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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비안 마이어 : 나는 카메라다 ㅣ 비비안 마이어 시리즈
비비안 마이어 지음, 박여진 옮김 / 윌북 / 201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오래 전에 흑백사진 찍고 현상과 인화하는 법을 배웠다. 아주 오래 전부터 배우고 싶던 거라 그런지 그 과정이 너무 재밌었다. 그런데 그 시절은 이제 막 디지털 카메라가 도입되어 기존의 습식 현상기법과 이제 곧 세상을 바꿀 건식 현상기법의 대결이 막 시작된 터였다. 그리고 후자의 완벽한 승리로 귀결된 것이 오늘의 모습이다. 예전 사진 현상 인화의 단점 중의 하나는 많은 비용이 든다는 것이다. 사진의 기초 재료인 필름은 가격이 비쌌고, 암실을 갖추지 못했다면 현상과 인화는 하는 수 없이 DP점에 맡겨야 했다. 그러니 돈이 많을 들 수밖에. 암실이 있는 학교를 찾아다니며 눈칫밥을 먹어가며 어렵게 찍은 필름을 현상하던 시절이 비비안 마이어의 책을 보며 오롯하게 피어올랐다.
전혀 알지 못했던 미국 출신의 사진작가 비비안 마이어의 이름은 엉뚱하게도 영화를 통해 처음 알게 됐다. 우리나라에 아직 개봉은 하지 않았지만, 외신을 통해 무명의 사진가 비비안 마이어를 다룬 영화 <비비안 마이어를 찾아서>라는 다큐멘터리 영화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그 호기심은 이 책에까지 도달하게 됐다. 모름지기 시대는 앞서 나가는 존재를 알아주지 않는 법이다. 비비안 마이어는 생전에 보모로 일했으며 자신의 아티스트 삶에 대해서는 비밀에 부쳤다고 한다. 다른 무명의 아티스트들처럼 그녀 역시 사후에 이름을 날리게 되었으니 그 또한 기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비비안 마이어는 죽으면서 현상도 안한 어마어마한 양의 필름 네거티브를 남겼다고 하는데, 죽을 즈음엔 거의 노숙자나 다름없었다고 했던가. 사진첩을 보니, 심지어 현금으로 바꾸지 않은 체크(수표)도 있었다고 한다. 할 말이 없었다.
그녀의 사진들을 보면서 미국이라는 나라 특히 뉴욕과 시카고[Chicagoland]이라는 도시와 당시의 시대상을 엿볼 수가 있었다. 사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는 그저 그런 일상이겠지만, 그것이 공개되지 않고 있다가 반세기 정도 지난 다음에 보게 되면 지금은 사라지고 없어진 것들에 대한 회상과 여러 가지 요소들이 복합적인 융합작용을 일으키면서 기묘한 감상을 자아내는 게 아닌가 싶다. 그녀가 주로 다룬 뉴욕에도 몇 번 가봤지만, 그녀가 사진을 찍던 시절의 그것과는 너무 다른 모습에 조금은 놀랐다. 모름지기 사람의 모습이 세월의 풍상에 따라 바뀌듯 그 사람이 사는 도시의 모습 역시 변하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비비안 마이어가 사진을 찍던 시절은 1950년대, 1960년대는 이미 칼라사진이 일반화된 시절이었는데 우리의 주인공은 롤라이플렉스 카메라를 목에 걸고 흑백사진을 고집했다. 그런데 흑백사진을 찍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흑백사진 고유의 콘트라스트가 주는 아우라는 칼라사진의 그것에 비할 바가 아니며, 하물며 요즘 디지털 사진의 그것과도 격이 다르다. 사진이라 하면 모름지기 빛이 창조해내는 예술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우리 앞에 살던 선구자였던 비비안 마이어는 그 점에 주목했으리라. 그녀 사진의 특징 중의 하나는 셀프 포트레이트가 의외로 많다는 점이다. 아마 피사계 심도 조작에 정통했는지 요즘처럼 자동초점도 아닌 수동카메라를 조작해서 흐트러지지 않는 멋진 셀프 포트레이트 사진을 찍었다는 점이 놀랍기만 하다.
초반에 프랑스에서 찍었다는 사진도 있지만, 비비안 마이어 카메라의 대상은 미국과 미국에 사는 사람들의 일상이었다. 아이들의 워나비 캐릭터인 미키마우스 모자를 쓰고 천진하게 웃는 흑인 꼬마의 얼굴, 뉴욕의 마천루에서 철근을 나르는 인부의 고단한 모습, 플로리다 해변가에서 물놀이를 즐기는 일상의 모습, 삶에 고단함 혹은 실연에 지친 어느 아가씨의 모습에 이르기까지 삶의 매순간 벌어지는 각양각색의 모습을 비비안 마이어는 카메라에 담았다. 물론 오드리 헵번이 등장하는 극장의 프리미어 사진도 있지만, 너무 급하게 찍어서 그런지 많이 흔들렸다. 사진이 갖는 기록성이라는 점에서 감안한다면 그 정도의 실수는 눈감아 줄 수 있지 않을까.
<비비안 마이어: 나는 카메라다>에 실린 사진들을 보면 대부분 장소와 시간이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진도 많이 실려 있다. 그런 사진들은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도대체 이 사진은 어디에서 찍었을까? 보통 사진을 찍을 때, 스냅샷이라고 하더라도 피사체 특히 사람이 카메라 렌즈를 의식하지 않게 하라고 들었는데 그녀가 찍은 많은 사진들을 보면 사진 속의 인물들은 대놓고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탤런트 릴리스(Talent release)라는 서류도 사전에 받으라고 했는데, 그 시절에는 아마 그런 게 없었던 모양이다. 초상권과 저작권 혹은 퍼블리시티권이라는 개념조차 제대로 잡히지 않았던 그야말로 사진가에게는 엘도라도 같았던 시절의 이야기다.
우리나라에서 오는 4월 30일, 그녀의 일대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비비안 마이어를 찾아서>가 개봉한다고 한다. 뉴욕타임즈 보도에 따르면 비비안 마이어가 남긴 필름을 두고, 2007년 처음으로 그녀의 작품을 세상에 알린 부동산 중개업자이자 길거리 사진가인 존 말루프(경매에서380달러에 필름들을 사들였다고 한다, 영화 <비비안 마이어를 찾아서>의 연출가이기도 하다)와 마이어 연구가라는 데이비드 딜이 수백만 달러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는 비비안 마이어 사진의 소유권 분쟁 중이라고 한다. 2009년 비비안 마이어가 죽고 나서 그녀의 사진이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뒤에야 소유권을 주장하고 나선 모습이 석연치 않지만, 이 소송 역시 베일에 감춰진 작가의 신화를 알리는데 단단히 한 몫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녀가 남긴 15만 장이나 되는 사진 중에 엄선했다고 하지만 235점의 사진만으로 한 사람의 삶을 평가하기는 부족한 점이 없지 않지만, 세상에서 잊힐 뻔한 사진작가의 발견이라는 차원에서 충분하지 않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