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그동안 김영하라는 이름은 수도 없이 들어왔지만, 그의 책은 소설집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를 통해 처음으로 만나게 됐다. 가히 엄청난 속도로 완독했는데, 작가의 책을 읽으면서 나의 머릿속에 떠오른 두 단어는 “몰입”과 “스피드”였다.

 

모두 12개가 담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는 마치 어린아이가 살바도르 달리가 디자인했다는 멋진 포장지에 싸인 추파춥스 막대사탕 같은 맛이 배어 있다. 한 이야기를 읽고 나면, 또 다음에 나올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라는 기대감이 솔솔 번져 온다. 그러니 그의 글에 몰입하지 않을 재간이 없다. 전철 안에서 책장을 넘기는 손길이 분주해진다.

 

언제나 그렇지만 단편보다는 긴 호흡의 장편을 더 좋아하지만, 김영하 작가 소설집에 오롯하게 담긴 서사의 마력(魔力)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자신을 보고 깜짝 놀란다. 사실 단편은 무엇보다 첫 번째 페이지가 중요하다. 충분히 시간을 두고 어느 특정 캐릭터에 대한 묘사로 승부를 걸 수 있는 장편에 비해, 정말 단기간에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해야 하기 때문이라고나 할까. 그런 차원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에서 작가는 연전연승이다.

 

<로봇>과 <여행>에서는 비틀린 남녀 간의 관계를 축으로 서사가 진행된다. 타클라마칸 사막을 꿈꾸며 개미지옥 같은 도시의 수렁에 빠진 여자 김수경과 생면부지의 남자 이문상이 만나 사랑하게 되는 과정이 소개된다. 뜬금없이 아시모프 박사의 로봇 3원칙에 대해 이야기하는 남자, 관계의 향방은 온전하게 여자에게 달렸다. 더 나갈 것인지, 아니면 그곳에서 멈출 것인지. 느닷없는 남자의 고백과 갑작스러운 사랑의 엔딩. 한편, <여행>에서는 좀 더 노골적이다. 예전에 끝낸 사랑을 볼모로 잡고 차를 달려 동쪽 바다로 향하는 한선. 그들의 관계는 결혼을 앞둔 수진이 백화점에 사왔지만 깨져 버린 로열달튼 그릇으로 형상화된다. 예정에 파국과 폭력의 시간이 흐르고, 수진은 쿨하게 택시를 잡아타고 원상복귀한다.

 

마크트플라츠라는 이질감이 느껴지는 공간의 남녀는 해마다 만난다. 허무의 정점으로 치닫는 그들의 관계의 끝은 어디일까. 누가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관심이나 둘까. <밀회>는 반복되는 이별과 재회이라는 행위에 중점을 둔다. 김영하 씨의 단편선의 타이틀로 뽑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라는 문구가 책 표지의 점멸하는 자동차 헤드라이트 이미지와 겹쳐진다.

 

욕망이 들끓는 서울공화국의 복판에서 국어국문학을 공부하겠다는 당찬 도전정신으로 무장한 이방인 마코토의 이야기는 유머와 즐거움이 잘 배어 있다.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하는 여대생의 페르소나를 작가는 능청스럽게 잘도 뽑아낸다. 주인공의 마코토에 대한 사랑의 돌격은 번번이 현주라는 바리케이드에 걸려 넘어진다. 그리고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난 다음에 다시 만난 마코토에게 열렬한 키스를 퍼부으며, 오랜 짝사랑의 종지부를 찍는다. 어쩌면 이렇게 여성의 감정을 잘 파고드는지, 역시 작가는 타고난 구라꾼이지 싶다.

 

IMF에게 나라의 살림을 모두 뺏긴 채, 미츠라는 낱개포장 아이스크림 먹는 낙에 사는 젊은 부부의 궁핍과 빡빡한 인생살이를 희화화한 <아이스크림>, 소비욕망이 소용돌이치는 백화점이라는 공간을 무대로 한 “조”라는 사나이의 몰락을 그린 <조> 그리고 영상시대의 경쟁과 과거에 끔찍한 트라우마가 있는 주인공의 인스턴트 사랑을 버무린 <퀴즈쇼>에 이르기까지 작가가 문자로 형상화시키는 소재는 그야말로 무궁무진하다.

 

이 소설집에는 작가가 기존에 발표한 작품과 미발표작이 뒤섞여 있다고 한다. 하지만, 조금은 불친절하게도 그런 설명이 빠져 있어서 분간할 방법이 없는 점이 좀 아쉬웠다. 조금만 친절하게 언제 어디에 발표된 작품이라는 설명이 덧붙여져 있다면 좀 더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이미 책이 다 나온 다음의 사족일 따름이다.

 

작가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에서 다양한 감정의 칵테일을 선보인다. 불완전한 존재인 인간은 결국, 감정적으로 타인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방증일까.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면서 옛 애인을 데리고 바닷가로 무작정 향하는 남자, 자신이 가진 권력을 이용해서 사적 이익을 취하다가 결국 나락으로 떨어져 버리는 주인공, 꼭꼭 숨겨둔 자신의 감정을 아주 오랜 시간과 라이벌이 마침내 사라져 버린 후에 비로소 폭발시키는 여자에 이르기까지 김영하 씨의 소설을 통해 참 다양한 인간 군상과 만날 수가 있었다. 어떨 때는 동지애적 감정을 느끼기도 하다가, 불쾌한 이물감에 고개를 내젓기도 한다. 이렇게 호오(好惡)를 오가는 양가적 감정의 연장선상에서 그의 소설에 푹 빠질 수가 있었다.

 

난 왠지 이 작가가 좋아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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