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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묘지에 사는 남자
피터 S. 비글 지음, 정윤조 옮김 / 문학수첩 / 2015년 3월
평점 :
절판
어려서 하도 공동묘지에 대한 기묘하고 무서운 이야기들을 많이 들어서 그런지 공동묘지에 대한 좋지 않은 이미지를 갖고 있다. 게다가 우리나라에서는 공동묘지가 거주지에서 아주 멀찍하게 떨어진 곳에 있지 않은가. 미국이나 유럽에 갔을 적에 놀랐던 것 중의 하나는 공동묘지가 주택가와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점이었다.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라면 죽음을 생래적으로 거부하기 마련이지만, 죽음 또한 피할 수 없는 우리의 운명이라는 점을 상기시켜 주기 위해 그런 것일까. 다시 한 번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를 생각해 본다.
1960년 5월 23일, 처음으로 세상의 빛을 본 <공동묘지에 사는 남자>는 피터 S. 비글 작가의 첫 번째 (판타지) 소설로, 이 작품의 주인공은 하루 이틀도 아니고 자그마치 19년 동안이나 뉴욕 요크체스터의 어느 공동묘지에 사는 조너선 리벡이다. 그는 남부럽지 않은 약제사라는 직업을 버리고, 까마귀가 물어다 주는 샌드위치 따위로 연명한다. 영화 <식스 센스>의 꼬맹이처럼 망자를 볼 수도 있고, 대화도 나눈다. 물론, 자신에게 먹거리를 물어다 주는 까마귀와도 대화가 가능하다. 뭐 이 정도면 판타지 소설로서 필요조건을 충족시킨다.
소설의 메인 캐릭터인 리벡을 중심으로 다양한 인물군이 등장한다. 변호사였던 부군 모리스를 잃은 클래퍼 부인, 누가 봐도 한눈에 반할 법한 미모의 아내 샌드라에게 독살당한 대학교수 출신의 마이클 모건, 염세주의자 로라 듀런드 그리고 묘지지기 캄포스에 이르기까지 각자 사연을 갖고 있는 조연들이 비글 작가의 이야기를 다채롭게 만드는 데 한몫한다. 소설에 등장하는 이 매력적인 캐릭터들의 면면에 현미경을 들이대고 살펴보자. 죽었지만,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는 남자 마이클은 사랑스러운 아내 샌드라가 쥐약으로 자신을 죽였다고 굳게 믿고 있다. 그런데 변호사와 함께 묘지를 찾은 샌드라의 말을 들어 보면 그런 것만도 아닌 것처럼 들린다. 누구의 말이 진실일까? 이 장면에서 문득 구로사와 아끼라 감독의 <라쇼몽>이 떠올랐다. 누구나 자신이 믿고 싶은 것을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주관적 신념이야말로 삶의 원동력이 아니던가. 단편적 정보와 마이클의 주장대로, 샌드라가 마이클을 죽였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지긋한 나이에 모리스의 미망인 클래퍼 부인과 썸을 타는 주인공 리벡은 또 어떤가. 무슨 이유 때문인지 세상을 등지고, 공동묘지를 자신의 안식처로 삼은 산 사람의 이야기는 독자로 하여금 판타지적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만든다. 자신의 결점을 충분히 알고 있는 리벡은 클래퍼 부인에게 끌려 자신의 상태를 고백하고 만다. 그것이 과연 사랑의 관문에 이제 막 들어서려는 한 남자의 실수였을까?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의 카니발을 더 흥미롭게 만들어주는 사이드킥으로 흉조의 상징인 까마귀가 풀어놓는 독설은 또 어떤가. 변변한 이름 하나 없는 까마귀는 뉴욕의 상공을 배회하며, 리벡에게 먹이를 공급하고 세상에서 벌어지는 뉴스를 전달해주는 메신저 역할을 자처한다. 외부와 격리된 그들에게 샌드라의 재판에 대한 정보는 귀를 솔깃하게 만든다. 과연 샌드라는 마이클을 죽였을까?
<공동묘지에 사는 남자>의 원제는 <A Fine and Private Place>다. 좋고 사적인 장소라는 뜻인데, 의외로 소설의 배경이 되는 공동묘지는 예상대로 죽음과 사랑, 갈등, 질투 같은 보통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들의 집합소라는 느낌이 들었다. 리벡 씨가 새로 사귄 친구인 거트루드 클래퍼 부인은 한 때 뉴욕의 약제사, 아니 주술사로 불리던 그가 공동묘지 생활을 접고 다시 세상으로 나와야 한다고 거의 강권하다시피 주장한다. 사실 이 소설의 고갱이는 리벡 씨의 귀환이 언제 어떤 방식으로 될 것인가가 핵심이다. 그는 혼잣말로 세상이 품위를 갖추게 되면 돌아가겠노라고 말하지만, 언제 세상이 제대로 품위를 갖춘 적이 있었던가. 마이클의 죽음에 대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소설은 클라이막스로 치닫기 시작한다. 대학 교수였던 마이클은 점점 더 염세적인 경향을 띠기 시작하고, 그동안 자신이 사랑이라고 믿어왔던 것들이 모두 부질없는 사실이었노라고 고백하기에 이른다.
자, 그렇다면 피터 S. 비글 작가가 이 책을 통해 독자에게 주고 싶었던 메시지는 과연 무엇일까. 소설에 따르면 죽음은 우리가 그렇게 두려워하는 만큼 두려워할 만한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떤 점에서 본다면 에피쿠로스학파의 사상처럼 현재를 충분히 즐기면서 사는 게 이승의 복락이라는 주장과 일맥상통하기도 한다. 이 책에서 다양한 철학적 질문들과 만나기도 하고, 다시 한 번 그 의미를 곱씹어 보게 하는 대화들을 만나기도 했다. 망자들에게도 사랑과 질투 같은 감정이 허용된다는 설정도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잊히고 싶지 않다는 갈망이 있다는 것도 확인할 수가 있었다. 특히나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바로 그런 점에서 세상에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표현이 절절하게 다가온 모양이다.
리벡 씨가 과연 세상에 나가서 재활에 성공했는지 궁금하다. 상상의 나래를 펼쳐 보인다면, 클래퍼 부인의 헌신적인 도움으로 다시 뉴욕을 주름잡는 주술사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