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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자본 발전사전 - 자본주의의 세계화 흐름을 뒤집는 19가지 개념
볼프강 작스 외 지음, 이희재 옮김 / 아카이브 / 2010년 12월
평점 :
절판
『反자본 발전사전』은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어휘들의 사전적 의미와 그것이 시간이 흐르면서 어떻게 오용되고 있는지를 설명하면서 그 뒤에 숨겨져 있는 의미들을 파헤친다. 제목이 시사 하는 바처럼 자본주의와 관련된 단어들 즉 발전, 환경, 평등, 시장, 진보, 기술, 과학, 환경, 생활수준, 인구 등등 19가지의 개념들에 대해 각기 다른 필자들이 글을 썼다. 이 책을 엮은 볼프강 작스의 글이 두 꼭지 있으니 총 17명의 필자가 있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이반 일리히를 제외하면 모두 처음 대하는 필자들이다.
초판 서문에는 이 책이 결실을 맺게 된 과정이 적혀 있다. 그들은 모두 처지가 달랐으므로 며칠씩 혹은 몇 주씩 함께 모여 요리하고 여행하고 토론했던 모양이다. 그들은 ‘모르는 것은 나누었고 아는 것은 겨루었’으며, ‘같이 헤맸고 같이 깨달음을 얻었다.’ 그들은 또 ‘비강단 지식인은 우정과 공동의 책임감을 빼면 시체라는 것을 체험’했으며 이렇게 나온 책은 이들의 ‘우정의 결실’이면서 ‘서로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밝혔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부러웠던 부분이다.
그들이 가장 먼저 파헤치는 단어는 ‘발전’이다. ‘발전’은 성장, 진화, 성숙 같은 단어들과 팔짱을 끼고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열등한 것에서 우월한 것으로, 나쁜 것에서 좋은 것으로 나아가는 행보를 늘 암시한다.’ ‘발전’이란 무조건 좋은 것, 그래서 누구나 온 힘을 다해 따라해야 하는 것 등 긍정적인 의미로 자신을 포장하므로, 어떤 ‘존재의 합당한 형태를 향해 움직인다는 변형’의 개념에서 점점 ‘완벽한 형태를 향해 움직’이는 것으로 개념이 진화했다. 그래서 ‘발전’은 ‘저발전’이라는 대상을 갖게 되고 이것은 어느 순간 ‘미개인’같은 개념과 동일시된다. 결과적으로 ‘발전‘이라는 단어는 경제중심 세계관의 패권을 강화하게 되는 것이다.
‘발전’이라는 말이 이렇게 원래의 의미와는 다른 뜻으로 쓰이게 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후였다. 트루먼 대통령이 취임한 날 그가 천명한 발전 사업으로 인해 ‘저발전’이라는 말이 발명되었다. 1949년 1월 20일, 이날부터 세계 20억 인구는 ‘저발전’인이 되어 자신들이 가진 온갖 다양성을 버리고 저발전이라는 부끄러운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의 경험과 꿈에 속박 당하게 할 뿐만 아니라 빈부 격차를 심화시키고 ‘절대빈곤’의 수준을 악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발전’이라는 단어는 아무 여자나 집적대는 바람둥이와도 같다. 이 책에 나오는 모든 단어들은 ‘발전’과 관계 맺는다. ‘한 세계’라는 부분도 예외가 아니다. 고대인들은 하늘의 태양과 별을 바라보면서 인간을 자연의 일부라고 여겼다. 그들에게 인간은 우연에 휘둘리는 지상의 미미한 존재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영원불변의 천상과 관계 맺는 것에 관심을 쏟았다.
반면 과학이 발달(발전)하게 되자 현대인들은 지구에서 하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광막한 우주 공간에 떠 있는 지구라는 행성을 바라본다. 그리고 지구상에 살고 있는 우리는 한 몸이라는 사실을 떠올린다. 이것은 세계를 하나의 동질적 공간으로 파악하게 만들면서 각 나라 고유의 관습과 문화를 서서히 증발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공간이 중심에 오는 사고는 일체성을 추구하게 되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관계 맺는 장소는 사라지게 만든다. 사이버, 인터넷, 트위터 등의 공간에서만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장소를 자신의 뿌리로 여기면서 더 큰 공간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우리는 삶의 많은 부분을 점점 더 공간에 빼앗기고 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아니 알고 있다고 믿고 있는 것들을 뒤집어 그 속을 낱낱이 보여주는 저자들의 글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생활수준’은 행복의 다양성을 줄이고, ‘사람’은 ‘인구’로 대체되었는데, 그것은 사람을 ‘규정된 확률로 만나서 짝짓기를 하는 번식 군집’으로 정의하면서 통제와 관리가 필요한 존재로 환원 시킨다. ‘요구’는 호모 사피엔스가 마땅히 가져야 하는 의식과 감각을 갖지 못한 궁핍한 인간으로 탈바꿈 시키면서 새로운 종 ‘호모 미세라빌리스(궁핍한 인간)’를 탄생시킨다. 낙원으로 가는 비밀통로라고 여겼던 ‘기술’은 자연이 이룩해 놓은 것을 약탈하고 자연에, 제3세계에, 미래 세대에게 비용을 떠넘긴다. 이제 미래는 희망이 아니라 궁핍으로, 공포의 저장소로 변질되어 가고 있다.
필자들이 이 글을 쓴 것이 내게 협박을 하거나 절망의 나락으로 집어던질 의도는 분명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알던 모든 어휘들의 개념을 다시 생각하다 보니 만약 내가 생의 역사를 써야한다면 그건 ‘교정의 역사’가 되지 않을까 싶다. 쉽지 않은 내용에 분량이 주는 압박감으로 거의 탈진 상태다. 나는 ‘사전’을 이런 식으로 읽어본 적이 없다. ‘사전’에 대한 개념정의도 다시 해야 할 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