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의 주택지 - 인구 폭증 시대 경성의 주택지 개발 정암총서 12
이경아 지음 / 집(도서출판) / 2019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주택 개발의 시작

 

조선 시대까지만 해도 주택 공급은 짓고자 하는 사람과 지어주는 사람만 존재하는 일종의 주문생산 방식이었다. 그런데 100여 년 전, 일제강점기 경성에서부터 크게 변화하기 시작한다. 인구가 갑작스럽게 늘어나고 엄청난 주택난으로 몸살을 앓게 되면서 주택 공급 방식도 바뀌게 된 것이다조선 500여 년간 약 10만에서 20만 내외로 유지되던 한양의 인구 규모가 불과 30년 만에 100만에 육박하게 되는, 그야말로 ‘인구 폭증 시대’를 맞았다. 개발자 또는 개발회사는 앞다투어 대규모 필지를 사들이고 그것을 나누어 불특정 다수에서 분양하기 시작했다. [p. 9]

 

주택 개발의 시작이자, 부동산 투기의 시작인 셈이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후암동의 학강(學岡) 주택지, 장충동의 소화원(昭和園) 주택지와 함께 경성의 3대 주택지로 손꼽히던 북아현동의 금화장(金華莊) 주택지다.

 

금화장 주택지는 원래 토막민이 움집을 짓고 살던 빈민촌이었다금화장 주택지 개발을 할 당시 토막민들과 갈등이 생기는 일은 당연했다. 새롭게 개발된 신규 서양식 주택지와 주변으로 밀려난 토막민의 초라한 움집이 극명한 대비를 이루는 것은 비슷한 시기 신당동을 포함한 경성의 여러 주택지 개발에서 나타난 모습과 매우 유사했다. 결국 밀려난 토막민들은 아현리와 홍제내리로 옮겨 아무런 시설도 갖춰지지 않은 비위생적이고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었다. [p. 310]

 

이렇게 토막민이 움집을 짓고 살던 빈민촌을 밀어낸 자리에 요즘식으로 말하자면 명품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게 되었다.

 

금화장 주택지는 금화산에 둘러싸여 있고 금화원이 있어서 녹음과 사계절의 풍경을 즐길 수 있고 고지대에 위치하고 있어 땅이 건조하며 공기가 맑은 위생적인 주택지로 여겨졌다. 그야말로 자연과 함께 하는 교외 주택지의 이미지가 금화장 주택지에 그대로 투영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곳은 일찍부터 전차가 연결되어 도심부는 물론이고 한강의 마포까지 손쉽게 연결될 수 있는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주택지가 개발된 이후에는 전차를 타고 경성역, 용산, 멀리는 한강교를 건너 노량진과 영등포까지 갈 수 있게 되었으니 더할 나위 없는 주택지였다. 금화장 주택지 올라가는 언덕 바로 앞에는 죽첨정이정목 전차역이 있었으며 인근에는 서대문소학교와 미동보통교, 죽첨보통교와 같은 교육시설적십자병원과 같은 의료시설동양극장과 같은 문화시설 등등 생활편의시설이 주택지 주변에 두루 구비되어 있었다. 이렇듯 시대의 유행을 타고 나타난 신규 주택지 금화장은 당시 사람들에게 최적의 주택지로 인식되면서 경성의 3대 주택지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pp. 304~306]

 

물론 이 과정에서 시세 차익을 노린 부동산 투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도쿠가와 요리사다[德川 賴貞]은 이 땅을 30만원에 매입해서 10년 만에 130만원에 매각했다.

 

“이곳은 원래 도쿠가와[德川] 가문의 도쿠가와 요리사다[德川 賴貞] 후작이 1916년에 매입한 땅이었다고 한다. 도쿠가와 요리사다는 장래 토지가격이 상승할 만한 곳을 찾았는데, 하세가와[長谷川] 군부 사령관에게 의뢰하여 찾은 땅이 바로 이 일대 토지와 부산의 토지였고 이것을 30만 원에 매입했다. 이 땅을 1926년 마스다 다이키치[增田 大吉]가 130만 원에 매입했다고 하니 이전 소유자였던 도쿠가와 요리사다는 엄청난 시세차익을 남긴 셈이다.” [pp. 306~307]

 

 

한옥 개량의 노력 - 정세권과 박길룡

 

주택 개발의 시대는 ‘문화주택’이라고 불리던 서양식 주택의 시대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문화주택’의 광풍(狂風) 속에서도 한옥을 개량하여 경제적이면서도 위생적인 주택을 공급하기 위한 노력은 끊이지 않았다. 대표적인 것인 경성의 건축왕 기농(基農) 정세권(鄭世權, 1888~1965) (https://blog.yes24.com/document/9734348) 최초의 조선인 건축사무소를 개설한 일송(一松) 박길룡(朴吉龍, 1898~1943)이다.

 

먼저 정세권을 살펴보면,

 

그는 조선 재래주택의 단점을 발견한 뒤 경제적이면서도 위생적인 주택을 목표로 매년 300여 호의 개량주택을 지었다주택 공급방식으로는 연부, 월부의 판매 제도를 도입했다. 당시의 주택난에 다소 도움이 되고자 했던 그의 의지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직접 주택 개량의 실험대상이 되었다. 개량주택에 들어가 살다가 매각하기를 반복하면서 단점을 찾아내고 그것을 다시 개선해 나가는 식으로 주택 개량 실험을 이어나갔다. 당시 박길룡과 같은 건축가들과 교류하면서 주택 개량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어느 건축가도 정세권처럼 많은 한옥을 직접 짓고 살아보며 실질적인 개량안을 내놓진 못했다. [p. 21]

 

이러한 정세권의 한옥 개량 노력이 집약된 것이 가회동 한옥 단지다.

 

그 동안 가회동 일대는 역사적, 지리적 위상, 가장 한옥 밀도가 높은 한옥단지 정도의 이유로 유명세를 탔다. 100년이 넘은 조선시대 한옥밀집지역이라는 오해를 받기도 하지만, 굳이 ‘100년’, ‘조선시대’라는 용어로 치장하지 않아도 다른 한옥단지와 차별화될 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시대를 앞서간 건축왕이자 민족운동가였던 정세권, 정세권이 가진 조선 주택 개량에 대한 꿈과 이상이 다양하게 실현되었던 곳그래서 20세기 전반 한옥이 ‘도시 주택’으로 변화해 가던 모습을 가장 다채롭게 보여주고 있는 곳이라는 생각을 가진다면, 그 가치는 다른 한옥단지와 견줄 수 없다. [pp. 39~40]

 

이렇게 정세권이 실무적으로 한옥 개량을 위해 노력했다면, 박길룡은 이론적으로 한옥 개량을 위해 노력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일찍부터 조선 주택에 관심을 두고 각지를 여행하면서 조사하고 그 기록을 도면으로 남겨, 이를 바탕으로 집중식(集中式) 평면배치와 부엌과 온돌, 변소 등의 개선안을 제시했다.

 

박길룡은 1926년부터 1943년 서거하기 전까지 각종 언론 매체를 통해 거의 매해 빠지지 않고 주택 개량에 대한 글을 발표했다. 한글 매체든 일본어 매체든, 신문이든 잡지든 매체를 가리지 않고 재래 주택의 단점을 이야기하고 당시 주택건축 현황을 비판하고 개량에 관한 논의를 펼치고 개량안을 제시했다. 개량안은 단지 말뿐 아니라 평면도, 입면도, 단면도, 투시도, 액소노매트릭, 사진 등과 함께 게재해 대중의 이해도를 높였다.

중략 ~

그는 이미 지어진 주택에 대해서는 방의 위치를 바꾸는 것 같은 응급 조치책을 제시하고 새롭게 지어질 주택에 대해서는 개선안을 내놓았다. [pp. 78~80]

 

하지만, 박길룡이 원하는, 집중식 배치의 건물과 주변의 외부공간을 두는 한옥을 짓기 위해서는 대규모 토지와 건물이 요구되고문화주택’에 대한 열풍 몰아치고 있기에 이러한 주택 개량에 대한 박길룡의 생각은 온전히 반영되지 못했다. 그나마 그의 생각을 가장 많이 반영한 것이 244평의 대규모 대지에 지어진 경운동 민병옥 가옥[지금의 민가다헌(閔家茶軒)]이다.

 

삼청동 H자형 하이브리드 주택의 평면과 입단면도

출처: <경성의 주택지>, p. 122

 

길가에 면한 부분에는 서양식으로 보이는 2층의 오오카베[大壁] 구조의 주택을 배치하고 안쪽에는 1층의 한옥을 배치한, 한일(韓日)절충의 H자형 주택을 제시한 김종량(金宗亮, 1901~1962)의 하이브리드 주택도 이러한 주택 개량을 위한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별도의 출입 동선과 화장실 등을 두어 임대가 용이했으나 공간의 낭비가 심하고, 공사비가 비쌌으며, 겨울의 추위로 일본인마저도 다다미가 아닌 온돌을 선호했기에 널리 받아들이지 않았다.

 

 

서양식 주택, 문화주택의 도입과 광풍

 

당시 자유연애를 부르짖었던 신여성은 문화주택을 통해 상대방의 경제력을 가늠해 결혼 여부를 결정하기도 했는데, “문화주택만 지어주는 이면 일흔 살도 괜찬어요. 피아노 한 채만 사주면”이라는 문구에서 나타나듯 자신의 삶을 문화주택과 치환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여성이 생기기도 했다. 따라서 문화주택을 선호하는 여성을 노리는 사기꾼이 나타난다거나, 문화주택을 미끼로 결혼했다가 결국 파경에 치닫고 마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문화주택을 소유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점점 많아져서, 어떤 이는 문화주택을 소유하고 싶은 마음에 무리하게 은행대부를 받아 지어보기도 했지만 이자를 갚을 능력이 안 되어서 지은 지 얼마 안 되는 문화주택을 은행에 넘기고 은행에 넘어간 문화주택은 결국 외국인에게 소유권이 넘어가 버리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 [pp. 48~49]

 

이렇게 ‘문화주택’으로 대표되는 서양식 생활을 선호하면서도 온돌로 대표되는 기존의 습성은 버리지 않았다. 그 괴리 속에 외관은 벽돌조의 서양식 주택, 내부는 일본식 목조 주택 모듈과 중복도형 공간 구성을 취하면서 온돌 공간을 유지하는 한국, 일본, 서양의 주거문화가 공존하는 현상이 빚어졌다. 마치 서양문화를 수용하던 20세기 조선을 상징하듯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