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반전.호질.광문전.임호은전 - 한국고전문학100 11
김기동 외 지음 / 서문당 / 198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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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문자전(廣文者傳)> 혹은 <광문전(廣文傳)>(이하 ‘광문자전’)은 누구나 학창시절에 한번쯤 제목은 들어보았을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의 단편소설이다. 그냥 읽으면 광문(廣文)이라는 거지의 의리 있는 행동을 부각시킨 글에 불과하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세상에 구애 받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광문이라는 비렁뱅이를 통해 유교적 관습에 얽매인 조선의 사대부를 은근히 비판하고 있다.

 

조선의 사대부는 공식적으로 군자(君子)를 지향한다. 바로 유학(儒學)의 시조(始祖)인 공자(孔子)가 이상적인 인간형으로 꼽은 ‘군자(君子)’말이다. 하지만 영남학파의 시초인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었던 소총(홍유손(洪裕孫, 1431~1529), 생육신의 하나인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 1454~1492) 등 많은 문인들은 도가적인 죽림칠현(竹林七賢)을 지향하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죽림칠현을 지향하는 것은 사대부가 할 수 있는 최대의 반항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광문자전>에 언급된 광문 혹은 달문(達文)의 행적을 보면 세상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다. 물론 그가 비렁뱅이라서 그렇게 행동할 수 있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거지라고 해서 세상에 얽매이지 않고 살아가기는 힘들다. 심지어 세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출가(出家)한 스님 조차도 또 다른 사회에 얽매이고, 타인의 시선을 의식할 수 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병든 거지 아이를 위해 구걸했지만 살해했다고 의심받아 매를 맞고 쫓겨나도 변명하지 않았고, 약방 부자가 도둑질했다고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도 묵묵히 지낸 광문의 행적은 독특하다. 마치 <장자>에서 말한, 사심(私心)이 없는 ‘지인(至人)에 해당하는 것처럼 보인다.

 

<장자(莊子)> 소요유편(逍遙遊編)에 언급된 송영자(宋榮子)를 보면,

 

세상 모두가 칭찬한다고 더욱 애쓰는 일도 없고, 세상 모두가 헐뜯는다고 기(氣)가 죽지도 않는다. 다만, 내심(內心)과 외물(外物)의 분별을 뚜렷이 하고 영예와 치욕의 경계를 구분할 뿐이다그는 세상 일을 좇아 허둥지둥하지 않는다.

중략 ~

그래서 “지인(至人)에게는 사심(私心)이 없고, 신인(神人)에게는 공적(功績)이 없으며, 성인(聖人)에게는 명예가 없다”고 한다.1)

 

그렇기에 광문의 평가가 가장 공정(公正)하다고 느껴졌던 것 같다. 그래서 “장안에 이름난 기생으로 얼굴이 어여쁘고 노래와 춤을 잘해도 광문의 입에서 칭찬이 나오지 않으면 그 기생은 한 푼어치의 가치도 될 수 없었다2)고 한 것이 아닐까?

 

어느 날 궁궐 안 별감(別監)들이며 부마(駙馬)들 또는 그 아래서 일하는 사람들이 이름난 기생 운심(雲心)을 찾아갔다. 술상을 차려 놓은 가운데 장고 거문고 등에 맞추어 춤추기를 부탁하며 애원하다시피 하였다. 그러나 운심은 자꾸 미루면서 춤출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마침 광문은 밤에 이들이 노는 집 밑에 다다라 머뭇거리다가 방에 뛰어 들어가 상좌에 앉았다. 광문은 비록 다 떨어진 옷을 입었지만 아무 거리낌없이 당당한 태도였다.

중략 ~

술 좌석에 앉았던 사람들은 크게 놀라서 서로 눈짓을 하며 광문을 몰아내 쫓아 버리고자 하였다. 그러나 광문은 더욱 다가앉으면서 무릎을 치고 콧노래를 부르면서 장단을 맞추는 것이었다. 운심은 일어서더니 옷을 고쳐 입고 광문을 위하여 칼춤을 추기 시작하였다.3)

 

이렇게 광문은 남의 권위를 빌리려는 가짜들과 달리 당당하게 ‘나’를 내세우는 진짜였기에 운심도 그를 위해 기꺼이 칼춤을 춘 것이다. 광문이 진짜니까 그녀도 진짜를 대접한 셈이다.

 

<광문자전>의 속편이라 할 수 있는 <서광문전후(書廣文傳後)>를 보면, 광문의 명성을 빌리기 위해 그의 아들인 척 하는 거지 아이와 그의 동생인 척하는 요망한 자가 결국 사형되거나 귀양을 간 이야기가 적혀 있다. 거짓으로 남의 인생을 사는 자의 말로(末路)가 이처럼 명확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만은 예외라고 생각해서 기꺼이 남의 인생, 거짓된 삶을 살려고 한다. 그렇게 사는 것도 재능이 필요하기에 쉬운 일도 아니라는 점을 감안하면, 잠깐 부귀영화의 끝자락이나마 맛보고 싶어하는 마음이 재능을 헛되게 낭비하게 만든 셈이다.

 

<광문자전>과 <서광문전후(書廣文傳後)>에서 보이는 광문처럼 세상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사는 것은 어렵다. 그래서 <장자>에서 말하는 사심(私心)이 없는 ‘지인(至人)’이라고 할 수 있는 광문의 마지막을 저자는 “그 뒤에 광문이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는 말로 끝낸 것 같다. 아마도 광문과 같은 이가 세상에 존재하기 어렵다는 것을 상징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1) 장주, <장자>, 안동림 역주, (현암사, 1993), pp. 33~34

2) 김기동, 전규태 엮음, <양반전, 호질, 광문전, 임호은전>, (서문당, 1984), p. 33

3) 앞의 책, pp. 3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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