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해록, 조선 선비 중국을 표류하다 - 기행문 겨레고전문학선집 14
최부 지음, 김찬순 옮김 / 보리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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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성종 18년(1487) 최부(崔溥, 1454~1504)가 제주 세 읍의 추쇄경차관(推刷敬差官)1)으로 임명되어 제주로 파견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하지만 성종 19년(1488), 최부의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이야기는 급진전된다. 이 소식에 최부는 수행원 42명과 함께 배를 타고 서둘러 고향인 전라도 나주로 향했다. 하지만 오늘날과 달리 그 당시에는 제주도를 오가는 것이 목숨을 걸 각오까지 해야 할 정도로 험난한 일이었다. 문제는 날씨를 가늠하기 어려워 출항여부를 놓고 다투다가 진무(鎭撫) 안의(安義)가 동풍(東風)이 좋으니 떠나자고 권하자, 부친상을 빨리 치르고자 하는 최부가 이를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그러니 조금만 상황이 안 좋아지면 분위기가 험악해질 수 밖에. 그래서일까? 최부의 나주행은 시작부터 순탄하지 않았다.

 

바람이 약해지면서 비가 쏟아졌다. 추자도의 배 대는 자리가 가까워졌을 때 썰물은 몹시 급하고 하늘은 매우 캄캄하였다. 군인들을 지휘하여 노를 젓게 하였으나,

이런 날에 배를 떠나게 한 것이 누구 잘못인데…….”

하고 모두 중얼거리며 반발심을 품고 말을 듣지 않았다. 그들이 제멋대로 노질하여 뒤로 밀려나 초란도(草蘭島)에 이르러 서편 언덕 아래에 닻을 내리고 배를 대었다. [p. 20]

 

이 무렵 닻이 부서져서, 이를 확인하고 급히 노를 저었으나 북풍에 휩쓸려 바다 가운데로 불려 나갔다. 본격적인 표류가 시작된 것이다. 그러다가 간신히 닿은 절강(浙江) 영파부(寧波府) 하산(下山)에서 해적을 만나 약탈을 당하고, 다시 큰 바다에 버려져 표류하다가 태주부(台州府) 임해현(臨海縣)에 닿았다. 하지만 최부 일행의 고난은 끝나지 않았다. 상륙 후 그 곳을 담당하는 사자채(獅子寨)의 관원이 그들을 왜구(倭寇)로 몰아 머리를 바치고 공훈을 세우려고 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최부 일행이 배를 버리고 마을로 진입하는 바람에 그 흉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왜구라는 의혹은 풀지 못해, 임해(臨海) 도저소(桃渚所), 소흥부(紹興府), 항주부(杭州府)에서 각각 조사를 받았다. 가까스로 왜구가 아닌 표류한 조선의 관리임이 확인된 후에야 대운하를 따라 북경으로 향했다. 북경에서 명(明)나라 홍치제(弘治帝)를 알현한다. 김종직(金宗直)의 제자답게 최부는 황제에 알현하는 과정에서 상복을 벗고 관복을 입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으나

 

나는 차마 길복을 입을 수가 없었다. 이상은 직접 내 굴건을 벗기고 사모를 씌우더니

나라에 일이 있게 되면 기복(起服)2)하는 제도도 있지 않습니까. 당신은 지금 이 문에서 길복을 입고 들어가서 사은의 예를 마치고는 다시 문밖으로 나와서 도로 상복을 입을 테니 그저 잠시 동안일 뿐입니다. 하나만을 고집해서 예절을 잃어서는 안 되지요.” [pp. 212~213]

 

결국 잠시나마 상복을 벗고 알현을 했다. 그 후 귀국 길에 올라 요동과 압록강을 거쳐 귀국했다. 귀국했다고 일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하루속히 부친상을 치르고자 했던 최부에게 성종은 중국에서 있었던 일을 우선 기록으로 남기라 명한다. 이에 최부는 단 8일만에 중국에서 겪었던 거의 모든 일들을 꼼꼼히 기록해 바친다. 그것이 바로 이 책 <표해록>이다. 이 책은 일기를 적듯 하루 하루 최부가 겪은 내용을 엮었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시간과 장소를 들어, 자신의 신분을 밝히기 위한 중국 관원과의 문답과정에서 조선의 제도, 조선과 명의 문화적 차이 등을 언급하고 있다. 또한 마지막 부분에 대운하를 따라 이동하면서 본 중국 각지의 기후, 도로, 방죽과 갑문 등 물길 이용 제도, 살림살이와 옷 차림새, 인정과 풍속 등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다.

 

이런 과정에서 중국의 강남과 강북의 문화적 차이도 드러내고 있다.

예를 들면,

 

강도질을 하는 자들은 재물에 눈이 어두워 폭력을 휘두르는 것은 물론 사람 죽이기를 거리낌 없이 한다. 그러나 여기 강남 사람은 비록 사사로운 이익에 사로잡혀 강도질은 할지언정 그렇게 마구 사람을 죽이지는 않는다. 하산의 도적들도 우리를 죽이지는 않았고 먹을 것도 주었으며 선암리 사람들은 자기들이 빼앗은 것을 숨기지 않고 말안장을 도로 내놓지 않았는가. [p. 95]

 

부영은 “중국의 인심을 논한다면 북방 사람은 모질고 남방 사람은 유순합니다. 영파의 도적은 강남 사람이므로 아무리 도적이 되었다 해도 물건만 빼앗을 뿐 사람을 죽이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당신들도 목숨을 보전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북방 사람은 약탈하고는 반드시 사람을 죽여 구렁텅이에 던지기도 하고 강이나 바다에 띄우기도 하니 오늘 강에 떠 있는 시체를 보고도 알 말하지 않은가요?” 하였다. [pp. 178~179]

 

처럼.

 

또한 생사가 걸려있기에 섣불리 조선으로의 이주를 시도하지 못하는 해외유민의 모습도 묘사된다.

 

계면(戒勉)이라는 중은 우리 나라 말을 잘하였다. 그가 나더러,

저는 중인데 본래 조선 사람입니다. 역시 중이었던 저희 할아버지가 여기로 들어왔으며 지금 이미 삼대째입니다.

이 지방은 옛날 고구려 땅이었으나 지금은 중국 땅이 된 지 천 년이 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고구려의 풍속이 아직도 남아 있어 고려사를 세워 제사를 정성껏 지내며 전통을 잊지 않습니다. 새가 날면 고향으로 가고 토끼가 죽으면 굴 쪽으로 머리를 둔다지요! 언제나 본국이 그리워 돌아가 살고 싶지만, 본국에서 나를 도리어 중국 사람이라 하여 중국으로 돌려보낸다면 분명히 다른 나라로 탈출한 죄를 받아 몸과 머리가 따로 구르게 되겠으니 마음은 가고 싶어도 발이 주저합니다.”  [p. 251]

 

이렇게 일기체로 구체적인 내용을 적었기에 <표해록>은 명나라 초기의 중국 실정을 확인하는데도 중요한 자료가 된다. 그래서일까? 일본에서는 1769년 유학자 세이타 겐소[淸田??, 1719~1785]에 의해 <당토행정기(唐土行程記)>란 이름으로, 미국에서도 1965년 컬럼비아 대학의 존 메스킬(John Meskill, 1925~ )이 <최부의 일기 표해록(Diary: a record of drifting across the sea by Pu Ch’oe)>라는 이름으로 각각 번역본이 나왔다.

심지어 우리에게는 여전히 낯선 이 책을, 마르코 폴로(Marco Polo, 1254(?)~1324)의 <동방견문록>과 일본 승려 엔닌[圓仁, 794~864]의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와 함께 3대 중국 여행기로 꼽는다고 하니 우리 스스로 우리의 것에 무관심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이처럼 우리가 우리 옛 문헌에 수록된 우리 역사를, 옛 유물에 서린 우리 역사를 망각하고 있다는 것이 더 큰 문제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최부는 상복 일화에서 드러나듯이 꼬장꼬장한 면도 있지만, 관찰력도 좋았던 것으로 보인다. 덕분에 소흥부에서 수차(水車)를 돌리던 것을 보고 부영(傅榮)에게 수차 제작법을 알려달라고 했고, 결국 그에게 배운 수차의 형태와 운용법을 가지고, 조선에 돌아와 수차를 제작, 호서지방의 가뭄 해소에 기여할 수 있었다. 그런 그에게서 행동함에 거침이 없었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꺼려하지 않았던 15세기 조선선비의 진취적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아쉬운 점은 그가 지나온 길을 지도로 확인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출판사에서 조금만 배려를 해주어 지도를 첨부해주었다면 좋았을 텐데…….

 

1) 경차관(敬差官)은 왕명을 받아 지방에 파견되어, 지방 행정을 감찰하는 관직이고, 추쇄(推刷)는 제 고장에서 도망하여 숨어든 자를 송환하는 일을 말한다. 따라서 추쇄경차관은 제주도로 도망간 노비나 범법자들을 송환하기 위해 파견된 감찰관인 셈이다.

2) 상중에는 벼슬을 하지 않는 법이지만 나라에 일이 있을 때, 불러 상복을 벗고 출사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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