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재미 문학과지성 시인선 320
문태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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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오랜만에 시집을 읽었다. 언제 마지막으로 시집을 읽었는지 기억조차 할 수가 없다. 오래전 군대 있을 적에 최영미 시인의 <서른, 잔치는 끝났다>를 읽은 것이 아마 마지막이지 싶은데, 사실 그것조차 제대로 다 읽었는지 아니면 표제작만 달랑 읽었었는지 확실하지 않다. 그리고 먼 길을 떠나면서, 백석 시인의 시집을 가지고 갔었는데 오랜 시간 동안 읽지 않고 다시 가지고 돌아온 기억이 난다. 그러니 어제와 오늘 이틀에 걸쳐 읽은 문태준 시인의 <가재미>는 정말 나에겐 기념비적인 시집이 아닐 수 없다.

 

소설과 인문서적, 여행기 등등 독서에 있어 탐닉하는 편인 나에게 시집은 왠지 금기의 대상처럼 다가왔다. 아마 그 대부분은 학창 시절 시적 의미를 분석하고 외워서, 평가를 하는 학교교육의 폐해라고 말하고 싶다. 그 시절에는 시를 즐길 수 있는 여유가 도통 없었다. 그저 나에게 시는 평가의 대상으로서 텍스트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지겨움의 발로에서였을까 나이가 먹고 어느 정도 여유가 생겼지만, 여전히 시를 읽고 싶다는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또 한편으로는 시인이 구사하는 시적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자괴감도 있지 않았나 추정해 본다.

 

그렇게 오랜만에 읽은 문태준 시인의 <가재미> 역시 그런 나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 어떤 구절들은 읽어도 무슨 뜻인지 모르겠고(아마 내가 시를 멀리 하는 직접적인 이유일 것이다), 간신히 따라 잡은 구절들 역시 자의적 해석으로 마무리하기 일쑤였다. 그리고 조백(早白)이니, 중음(中陰)이니 굿당이니 하는 말들은 솔직히 난생 처음 듣는 표현들이었다. 그런 표현들의 해석을 위해 굳이 표준국어대사전을 뒤적이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아야 했다. 역시 시를 소화하기 위해서는 즐겨 읽는 소설보다는 좀 더 수고가 필요하구나 싶었다. 최근 시집을 읽어 보지 않아 잘 모르겠지만, 상당히 많은 부분을 해석도 달지 않은 한자를 시인을 구사한다. 다행히 누군가 그 한자풀이에 약간의 감상을 적어 넣어 나같은 시에 대한 문외한에게 도움을 제공해 주니 고맙지 아니한가.

 

시는 역시 독자에게 무궁한 상상력을 필요로 한다. 과연 그것이 가능한가라는 질문보다 그 광경을 이미지화해서 상상해 보는 능력을 요구한다. 어미 기러기가 새끼 기러기를 업고 나는 장면을 그려본다. 현실에서 그것이 가능한가? 시를 읽다 보니, 머리와 꼬리는 다 사라져 버리고 한 구절들이 뇌리에 와서 들어와 박힌다. 그리움의 곡면이라니. 그런 표현을 창조해내는 것이야말로 시인 본연의 임무라는 생각 밖에 들지 않는다. 세상에 나를 보내준 어머니가 풍상에 젖어 나이 드는 것을 얼굴에 골짜기가 생겼다는 말로 형상화해내는 문태준 시인의 감수성이 인상적이다. 영원히 젊을 것만 같았던 나의 어머니 역시 세월을 이길 수 없구나.

 

표제작인 <가재미>에서는 암으로 죽음을 목전에 둔 환자와 보호자의 관계가 부상한다. 죽음을 물속이란 말로 대치한 걸까. 병실에서 환자 옆에 누운 이를 한 마리 가재미로 형상화해서 그 옆에 나란히 배치한다. 그녀의 거칠어져 가는 숨소리, 야윈 두 다리 따위가 죽음의 사자가 가까이에 와 있음을 암시한다. 그 사이를 좌우로 헤엄치는 나는 가재미다. 슬픔의 감정을 가재미에게 이렇게 효과적으로 이식할 수 있다니 역시 시인답다. <평상이 있는 국숫집>에서는 지기와 떠난 담양여행에서 먹었던 국수 생각이 났다. 그 집 역시 평상이 있었다. 국수는 역시 한 여름날 평상에서 먹어야 제 맛이던가. 시의 한 구절마다 떠오르는 추억에 대한 사모가, 사연이 과거로 나를 돌려보낸다.

 

문태준 시인의 <가재미>를 읽으면서, 시집은 역시 단발성으로 한 번 읽고 말 것이 아니라 좋은 시집이라면 곁에 두고 계속해서 곱씹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모르겠지만, 또 시간이 지나 세월의 풍상이 더께처럼 삶 속에 둥그런 고요처럼 침잠하면 그 땐 또 다른 느낌으로 나에게 깨달음을 전해주지 않을까. 그런 기대를 해본다.

 

[리딩데이트] 20141011~ 12일 오전 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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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모닝 예루살렘
기 들릴 지음, 해바라기 프로젝트 옮김 / 길찾기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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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예루살렘이다. 국경없는 의사회 소속인 부인 나데즈를 따라 이번에는 세계의 화약고라 불리는 이스라엘 그 중에서도 기독교, 무슬림 그리고 유대교의 성지인 예루살렘을 기 들릴은 그린다. 캐나다 출신(퀘벡) 아티스트로서 중립적인 입장에 서서 나름대로의 객관적 견지에서 1년간 예루살렘에서 자신이 직접 보고 들은 것들을 바탕으로 생생한 이야기를 전달자의 역할에 작가는 충실하다. 이제는 절판돼서 구할 수도 없는 그의 출세작이라고도 할 수 있는 <평양>(2003)이 아쉽다.

 

내가 처음으로 만난 작가의 <굿모닝 버마>보다 아무래도 최근작(2011)이어서 그런지 데생의 깊이와 스케치 그리고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 따위가 일취월장했다는 느낌이다. 뭐랄까 전작에서 버마의 외부에 머물렀다는 느낌이 들었다면, <굿모닝 예루살렘>에서는 그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내부에 좀 더 깊숙하게 침투했다고나 할까.

 

아내를 외조하는 전업주부로 육아를 맡은 작가의 삶에 다분히 공감이 간다. 아이들이 놀만한 놀이터와 동물원을 찾아 나선 성실한 주부아빠의 모습이 이젠 낯설지 않다. 아티스트로서 작가의 작업은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나서야 비로소 시작된다. 처음에는 예루살렘의 곳곳을 도보로 누볐으나, 차까지 사서 기동력을 높여 예루살렘의 다양한 곳들을 독자에게 소개하고 있다. 개인적인 소용의 차원에서 구매한 자동차 덕분에 독자가 호사를 누렸다고나 할까. 그의 작품은 어쩔 수 없이 미국 출신 저널리스트 조 사코의 <팔레스타인>과 비교될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났다. 조 사코가 상당히 정치적인 차원에서 팔레스타인 이슈에 접근한다면, 캐나다 사람인 기 들릴은 상대적으로 비정치적인 접근 방법을 택했다.

 

나치에게 홀로코스트라는 어마어마한 박해를 받은 이스라엘 민족이 팔레스타인 원주민들을 핍박하면서 중동의 깡패로 떠오른 이면에는 큰형 미국과 미국 내 유대인들의 적극적 지원이 있었다. 지금도 중동의 패권을 잡기 위해 사사건건 미국과 대결하고 있는 이란에 대항하는 이스라엘은 미국의 강력한 동맹국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이스라엘은 점점 더 병영국가화되고 있다는 느낌을 이 책을 통해 받았다. 외국인들은 이스라엘에 출입국할 때마다, 여행 목적과 체류지에서 어느 호텔에 묵었는지, 심지어 조부가 무슨 일을 했는지에 대해 이스라엘 국가에 설명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한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테러에 대비한 상시적인 검문검색은 일상이고, 분리장벽까지 세워 예루살렘을 그야말로 결딴내 버렸다.

 

유엔에서 불법으로 규정한 정착촌에 대한 작가의 미묘한 시선도 빼놓을 수 없다. 정착촌에는 다양한 서방 물품들을 살 수 있는 마켓이 있지만, 거기서 물건을 사는 건 정착촌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이라며 단호하게 물건사기를 단념한다. 하지만 오히려 아랍 사람들이 그게 무슨 상관이냐며 물건을 사는 장면을 그리기도 한다. 여전히 메시아의 재림을 기다리며, 세 번째 성전 건축을 희망하는 극정통파 유대인을 비롯해서 다수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정착촌 건설을 정당화하고 있다. 물론 그 이면에는 팔레스타인 원주민에 대한 무차별적인 테러와 차별이 깔려있다. 군인도 아닌 정착촌 사람들은 위협적인 상황에 대비해서 총기로 무장하고 조깅을 하기도 한다. 가이드 역시 어디서 날아올지 모르는 총알에 대비해서 총을 가지고 다닌다. 극정통파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이 신의 선택을 받았다는 선민의식에 젖어, 21세기 문명을 거부하고 각종 율법과 규례에 따라 생활한다. 심지어 같은 유대인 내에서도 차별이 존재한다. 동유럽 출신 유대인(아쉬케나즈)들은 예멘 출신 유대인들과 말도 섞지 않는다고 했던가. 겉모습만으로는 흑인인 에티오피아 출신 유대인은 또 어떤가.

 

그렇다고 해서 모든 유대인들이 그런 편협한 사고에 젖어 있는 건 아니다. 텔아비브나 야파에 사는 개화된 유대인들의 삶의 모습은 우리네 그것과 다를 바가 없다. 무슬림과 기독교 양대 종교의 성지인 예루살렘은 통곡의 벽을 비롯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선지나 무함마드의 행적을 쫓는 많은 외국인 관광객과 더불어 여전히 그들을 거부하는 극정통파 유대인과 자신들만의 삶을 추구하는 극소수의 사마리아인들도 있다고 한다. 기독교라고 해서 다 같은 기독교도가 아니고, 다양한 형태의 분파들이 존재하는 곳이 바로 신의 땅 예루살렘이라는 것이 기 들릴이 말하고 싶은 핵심 포인트가 아닐까.

 

이야기는 돌고 돌아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 만화의 말미에 기 들릴은 두 번의 가이드 투어 체험을 소개한다. 하나는 Breaking the Silence(BTS)라는 팔레스타인의 비참한 현실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전직 유대인 군인들이 조직한 NGO 단체의 투어이고, 후자는 정착민이 소개하는 가이드 투어이다. 특이한 점은 자기들에게 불리한 사실에 대해서는 가리고, 자신들이 알리고 싶은 사실만을 관광객들에게 보여준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헤브론 정착민들이 제공하는 투어에서는 1994년 골드스타인이 패트리아크 동굴에서 저지른 만행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반면, BTS 투어에서는 1929년 학살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현재 진행 중인 강제철거와 이주 투쟁에 대해 보여주기를 원한다. 아이러니 중의 하나는 관광에 나선 투어리스트들과 정착민들이 서로의 모습을 비디오카메라에 담는 장면이었다. 그래도 BTS에서는 균형 잡힌 시선을 위해 헤브론 정착민들이 실시하는 투어를 해보라는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바로 이 부분이야말로 캐나다 출신 만화가 기 들릴이 이 책에서 전하고 싶은 메시지였다고 확신한다. 편견 없이, 균형 잡힌 시각으로 예루살렘과 팔레스타인 이슈를 보라.

 

최근 부패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은 전 이스라엘 총리 에후드 올메르트의 온건 노선이야말로 오늘날 시한폭탄이 된 팔레스타인 해법 중의 하나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예루살렘 시장을 역임한 정치인 올메르트는 사임 연설을 통해 위대한 이스라엘을 꿈꾸는 이들에게 착각에 빠져 있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성도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뿐만 아니라 다른 민족들도 함께 공존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물론 조만간 이뤄지기 힘들겠지만, 비정상의 정상화와 중동평화를 위해 그의 바람이 꼭 이뤄지길 희망해본다.

 

[리딩데이트] 20141010일 금요일 2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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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세이
가레스 하인즈 글.그림, 황윤영 옮김 / 보물창고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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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전 읽기가 부담스러운 사람에게 그래픽 노블만한 게 또 있을까. 이십대에 세계정복에 나선 알렉산드로스가 즐겨 읽었다는 <일리아드>, <오디세이> 두 편 모두 대강의 이야기는 알고 있으나 너무 어려서 읽은지라 이젠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트로이 전쟁 전편에 해당하는 것이 <일리아드>라면, 이타카의 영웅 오디세우스가 20년간의 험한 여정 끝에 고향으로 돌아오는 일련의 과정을 그린 것이 바로 <오디세이>란다. 이천년이 훨씬 지난 지금에도, 험난한 대모험을 가르켜 오디세이라 부르는 걸 보면 역시 서구 문화의 원류가 얼마나 대단한지 다시 한 번 느끼게 된다.

 

그리스 고대영웅 서사시로만 알려졌던 <트로이 전쟁>이 독일 출신 슐리만의 발굴로 비로소 역사의 단계로 진입하게 된 것을 주지의 사실이다. 그리스 최고의 미녀 헬레네를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가 납치하게 되면서 발발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실상은 그리스 세계와 동방 트로이 간의 무역전쟁이 원인이 된 10년 전쟁이었다고 한다. 아가멤논과 오쟁이진 스파르타의 메넬라오스가 주축이 된 그리스 원정군은 막강한 트로이를 상대로 10년이나 전쟁을 질질 끌다가 결국 오디세우스의 지략을 이용한 트로이 목마 전략으로 트로이를 멸상시키게 된다. 그리고 모두 고향으로 돌아가 잘 먹고 잘 살았으면 좋았겠지만, 그리스 신들은 언제나 그렇듯 인간의 운명을 뒤바꾸어 놓았다.

 

성경에도 나오지만, 갈대아 우르 지방에 살던 아브라함은 여호와의 계시에 따라 낯선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 다시 말해 지금의 팔레스타인 지방으로의 이주를 결정한다. 지금도 그렇지만, 고대시대에 자기가 속한 씨족을 떠나 물설고 낯선 땅에서 새로운 기업을 구축한다는 건 어쩌면 죽음을 각오한 결정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나마 아브라함은 물적 토대라도 있었지만, 이타카의 왕 오디세우스는 그런 것 하나 없이 트로이를 떠나 생사를 넘나드는 모험에 뛰어든다. 물론 자발적인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가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아들이자 외눈박이 거인 괴물 키클롭스 족의 폴리페모스의 눈을 찌르고 달아나면서, 굳이 밝히지 않아도 되는 자신의 본명을 밝히면서(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해서 신인 포세이돈이 몰랐을 지도 없겠지만) 스스로 화를 자처한다. 그래서 제우스를 비롯한 신들이 그의 귀환을 허락했을 때도, 유일하게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바닷길을 지배하고 있던 포세이돈은 오디세우스의 귀환을 갖은 방법을 사용해서 방해한다.

 

한편, 이타카에서는 오디세우스의 아름다운 아내 페넬로페에게 부군인 왕은 이미 죽었고 자신과 결혼해 달라는 수많은 구혼자들에게 둘러 쌓여 지옥 같은 나날을 보내고 있다. 이 뻔뻔하기 짝이 없는 무리들은 오디세우스의 재산을 축내면서 매일 같이 축제와 같은 날들을 보내고 있다. 도대체 당시 이타카의 왕권은 그 정도 밖에 안되었다는 말인가. 어디 왕위계승권자도 아닌 자들이 나서 왕비를 위협한단 말인가. 어쨌든 그런 상황 속에서 오디세우스가 트로이 전장으로 떠나던 시절 젖먹이였던 아들 텔레마코스는 장성해서 아테나 여신의 도움을 받아 오디세우스를 찾아 나선다. 참고로 아테나 여신은 트로이 전쟁 이래, 오디세우스의 수호신으로 그를 몇 번이고 죽음의 위험에서 구해낸다.

 

신들의 시기와 질투, 그리고 수호를 동시에 받는 오디세우스는 숱한 난관을 겪으면서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는 꿈을 저버리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판도라의 상자에 마지막으로 남은 인류의 소망인 희망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 아닐까. 어느덧 20년이라는 세월이 지나, 영웅 오디세우스의 얼굴에는 영욕의 세월의 흔적이 그대로 나타났지만 그런 시간조차 영웅의 기개를 꺾을 순 없었다. 초한대전에서 유방에게 처참하게 패한 항우는 마지막 전투였던 해하싸움에서 지고, 다시 오강을 건너 강동으로 건거나 권토중래하라는 촌로의 권고에 어찌 강동의 자제 8,000명을 잃고 무슨 낯으로 그들의 부형을 만나겠냐며 자결하는데, 이타카의 젊은이들을 이끌고 트로이 전쟁에 나갔다가 단신으로 귀환한 영웅에게는 그런 수치심도 없었던 모양이다. 그의 안중에는 오로지 자신의 무사귀환만이 목적이었으니 말이다.

 

<오디세이>를 비롯한 모든 영웅서사시와 신화에 등장하는 것처럼 무엇을 하지 말라는 금기, 즉 터부는 모두 깨지게 되어 있는 모양이다. 트리나키아 섬에서 태양의 신 헬리오스(아폴론?)의 신성한 소를 절대 건드리지 말라는 금기 역시 오디세우스 부하들이 굶주림 때문에 결국 깨지게 되고 결정적으로 그 숱한 고난의 시절을 함께 했던 동지들이 한 순간에 바다의 제물이 되고 만다. 어느 금기고 인간의 부주의함 때문에 깨지게 되어 있고, 그에 따른 고난의 수순은 이미 예정된 대로 진행된다. 아이들이 하지 말라는 일은 기를 쓰고 하는 것처럼 말이다. 어쩌면 우리네 삶의 서사 가운데 일부는 고대 신화에서 비롯된 금기와 절제의 미덕을 지키지 못해 생기는 갈등의 연속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영웅서사시 <오디세우스>의 전반부가 그런 고난의 기록이었다면, 후반부는 마침내 신들로부터 고향으로의 귀환을 허락 받아 마침내 이타카에 도착한 오디세우스의 복수로 점철된다. 아들 텔레마코스와 자신에게 여전한 충성을 맹세한 돼지치기 에우마이오스와 필로이티오스 같은 노병을 이끌고 마지막 승부에 나선다. 역시 신의 수호를 받는 오디세우스는 파리떼처럼 달려드는 페넬로페의 구혼자들을 특유의 기지와 녹슬지 않은 용맹함으로 물리치고 마침내 기나긴 서사시를 완성한다. 그리고 이타카의 영웅 오디세우스는 문학을 통해 마침내 불멸의 존재가 되었다.

 

<오디세우스>에는 후세에 수없이 반복되는 다양한 형태의 문학적 클리셰이의 원형들이 차고 넘친다. 세이렌의 치명적인 유혹, 로터스의 열매를 먹고 모든 것을 잊고 현재에 만족하게 된다는 되는 마법, 마녀 키르케가 알려준 죽은 자들의 땅에서 망자 테이레시아스의 예언, 금기(터부)를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신의 처벌, 영생을 주겠다는 칼립소의 유혹에도 굴하지 않는 오디세우스의 인간의지 등 우리네 삶의 원형적 서사의 가히 모든 것이 그대로 들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싶다. 미국 출신의 그래픽 노블작가 가레스 하인즈는 바로 이런 다양한 서사의 보물창고인 영웅서사시 <오디세이>를 원전보다 훨씬 이해하기 쉬운 스타일로 독자들에게 풀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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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모닝 버마 - 금지된 자유의 땅 버마로 간 NGO 부부의 버마 견문록 카툰 클래식 12
기 들릴 지음, 소민영 옮김 / 서해문집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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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한 기회가 알게 된 기 들릴의 카툰을 아주 재밌게 읽고 있다. 사실 <굿모닝 예루살렘>부터 읽기 시작했는데, <굿모닝 버마>를 먼저 다 읽게 됐다. 작가의 전작 중에는 <평양> 좌충우돌 방문기도 있다고 하던데, 이 책은 절판이 돼서 구할 수가 없나 보다. 국경 없는 의사회 소속의 아내를 따라 전 세계를 누비는 캐나다 만화가 기 들릴의 버마 방문기를 읽으면서 묘한 생각이 들었다. 원제는 <버마 연대기>로 아마 출간되면서 굿모닝 시리즈로 이름이 확정된 모양이다.

 

원래 과테말라로 갈 예정이었으나, 버마로 오게 된 기 들릴 부부의 일상을 작가는 그리고 있다. 국경 없는 의사회 소속의 아내 나데주는 주로 일 때문에 바쁘고 주인공 기 들릴은 아들 루이스의 육아에 여념이 없다. 보통 아내가 집에서 육아를 책임지고, 남편이 밖에서 돈을 벌어오는 시스템과는 반대라고나 할까. 작가도 말했지만, 버마(미얀마라고도 불린다)에 사는 외국인들의 지위는 좀 특별하다. 어쨌든 버마 사람들보다 소득 수준이 높다 보니 아무리 봉사를 하러 버마에 온 이들도 그곳에 사는 사람들보다 월등한 생활을 하기 마련이다. 아이 보는 보모도 두고, 경비도 두고 그런 걸 보면 말이다.

 

북한과 더불어 아시아에서 유례없는 군부독재 정치 치하의 버마는 만성적인 에너지 부족으로 정전이 일상화되어 있다. 그러니 에어컨 없이는 살 수 없는 서양 사람들이 버마의 습하고 뜨거운 열기를 어떻게 참을 수 있겠는가. 작가의 불평 중에는 언론의 자유 없는 검열 통제 정책도 빠지지 않는다. 유신 시절 국내에서 벌어지는 사건 사고의 실체를 알기 위해 외국 언론에 의존해야 했다는 말이 문득 떠올랐다. 기사 삭제로 너덜너덜해진 외신과 버마 군부인사들이 참가한 행사소식을 전하는 국영 매체의 대비가 인상적이었다. 작가도 나중에 버마를 방문한 친구가 자신의 사진과 이름을 실명으로 표기한 기사를 내보내면서 필화를 겪을 뻔한 체험담도 진솔하게 공개하고 있다. 버마를 떠나면 그만인 자기보다, 자기와 함께 애니메이션 공부를 하던 버마 친구들의 안위를 걱정하는 모습에서 이방인의 인도주의 정신이 빛났다고나 할까.

 

인터넷 필터링은 기본이고, 어처구니없는 일로 재판을 받고(어떤 경우에는 재판도 없이) 처벌받는 일이 다반사인 독재국가의 모습을 작가는 있는 그대로 그리고 있다. 이런 점에는 편견 없는 팩트 위주의 기술이 마음에 들었다. 버마의 에너지 위기에도 불구하고, 다국적 에너지 기업인 토탈이 버마 인근해에서 가스를 시추해서 태국으로 보내, 그곳의 경제에 이바지하는 역설도 빼놓지 않는다. 버마 소수민족에게 의료지원을 하기 위해 다양한 봉사단체들이 버마-태국 국경의 카렌, 카친족들을 돕고자 하지만 버마 군부는 까다로운 조건들을 내세워 서류작업으로 그들의 업무를 지연하고 방해한다. 국가가 해야할 일을 그런 단체에게 미룬다고 기 들릴은 신랄하게 비판하기도 한다. 전적으로 공감이 가는 이야기였다.

 

기 들릴 작가가 버마에 체류하던 당시 여전히 가택연금 중이었던 아웅산 수지 여사의 이야기도 간간히 소개된다. 수십년간 무소불위의 독재권력을 행사해온 군부에 맞서, 15년 넘게 망명을 거부하고 가택연금을 받아들인 야당 정치인을 다양한 방식으로 지지하는 버마 사람들의 이야기도 작가는 소상하게 들려준다.

 

그런 정치적인 이야기 뿐만 아니라, 자신의 작업을 위해 중국산 잉크를 사러 시장에 나갔던 이야기, 바간과 미치나 등 버마 각지를 직접 여행한 이야기, 또 인근 태국 여행을 바탕으로 인접해 있지만 너무 다른 두 나라에 대한 재밌는 짤막한 에피소드가 끊이지 않는다. 왕국인 태국 극장에서 국왕 부처의 사진이 등장하면 주변 사람들이 모두 일어나는데 외국인 작가는 아랑곳하지 않고 음료수와 팝콘을 즐겼다는 그런 이야기도 흥미진진하다. 메뚜기 구이를 먹는 법도 소개해 주고, 불교 국가인 버마의 종교 관련 에피소드, 서로를 축복하는 의미에서 행해지는 물 축제 등등 이색적인 체험기가 <굿모닝 버마>를 장식한다.

 

악명 높은 사회주의 국가로 자신들은 미얀마로 국호를 부르고 있지만, 서양에서는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부터 작가는 소개한다. 미신적인 이유로 해서 통용되는 지폐 단위를 십진 단위로 하지 않는다는 따위는 아무 것도 아니다. 아마도 이라크 전쟁의 여파로 인해 서방 세계의 무력 제재를 두려워해서인지, 버마 군부는 기존의 수도인 양곤에서 내륙 도시 네피도로 옮기는 천도를 국민들의 의견도 묻지 않고, 일부 국가 지도자들의 독단적 결정에 따라 일사천리로 처리해 버린다. 독재 때문에 세계 각국으로부터 경제제재도 받고 있지만, 소규모이긴 하지만 석유 및 천연가스, 구리, 주석, 텅스텐, 철광, 석회석 같은 풍부한 천연자원을 중국에 수출하면서 서방세계의 경제제재를 무력화시키고 있다.

 

버마를 떠나기 전에 작가는 마지막으로 명상을 통해 참선과 수행을 배워 보는데 도전하지만 보기 좋게 이틀 만에 포기해 버린다. 서양인의 사고로, 선순환하는 동양 철학을 이해하기란 난망했을 것이다. 버마 행상 아주머니가 파는 주스의 위생을 지적하고, 토사물을 먹고 자란 뱀장어 요리를 먹는다는 사고의 연결이 여전한 서양식 오리엔탈리즘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고의 발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 들릴의 버마 이야기를 보고 나니, 더더욱 그가 그린 <평양>은 어떨지 궁금해졌다. 구하기 힘든 책일수록 더더욱 궁금해지니 언젠간 읽게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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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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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그동안 김영하라는 이름은 수도 없이 들어왔지만, 그의 책은 소설집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를 통해 처음으로 만나게 됐다. 가히 엄청난 속도로 완독했는데, 작가의 책을 읽으면서 나의 머릿속에 떠오른 두 단어는 “몰입”과 “스피드”였다.

 

모두 12개가 담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는 마치 어린아이가 살바도르 달리가 디자인했다는 멋진 포장지에 싸인 추파춥스 막대사탕 같은 맛이 배어 있다. 한 이야기를 읽고 나면, 또 다음에 나올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라는 기대감이 솔솔 번져 온다. 그러니 그의 글에 몰입하지 않을 재간이 없다. 전철 안에서 책장을 넘기는 손길이 분주해진다.

 

언제나 그렇지만 단편보다는 긴 호흡의 장편을 더 좋아하지만, 김영하 작가 소설집에 오롯하게 담긴 서사의 마력(魔力)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자신을 보고 깜짝 놀란다. 사실 단편은 무엇보다 첫 번째 페이지가 중요하다. 충분히 시간을 두고 어느 특정 캐릭터에 대한 묘사로 승부를 걸 수 있는 장편에 비해, 정말 단기간에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해야 하기 때문이라고나 할까. 그런 차원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에서 작가는 연전연승이다.

 

<로봇>과 <여행>에서는 비틀린 남녀 간의 관계를 축으로 서사가 진행된다. 타클라마칸 사막을 꿈꾸며 개미지옥 같은 도시의 수렁에 빠진 여자 김수경과 생면부지의 남자 이문상이 만나 사랑하게 되는 과정이 소개된다. 뜬금없이 아시모프 박사의 로봇 3원칙에 대해 이야기하는 남자, 관계의 향방은 온전하게 여자에게 달렸다. 더 나갈 것인지, 아니면 그곳에서 멈출 것인지. 느닷없는 남자의 고백과 갑작스러운 사랑의 엔딩. 한편, <여행>에서는 좀 더 노골적이다. 예전에 끝낸 사랑을 볼모로 잡고 차를 달려 동쪽 바다로 향하는 한선. 그들의 관계는 결혼을 앞둔 수진이 백화점에 사왔지만 깨져 버린 로열달튼 그릇으로 형상화된다. 예정에 파국과 폭력의 시간이 흐르고, 수진은 쿨하게 택시를 잡아타고 원상복귀한다.

 

마크트플라츠라는 이질감이 느껴지는 공간의 남녀는 해마다 만난다. 허무의 정점으로 치닫는 그들의 관계의 끝은 어디일까. 누가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관심이나 둘까. <밀회>는 반복되는 이별과 재회이라는 행위에 중점을 둔다. 김영하 씨의 단편선의 타이틀로 뽑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라는 문구가 책 표지의 점멸하는 자동차 헤드라이트 이미지와 겹쳐진다.

 

욕망이 들끓는 서울공화국의 복판에서 국어국문학을 공부하겠다는 당찬 도전정신으로 무장한 이방인 마코토의 이야기는 유머와 즐거움이 잘 배어 있다.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하는 여대생의 페르소나를 작가는 능청스럽게 잘도 뽑아낸다. 주인공의 마코토에 대한 사랑의 돌격은 번번이 현주라는 바리케이드에 걸려 넘어진다. 그리고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난 다음에 다시 만난 마코토에게 열렬한 키스를 퍼부으며, 오랜 짝사랑의 종지부를 찍는다. 어쩌면 이렇게 여성의 감정을 잘 파고드는지, 역시 작가는 타고난 구라꾼이지 싶다.

 

IMF에게 나라의 살림을 모두 뺏긴 채, 미츠라는 낱개포장 아이스크림 먹는 낙에 사는 젊은 부부의 궁핍과 빡빡한 인생살이를 희화화한 <아이스크림>, 소비욕망이 소용돌이치는 백화점이라는 공간을 무대로 한 “조”라는 사나이의 몰락을 그린 <조> 그리고 영상시대의 경쟁과 과거에 끔찍한 트라우마가 있는 주인공의 인스턴트 사랑을 버무린 <퀴즈쇼>에 이르기까지 작가가 문자로 형상화시키는 소재는 그야말로 무궁무진하다.

 

이 소설집에는 작가가 기존에 발표한 작품과 미발표작이 뒤섞여 있다고 한다. 하지만, 조금은 불친절하게도 그런 설명이 빠져 있어서 분간할 방법이 없는 점이 좀 아쉬웠다. 조금만 친절하게 언제 어디에 발표된 작품이라는 설명이 덧붙여져 있다면 좀 더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이미 책이 다 나온 다음의 사족일 따름이다.

 

작가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에서 다양한 감정의 칵테일을 선보인다. 불완전한 존재인 인간은 결국, 감정적으로 타인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방증일까.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면서 옛 애인을 데리고 바닷가로 무작정 향하는 남자, 자신이 가진 권력을 이용해서 사적 이익을 취하다가 결국 나락으로 떨어져 버리는 주인공, 꼭꼭 숨겨둔 자신의 감정을 아주 오랜 시간과 라이벌이 마침내 사라져 버린 후에 비로소 폭발시키는 여자에 이르기까지 김영하 씨의 소설을 통해 참 다양한 인간 군상과 만날 수가 있었다. 어떨 때는 동지애적 감정을 느끼기도 하다가, 불쾌한 이물감에 고개를 내젓기도 한다. 이렇게 호오(好惡)를 오가는 양가적 감정의 연장선상에서 그의 소설에 푹 빠질 수가 있었다.

 

난 왠지 이 작가가 좋아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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