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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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도비 포토샵에 그라데이션이라는 기능이 있다. 검은색에서 흰색으로 바뀌는 과정을 6자리 디지털 정보로 된 흑백 사이의 일련의 색깔들을 표시한 기능인데, 이번에 미미 여사의 미야베 월드 2막 미시마야 시리즈의 첫 번째 인스톨인 <흑백>을 보면서 서두에서 말한 바로 그 그라데이션이 떠올랐다. 두 번째 에피소드에 앞서 주인공 오치카 아가씨를 거두고 있는 미시마야의 주인장 이헤에 숙부가 세상은 반드시 흑과 백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 사이에 틈새기의 색깔도 있지 않나 하는 표현이야말로 미시마야 시리즈에서 미미 여사가 다루고 있는 주제를 정확하게 집어낸 것이 아닌가 싶다.

 

나는 미시마야 시리즈 중에서 제일 늦게 출간된 <피리술사>로 미야베 월드 2막을 시작해서 역주행 중에 있다. 개인적으로 사무라이, 에도시대에 대한 관심이 많아서 그런지 미미 여사의 시대물 미스터리에 흠뻑 빠져 버렸다. <피리술사>를 읽으면서 그전 이야기들인 <흑백>과 <안주>를 읽어 보지 못해 자못 궁금한 점들이 몇 가지 있었는데, 시리즈의 시원이 되는 <흑백>을 통해 그런 궁금증들을 한방에 털어 버릴 수가 있었다.

 

본국에서도 미미 여사의 시대물이 인기가 있는지 지난여름, 소설 <흑백>에 실린 다섯 개의 에피소드가 일본 NHK를 통해 5부작 드라마로 영상화되었다고 한다. 이제 소설도 다 읽었으니 예의 드라마도 한 번 보고 싶어졌다. 특히 첫 번째 이야기로 등장하는 <만주사화> 꽃이 어떻게 생겼나 싶었는데, 블로거들이 올려놓은 드라마 스틸샷으로 고혹적이면서도 무언가 스토리를 담고 있을 것 같아 보이는 실물을 직접 볼 수가 있어 좋았다. 우선 미미 여사는 오치카 아가씨가 어떤 사연(곧 알게 되지만 약혼자의 죽음) 때문에 에도에서 좀 떨어진 고향 가와사키 역참 마루센을 떠나 에도 간다 거리의 주머니가게 미시마야에 둥지를 틀게 되었다는 설정으로 소설을 시작한다. 추리물답게 본론으로 바로 들어가지 않고, 적절한 사연의 배치를 통해 독자들은 호기심을 가지고 오치카의 내면세계로의 여행에 나서게 된다.

 

아무래도 상가(商家)가 중심이 되는 이야기이다 보니 어려서부터 기술을 배우기 위해 도제 신분으로 고용살이에 나서는 십대 청소년들의 고된 '고용살이' 이야기가 많이 나오게 된다. 지금도 그렇지만, 17세기 일본에서는 이미 기술이야말로 먹고 살기 위한 방편이었다는 사실을 작가는 무서울 정도로 날카롭게 파고든다. 이헤에 숙부의 바둑 상대로 미시마야를 찾은 도키치를 우연히 대접하게 된 오치카는 뜰에 핀 자신의 존재 같은 덧없고 쓸쓸해 보이는 만주사화를 보고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지는 손님의 모습에 적잖이 당황한다. 그리고 도키치는 만주사화에 얽힌 평생 자신을 짓누르고 있던 회한 덩어리를 풀어낸다. 무려 사십년 전으로 올라가는 이야기는 우연한 기회에 사람을 죽이고 15년 귀양살이를 마치고 돌아온 형 기치조를 외면하고 마침내 형을 죽게 만들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도키치. 고용살이라는 팍팍한 삶에서 살아남기 위해 살인자의 동생이기 때문에 그 역시 비슷한 성정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라는 타인/고용주의 시선이 두려워 돌아온 형을 외면한 원죄는 만주사화의 원념으로 남게 된 것이다.

 

만주사화 사건을 계기로 이헤에 숙부는 오치카가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현실세계의 고통을 잊을 수 있는 묘수를 하나 개발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흑백의 방에서 오치카가 변조괴담을 들려주고 싶어 하는 화자들의 고민상담을 하면서 자신을 되돌아보게 하고, 거짓과 진실을 꿰뚫어 보는 눈도 기르라는 숙제를 내준다. 두 번째 에피소드인 <흉가>는 안도자카 언덕의 저택에 백냥이라는 거금을 벌기 위해 들어가 살게 된 오타카 가족의 이야기다. 직업소개꾼 안도 노인의 소개로 흑백의 방을 찾게 된 오타카는 과거의 이야기를 오치카에게 들려준 다음, 백냥이 아닌 마음의 평안함을 줄테니 귀신의 집 안도자카 저택으로 가자고 유혹한다. 그녀는 오치카에게 안도자카의 저택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고 말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 섬찟한 에피소드는 맨 끝에 배치된 <이에나리>에서 다시 불쑥 독자를 찾아온다. 모든 것은 그렇게 연결되어 있구나.

 

역시 뭐니 뭐니 해도 <흑백>에서 가장 중요한 에피소드는 오치카 본인이 흑백의 방에서 청자가 아닌 화자로 등장하는 <사련>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사련(邪戀)의 정의를 찾아 보니 다음과 같다. 도덕이나 도리에 벗어나거나 떳떳하지 못한 연애.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의 시원을 밝히는 이야기로 도대체 가와사키의 마루센에서 그녀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에 관한 것이다. 오치카와 그녀의 도락을 즐기다 정신 차린 약혼자 요시스케 그리고 마루센의 업둥이이자 충실한 일꾼으로 살아온 마쓰타로 이 세 명의 삼각관계가 시발점이다. 부모에게 버림 받았지만, 주변 사람들의 구조로 살아난 마쓰타로는 총명함과 성실함으로 마루센의 양자처럼 성장하지만, 결국 그는 남이었고 남몰래 오치카를 연모하던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가고 있었다. 오치카의 부모나 오치카의 오라비인 기이치 역시 마쓰타로를 잘 대해 주면서도, 우리가 아닌 타인으로 생각해온 것이 문제였다. 왜 오치카의 부모는 마쓰타로를 놔주지 않았을까, 바로 그런 그들의 이기심이 끔찍한 결말의 원인이었던 건 아닐까. 물론 우리의 주인공 오치카가 느낀 자책감은 말할 것도 없다.

 

<사련>을 중심으로 배치된 <만주사화>, <흉가>, <마경> 그리고 <이에나리>는 서로 연관된 이야기들로 최종편에 해당하는 <이에나리>에서는 기존에 등장한 인물들이 모두 재등장해서 대단원의 막을 장식한다. 오치카가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줌으로써 쌓은 공덕은 마침내 안도자카 저택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곳에서 만난 '상인'은 저 세상과 이 세상을 가리지 않고 장사한다고 자신을 소개한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녀와 만나게 될 거라는 그의 말대로 그들은 <피리술사> '절기 얼굴' 에피소드에서 재회하게 된다.

 

<피리술사>에서 정립된 화자는 말하고 버리고, 청자는 듣고 버린다는 흑백의 방 원칙은 아직 정해지지 않은 모양이다. 요즘 힐링이 대세라고 하는데,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오치카처럼 진중하게 타인의 목소리를 들어줄 줄 아는 사람을 만나는 것도 힐링에 있어서 중요한 포인트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오치카도 처음에는 <피리술사>에서처럼 그렇게 능숙한 청자가 아니었구나 싶은 생각에 슬며시 미소가 떠오른다. 꾸준하게 자가발전해 나가는 캐릭터를 지켜보는 재미야말로 미야베 월드 2막의 숨겨진 별미다.

 

이번에 새로 출간되는 <맏물 이야기>를 예약 주문하고 기다리고 있다. 설날 연휴를 겨냥한 주문이리라. <맏물 이야기>에 앞서 <혼조 후카가와의 기이한 이야기>도 구해서 내친 김에 읽기 시작했다. 오캇피치 모시치가 에피소드 마다 출연하고 있는데, 오치카 아가씨가 나오는 미시마야 변조괴담에 시리즈에 견주어 보니 조금 맛이 덜하고나 할까. 어설픈 사무라이 헤이시로가 나오는 <얼간이>도 읽고는 싶은데 지금 수중에 있는 책들은 <안주>, <메롱> 그리고 <흔들리는 바위>가 전부다. 이번 설날은 미미 여사의 에도시대물과 함께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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