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식스 카운티 미메시스 그래픽노블
제프 르미어 글 그림, 박중서 옮김 / 미메시스 / 2011년 1월
평점 :
절판


 

 

어느 신문 기사의 추천을 보고 지난 주에 읽게 됐다. 그런데 책의 실물을 보고서는 깜짝 놀랐다. 그냥 그런 그래픽 노블이라고 생각했는데, 보너스 자료까지 해서 자그마치 500쪽이 넘는 분량의 대작이었다. <농장 이야기>, <유령 이야기> 그리고 <시골 간호사>라는 기본 세 가지 스토리라인에 그래픽 노블의 번외편에 해당하는 두 가지 이야기를 더해 모두 5개의 이야기로 구성이 되어 있는데, 이건 마치 대하소설을 보는 듯한 그런 느낌이 들었다. 게다가 등장인물들이 모두 과거와 현재를 매개로 해서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더더욱 그렇게 느껴졌다.

 

등장인물 간의 관계가 나처럼 좀 복잡하게 느껴진다면 먼저 책의 447페이지에 나온 가계도를 참조하면 좋을 것 같다. 물론 제프 르미어 작가의 의도대로 순서대로 읽으면서 등장인물을 만나 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다. 그래픽 노블은 어머니 클레어가 죽은 뒤, 켄 삼촌의 농장에 얹혀사는 레스터 파피노의 상상으로 시작된다. 문득 왜 <에식스 카운티>에 나오는 이들은 하나 같이 상처 입은 영혼들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먼저 레스터는 병상의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남긴 ‘우리 영웅’이라는 말에 슈퍼히어로 코스튬을 포기하지 못한다. 죽어가는 누이동생이 유언으로 부탁한 레스터를 돌봐 달라는 말을 거절하지 못한 삼촌 케니 역시 마찬가지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기를 달리고 있는 레스터를 다룰 줄 몰라 쩔쩔 매는 중년 남자의 고민이 그대로 묻어 있다.

 

그리고 한 세대를 뛰어 넘어 <유령 이야기>에서 비로소 그들 삶의 비밀이 조근조근하게 소개된다. 아이스하키에 미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아이스하키에 대한 캐나다 사람들의 사랑이 바로 루와 빈스 르뵈프 형제 간의 이야기에서 재현(representation)된다. 후기에서 제프 르미어 작가가 썼듯이 형제애, 배신 그리고 아이스하키가 루의 회상으로 시작되는 두 번째 에피소드를 관통하는 소재다. 한 때 도시에서 날리던 아이스하키 선수였던 루와 빈스 형제의 부침을 제프 르미어는 잔잔하게 그려냈다. 그들은 한때 죽고 못 살 정도로 우애가 깊은 형제였지만 루가 저지른 단 한 번의 실수 때문에 형제간에 의절하고 사반세기를 떨어져 지냈게 되었다. 촉망 받는 아이스하키 선수였던 빈스는 고향 에식스 카운티로 내려가 농사를 짓고, 루는 부상으로 아이스하키에서 은퇴하고 전차 기사로 살아왔다. 다시 그들을 하나로 묶어준 것은 끔찍한 교통사고였다(삶의 반전을 가능하게 만든 결정적 사건을 교통사고라는 클리셰이로 처리한 것이 좀 아쉬웠다). 교통사고로 간신히 목숨을 건진 동생 빈스와 조카 손주 지미를 돌보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온 루. 르뵈프 형제들의 이야기를 보면서 어떤 의미에서 가족은 세상의 풍파를 헤쳐가게 만들어주는 울타리이기도 하지만, 그렇게 애증이 교차하는 갈등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 에피소드인 <시골 간호사>에서는 독자는 몰랐지만, <에식스 카운티>의 병들었거나 죽어가는 사람의 곁을 지킨 시골 간호사 앤 번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간호사 앤은 루 르뵈프를 돌보고 있으며, 그의 조카 손주 지미 르뵈프를 알고 있으며, 레스터의 어머니 클레어를 간호하기도 했었다. 어머니를 잃고 방황하는 레스터를 위로하는 장면도 나온다. 그렇게 이타적인 삶을 사는 그녀이지만, 남편 더글라스 켄빌을 잃고 하나 있는 아들 제이슨과도 소원하다. 그녀를 지탱해주는 건 할머니 마거릿 앤 수녀가 전해준 신앙심 정도가 아닐까. 그녀가 에식스 카운티에서 최고령자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자신의 할머니를 찾아가 나누는 대화에서 다시 두 세대를 점프해서 이야기의 시원으로 독자를 안내한다. 이 정도로 시공을 초월한 정밀한 이야기 서사 구조와 탄탄한 스토리라인을 가공해낸 제프 르미어 작가의 내공에 다시 한 번 박수를 보내고 싶다.

 

정밀하다기 보다 조금은 거친 톤의 제프 르미어 작가의 그림과 서사에는 울림이 배어 있다. 삶의 상처를 보듬고 살아가야 하는 보통의 삶 속에도 그렇게 깊은 비밀이 자리 잡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긴 여정 끝에 만나게 되는 깨달음의 순간이 너무 인상적이었다. 내 삶에서 어느 순간 놓쳐 버린 시간과 다시 재회하는 그런 느낌이라고나 할까. 언제나 그렇듯 피상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와의 대면은 고통스럽기 마련이다. 오랜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사랑으로도 덮을 수 없는 그런 이야기들이 있기 마련이다. 바로 그런 우리네 삶이 품은 내면의 이야기를 제프 르미어 작가는 <에식스 카운티>의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처음에 등장하는 <농장 이야기>에서 하늘을 나는 레스터의 모습을 보고 흔해 빠진 슈퍼히어로가 등장하는 전형적인 마벨 코믹 스토리가 아닌가 하는 나의 우려는 서사에 얽힌 주인공들이 차례로 나오면서 저절로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검은색과 흰색의 여백으로 이루어진 공간에 제프 르미어 작가가 야심차게 준비한 밀도 높은 서사로 이루어진 에피소드들이 차례로 채워지면서 <에식스 카운티>는 비상하기 시작한다. 우리가 알지 못했던 삶의 진실들과 마주하게 됐을 때, 과연 우리는 그 사실을 선뜻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던가. 역시 고수 답게 작가는 사전에 그런 떡밥들을 모처에 조심스럽게 심어 두었다. 그리고 수확기에 농부가 그동안 정성 들여 키운 작물을 거둬들이듯, 작가는 아름답게 영근 이야기들로 대미를 장식한다.

 

<에식스 카운티>가 보여주듯, 우리네 삶은 마치 비포장도로를 운전하는 느낌일지도 모르겠다. 울퉁불퉁한 그런 길을 가듯, 살다 보면 우리네 삶에는 예상치 못했던 상처도 있을 수 있고 배신과 모략을 비롯해서 상상할 수 없는 그 모든 것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오기 마련이다. 생전 아이라고는 보지도 못한 중년의 남자가 한창 감수성 예민한 십대 소년을 두고 어쩔 줄 몰라 하듯이 말이다. 바로 그런 순간에 짜증을 낼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그런 일탈과 예상하지 못한 삶의 변수야말로 도무지 알 수 없었던 삶의 진실에 도달했을 때 비로소 느끼게 되는 재미일지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랑이었던 모든 것
알베르트 에스피노사 지음, 변선희 옮김 / 박하 / 2015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신경숙 작가의 표절문제로 문학판이 어수선하다. 답답한 심정에 블로그에 글을 쓰고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타고난 게으름 탓에 미루다가 결국 쓰지 못했다. 나 같은 보통의 독자가 할 수 있는 선택은 역시나 독서였다. 스페인 바르셀로나 출신이라는 알베르트 에스피노사 작가의 짧은 소설 <사랑이었던 모든 것>은 순전히 제목 때문에 읽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목에서 들어나는 사랑은 과거 시제이어야만 하나, 하는 생각이 이 책을 집어 들게 만들었다.

 

소설의 내용은 비교적 간단하다. 이제 막 13년을 만난 여자 친구와 극적인 이별을 앞두고 있는 우리의 주인공(아마도 40) 다니는 이제 막 자신이 아니면 안되는, 자신이 꼭 해야만 하는 일이 생겼다. 그래도 그 일보다 여자 친구와의 관계 개선이 우선이 아닐까 하는 독자의 노파심은 다니의 과거를 들여다 보며, 자연스레 관심사에세 멀어진다. 왜소증을 앓는 주인공의 핸디캡은 불의의 사고로 돌아가신 다니의 어머니가 그를 작은 거인이라고 의식적으로 불렀지만, 세상은 그의 외모를 결코 용서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자신을 돌볼 생각이 전혀 없던 형 때문에 가출을 결심하는 열세 살의 다니. , 그전에 더 극적인 만남이 하나 더 있었구나.

 

열 살 때 편도선 수술로 병원에 입원해 있던 다니는 향후 자신의 운명을 좌우하게 될 마르틴과의 숙명적 만남을 갖는다. 그리고 그가 남긴 유산을 가지고 3년 뒤, 카프리 섬으로 가는 페리에서 이번에는 조지라는 자신보다 딱 반세기를 더 산 남자와 만나게 된다. 그렇게 자신의 운명에서 진주 같은 아니 다이아몬드 같은 사람들과 인연을 맺은 소년이 자라 실종된 아이들을 찾는 일을 하는 전문가가 되었다. 과연 삶에서 다이아몬드 같은 보석보다 더 중요한 게 바로 그런 만남과 인연이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마르틴과의 첫 만남으로부터 수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자신이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다니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우리는 과연 무슨 생각을 가지고 사는지, 나의 행복의 현재 좌표에 어디에 있는지 생각해 보게 됐다. 다니가 마주한 연인과의 이별 문제 그리고 당장 자신에게 맡겨진 실종된 아이를 찾아야 하는 긴박감 속에서 과거와 현재는 교차되며 독자를 사유의 미로 속으로 인도한다.

 

다니에게 왜 사랑은 모두 현재가 아닌 과거의 일로 간주되는 걸까 하는 생각 때문에 책을 읽는 동안 내내 궁금했다. 오래 전에 어른이 되었지만, 박탈당한 유년 시절의 추억 때문에 그런 게 아닐까. 하고 싶었던 일도 많고, 가보고 싶은 곳도 많았고, 먹고 싶었던 것도 많았던 그 시절을 가능하게 해줄 수 있는 부모님이라는 존재의 부재 탓은 아니었을까. 그래 사랑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은 일들이 있을 수 있겠지. 그렇다고 해서 불혹의 나이에 접어든 다니에게 얼치기 심리 분석을 시도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그의 삶 속에 영향을 미친 이유들에 대해 알고 싶은 마음이라고나 할까. 타인의 삶에 견주어 나의 그것을 반추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어느 정도 없었다고 한다면 거짓이겠지.

 

십 수 년 전에 들렀던 카프리 여행에서 고생도 단단히 했지만, 소설을 읽으면서 나도 카프리 섬에 갔었지 하며 미소를 지었었다. 이 소설의 주인공 다니처럼 기승전결로 이어지는 촘촘하고 환상적인 이야기는 없었지만, 여전히 그 때 시간이 너무 없어서 사지 못한 수제 샌들에 대한 아쉬운 마음을 곱씹어 봤다. 그 때 만약에 그 수제 샌들을 샀다면 아직까지도 가지고 있으려나. 소설처럼 세상만사가 해피엔딩으로 끝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상념이 꼬리를 물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느 물푸레나무의 기억 북멘토 그래픽노블 톡 2
박건웅 지음, 최용탁 원작 / 북멘토(도서출판) / 2015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리딩데이트] 2015년 6월 2일 오후 1시 32분

 

우리에게는 만화로 알려진 그래픽노블의 리얼리티를 믿는가? 그렇다면 당장 박건웅 작가의 <어느 물푸레나무의 기억>을 봐야할 것이다. 북멘토 출판사에서 시리즈로 발표 중인 역사물 2탄인 이 작품은 대한민국 역사에서 지울 수 없는 ‘국민보도연맹’ 사건을 그 중심에 두고 있다. 인류 역사에서 좋은 전쟁이 있었나 묻고 싶다. 충청도 어느 시골 마을에서 벌어진 비극을 보면서 왜 우리에게 어떤 방식의 전쟁도 필요하지 않고, 오로지 평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됐다.

 

<어느 물푸레나무의 기억>은 어느 형제가 사이좋게 산으로 나무를 하러 와서 나누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시골에서 농사짓는 형은 이제 막 사내아이를 얻은 형편이고, 도회로 나간 동생은 대학에 다니고 있다. 대학에 간 동생이야말로 집안의 기둥이라고 말하는 형과 장손이라며 형님을 깍뜻하게 대하는 동생의 우애가 정겹기만 하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모두 곧 이어질 비극의 전초전일 따름이다. 그래픽노블의 전개는 바로 제목에서 말하는 반세기도 더 넘게 산을 지켜온 물푸레나무의 재미난 ‘구경거리’에 대한 이야기로 옮겨간다.

 

무더운 여름으로 접어드는 7월 초순의 어느 날 저녁, 이백 여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경찰들의 오라에 묶여 줄줄이 골짜기로 접어드는 것이 아닌가. 산속에서만 있어온 어린 물푸레나무에게는 진기한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그들은 모두 남자들로, 손은 철사로 포박이 되어 있었다. 그렇게 한 무더기가 된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자신들에게 닥쳐올 운명을 깨닫고, 손에 총과 탄창을 든 경찰들에게 이승만 대통령 만세,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제복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마냥 평범해 보이는 농투성이 모습의 아저씨들을 계곡으로 몰아넣었다.

 

그리고 창주경찰서의 국민의 안녕과 치안을 책임진 책임자가 나서서 일장연설을 하며, 여기 모인 3개면의 보도연맹원들에게 그들만 죽는 것이 아니니 억울해 할 것 없다는 말과 함께 일제사격 명령을 내린다. 그 다음은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그런 살육의 현장이었다. 그렇게 확인사살까지 마치 경차들이 물러가자, 산속의 온갖 집파리, 쇠파리, 똥파리, 종벌레, 총채벌레 같은 생령들이 벌이는 포만의 축제가 벌어졌다고 어린 물푸레나무는 증언한다. 그 뒤로는 몇 차례나 같은 일들이 반복되었고, 600여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골짜기에서 죽어갔다. 시쳇말로 ‘골로 간다’는 표현이 있는데, 어디선가 이 시절의 사건에서 비롯된 거라는 말을 들은 기억이 난다.

 

비극의 마무리는 생떼 같은 아들을 잃은 노파가 며느리와 이제 막 태어난 손자를 데리고 자신의 아들을 시체 더미에서 찾기 위해 나선 장면이다. 그야말로 생지옥에서 오로지 억울하게 죽은 자식을 찾기 위해 염천 가운데 부패하가는 시취도 마다하지 않고 사투를 벌이는 장면은 정말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

 

훗날 미국의 기밀문서 해제로 세상에 공식적으로 알려지게 된 한국전쟁 당시 국군과 경찰에 의해 자행된 보도연맹원 학살 사건은 공산군에게 패퇴하기 직전, 공산군에게 협력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양민들을 무차별적으로 죽인 사건이다. 물론 죽은 사람 가운데는 좌익사상을 가지고 공산군에게 협력할 가능성을 가진 이들도 있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좌익이 무언지도 모르는 무고한 농투성이들이었노라고 어린 물푸레나무는 증언하고 있다. 작가가 구현한 판화 스타일의 그림체는 색채를 입힌 것보다 더 비극적으로 사실에 접근을 시도한다. 과연 컬러였다면 그 충격을 감당할 수 있었을까.

 

한국전쟁이 시작된 지 반세기도 넘어 65년이 된 지금도 여전히 우리의 산하는 물푸레나무가 그랬던 것처럼 허리가 동강나 있는 상태다. 여전히 준전시상태에서 우리는 하루를 살고 있다. 그래픽노블로 재현된 비극을 읽으면서 어떠한 형태의 전쟁도 있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마일 5Mile Vol 1. - 창간호, Made in Seoul
오마일(5mile) 편집부 엮음 / 오마일(5mile) / 2015년 4월
평점 :
품절


하나의 테마, 여행 그리고 음식이라는 주제와 앤디 워홀의 마릴린 먼로 사진을 전면에 배치한 <5 Mile>의 창간호와 만날 수가 있었다. 그의 너무나 유명한 캠벨 수프 작품만 있다는 게 아니라는 것도 이 매거진을 통해 처음 알게 됐다. 마릴린 먼로 작품은 1967년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런데 마릴린 먼로가 죽은 게 언제지?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1962년이라는데, 한 시대를 풍미한 대스타가 죽고 나서 5년이나 지난 뒤에 팝아티스트 앤디 워홀은 무슨 생각을 가지고 그녀의 이미지에 그렇게 변형을 준 걸까. 궁금하기만 하다. 그리고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은 또 어떻고. 어쩌면 이 시대의 모든 변형은 피카소와 앤디 워홀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상상도 들었다.

그 다음 이야기 <당신이 몰랐던 서울>에서는 내가 아는 익숙한 모습의 서울이 등장하기도 하고, 또 제목 그대로 전혀 몰랐던 모습의 서울에서 거리감을 느끼기도 했다. 문득 사진가들에게 서울의 하루라는 제목으로 특정한 하루를 정해서 우리가 몰랐던 이모저모를 담는 기획도 재밌지 않을까 싶다. 위치를 알 수 없는 골목길, 도회의 노인이 사라져 가는 모습, 번화가의 모습들 그리고 상업화의 상징처럼 내겐 다가온 쌈지길의 모습들이 오늘의 서울이구나 싶었다.

책쟁이인 나의 시선을 가장 사로잡은 기사는 바로 <Hidden book stores: 숨겨진 동네 서점여행>이었다. 물론 초반에 나온 10가지 질문은 가볍게 패스 했으니, 당근 이 여행에 동참하고 싶다. 오늘 오후에도 중고서점에 들러 꼭 필요한 책이 아니더라도 무언가 사야 하지 않나 하는 강박에 시달리지 않았던가. 사실 김영하 작가의 추천 책인 오에 겐자부로의 <만엔원년의 풋볼>을 사려고 했지만. 모두 세 곳이 소개되었는데 제목부터 범상치 않다. <스토리지 북 앤 필름>, <일단멈춤> 그리고 마포 상수동 부근의 <베로니카 이펙트>가 그 주인공들이다. 요즘 아마추어 사진가들에게 뜨는 장소라는 염리동 소금길에 있다는 <일단멈춤>에도 한 번 가보고 싶고(요즘처럼 바빠서는 내년에나 가볼 수 있을까 싶다), 파올로 코엘료의 책 제목을 떠올리게 하는 <베로니카 이펙트>에도 들러 보고 싶다. 짧은 인터뷰로만도 이 서점들이 내가 주로 찾는 그런 일반 서점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 주고 있었다. 그냥 책은 사지 않고 들러서 사진만 찍어도 될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업주 입장에서는 아마 귀찮은 헛손님이겠지만. , <베로니카 이펙트> 내부의 조명 배치는 진짜 멋져 보인다.

리넨이나 천 같은 직물에 직접 그린 무늬를 프린트한다는 장인, 마이스터징거라고 불러야 하나,의 이야기에도 호기심이 생긴다. 얼굴을 공개하고 싶지 않은지, 묘하게 가린 주인공의 한땀한땀 어린 작업 순서도가 인상적이다. 진짜 천연의 풀이나 나뭇잎들을 재료로 사용하는 점이 신기하기만 하다. 어린 시절, 나뭇잎으로 종이에 물감을 묻혀 찍던 시절의 그 재미지던 시간들 말이다. 서울의 소소한 100가지 오브제 역시 주르르 넘기다 보면, 어떤 것들은 사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불쑥 든다. 물론 딱히 필요는 없지만, 한가로운 여행길에서 만난 소품들이 그렇듯이 말이다. 내가 베를린의 벼룩시장에서 7유로 주고 산 솝스톤(soap stone)으로 만든 오렌지 컬러 하마가 아버지의 문진으로 쓰일 줄 누가 알았겠는가 말이다. 어떤 물건이든 다 쓸모가 있는 법이다.

여행과 푸드를 주제로 삼은 만큼 요리 이야기도 빠지지 않는다. 다만 난 만드는 것보다 먹는 것을 더 좋아하니 사진만으로는 당최 판단이 서지 않는다. 사실 사진만 보면 다 맛있어 보이지 않는가 말이다. 역시 맛을 봐야 하는데, 그럴려면 시간과 노력 그리고 돈이 필요하다. 그러니 매거진에 실린 사진만으로 나의 흔들리는 식욕을 달래려면 상당한 내공이 소용될 것이다. 마지막의 바르셀로나 컷은 정말 당장에라도 모든 것을 접고 달려가고 싶은 충동일 생길 정도다. 몇 년 전에 여름휴가 때 바르셀로나에게 가볼까 하는 헛된 꿈에 젖어 직항편을 알아보다가 어마무시한 가격에 당장 포기했던 추억도 떠오른다. 그땐 그랬지.

뭐니뭐니 해도 이 책의 하이라이트는 <5 Mile>에서 창간호를 맞이하여 독자들에게 야심차게 준비한 감사의 선물이다. 말미에 실린 두 개의 선물이 기다리고 있는데 하나는 앤디 워홀 전시회 티켓과 5 Mile 네 잔의 레드비어다. 난 볼 것 없이 두 번째 선물을 택할 것이다. 그런데 부욱~ 하고 해당 페이지를 찢어 가면 되는 게 아니라 꼭 창간호 책을 통째로 들고 가야 한다고 한다. 그 정도 수고야 감당할 수 있지 뭐. 그런데 유효기간은 언제지? 난 과연 네 잔의 레드비어를 마실 수 있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족 - 개정판
이창래 지음, 정영문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제 이창래 작가의 책은 <척하는 삶>만 읽으면 완독이다. <네이티브 스피커>로 시작된 이창래 작가를 탐험하는 나의 독서 여정은 <생존자>(그의 작품 중에서 최고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최신작 <만조의 바다 위에서>를 거쳐 마침내 <가족>에 도달했다. 지금으로부터 딱 십년 전에 출간된 랜덤하우스 중앙 버전으로 구해서 읽었는데(절판됐다), 물론 작년에 재출간된 버전도 구입하긴 했다, 거진 읽는데 일년이 걸린 모양이다. 그 사이에 <척하는 삶>도 읽다가 말았는데, 이번 6월이 다 가기 전에 그 책도 마저 다 읽어야겠다.

 

<가족>의 주인공은 59세의 제리 배틀이다. 오십대의 마지막이자 이제 노년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시기에 접어드는 주인공의 주변은 온통 위기 투성이다. 사실 제리가 가진 재력이라면 풍족하지는 않더라도, 평안한 노년을 보낼 수 있을 텐데 언제나 그렇듯 타의에 의한 내 삶의 퍼레이드는 고단하기만 하다. 우선 양로원에서 지내는 85세의 아버지가 있다. 위기가 겹치는 상황에서 양로원에 거주하는 아버지마저 실종되다니, 설상가상이다. 하나 있는 딸 테레사는 비호지킨 림프종이라는 암에 걸렸는데, 임신한 상황에서 아기를 낳겠다고 고집한다. 유산하고 당장 암 치료에 나서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하는데도 말이다. 이십년을 함께 산 푸에르토리코 출신 여자친구 리타는 잘 나가는 변호사 리치와 눈이 맞아 제리의 곁을 떠나겠다고 선언한다. 가장 큰 문제는 삼대를 이어온 조경가업회사인 배틀 브라더스를 맡은 큰아들 잭의 파산이 눈앞에 다가왔다는 사실이다.

 

가장의 자리를 아들 잭에게 물려주고 은퇴를 선언했지만, 우리의 까칠한 남자 제리 배틀의 삶은 그렇게 고달프다. 그의 유일한 위안은 애기(愛機) 도니를 타고 하늘을 나는 것이다. 그렇게 지상에서 반 마일 정도 떨어진 창공에 있다 보면, 모든 것이 완벽해 보인단다. 남다른 취미생활인 그의 비행은 도저히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 현실로부터 도주하는 완벽한 방법이다. 그런데 얽히고설킨 그의 가족사의 내면에는 수영장에서 익사한 채로 발견된 한국계 부인 데이지의 존재가 자리하고 있다. 모두가 알고 있듯이, 미국이란 사회는 이민자의 나라가 아니던가. 제리 배틀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유달리 가족애를 자랑으로 하는 이탈리아계 미국인인 제롬 바타글리아(제리 배틀의 본명)는 배틀 브라더스라는 조경회사를 차려 근교 부자들의 조경에 대한 고상한 취미를 만끽시켜 주면서, 자신들도 성공한 아메리칸 드림의 대열에 합류했다.

 

게다가 한국계 아내인 데이지와 결혼하면서 다인종국가 미국의 본질에 다가선다. 완벽한 영어를 구사하는 자식들인 잭과 테레사는 각각 가업을 이어 받고, 이름난 학교를 졸업하고 문학평론을 하는 엘리트 계급으로 거듭나는데 성공한다. 그들의 성취가 모두 부모 세대의 자본 축적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띄었다. 어찌어찌해서 사업에 실패하고 재기를 위해서도 부모에 기대야 하는 상황은 우리가 어려서 줄기차게 들어온 자립적인 미국 청년들의 모습을 배반한다. 그들 역시 자립하기 위해 어느 정도는 부모의 조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이 새롭게 다가온다. 이민자 2세인 이창래 작가는 기존의 <네이티브 스피커><척하는 삶>에서 다뤘던 이민 1세대 이슈에서 벗어나 본격적인 오늘날 이민자의 나라에 대한 이야기에 천착한다. 그리고 아마도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아버지 세대와의 소통과 화해라는 주제를 부상시키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 주제를 다루는데 있어, 가족소설이라는 형식이야말로 금상첨화였다.

 

주인공 제리 배틀의 시선에서 기술된 <가족>에서 이창래 작가는 굳이 미국 가족이 아니더라도 보편적 가족들이 마주칠 수 있는 상황의 일반화를 통해 가족이라는 사회구성체에 현미경을 들이댄다. 제리 배틀은 아내 데이지의 죽음 이래, 핵심을 회피하는 전략으로 스스로 잭과 테레사로부터 멀어져왔다. 실질적인 새로운 아내라고 생각하는 리타와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다. 가장이자 아버지로서 자신의 역할을 제한하고, 그저 현상유지만을 목표로 하니 리타의 불만을 재울 수가 없는 것이다. 결국 암으로 죽어가는 딸 테레사는 아버지에게 랍스터가 먹고 싶다는 강력한 요청으로 비행을 함께 하면서, 파산한 아들 잭을 받아들일 것을 제안한다. 성경에 나오는 탕자처럼, 이미 돌아온 한 명의 탕자는 아버지에게 온전하게 투신해서 자신의 사후를 부탁하고 더 나아가 가업을 말아먹은 두 번째 탕자와 화해하라고 강권한다. 죽어가는 딸의 이런 부탁을 어떻게 거절할 수 있단 말인가. 모든 문제의 해결은 역시 끈끈한 가족애의 재구성이라는 전통적 방식으로 소설을 끝을 맺는다. 소설의 어디선가 나온 표현대로 우리가 원하든 그렇지 않든 계속해서 이어지는 삶이라는 퍼레이드야말로 이 소설에서 작가가 하고 싶었던 말이 아니었을까.

 

내가 체험한 이창래 작가 소설의 호흡은 길다. 노블도 아닌 노블라가 유행하는 시대에 꽤 두꺼운 분량의 책을 읽어내기란 솔직히 쉽지 않다. 책이 아니어도 우리의 눈과 귀를 유혹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하지만 묵직한 내용의 그가 저술한 소설을 읽다 보면, 어느 순간 그만이 가진 독창적 매력에 빠지게 될 것이다. 게다가 계속해서 진화하는 작가의 책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반가울 뿐이다. 솔직히 최신작 <만조의 바다 위에서>는 작가가 그동안 보여준 스타일과 너무 달라서 좀 당혹스럽기도 했지만, 또다른 신작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에 이번에는 또 어떤 도전을 보여줄지 기대가 된다. 완독의 만족스러움과 고단한 삶에 지친 나에게 작은 평안과 위로를 선사해주어 고맙다.

 

[리딩데이트] 2015531일 오후 95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