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의 도쿄
호즈미 가즈오 지음, 이용화 옮김 / 논형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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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明治]의 시작은 1868년이다. 1868년은 일본 역사에 큰 의미가 있는 해인데, 단순한 정권교체가 아니라 중세에서 근대로의 패러다임의 변화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화의 소용돌이에서 에도[江戶]가 신정부의 수도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에도가 당시 일본의 중심이 되는 대도시였고, 보신[戊辰] 전쟁 당시 도쿠가와 막부측의 가쓰 가이슈[勝 海舟, 1823~1899]와 메이지 신정부군측의 사이고 다카모리[西鄕 隆盛, 1828~1877]의 협상으로 ‘에도’라는 도시가 전쟁의 피해를 보지 않고 온전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탄생한 메이지 정부의 도쿄는 어떤 모습일까?

먼저 ‘1장 문명개화’에서 소개된 메이지 시대의 특징을 보면,

 

에도 이래의 전통과 서구의 근대문명이 뒤섞여진 이상한 이국정취야말로 메이지의 독특한 매력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전통과 근대화라는 이중구조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생활과 사고방식까지 영향을 주고 있다 [pp. 18~19]

 

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메이지 정부가 목표로 한 것은 ‘근대도시’로서의 도쿄였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제국의 수도’ 즉 국가의 수도로서의 딱딱한 관리사회를 의미하고 있었다. 요컨대 걸핏하면 쾌적성보다도 국가의 체면과 통치가 우선되어 정치성과 경제성을 추구했다. 그러나 도쿄의 일반시민들은 에도 이후의 시민문화를 이어받아 자유로운 생활공간을 추구했다. 메이지의 도쿄는 ‘천황’의 의향과 ‘시민’의 목소리라는 두 개의 요소가 대립과 공존하면서 성립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p. 19]

 

라고 한다.

 

이러한 메이지의 도쿄를 보여주는 것 가운데 하나가 도쿄 최초의 본격적인 호텔이라고 불리는 ‘쓰키지[築地] 호텔관’이다.

 

쓰키지[築地] 호텔관

출처: <메이지의 도쿄>, pp. 28~29

 

이곳의 설계는 미국인 리차드 브리젠스(Richard P. Bridgens)가 했지만, 건축은 훗날 시미즈[淸水] 건설의 창업자의 양자인 2代 시미즈 기스케[淸水 喜助, 1815~1881]가 맡았다. 그래서인지 완성된 쓰키지 호텔관은 시미즈 기스케의 독창적인 디자인이 가미되었다. 쓰키지 호텔관의 외관은 흙과 회로 두껍게 바른 것 같은 해삼벽[海鼠壁]1)이고, 지붕 중앙에는 절의 종루를 닮은 탑이 솟아 있다. 탑으로 오르는 입구에는 나선형 계단이 있어 일본식도 서양식도 아닌 너무나도 기묘한 건축물이 되었다. 게다가 외국인이 바다에서 직접 들어오는 것이 금지되는 바람에 원래 후문으로 설계된 나가야문[長屋門]2)이 정문으로 바뀌는 등의 설계상의 변동도 발생했다. 하지만 이 건물은 아쉽게도 1872년 긴자[銀座] 대화재로 소실되었다.

어떻게 보면 이러한 호텔들은 메이지 정부가 내세운 ‘서구화 정책’ 혹은 ‘근대 문명’을 상징하는 건축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문명개화(文明開化)의 또 다른 상징으로는 긴자[銀座]의 벽돌거리가 있다. 1872년 발생한 긴자 대화재를 기점으로 메이지 정부는 도쿄 전체를 불에 타지 않는 서구식 건물로 바꾸겠다는 방침 아래 화재로 인한 폐허 위에 서구식 거리(street)를 건설하기로 결정했고, 토마스 워터스(Thomas J. Waters, 1842~1898)에게 설계를 맡겼다. 이렇게 조성된 ‘벽돌거리’ 혹은 ‘렌가가이[煉瓦街]’는 일본 최초로 대로를 중심으로 차도와 인도를 분리했으며 가로수를 심고 가스등을 세웠다. 대로변의 상점 건물을 붉은 벽돌로 지었으며, 부채꼴의 벽돌로 만든 원주로 지탱되는 아케이드를 상가 입구에 붙였다. 이렇게 건설된 벽돌거리의 모습은 19세기 영국과 그 식민지에서 볼 수 있었던 아케이드로 둘러싸인 모습 그대로3) 였다고 한다. 하지만 습기가 많은 일본 환경과 거주자를 고려하지 않고 조성했기 때문인지, 완공 후 약 5~6년간 가옥들이 거의 빈 채로 있었고, 입주 후에도 목조 부엌과 변소 등을 건물 외부에 대나무로 만든 전통 빗물 보호대를 설치하는 등 일본적 요소를 추가한 대대적인 개축 등을 실행했다4)고 한다.

 

벽돌거리의 계획은 수도의 체제를 정비하려는 정부의 생각만으로 진행된, 이를테면 주민 부재의 지역 개발이었다. 타고 남은 가옥의 강제철거를 시작으로 벽돌구조의 비싼 건축비로 인한 집세와 불하료5)문제, 일본의 기후습도에 어울리지 않는 설계상의 약점, 게다가 거주자의 생활양식과 맞지 않는 점도 특이할 만하다. [p. 37]

 

긴자[銀座] 벽돌거리의 변화

출처: <메이지의 도쿄>, pp. 34~35

 

출처: <메이지의 도쿄>, pp. 242~243

 

이처럼 일방적으로 서구화를 하다 보니 웃지 못할 에피소드들도 발생했다.

 

메이지 5년(1872) 연말은 실로 황당하고도 묘한 일이 벌어졌다. 왜냐하면 정령에 의해 지금까지의 태음력 대신에 태양력이 채택되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12월은 겨우 이틀 만에 끝나고, 다음날인 3일은 다시 메이지 6년(1873) 1월 1일이 되었다. 이 때문에 관공서에서 지불하는 월급이 1개월분 덜 들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갑작스런 설 준비로 시민들은 우왕좌왕할 뿐이었다. [pp. 95~96]

 

메이지의 패션

출처: <메이지의 도쿄>, p. 248

 

출처: <메이지의 도쿄>, p. 250

 

일본 여성의 머리모양과 속발

출처: <메이지의 도쿄>, p. 253

 

당대의 아이돌이었다는 ‘뮤수메 기다유[娘 義太夫]’와 메이지 시대의 오빠 부대인 ‘도스루 팬클럽[ド-スル連]’의 얘기는 신기했다. 다만, 이 책에서 언급된 뮤수메 기다유[娘 義太夫]가 사람 이름인지 아니면 ‘걸그룹’처럼 장르 혹은 분야의 명칭인지 명확하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왜냐하면, 한국의 판소리처럼, 일본에는 독특한 창법으로 말하고 노래하는 다유[太夫]와 다유의 표현을 리드하고 반주하는 샤미센[三味線]으로 구성된 기다유부시[義太夫節]라는 장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저자는 문명개화, 새 나라 만들기, 도시의 시설, 언론의 시대, 도시 만들기, 시민의 생활, 도시의 즐거움, 메이지의 쇠퇴기라는 8개의 주제로 메이지 시대의 건축물과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이 서양으로부터 들여 온 새로운 문화, 풍습, 사회 현상 등을 깔끔한 일러스트와 함께 차분하게 서술하고 있다. 아마도 저자가 건축학과 출신의 일러스트레이터 호즈미 가즈오[穗積 和夫, 1930~ ]이기 때문이 아닐까? 전체적으로 역사에 기반을 두면서도 건축물, 도로와 철도, 도시 계획 등에 초점을 맞춰 오늘날의 도쿄가 어떤 기틀에서 형성되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백과사전적인 측면이 있다 보니 메이지 시대의 역사를 살피고자 하는 이에게는 다소 난잡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다. 또 흑백 일러스트이기에 건축물들이 비슷비슷해 보인다는 점도 아쉽다.

 

1) 흙벽돌로 된 외벽에 네모진 평평한 기와를 붙이고 그 이은 틈을 석회로 불룩하게 만든 벽

2) 다이묘[大名]이 자신의 저택 주변에 가신들을 위해 나가야[長屋]을 지어 살게 하고 그 일부에 문을 연 것에서 비롯된, 일본 무가 저택의 전통식 문(門)의 형식.

3) 김효진, “일본의 초기 근대 건축의 양상과 변모”, <일본비평> 15호, (2016), pp. 264~265

4) 김효진, 앞의 글, pp. 266~268

5) 불하(拂下)는 국유나 공유재산 또는 귀속재산을 개인에게 팔아 넘기는 일. 다만, ‘불하’라는 단어는 일본식 한자어이기에 ‘매각’ 또는 ‘팔다’로 순화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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