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 기다리기>

신년을 맞아 해돋이를 보러 가자. 나는 그렇게 이해했다. 네가12월 31일 오후에 서울을 떠나 부산에서 이틀을 묵고 돌아오자제안했을 때, 내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이미지가 일출이었으니까. 저멀리 수평선 위로 진홍색 불덩이처럼 떠오르는 해, 잿빛구름 사이로 어지러이 활공하는 갈매기들, 일정한 간격으로 귓가에 밀려들고 부서지는 해조음, 소금기를 머금은 바람, 추위에 발을 동동 구르던 사람들이 일제히 눈을 감고 올리는 기도, 새 인생,
새 출발 뭐 그런 것들.
그러나 아니었지. - P177

우리가 사귄 지도 어느덧 팔백 일이 넘어가고 있었다. 달콤한애정에 눈이 멀어 서로의 새치나 뾰루지마저 어여쁘게 여기던 시기를 지나 이제는 만날 때마다 뇌리를 스치는 의구심이랄까 의아함을-얘는 왜 이러는 거지? - 순순히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하는단계에 이른 것이다.  - P179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그렇지만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새해랍시고 아침 댓바람부터 너를 끌고 나가 해돋이를 보는 일 따위가 아니었다. 전혀 아니었지. 나는 그저 네가 원하는 일을 했으면 했다. 원하지 않는 일을 원하지 않는다고 내게 말해주었으면 했다. 우리가 서로에게 솔직했으면 했다.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연인일 테니까. 그렇지만네가 일출 따위 눈곱만큼도 관심 없다고, 귀찮으니 형이나 보러가라고 내게 가감 없이 털어놓았을때과연내 마음이 상하지 않을 수 있느냐를 묻는다면… 그건 또 자신 없었다. 틀림없이 실망하겠지.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사람도 변했니, 하면서 주접을 떨게 될지도. 하, 그럼 이제 나는 뭘 어떻게 하면 좋을까. - P180

그즈음 나는 몇시에 잠자리에 들든 세 시간쯤 후에는 반드시 깨어나 동틀 무렵까지 불면에 시달리는 증세를 앓고 있었다. 눈이떠지면 다시금 잠을 청해도 십오 분에서 이십 분 간격으로 재차깨어나기 일쑤였고, 심할 적에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다시피 했다. 그러면서 나는 짤막한 분량의 비연속적 꿈인지 망상인지 모를것에 사로잡히곤 했는데, 그 속에서 나-실제의 ‘나‘라기보다 내가 바라볼 수 있는
대상으로서의 ‘나‘-는 언제나 사력을 다해
도망다니고 있었다. - P181

장난처럼 유야무야 덮긴 했지만 사실 그즈음 나는 너의 보금자리 마련에 이렇다 할 도움을 주지 못하는 스스로에게 가책을 느끼고 있었다. 아무래도 우리가 법적으로 묶이지 않은 상태에서 내가너에게 주택 마련을 위한 현금을 증여하거나 함께 빚을 갚아나가기로 약조하는 일에 대한 두려움이 좀... 사랑을 압도하는 지점이 있었으니까. 그렇다고 돈을 빌려주면서 차용증을 요구하기도뭣하고...…. 어째서 나는 이렇게도 속물일까. 사랑한다면,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연인에게 그냥 전 재산을 내어줄 수도 있어야 하는것 아닐까. 기꺼이 목숨을 바칠 수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 혹시 나는 너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못해서 이렇게 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려대는 것일까. 내 안위를 가늠하고, 파국을 넘겨짚고, 골치 아픈 문
제들을 외면하고자 우스갯소리만 늘어놓
는 것일까.
돌이켜보면 나는 이러한 속내를 네게 한번도 털어놓은 적이 없었다. - P201

관두자.
비로소 마음먹었을 때였다.
난 말이야. 네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뭐가 됐든 형이 내키는 대로 했으면 좋겠어. 내가 정말로 바라는 건 그뿐이니까.
나는 고개를 돌려 네 쪽을 건너다보았다. 마냥 떠넘기는구나.
뒷짐지고 물러서는구나. 연하는 원래 다 이런가 싶었는데 실은무엇이든 함께해줄 심산이었구나. 내가 원하는 것을 너는 기꺼이원할 준비가 되어 있었구나.
그날 나는 팔을 뻗어 말없이 너를 끌어안았다. 두 눈을 감은 채네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왜 이래, 간지럽게. 너는 핀잔을 주다가이내 나를 꼭 안아주었다. 네 체온은 내 살갗 위로 뭉근히 번져왔다. 불덩이처럼 뜨거운 너의 몸. 그렇게 네 가슴에 한쪽 귀를 얹고 있으니 심장박동 소리가 고스란히 들려왔다. 쿵쿵, 쿵쿵.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나른한 감각이 엷은 베일처럼 우리 몸 위로살며시 내려앉는 듯했다. 그대로 가라앉히는 듯했다. 나는 설핏한잠결 속에서 아주 잠깐이지만 내가 사라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 P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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