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베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7
서머셋 모옴 지음, 황소연 옮김 / 민음사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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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서머싯 몸의 책을 읽었다. 좀 부끄럽다고나 할까. 그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달과 6펜스>는 정말 오래 전에 사두었지만, 아직도 읽지 않고 있다. 그러다 지난 주 독서모임에서 서머싯 몸의 <인생의 베일>이 다음달 독서모임 책으로 정해지면서 부랴부랴 구해서 읽기 시작했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읽기 시작했는데, 그 재미가 고전소설임에도 탁월했다. 카프카의 <소송>과 더불어 나의 고전읽기 트라우마 탈출에 좋은 기회를 제공해 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부풀었다.

 

인터넷 위키피디아로 영국 출신의 저자 서머싯 몸을 검색해봤다. 사실 이름은 많이 들어 보았지만 내가 이 작가에 대해 아는 게 뭐가 있나 싶을 정도로 무지했다. 물론, 다른 인터넷 기사와 리뷰도 참조했는데 두 가지가 기억에 남는다. 동성연애자였음에도 결혼하고 가정을 꾸렸다는 점과 통속소설작가로 생전에 불렸었노라는. 그리고 91세까지 장수를 누리다가 남프랑스 니스에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이 정도면 남부럽지 않은 삶이지 않았을까.

 

서머싯 몸의 <인생의 베일>은 지금까지 모두 세 번 영화화되었는데 최근작으로 원제 그대로인 <페인티드 베일>은 2006년 존 커랜 감독이 연출을 맡아 나오지 왓츠가 여주인공 키티 역을, 에드워드 노튼이 냉정한 남편 월터 페인 역을 그리고 찰스 타운센드 역을 리브 슈라이버를 캐스팅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요즘 소위 잘나가는 막장드라마 뺨치는 스토리라인의 구성을 읽으면서 왜 당대 사람들이 서머싯 몸의 작품을 통속소설이라 불렀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작가가 서두의 <저자의 말>에서 밝히듯이 <인생의 베일>의 모티프는 단테 알리기에리의 그 유명한 <신곡>에 나오는 에피소드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먼저 캐릭터를 만들고 그것을 바탕으로 이 걸작소설을 완성시켰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인생의 베일>의 주인공 키티와 닥터 월터가 이끌어가는 서사의 힘은 대단하다. 스토리는 매우 간단하다. 런던 사교계의 꽃이었던 키티가 조급한 마음에 사랑하지 않지만 멋진 외모의 정부 세균학자 월터 페인의 세련되지 못한 청혼을 받아 들여 결혼에 이른다. 행복하지 않은 결혼생활의 말로는 홍콩 총독 차관보였던 중년의 멋쟁이 찰스 타운센드와의 불륜으로 치닫게 되고, 이 사실을 알게 된 키티를 너무 사랑하는 남자 월터는 콜레라가 창궐하는 죽음의 땅 메이탄푸로 부정한 아내와 향한다.

 

 

 

소설은 키티와 찰스의 외도가 남편 월터에게 발각되는 사건으로 시작된다. 19세기에 태어난 작가 서머싯 몸은 어떻게 보면 진부하기 짝이 없는 스토리에 여주인공 키티의 시선으로 영혼을 불어 넣는다. 그리고 영화에서 흔히 사용되는 플래시백 기법으로 어떻게 해서 키티의 어머니 가스틴 부인이 왕실변호사인 남편을 닦달해서 상류사회에 진입하고자 부단히 노력했으며, 이런저런 이유로 자신의 꿈이 좌절되자 이번에는 딸들을 좋은 혼처에 시집보내는 과제로 인생의 목표를 수정했는지 등등에 대한 제국주의 시절 영국 상류사회 일상의 치부를 고스란히 드러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들이 벌이는 게임에서 사랑이란 부질없는 감정의 찌꺼기일 따름이다.

 

결혼이라는 제도 아래 감추어진 부르주아 계급의 위선에 대해서도 서머싯 몸은 가차 없는 비판의 시선을 보낸다. 사랑에 눈이 먼 키티는 자신의 남편이 자신에게 보내는 온전한 사랑을 지루하다고 폄하하면서, 찰스 타운센드만이 자신의 유일한 사랑이라고 치켜세운다. 그녀는 마치 피그말리온이 갈라테아를 스스로 만들어서 사랑한 것 같은 그런 감정의 소용돌이 속으로 뛰어든다. 하지만, 그들의 부정을 알게 된 월터는 찰스의 외도가 키티가 생각하는 그런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간파하고 그녀가 스스로 깨달을 수 있는 기회를 얼음장 같은 차갑게 제공한다. 언제나 그렇듯 열정이 냉정으로 변하는 순간은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럼 여기서 과연 찰스 타운센드는 비난의 대상이어야만 하는 걸까? 적어도 키티와 찰스는 서로가 사랑한다고 믿는 동안만큼은 서로에게 정직했다. 하지만 키티의 희망처럼 찰스는 자신의 와이프인 도로시와 전혀 이혼할 생각이 없었다. 언젠가 식민지 총독이 될 거라는 꿈을 꾸던 그는 자신의 이력에 오점을 남길 그런 실수는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그가 키티의 아름다움에 매혹되어 부적절한 관계를 갖게 된 것을 비난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하지만 찰스 타운센드는 그렇게 자신이 누린 아름다움을 책임질 마음이 전혀 없는 비열한이었다. 바로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키티는 절망하게 된다. 통속소설이라는 세간의 비아냥거림에도, 이런 관계의 치밀한 구성이야말로 <여성의 베일>이 고전의 반열에 오른 진짜 이유가 아닐까.

 

 

 

한편, 역병이 창궐하는 사지(死地) 메이탄푸로 스스로 들어간 닥터 월터에게 죽음은 숙명일 수밖에 없다. 자신에 대한 타운센드의 감정을 확인한 키티는 현지 중국인들에게 죽음을 무릅쓰고 봉사하는 프랑스 수녀원장 일행의 고귀한 희생정신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재확인하고, 새로운 삶에 도전하게 된다. 물론 완벽하지 못한 인간의 모습을 그대로 지닌 키티는 월터가 죽고 영국으로 귀향하는 길에 들린 홍콩에서 불같이 일어난 욕정 때문에 실수를 반복한다. 하지만 이런 점이 그녀가 존경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던 수녀들의 비인간적일 정도로 극도로 정제된 감정표현과 대비되는 장면이 아니었을까. 마침내 아내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난 아버지 가스틴 씨와의 한판 대결은 의미심장했다. 죽음의 고비에서 벗어난 마침내 여인으로 거듭난 키티의 성장으로 소설은 마무리된다.

 

전형적 통속소설이라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서머싯 몸의 <인생의 베일>은 읽는다면 아마 독자는 키티와 월터가 펼쳐 보이는 부부/연인 사이에 얽히고설킨 감정의 동선에 주목하게 될 것이다. 그만큼 작가가 입체적인 캐릭터 창조에 공을 들인 노력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열렬하게 자신의 아내를 사랑했지만 끝내 부정한 아내에 대한 용서를 거둘 수 없었던 월터의 고뇌를 작가는 냉정하게 기술한다. 그가 용서할 수 없었던 건 키티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던가. 어쩌면 실제 삶에서 동성연애자였지만, 결혼해서 부부생활을 했던 서머싯 몸이 가진 이중적 모습에 대한 변명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메이탄푸에서 역병으로 죽어나가는 중국인들을 돌보는 월터의 모습은 타인에게 성자(聖者)의 그것이었을지 모르겠지만, 키티는 월터의 행위가 자신의 부정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릇된 의도와 가치에서 비롯된 행동이 전도된 진실로 바뀌는 아이러니를 서머싯 몸은 탁월한 기량으로 지적한다.

 

인간관계의 핵심에 대한 작가 나름의 성찰과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빚어내는 삶의 드라마는 확실히 재밌다. 하지만, 제국주의 시대 출생한 작가의 고질적 오리엔탈리즘 기술은 독자를 불편하게 만든다. 서구인들에게 동양이라는 공간은 여전히 미지의 신비스러운 오브제일 뿐이고, 그 공간에 사는 이들 역시 동경이 아닌 동정의 대상으로 묘사된다. 물론, 철없는 소녀였던 키티가 불륜과 부정 그리고 남편의 죽음 등을 겪으면서 진정한 의미의 여성으로 성장해 가는 과정에 대해서는 시대를 앞선 사고의 발현이라는 점에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럼에도 ‘역겹고 소름끼치는 생물체’라는 표현까지 빌리는 서구인들의 시선을 가감 없이 그대로 표현한 장면에서는 한숨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상대적으로 여성성에 대해서는 진보적인 입장을 보여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시대의 한계를 보여준 작가의 시선이 아쉬울 따름이다.

 

이제 소설을 재밌게 읽었으니 다음은 영화로 만나볼 차례다. 철부지 사교계 처녀에서 산전수전 경험한 여인으로 거듭나는 역할을 소설의 주인공보다 실제로 열 살 정도 더 먹은 나오미 왓츠가 과연 어떻게 연기해낼지 자못 궁금하다. 대신 냉정하기 짝이 없는 무심한 표정의 연기를 보여줄 것으로 기대되는 에드워드 노튼의 퍼포먼스는 기대 이상일 것이라고 믿고 싶다. 소설에서 서머싯 몸은 새로운 사건이나 일화에 앞서 숫자로 표현했는데, 아마 영화에서는 각색 작업에서 그런 부분들이 배제됐을 거라고 추정된다. <인생의 베일>의 번역은 여성 번역자가 맡은 것 같은데, 책 속지의 저자 소개에서 서머싯 몸이 본격적으로 작가 활동을 위해 ‘의사를 때려치운다’라고 기술한 점이 눈에 띄었다. 물론 그 부분은 역자가 아니라 출판사에서 쓴 것일 수도 있겠지만. 남성작가의 글을 여성 역자가 번역해서 그런지 여성작가의 감성이 곳곳에서 느껴지기도 했다.

 

다시 한 번 프란츠 카프카의 <소송>에 이어 서머싯 몸의 <여성의 베일>을 통해 고전 문학도 신간 못지 않게 재밌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타진해낸 것이야말로 이번 독서 최대의 수확이다. 내친 김에 역시 서머싯 몸의 대표작이라고 꼽히는 <달과 6펜스>에 도전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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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르칸트의 황금궁전 - 코르토 말테제
휴고 프라트 지음, 홍은주 옮김 / 북하우스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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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연한 기회에 이 책과 만나게 됐다. 오래 전에 한 번 들어본 적도 있는 것 같은데 코르토 말테제 시리즈라고. 유럽 작가가 그린 만화인데, 역시나 우리나라에서는 아무래도 인기가 없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판형 또한 커서 어지간한 책장에 수납되지도 않을 것 같다. 22 X 29 cm 정도 되나. 인터넷으로 코르토 말테제를 검색해 보니 대뜸 캐릭터의 이름을 딴 의류 브랜드가 맞이한다. 어쨌든 스타일이 멋지긴 하군.

 

인터넷 웹사이트를 검색해 코르토 말테제의 정보를 알아봤다. 1887년 몰타의 발레타 출생으로, 아버지는 영국 콘월 출신의 뱃사람이었고 어머니는 세비야 출신의 집시였다. 말테제의 부모는 글로벌 시대의 연인답게 지브롤터에서 만났고, 어린 말테제 역시 지브롤터에서 자랐다. 발레타에 있는 유대인 학교에 다녔으며, 의화단 사건(1900)이 발생했을 때는 중국에 거주했다고 한다. 1904년 비로소 선원이 되어 전 세계를 누비기 시작한 말테제는 고향 발레타를 떠나, 이집트 기자의 피라미드 구경도 하고 이스마일리아, 아덴, 무스카트, 카라치, 봄베이, 콜롬보, 마드라스, 랭군, 싱가폴, 퀄룽(홍콩), 상하리를 거쳐 텐진에까지 도달했다. 그 외에도 다양한 그의 약력이 존재하지만 너무 방대하여 이 정도로 정리하자.

 

이런저런 시대적 유추를 통해(극중에 나오는 앙베르 베이의 사망연도를 근거로 삼아) 1920년대라는 걸 짐작할 수 있다. 휴고 프라트 공식사이트에서는 1921-22년이라고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그리스 로도스섬에서 바이런 경의 육필 원고를 찾는 가벼운 몸풀기로 시작한 우리의 주인공 코르토 말테제는 중앙아시아 모처에 숨겨져 있다는 알렉산더 대왕의 황금보물을 찾는 여정으로 독자를 인도한다. 뭐 언제나 소년만화 스타일이 그렇듯, 멋진 여인들과의 로맨스가 줄기차게 등장하며 숱한 위기 또한 특유의 임기응변으로 넘기는 코르토 말테제 특유의 기지가 돋보인다고나 할까.

 

 

 

코르토 말테제의 절친으로 모처에 감금되어 있는 러시아 상남자 라스푸틴도 계속해서 등장하게 되는데, 역시 성인만화답게 총격전이 많이 보이고 가차 없이 배신을 거듭하고, 배신자에 대한 응징으로 죽음이 등장하는 장면이 좀 낯설긴 하다. 당시 복잡하기 짝이 없는 중동지역의 정세를 판단할 수가 없다. 1차 세계대전에 독일편에 섰다가 처절하게 연합군에게 응징당하고 국토의 상당 부분을 유실한 터키 내에 앙베르 베이라는 영웅이 중국에서부터 러시아를 거쳐 터키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에 통일된 투르크 국가를 세우겠다고 나선 돈키호테식 발상부터가 어째 영 시덥지 않다.

 

게다가 티무르 슈브케라는 자와 똑같은 외모 때문에 연달아 위기에 빠지곤 하는 주인공에 관련된 이야기 전개가 조금은 구닥다리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사실 어느 순간부터 코르토 말테제가 사마르칸트에 있다는 황금궁전을 찾는지 못 찾는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저 정말 운이 없어 보이는 이 캐릭터에게 어떤 환난이 찾아올지, 그리고 이번에는 또 어떤 식으로 위기를 넘기게 될지가 관건일 따름이다. 아니나 다를까, 국경지대의 볼셰비키들의 포로가 되어서도 위대한 수령 스탈린 동지와의 연줄을 타고 유유히 빠져 나가는 모습이란. 역사의 빈틈을 파고드는 작가 휴고 프라트의 기술이 남다르게 보이지 시작한다.

 

지난 세기 첫 번째 학살로 기록된 아르메니아 학살사건에도 코르토 말테제는 깊숙하게 관계된다. 물론,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은 아니지만 이슬람 세력인 터키인들이 기독교 아르메니아인들을 학살한 사건에 대해 이번에는 아르메니아 민족주의자들이 볼셰비키 적군 편에 서서 터키인들에 대항하는 장면도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이런 역사적 대결 국면에서 상당히 이기적으로 보이는 주인공 코르토 말테제는 자신의 유일한 관심인 황금궁전 찾기에 여념이 없을 따름이다. 그러니 나중에 그가 목표를 이루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크게 문제가 될 것도 없다.

 

만화라고 해서 쉽게 읽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건 어디까지나 나의 판단착오였던 것 같다. 유럽 작가들의 그림체는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는 모양이다. 아무래도 자라면서 보고 자란 영향 때문이지 싶다. 데생 수준의 그림체를 바탕으로 선과 모양을 이용해서 튀어나오는 다양한 그림들이 신기할 따름이다. 휴고 프라트는 개인의 모험기에 역사적 사건들을 슬쩍슬쩍 배치하는 기법으로 코르토 말테제 시리즈의 흥미를 배가시키는 전법을 구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살라딘 시대부터 활동한 산노인이 지휘하는 신출귀몰한 아사신 집단에 대한 기술도 흥미진진하다. 사실 만화의 전개에 큰 영향을 미치는 건 아니지만, 서구인의 고질병 중의 하나인 오리엔탈리즘의 다른 한 면을 엿볼 수 있었다. 지금 읽고 있는 서머싯 몸의 <인생의 베일>에서 불편한 장면이 등장하는데 정말 어쩔 도리가 없는 모양이군.

 

우리나라에 코르토 말테제 시리즈는 북하우스를 통해 지금으로부터 12년 전에 모두 5편이 소개가 되었는데 <베네치아의 전설> 말고는 모두 절판 혹은 품절의 운명에 처해졌다. 순서가 어떻게 되는 진 모르겠지만, 구할 수 있는 버전의 코르토 말테제를 하나씩 찾아 보는 재미도 쏠쏠할 것 같다. 절판본이니 더 흥미가 당기겠지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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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송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3
프란츠 카프카 지음, 권혁준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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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름지기 고전은 다시 읽어야 제 맛이라고 했던가. 하지만, 애서가도 장서가도 아닌 어중간한 독서인으로 읽어야할 고전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고, 기존에 읽은 고전을 거듭해서 읽는 것 또한 쉽지 않은 일이다. 그리하여 수많은 핑계를 뒤로 하고 오늘에서야 비로소 프란츠 카프카의 <소송>을 읽었다. 으레 고전이라고 하면 몸을 비비 꼬게 만드는 그런 지루함으로 점철되어 있으리라는 나의 예상은 확실하게 빗나가 버렸다고 고백해야겠다. 오늘날 현실을 복제한 것 같은 카프카의 긴장감 넘치는 <소송>은 확실히 그런 점에서 여타의 고전과는 다른 변별점을 구사하고 있다. 이렇게 고전이라 하면, 어느 시대에 읽어도 독자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확실한 한 방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소설의 주인공은 서른 살의 요제프 K.다. 어느 날 아침 그는 느닷없이 들이닥친 2명의 감시인과 감독관 3인조에 의해 체포당하고 소송당했다는 말을 듣게 된다. 문제는 시작부터 독자에게 환기된다. 도대체 무슨 죄목으로 고소/고발되어 소송에 걸렸단 말인가. 그 어느 누구도 요제프 K에게 무슨 죄가 있는지 알려 주지 않는다. 다만, 소송에 걸렸으니 심리에 나오고 재판 준비를 하라고 알려줄 뿐이다. 그의 죄를 입증할 검사조차 보이지 않는다. 가뜩이나 부조리한 현실 속에 사는 우리에게 부조리 하나가 더 얹혀진 셈이다. 또 한 가지 이상한 점은 체포에 따르는 인신구속은 없고, 자유롭게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는 점이다.

 

요제프 K는 젊은 나이에 은행의 서열 3위에 해당하는 부장의 자리에까지 오른 엘리트다. 은행에서 자금과 법률문제를 담당하는 직책에 있어서 그런지 소송에 걸렸다는 심리적 압박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업무에 소홀한 기색이 없다. 물론, 그건 소송이 막 시작된 시점에서의 이야기일 뿐이다. 주인공은 무엇 때문에 소송에 걸리게 된 걸까? 보통 사람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소송 과정을 그는 어떻게 헤쳐 나갈 것인가 하는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한편, 피고인이 된 주인공은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는 변호사의 궤변은 당혹스럽기만 하다. 이 궤변을 소설을 통해 입증이라도 하듯 요제프 K는 소송의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뭇 여인들과 소위 썸타는 관계에까지 발전하기를 반복한다. 어쩌면 현실 세계에서 작가 카프카가 약혼녀들과 약혼과 파혼의 줄다리기를 거듭한 것에 대한 자신의 문학적 변명일지도 모르겠다는 의혹이 들었다. 치정으로 얽힌 난마 같은 욕망의 알레고리는 소설 전반을 통해 꾸준히 재생산된다. 요즘 세태로 말하자면 막장드라마의 전주곡이라고나 할까.

 

자신의 조카 요제프 K가 소송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카를 숙부(그는 도대체 이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된 걸까, 소설에 나오는 이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요제프 K가 소송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자신의 영향력을 발휘해서 무척이나 유능한 훌트 변호사를 그에게 소개시켜 준다. 그 와중에 알게 된 거의 다 죽어가는 변호사의 하녀 레니 역시 피고인 요제프에게 매력을 느끼고 첫 대면에서부터 파란을 일으킨다. 카프카가 묘사하는 법정 씬은 우리가 상상하는 정숙하고 엄숙한 분위기의 위용을 갖춘 곳이 아닌 미로처럼 보이는 통로를 거쳐 어느 다락방에 위치해 있는 밀실 같은 분위기이다. 게다가 차례로 등장하는 거의 모든 캐릭터들이 법원과 모종의 관계를 가진 것으로 묘사된다. 그런 점에서 법원은 어쩌면 이 사회를 움직이는 비밀결사 회원들의 조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부지불식간에 카프카의 정신세계에 자리 잡은 유대교 카르발라의 영향도 보이는 것 같다.

 

우리의 주인공 요제프 K는 소설의 초반에 변호사도 없이 법정에 나가 스스로를 변호한다. 모순과 부조리로 가득한 사법 시스템과 관료주의에 대한 정면 도전인 셈이다. 사회계약을 통해 개인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시스템이 오히려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장치가 되었다는 역설에 카프카는 주목한다. 소설에 탑재된 점증하는 부조리의 실체를 극대화하기 위해 카프카는 정교하게 캐릭터를 배치했다. 소송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 주인공을 위해 차례로 등장하는 제조업자, 화가, 상인 그리고 대성당의 신부에 이르는 그야말로 모든 캐릭터들이 법원의 영향권 아래 있는 사람들이다. 어쩌면 이런 카프카식 기술은 미래에 도래할 감시사회에 대한 암울한 예언이 아니었을까. 일전에 우리 사회가 홍역을 치른 카카오톡 감청 사태를 되돌아보면 프라하의 소설가가 우려한 불안의 실체를 엿볼 수 있다.

 

소설 <소송>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 중의 하나는 요제프 K의 직장인 은행의 창고에서 초반에 등장한 두 명의 감시인 빌렘과 프란츠에게 가혹하게 매질을 해대는 태형리가 등장하는 장면이다. 소재가 불분명하고 의심스러운 법원만큼이나, 태형이 가해지는 장소가 바로 요제프 K의 직장이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피고인의 아침식사를 가로채고 파렴치하게 피고인의 내의까지 탐낸 감시인들에게 가해진 태형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그런 사소한 잘못에까지 이런 처벌이 내려진다면, 피고인 요제프 K에게 내려질 형벌의 무게가 가늠되지 않을 정도다.

 

 

주인공의 운명을 좌우할 상급 법원의 판사의 결정이 궁금하지만, 끝내 그 결정 과정은 독자에게 공개되지 않는다. 대신 피고인을 위해 적극 변론을 펼쳐야 하는 변호사에서부터 시작해서 모든 이들이 생사여탈권을 가진 법원 권력에 기생 혹은 봉사하고 있다는 사실에 전율할 따름이다. 사실관계에 입각한 정확한 심리보다는 짬짜미를 통해 그저 무죄에 가까운 평결을 기대해야 하는 운명이라니. 처음부터 주인공의 죄가 무엇인지 알 도리가 없으니, 그들에게 정의를 기대한 것 자체가 난망한 것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런 점에서 카프카가 고안한 대성당에서의 신부와의 대화 씨퀀스는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이제 요제프 K의 문제는 도저히 인간의 영역에서 다룰 수 없으니, 신의 영역으로 인도하는 것일까. 하지만 신을 위해 봉사해야할 신부조차 법원의 하수인이라는 사실이 이젠 놀랍지도 않다. 인간이라는 사실이 어떻게 죄가 되냐는 주인공의 절규에, 기독교 사상의 원류가 되는 인간원죄론까지 동원하는 건 지나친 무리일까.

 

 

소설을 다 읽고 나서, 1993년 데이빗 휴 존스의 영화 버전을 봤다. 스크린에서는 할리우드에서 한 때 잘 나가던 미남배우 카일 맥라클란이 주인공 요제프 K 역을 맡아 열연을 펼치고 있었다. 영화는 실제로 체코의 프라하에서 촬영되었다고 하는데,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소설에서도 역시나 하이라이트에 해당하는 대성당 씨퀀스였다. 예의 신부 역은 <양들의 침묵>에 출연했던 안소니 홉킨스가 맡았다. 영화는 소설의 줄거리 전개를 충실하게 따르고 있는데, 특히 마지막 부분을 영화로 보니 자연스럽게 전통 유대교의 희생번제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도심에서 동떨어진 채석장에서 두 명의 처형자에게 (자신이 무죄라고 믿는) 무고한 요제프 K의 죽음의 영상화는 필연적으로 어떤 종교적 상징을 연상시켰다. 확실히 이 부분은 영화가 소설보다 더 뛰어났다는 느낌이 들었다.

 

카프카의 <소송>을 읽기 전에 고전이라는 점 때문에 지레 겁을 먹었는데, 다 읽고 나서는 안도할 수 있었다. 물론 읽는 동안 수많은 리뷰와 신문기사, 다양한 형태의 미디어의 도움을 받은 기시감 덕분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다시 한 번 다채로운 해석과 변용이야말로 고전읽기의 또 다른 즐거움이었노라는 말로 <소송> 리뷰를 마무리 짓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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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돌아왔다
티무르 베르메스 지음, 송경은 옮김, 김태권 부록만화 / 마시멜로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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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70년 만에 총통이 귀환했다. 아, 어느 총통을 이야기 하냐고? 우리 모두가 죽었다고 믿어온 바로 그 문제적 인간, 아돌프 히틀러다. 독일 출신의 작가 티무르 베르메스는 “자연과학적으로 설명하기 힘든”이라는 표현으로 1945년 4월 베를린 방어전에서 자살한 것으로 알려진 문제적 인간을 문학적으로 소생시켰다. 사실, 히틀러의 사후 그의 유해가 발견되지 않아 독일제국의 총통은 죽은 것이 아니라 사실 유보트 잠수함을 타고 남미 혹은 미지의 남극 대륙으로 망명해서 제4제국의 부활을 꿈꾸고 있다는 식의 음모론이 횡행하는 빌미가 되기도 했다. 그런 음모론에 비해 베르메스 작가의 선택은 훨씬 탁월하다. 그것도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그의 부활에 대한 잡다한 논란을 틀어막고 이야기를 출발시킨다.

 

 

 

 

그렇게 21세기 독일의 정치적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베를린에서 부활한 히틀러는 정확하게 자기가 지난 세기에 죽던 시점의 복장 그대로 돌아왔다. 개인적으로 베르메스 작가가 이 풍자 소설에서 그린 히틀러는 우리가 알고 있는 대악(great evil)의 근원자이자 전쟁광의 그것과는 차이가 있는 그런 캐릭터라고 생각한다. 냉혹하고, 자기가 내린 결단에 있어서는 추호도 망설임도 없는 그런 독재자라기보다 현실에 직면한 문제들을 끝없이 사유하는 철학자 같은 이미지라고나 할까. 물론 우리의 총통은 예나 지금이나 독일 민족의 가능성을 끝까지 믿으며, 제국의 부흥이야말로 민족의 유일한 목표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점은 변하지 않았지만.

 

소설에 등장하는 주변 인물들은 모두 진짜 히틀러를 텔레비전 코미디물에 등장하는 메소드 배우라고 생각한다. 항상 그들은 정도를 지나치지 않았냐, 얼마나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으면 이 정도의 연기가 가능하겠냐고 상찬을 보낼 지경이다. 문제는 1930년이나 21세기나 그를 제외한 모두가 히틀러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 결과는 엄청난 인명이 사상된 2차 세계대전의 발발이었으며, 그 결과로 독일 민족과 국가는 파멸 직전까지 몰렸었다.

 

1930년대에도 히틀러는 이제 막 도래한 라디오 방송 시절의 일약 라디오스타였다. 패전과 살인적인 인플레 그리고 상상을 초월하는 실업률도 실의에 빠져 있던 독일민족의 각성을 이끌어 내는데 한몫 단단히 했던 나치 선전상 닥터 괴벨스의 선전술도 빼놓을 수 없지만, 히틀러 자신의 카리스마 또한 무시할 수 없는 강력한 요인이었다. 현실세계에 다시 등장한 히틀러는 이번에도 최첨단 미디어를 이용해서 단박에 스타 반열에 오른다. 인터넷 시대의 총아로 등장한 유튜브는 인터넷에 올려진 동영상을 철저하게 타자화시키는 전략으로 대중의 눈과 귀를 사로 잡아왔다. 히틀러를 닮은 코미디언이 동영상 하나 정도는 독일연방공화국에 아무런 해가 되지 않을 거라는 자신감을 행간에서 읽었다면 무리일까.

 

이렇게 거칠 것 없이 달리던 히틀러에게도 최대의 약점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홀로코스트였다. 그를 발탁해서 일약 방송스타로 키워준 플래시라이트 사의 여걸 벨리니도 신신당부한 것이 있으니 절대로 방송에서는 유대인에 관련된 것은 안된다는 것이었다. 자신의 비서로 열심을 다해 돕던 베라 크뢰마이어 양의 할머니가 연관된 에피소드는 변신에 변신을 거듭한 독재자에게도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는 사실을 독자에게 일깨워준다. 바로 이 지점에서 소설은 좌충우돌 부활한 독재자의 본모습을 잊지 말라고 경고한다. 이 정도의 균형도 잡아주지 않는다면, 소설 <그가 돌아왔다>에는 레드라이트가 들어왔을 지도 모르겠다.

 

한편 다시 태어나 현실세계에 빛의 속도로 적응한 희대의 독재자는 민주적 절차가 확고하게 자리 잡은 독일연방공화국에서 기존의 우익테러 같은 방식은 씨가 먹히지 않는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달은 모양이다.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이나 발언을 들을 때마다 자신을 호위무사처럼 옹위하던 게슈타포와 친위대를 그리워하는 걸 보면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새로운 세상을 맞은 독재자는 여전히 자신의 인종차별주의적 이데올로기와 슬라브 민족을 2등 국민으로 삼아 에너지 자원의 획득을 위한 정복전쟁에 대한 망상을 저버리지 않는다. 문제는 70년 전에는 그의 망상이 엄청난 폐해를 초래했다는 점일 것이다.

 

<그가 돌아왔다>의 재미를 더해 주는 작은 에피소드들도 눈여겨 볼만하다. 예를 들어, 뉴스 프로그램 중에 계속해서 화면에 등장하는 자막과 단신들은 뉴스 진행자가 전해 주는 뉴스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히틀러식 텔레비전 분석의 정점이다. 선진국병이라 불리는 저출산과 낙태 문제를 극렬하게 비난하면서, 이런 식으로 하다가는 훗날 동부전선에 투입될 정예 사단 수가 줄어들 거라는 식의 사고는 정말 못말릴 정도다. 공원에서 비닐봉지를 들고 다니면서 뒤처리를 하는 애견인들을 미친여자라고 부르는 장면도 빼놓을 수 없다. 마케팅 천국의 시대에 비용이 안드는 선전술의 방식으로 홈페이지를 개설하고 지지자를 규합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으로 덧글배틀도 마다하지 않는 총통사령부의 문제적 인간은 역시나 히틀러다운 발상이다.

 

소설의 말미에는 히틀러의 집권기를 다룬 만화를 그린 김태권 작가가 그린 서울에 나타난 히틀러라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작가는 히틀러가 구사하는 독일어 대신 외국인이라면 누구나 다 영어를 해야 한다고 하면서, 코스프레한 히틀러로 한껏 희화화한다. 하지만 한 때 모든 사람들을 공포에 몰아넣었던 독재자가 요즘 우리 사회 갈등의 현장 곳곳에 준동하는 우익과 결탁했을 때 과연 어떤 식으로 발전할지에 대해서는 의문점으로 남겨 두었다. 과연 우리 사회가 독일처럼 표현의 자유라는 미명으로 어떤 가치까지 관용적으로 대할 수 있을지 그게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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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는재로 2014-11-17 1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의외로 제대로 된 인간으로 그려진다는게 솔직히 그가 한 행동만 알고 있지만 어떤 배경이 있는지 왜 했는지는 솔직히 외면하고 있는 뭐 워난 큰 잘못을 저질렀으니
책 자체는 재미있께 읽었습니다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 비망록
조 사코 지음, 정수란 옮김 / 글논그림밭 / 2012년 1월
평점 :
품절


 

오래 전에 조 사코란 미국 만화가이자 저널리스트의 <팔레스타인>을 읽었다. 그 책을 읽고 나서 당연히 리뷰를 썼으리라고 생각했는데 미처 쓰지 않았나 보다. 그 후에 읽은 <안전지대 고라즈데>에 대한 리뷰는 있는데 말이다. 어쨌든 우리나라에서 소개된 지 10년만에 다시 나온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 비망록>을 읽게 됐다. 전편에 대한 기억이 가물가물한지라 아무래도 이번에는 새로운 이야기에 집중할까 한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조 사코의 작품에 대한 촉발점은 기 들릴의 <굿모닝 예루살렘>이었다. 예의 작품에서 기 들릴은 <팔레스타인>을 다룬 조 사코의 작품을 언급했고, 나의 관심이 그쪽으로 돌려졌다. 조 사코는 현재 팔레스타인의 상황보다 그 상황을 있게 한 1956년 수에즈전쟁 당시 벌어졌던 칸 유니스와 라파에서의 학살 사건에 주목한다. 저자가 말한 대로, 과거를 캐내는 편이 상대적으로 용이해서였을까. 그가 만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자신이 직접 체험한 이스라엘 독립전쟁으로부터 비롯된 아랍 이스라엘의 모든 역사를 들려 주고자 하지만, 작가는 자신이 목표로 삼은 주제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미국 저널리스트의 옹고집이라고 해야 할까. 내가 만약 그였다면, 모든 것을 아우르는 역사로 관심을 넓히지 않았을까 싶다.

 

조 사코는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 페다이로 알려진 전직 반유대 게릴라 전사들을 비롯해서 현재 이스라엘의 추적을 받고 있는 칼레드라는 인물에 이르기까지 1956년 11월 가자지구 남부의 칸 유니스에서 벌어진 민간인 학살 사건에 대한 사실을 들려줄 수 있는 모든 사람을 인터뷰한다. 현재에도 가자 지구에서 이스라엘의 점령과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대한 박해가 지속되고 있기 때문에, 인터뷰이들은 본명을 밝히길 거부한다. 그 점 때문에, 사실을 추적하는 과정은 난망하기만 하다. 그리고 기록된 정보가 아닌 구술과 증언으로 과거를 재구성하다 보니 아무래도 엇갈리는 진술들이 눈에 띄기도 한다. 어쨌든 조 사코는 최대한 자신이 접한 사실을 가감 없이 다루기로 작정하고 있는 그대로 독자에게 전달한다.

 

작가가 밝혔듯이 칸 유니스 사건의 중요성은 그동안 유대인과 팔레스타인 사람들간의 분쟁이 수에즈전쟁을 계기로 이스라엘 정부군이 직접 개입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가자 지구를 점령한 이스라엘 군인들이 페다이 게릴라를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저항하지 않는 비무장 팔레스타인 성인남자들을 무차별학살했다는 것이 칸 유니스 사건의 핵심이다. 그 이면에는 당시 아랍세계의 맹주로 자처하던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과 2차 중동전쟁(수에즈전쟁)의 기원이 자리한다. 북아프리카와 시리아까지 아우르는 아랍제국을 표방했던 나세르가 정력적으로 추진하던 아스완 댐 건설을 지원하기로 했던 미국, 영국, 프랑스가 나세르 정권이 무기금수조치에 대항해서 체코와 소련에서 전투기를 비롯한 각종 전쟁물자를 수입하기로 결정하자, 이에 앙심을 품고 지원을 철회하기에 이르렀다. 상황이 더 복잡해진 것은 나세르가 영국이 그동안 지배권을 행사해오던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하고, 알제리 전쟁에서 알제리 반군을 지원하자 본때를 보여주기로 결심한 영국과 프랑스는 이스라엘과 비밀협상을 벌여 수에즈 운하를 포함한 시나이 반도 전체를 점령한다.

 

이런 국제 정세 가운데, 나세르의 관심은 가자 지구에 사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운명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서방 세계는 물론이고, 같은 아랍권의 맹주라고 볼 수 있는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조차 신생국 이스라엘의 압도적인 무력 앞에 조상 대대로 살아오던 거주지에서 쫓겨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동정하지 않았다. 게다가 불법적인 유대인 정착촌 건설로 조성된 민족 간의 긴장을 아예 해소하기로 결정한 이스라엘 군부를 대표하는 모셰 다얀 참모총장과 벤구리언 전 총리 같은 강경파들은 이참에 가자 지구를 무력으로 정복하는 계획을 실행에 옮긴다. 조 사코가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 비망록>의 전반부에서 다룬 칸 유니스 사건의 배후에는 이런 복잡한 역사적 배경이 자리잡고 있었다.

 

행간마다 조 사코는 불도저를 앞세운 이스라엘 정부의 강제철거를 비롯해서, 이스라엘이 세운 분리장벽과 점점 수를 늘려가는 정착촌 유대인의 테러 위협에 노출된 팔레스타인 현지인들의 참상을 자신의 만화를 통해 증거한다. 최소한의 거주에 필요한 집을 잃어버린 아이들의 트라우마를 토끼처럼 아이들을 많이 낳아서 싸우겠다는 어느 팔레스타인 엄마의 절규를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내기도 한다. 이슬람 율법에 따르면, 어린이와 여자 그리고 노인을 해치면 안된다고 하는데 그런 사실 따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군인이라며 공격해대는 팔레스타인 무장단체의 주장이 과연 합리적인가 하는 의문도 들었다. 얼마 전 읽은 허핑턴포스트에 실린 아랍 청년의 하마스의 자살폭탄 공격과 인간방패 전략에 대한 비판도 일견 이해가 갔다.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실질적인 지지를 받는 하마스를 서방과 이스라엘에서는 테러집단으로 규정하고 대화 상대로조차 인정하지 않지만, 교육과 의료를 통해 지지를 획득하고 선거를 통해 선출된 그들을 부정할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 또한 아이러니다. 이런 정치적 상황이야말로 꼬일 대로 꼬여서, 가자지구를 포함한 모든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두 민족의 공존이 현실적으로 가능한지 계속해서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조 사커는 책의 두 번째 이야기인 라파 사건에 대해 좀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여전히 그와 동료 아베드는 여전히 1956년 11월 12일 가자기구 라파에서 이스라엘군에 의해 행해진 폭력행위와 무차별적인 학살 사건의 진상을 캐기 위해 증언할 사람들을 수소문한다. 저널리스트답게 저자는 증언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크로스체크를 통해 몇 번이고 재확인하는 과정을 거친다. 물론 그런다고 해서, 근 50년 전에 일어난 일에 대한 정확한 진상을 파악하기란 난망하기만 하다. 게다가 사건의 핵심인 이스라엘 정부는 UN에 의해 드러난 라파 사건을 왜곡 축소하는데 여념이 없다. 그러니 저자가 책의 중간에 기술한 대로, 사실이 조금 옆으로 샜다면 사과하겠노라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나치 독일의 끔찍한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유대민족이 다른 민족(팔레스타인 사람)에게 그들이 체험한 것 이상의 극단적 폭력을 행사하는 조 사커의 묘사를 받아 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피해자의 뇌리에 각인된 충격과 공포 때문에 적대적 환경에 둘러쌓여 생존을 위한 투쟁이었다는 논리로는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다. 게다가 중무장한 이스라엘군의 상대는 저항을 포기한 비무장한 민간인들 아니었나. 민간인 사이에 잠입한 페다이 민병대와 이집트 패잔병을 체포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는 설명으로는 부족하다.

 

조 사커의 전작처럼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 비망록>에서도 어떤 특정한 결론에 도달하지 않는다. 독자는 저자가 인도하는 1956년 11월의 칸 유니스와 라파로 여행하고 스스로 판단을 내릴 뿐이다. 전작에서도 궁금했던 점이지만, 조 사커는 왜 오늘날의 비참한 팔레스타인 현실 대신 집요하게 1967년도 아닌 1956년에만 유독 관심을 보이는 걸까. 그의 주변에서 다른 이야기도 들어야 한다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주장이 내 귀에만 들리는 걸까. 사건의 원형 구성을 위해서라면,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직후 발생한 1차 중동전쟁에서부터 시작하는 게 보다 정확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스라엘 측의 끝없는 가옥 파괴에 맞서 자신의 모든 것들을 잃으면서도 조상 전래의 땅에서 떠나지 않고 모든 것은 신의 뜻이라며 끝까지 맞서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모습이 기묘하게도 신의 뜻에 따라 약속의 땅에 마침내 거주하게 된 유대민족의 그것과 겹쳐 보이기 시작했다. 매일 같이 이스라엘측의 공격으로 수많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죽어 나가지만, 2003년 국제연대운동 회원으로 이스라엘의 불법 가옥파괴에 맞서 싸우다가 죽은 미국 출신 레이철 코리의 죽음만큼 국제적 관심을 끌지 못한다는 조 사커의 지적도 눈여겨 볼만하다. 그들이 악이 축이라고 믿는 미국, 영국 그리고 이스라엘에 맞서 싸운 이웃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영웅시 되는 장면도 못내 충격이었다. 그동안 우리는 후세인이야말로 중동 평화를 위협하는 악당으로 알아오지 않았던가.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 모르는 중동평화를 위한 로드맵이 무슨 이유 때문에 어려운지 조 사커의 만화를 통해 다시 한 번 깨닫게 됐다.

 

[리딩데이트] 2014년 10월 15일 수요일 오후 1시 1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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