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 - 천연균과 마르크스에서 찾은 진정한 삶의 가치와 노동의 의미
와타나베 이타루 지음, 정문주 옮김 / 더숲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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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빵을 좋아한다. 언젠가부터 아침에는 빵을 먹는다. 오늘 아침에도 우유 두 잔과 슈크림 크루아상 두 개를 먹었다. 그런데 다른 거에는 관심이 많으면서도 정작 내 입으로 들어가는 먹거리들이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져서 내 살이 되고 피가 되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그저 싼 값이면 족하다는 식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많은 이들이 올해의 책으로 꼽기에 주저하지 않은 일본 시골빵집 주인장 와타나베 이타루 씨가 쓴 <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를 읽으면서 삶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먹거리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됐다.

 

누구나 알다시피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의 특징 중의 하나는 바로 대량생산 대량소비다. 불특정 다수를 겨냥해서 대량생산된 제품들(먹거리를 포함한)은 단가 후려치기와 노동력 착취를 통한 교환 가치 하락에 방점을 두고 있다. 오, 시작부터 너무 마르크스주의적이 아니냐고? 솔직히 말해 거두절미하고 본론에 들어가자는 것이 나의 속셈이다. 서른이 너머 빵집을 차릴 생각을 하고, 동일본 대지진을 피해 안착한 가쓰야마라는 시골 마을에서 다른 곳보다 서너배는 비싼 빵을 만들어 팔면서 빵집 <다루마리>의 주인 와타나베 씨는 생산수단을 보유한 자본가의 지배로부터 실제적인 독립을 추구하는 방식으로 온 세계를 휩쓸고 있는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본격적인 저항을 시작한다.

 

똑같은 맛의 빵을 실패하지 않도 대량으로 생산하기 위해서는 전형적인 자본주의 시스템이 작동한다. 어마어마한 들판에서 기계화된 농법으로 재배된 밀을 대량으로 수입해서, 바로 바닷가에 자리 잡은 대기업화된 제분공장에서 빻은 밀가루를 원료로 해서 순수 배양균이라는 효모를 이용해서 만들어낸 빵이 우리가 쉽게 접하는 빵이다. 이 과정에서 소비자의 선택은 철저하게 무시되고, 그런 대기업화된 빵집이 만든 빵을 살 것이냐 아니냐로 선택지는 좁혀진다. 조금은 허랑방탕한 젊은 시절을 보낸 작가는 전쟁에서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대를 이어 의시가 되보려는 꿈을 꾸기도 하지만, 그놈의 형편없는 시험성적 때문에 농대를 선택하게 되고 시골이야말로 자신의 꿈을 키울 수 있는 장소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마르크스를 읽어 보라는 아버지의 조언도 한몫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빵집 <다루마리>는 자본의 총아인 이윤추구를 극도로 혐오한다. 부패하지 않는 돈의 경제야말로 자본주의 모순의 핵심이라는 점을 작가는 적확하게 파악했다. 기계화된 설비로 대량생산된 제품의 교환가치 하락은 필연적으로 노동의 교환가치 하락을 불러온다는 자본주의 철칙마저 간파한 그는 밀가루 반죽을 부패시키는 천연균처럼 돈도 한편으로는 부패도 하고 선순환의 과정을 통해야만 비로소 경제의 활력소가 된다는 점을 주장한다. 글로는 그런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자신이 직접 체험한 과정을 소개하고, 또 매 장의 서두에서는 <다루마리>의 주력 상품인 주종 빵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를 그림을 통해 상세하게 설명해준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소비자협동조합 운동이 늘고 있다고 하는데, 와타나베 씨는 지역경제를 살리는 그런 소상인 협동조합 운동이야말로 자신이 믿고 실천하고 있는 삶의 방식과 맞아 떨어진다고 생각한다. <다루마리>에서는 인공적으로 생산된 순수 배양균을 지양하면서, 100년된 고택에 사는 천연균의 힘을 빌어 빵을 발효시키고, 사용하기에는 편리한 플라스틱 용기 대신 인근의 죽세공 장인이 만든 대나무 소쿠리를 사용하며, 맛 좋은 가쓰야마 인근의 물로 빵반죽을 만들며, 역시 자연재배 방식으로 수확한 밀을 사용한다. 그리고 노동을 착취해서 빵을 대량생산 하는 대신 같이 일하는 스태프들에게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부여해서 창조적인 빵만들기를 장려하고 있다. 창조를 닦달해대는 환경이 아닌 충분히 휴식한 호모 루덴스적인 인간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창조를 이룰 수 있다는 점을 와타나베 씨는 깨달은 것이다.

 

와타나베 씨의 생각에 많은 부분을 공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회의적인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런 작은 활동이 과연 날로 거세지는 자본주의 이윤추구라는 거대한 물결을 막아낼 수 있을까 하고 말이다. 그리고 누구나 글쓴이처럼 일상에서 벗어나 자신이 하고 싶은 꿈을 추구할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래서 와타나베 씨는 정치를 바꾸는 방식이 투표라면, 경제를 바꾸는 방식은 돈 쓰는 방식이라고 선언한다. 책을 통해 배운 사고의 전환이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나의 책읽기 체험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와타나베 씨가 이 책을 통해 주장한 아름다운 부패와 순환의 알레고리를 당장 오늘부터라도 나의 실천적 삶에 적용시키는 문제를 고민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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