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의 사랑>
이 사랑은 어떻게 끝날까. 그것은 연인과의 관계가 한창 무르익을 즈음이면 내가 빼놓지 않고 떠올리는 생각이었다. 앞서 파국을예측해봄으로써 스스로에게 놓는 예방주사 같은 것이었다. 그러므로 너와 인사한 뒤 혼자 집으로 돌아오던 어느 날, 버스 맨 뒷자리에 앉아서 나는 생각했다.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가는 너에 대한마음을 잠시 억누른 채, 과연 우리는 어떤 식으로 헤어지게 될까하는 상상을 펼쳤던 것이다. 그렇지만 차창 너머로 서서히 번져가는 어스름과 하나둘씩 조명을 밝히는 가로등을 지켜보는 내내 나는 도무지 우리의 끝을 가늠해볼 수 없었다. - P109
삼년 전 여름, 나는 더이상 누구도 속이고 싶지 않다는 일념으로 엄마에게 첫 커밍아웃을 했다. 그걸 시작으로 친구, 직장 동료들에게까지 내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차근차근 털어놓았다. 그해방감, 삼십 년 가까이 숨기고 부정해야만 했던 내 정체성을 공개하는 과정에서 나는 삶이 이전과는 다른 방향으로 펼쳐질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을 보았다. 그 일말의 조짐만으로 가슴이 설레었고 만족스러웠다. 그러던 중 너를 만나 급속도로 사랑에 빠지면서・・・・・… 나는 새로운 비밀을 갖게 되었다. 네가 HIV감염인이라는사실이었다. - P117
문제는 HIV가 고혈압이나 당뇨처럼 지속적인 관리로 통제할수 있는 질환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보편 인식은 참담한 수준이라는 데 있었다. 어쩌다가 관련한 이야기라도 나누게되면 대부분이 "그거 밥만 같이 먹어도 옮는 병 아니야?" "내 주변에는 그런 사람 없어. 혹시라도 있으면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할 거야" 같은 반응을 보였으니까. - P118
그날 우리는 카페를 나와 지하철역 앞까지 함께 걸었다. 어느틈엔가 하늘은 어둑해져 있었고 빌딩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은 제법 쌀쌀했다. 걷는 동안 나는 네가 돌아오지 않을 누군가를 하염없이 기다렸을 순간들에 대해 생각했다. 친구나 가족도 아니고 처음 만난 낯선 이에게, 단지 연인으로 발전할지도 모른다는 미약한가능성 하나 때문에 자신의 내밀한 질환을 털어놓아야 했을 순간들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그때마다 네가 외로이 견뎌내야 했을 두려움과 떨림에 대해서도...... 나는 막연하게 상상만 해볼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러자 가슴 한편에 뜨겁고 묵직한 덩어리 같은 것이 느껴지는 듯했다. - P127
야간 조명이 켜진 해안가에는 아무도 없었다. 마치 연극이 끝나고 난 뒤의 무대처럼 텅 비어 있어서 우리는 환호성을 올리며 발이 푹푹 빠지는 모래사장을 겅중겅중 뛰었다. 마스크를 벗고 단숨에 바다 가까이 내려갔다가 금세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했다. 성난 파도가 순식간에 밀려들어 발목까지 적실 듯했고, 지척의 바위에 부딪치면서 거센 물보라를 일으킨 탓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너울이 몰아치는 자리에서 다섯 걸음쯤 물러나 얕은 둔덕에 올라서서 바다를 건너다보았다. - P134
스물셋의 여름, 너는 확진 판정을 받고 충격에 휩싸인 나머지의사와 간호사 앞에서 삼십 분이 넘도록 울음을 쏟아냈다. 눈앞이 캄캄했고, 다리에 힘이 풀려 의자에서 제힘으로 일어서지도 못했다. 누구도 너를 위로할 수 없었고, 일으켜세울 수도 없었다. 그바람에 너는 다음 순서의 환자에게 본의아니게 폐를 끼쳤다면서, 지금도 그날을 생각하면 영문도 모른 채 대기실에서 한 시간 가까이 기다렸을 이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 P135
그 밤 우리는 나란히 서서 바다를 바라보았다. 일순 바위에 부딪치며 솟아올랐다가 산산이 부서지면서 내려앉는 뒤로 슬금슬금 물러나는 검은 물결의 움직임을, 그 흐름을 지켜보았다. 한순간 보얗게 일어나고 사그라드는 물거품과 습기를 머금은 추위와영원히 우리를 가로막고 서 있을 듯한 어두움과 그 앞에 버티고선 순간에만 감지할 수 있을 불가해한 아름다움까지 우리는 함께했다. 그러다가 네 어깨의 떨림이 서서히 잦아들었을 즈음, 나는너를 붙든 손에 살며시 힘을 주었다. 네가 나를 보았을 때 나도 너를 보았고,우리는 동시에 미소를 지었다. "이만 돌아갑시다." "좋아요." 그런 대화를 나누며 우리는 바다를 등지고 선 채 천천히 걸음을옮겼다. 그러다가 부러진 나뭇가지를 하나 주워 모래 위에 하트를 그렸고, 그것의 양옆에 너와 나의 이름을 적어넣기도 했다. 쓰이자마자 바람에 흐트러지기 시작하는 우리의 사랑을 내려다보면서 어느 드라마의 엔딩처럼 이대로 시간이 멈춰버렸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나누었고, 어려울 것 없잖아. 라는 네 말과 함께 소망을 이루기 위한 하 나의 몸짓으로 우리는 입을 맞추었다. - P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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