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신세계
올더스 헉슬리 지음, 정승섭 옮김, 바나나몽스 그림 / 혜원출판사 / 2008년 8월
평점 :
품절


 

 

말로만 들어오던 책을 직접 읽게 되는 기분은 어떨까. 사실 이번에 읽은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는 수도 없이 많이 들어왔지만 정작 읽지 않고 있다가 이번 주말 독서모임 책으로 선정되어 부랴부랴 읽었다. 분량도 그렇게 많지 않고 결정적으로 생각보다 너무 재밌어서 단박에 읽어냈다. 이렇게 재밌을 줄이야.

 

1932년 1차 세계대전과 대공황을 거치면서 인류 지성에 대한 회의와 더불어 기술문명의 발전에 따른 미래가 마냥 밝지만 않을 거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 서구 소설가 올더스 헉슬리는 유토피아가 아닌 디스토피아적인 세계를 소설로 창조해냈다. 지금으로부터 무려 83년 전에 이런 발상을 해내게 된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소설을 읽으면서 정말 궁금했던 것은 어떻게 해서 우리는 인류의 진보를 굳건하게 믿으면서, 미래세계가 최소한 지금보다는 더 나을 거라는 막연한 믿음을 가지게 된 걸까하는 점이었다. 물론 기술문명의 발전이 예전에는 인간이 해야만 했던 일들을 대신해 주고, 생산효율을 극대화시키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문제는 그렇게 기계가 인간의 노동을 대신하게 되면서, 기본적으로 노동자인 인간이 노동으로부터 소외되어 주체적 삶을 상실해 가고 있다는 점이다.

 

소설에서 거의 광신에 가까울 정도로 사람들이 타령하는 포디즘이야말로 이런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결정적인 요인이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로 대표되는 현대 문명의 특징을 유발한 효율의 극대화는 인간의 사유에 히스테릭한 반응을 보인다. 히틀러의 나치즘에 찬동했던 포드는 소설에 등장하는 전체주의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에까지 도달했다. 서기 2540년에 해당하는 포드력 632년, 인류는 자연적 재생산을 미개한 방식으로 치부하면서 ‘디캔팅’이라는 방식의 인공적 방식의 재생산(reproduction)으로 대략 20억 명 정도 인구를 유지한다. 소설에서 그려지는 미래사회는 디캔팅 룸에서 태어나기 전부터 알파, 베타, 감마, 델타 그리고 엡실론이라는 다섯 개의 카스트로 구성된 철저한 계급사회다. 계층 간의 상호이동을 막기 위해 자연 생산 방식은 오래 전에 도태되었고, 가족이란 개념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지배계급은 피지배계급을 용이하게 다루기 위해 수면교육과 행동조절이라는 정말로 비인간적인 방식과 소마라는 세상의 모든 걱정과 근심을 잊게 해주는 신경안정제를 공급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인류는 오로지 자신의 직분에 맞는 노동과 오직 소비만 하라고 강조하라고 세뇌된다. 개인의 상상력과 창의력을 개발시키는 독서나 미술 같은 예술 활동은 일체 금지되고, 성놀이라는 희한한 명칭의 에로틱한 활동이 장려된다. 1930년대 독일에서 나치주의자들이 시행하던 국가개조의 데자뷰처럼 느껴졌다. 한편, 이 사회의 특이한 점은 인간이라면 필수불가결한 노쇠현상 역시 젊은이들의 피와 각종 기술로 젊음을 유지시켜 준다는 것이다. 그 결과 미래사회에서 노쇠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 되어 버렸고, 그렇게 젊음을 유지하다가 죽게 된다는 것이다. 일찍이 진시황이 꿈꾸던 영생불사의 노력은 미래사회에서도 빠질 수 없는 한 단락을 장식하고 있었다. 역설적으로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죽음이 삶의 일부이자 아무 것도 아니라는 교육을 받는다. 소설의 후반부에서 미스터 야만인 존이 어머니 린다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을 때, 들이닥친 한 무리의 아이들 앞에서 그렇게 화내는 것에 대해 보모장과 아이들은 그렇기 때문에 전혀 존을 이해할 수 없었다. 쾌락의 증진과 고통의 경감 그리고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 것도 아니라는 고대 그리스 에피쿠로스 철학의 한 단면도 엿볼 수 있다.

 

어느 사회에나 이단아가 존재하듯이 이 <멋진 신세계>에도 버나드 마르크스라는 특이한 캐릭터가 등장한다. 모두가 하루 정량의 소마를 먹으며 쾌락에 도취된 삶에 만족하지만, 신체적으로 자신의 계급에 미치지 못한 모습의 버나드는 그렇지 못하다. 아름다운 레니나와 데이트하면서 사랑이라는 관념을 구체화시켜 보려고 노력하지만 미래사회에 존재하지 않는 관념과 둘만의 시간을 보내며 고독을 칭송하는 버나드에게 자유연애주의자 레니나는 어쩔 수 없는 생래적인 거부감을 보인다. 극대화된 포디즘의 세례를 받은 전형적인 모델 레니나는 현대사회 소비 물신주의의 화신으로 봐도 무방할 것 같다.

 

하지만 버나드와 레니나의 캐릭터도 그들이 뉴멕시코 야만인 보존지역에서 만난 백인 청년 존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철저하게 이방인으로 자란 존은 우연한 기회에 버나드와 레니나를 만나 ‘멋진 신세계’에 편입된다. 19세기 서구인들이 아프리카 흑인을 잡아다가 서커스에 이용한 것처럼 버나드 역시 신세계에 도착한 존을 이용해서 단번에 자신을 오지로 보내 버리려는 인공부화 및 조절 국장의 기도를 분쇄하고, 일약 유명인사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자신이 그나마 신세계의 양심 있는 지식이라고 자부해온 버나드의 그런 행동은 이율배반적일 수밖에 없다. 더 큰 문제는 존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라는 점이다. 어머니 린다에게 글을 배우고, 야생세계에서 다양한 생존 체험을 하고 우연한 기회에 획득한 셰익스피어를 읽으며 주체적 자아를 형성한 존은 자신에게 호감을 보이는 레니나를 사랑하면서도, 신세계의 사랑 방식(성놀이)를 거부하며 진정한 사랑을 갈망한다. 서로 다른 탄착점을 향해 달려가는 두 남녀의 사랑은 파국으로 치닫기 마련이다.

 

올더스 헉슬리는 디스토피아 소설 <멋진 신세계>에서 훗날 다양한 방면으로 영향을 미치게 되는 선구적인 아이디어들을 다수 제공한다. 병에 태아를 넣어 기르는 디캔팅 방식을 통해 속성으로 인간을 만들어내는 장면은 영화 <아일랜드>의 그것을 연상시킨다. 영어문화권 독자가 아닌 번역을 읽어야 하는 입장에서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문학적 이해는 물론이고, 저자가 작품에서 인용한 수많은 셰익스피어 희곡에 등장하는 문장들에 대한 감흥은 상대적으로 빈약하다는 느낌이다. 얼마 전에 간신히 다 읽은 이창래 작가의 <만조의 바다 위에서>를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의 아류작이라는 비평을 어디선가 읽은 것 같은데, 그 이유를 이 책을 읽으면서 어느 정도 파악해낸 것도 하나의 수확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진부하긴 하지만 문명과 야만의 대결이라는 이분법적 구도도 주목할 만하다. 모든 종류의 책이라는 정보 전달 매체가 금지된 문명세계를 책을 통해 개화된 미스터 야만인 존이 비판하는 장면은 특히 인상적이었다. 그냥 문득 모든 것이 다 허용되지만, 책읽기가 금지된 세상에서 사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라는 엉뚱한 상상을 해보기도 했다.

 

소설을 읽는 동안, 예전에 본 영화 <인 타임>이 생각났다. 영화는 시간을 가진 사람이 모든 것을 통제하고 지배하는 사회 이야기다. 돈이 지배하는 현실을 시간으로 비틀었다는 점에서 섬뜩했다. 그런데 올더스 헉슬리가 <멋진 신세계>에서 그린 개인의 욕망마저도 누군가에 의해 통제받고 조종되는 가상의 디스토피아가 놀라울 정도로 작금의 현실과 닮았다는 사실에 다시 한 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행복을 미끼로 해서, 현실에 대한 궁극적 해결책이 아닌 진통제에 불과한 소마를 나눠주면서 카스트 구성원들에게 지금은 누구나 다 행복해라는 주술을 외우게 하는 프로파간다가 현실이 아니라고 누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겠는가. 빅토리아 시대를 산 작가의 무시무시한 예언에 다시 한 번 감탄하게 된다.

 

[리딩데이트] 2015년 2월 22일~23일 오후 9:3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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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2-24 2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 주 독서모임 선정도서군요. 취업 준비 때문에 서울에 갈 상황이 되지 않아서 당분간 독서모임에 참여하지 못하지만, 달궁 독서모임에 함께했던 분들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언젠가 시간 나면 모임에 참석할께요.

레삭매냐 2015-02-25 16:50   좋아요 0 | URL
아숩네요. 싸이러스님도 함께 했으면 좋았을 텐데 -
저도 오랜 만에 출격이라 기대가 많이 됩니다.
곧 뵙게 되길 바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