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벌레와 메모광
정민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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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을 읽으면서 지식 혹은 깨달음의 지평을 넓히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모름지기 책 읽는 이들이라면, 책을 통해 얻게 된 사유를 행동으로 전환시켜서 실천에 옮겨야 하는데 대부분 그러지 못하는 것 같아 아쉽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읽게 된 정민 선생의 <책벌레와 메모광>은 개인적으로 앞으로 나의 책읽기에 대해 어떤 지향점을 제시해 준 것 같아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저자인 정민 선생은 한양대 국문과 교수님이라고 하는데, 내게는 왠지 한학을 하시는 선비라는 느낌으로 다가왔다. 선생은 우리 선현들이 남긴 한문 글들을 집중적으로 연구하시고 계신 것 같다. 방대한 저작을 남긴 다산 선생의 편지글들을 모으시고, 다산 학풍의 바탕이 되는 초서에 대해서도 자세한 설명을 마다하지 않으신다. 바다 건너 하버드 대학 옌칭도서관에 연구를 하러 가셔서도 자료 수집에 여념이 없었다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됐다.

 

쓰신 글의 소개 순서가 좀 엇갈리긴 하지만 연구 과정에서 수집한 자료들과 당신이 남기신 메모를 딱풀로 책제본하시는 광경을 보면 모든 것이 속도로 결정되는 디지털 시대의 아날로그 방식을 고수하는 전형적인 선비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선생의 제본 철학은 단순하게 모은 자료를 남기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렇게 정선한 자료들을 하나로 만드는 과정에서 다시 한 번 공부하게 된다는 지론이다. 기계적으로 딱풀을 이용해서 책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료를 수집하게 된 과정을 메모로 남기고(선생은 포스트잇을 사용하시기 보다 선현들의 발자취를 따라 붓과 먹을 이용해서 첨언 남기시길 즐기시는 모양이다) 다시 한 번 읽어 보시면서 비로소 수집한 자료를 완성하는 것이다. 메모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다는 듯, 당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설득력 있는 메아리라고 부르고 싶다.

 

책읽기가 개인의 사유를 자극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생각이라는 건 항상 그렇지만, 너무 휘발성이 강하기 때문에 그 때 그 때 기록하지 않으면 달아나 버리기 마련이다. 개인적으로 책 읽고 나서 보잘 것 없는 독후감을 쓰기 위해서 상세하게 메모를 한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를 비교해 보면 전자의 품질이 월등하게 낫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다만 그러기 위해선 메모 공책을 따로 준비해서 책 읽다 말고 영감을 받은 내용들을 그 때마다 적어야 하는데, 이게 보통 귀찮은 일이 아니다. 그러다 보면 책 읽기의 맥이 빠지기도 하니 말이다. 하지만 정민 선생의 쓰신 대로 생각에 날개를 달리게 하고, 사고에 엔진을 붙이려면 이 정도 수고는 마다해야지 않을까.

 

책벌레 이야기보다 메모광 이야기가 먼저 튀어 나왔는데, 우리 선현 중에는 간서치라는 별명으로 널리 알려진 이덕무 선생에 관한 고사가 책에서 자주 등장한다. 가난 때문에 집에 불을 때지 못해 동상에 걸려 가면서 독서와 필사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에서는 가슴 한편에 찡한 감동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비싼 책 가격을 감당하기 어려워, 누가 희귀한 고서를 소장하고 있다는 말을 들으면 여러 번 청해 구해다가 독서와 필사를 하고 약속대로 반드시 돌려주었다고 한다. 그런 신뢰가 바탕이 되어 책주인이 먼저 나서서 책을 빌려 주겠다고 제안하기도 했다고 했던가. 멋진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나도 멋진 장서인을 하나 갖고 싶다는 생각을 몇 년 전부터 해왔지만, 가격이 만만치 않아 여전히 주문을 망설이고 있는 중이다. 그런 점에서 책의 권두를 시작하는 한중일 삼국의 장서인 비교도 흥미롭다. 한국의 경우에는 책을 훼절시켜 가면서까지 장서인의 기록을 지우려고 했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소유 관계의 단절을 뜻하는 ()”라는 글자를 찍었단다. 좀 정감이 없다고 해야 할까. 중국에서는 책을 소유할 때마다 개의치 않고 줄줄이 장서인을 찍어댔다. 정민 선생의 글 중에 책 읽는 사람이 주인이다라는 표현을 얼핏 본 것 같은데, 바로 공감할 수가 있었다. 어제도 독서모임에서 개인이 집에서 소장할 수 있는 책의 양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그렇게 책을 사 모은들 읽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며(왠지 찔끔하다)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 책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들도 널리 읽을 수 있도록 선물로 주거나 기증하는 게 독서라는 책의 본령을 위해서도 좋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실천은 쉽지 않겠지만 말이다.

 

꾸준한 책읽기와 그에 따른 메모하는 습관을 권장하는 이 책의 메인 테마 외에도 소소하면서도 유용한 독서 정보들이 <책벌레와 메모광>에는 담뿍 담겨 있다. 가령 예를 들어 누군가 책에 꽂아둔 은행나무 잎의 경우를 살펴보자. 나도 개인적으로 그런 적이 몇 번 있는데 가을날의 독서를 즐기다 바닥에 떨어진 은행 이파리를 그냥 재미로 책에 꽂아둔 게 아닌가 싶었는데, 선현들은 책벌레의 공격으로부터 책을 보호하기 위해 은행나무 잎을 책에 꽂았다고 한다. 한 수 배웠다. 그리고 진한 향기의 운초도 비슷한 효과를 거두기에 적합하다고 한다. 두어(蠹魚)라 불리는 책벌레는 물론 이와 벼룩 퇴치에도 효과만점이라고. 오징어 먹물 이야기는 또 어떤가. 요즘 오징어 먹물을 이용한 파스타나 염색약 이야기는 들어 봤어도 붓글씨를 오징어 먹물로 쓴다는 말은 또 처음 들어봤다. 오징어 먹물로 글을 쓰면 마치 펄이라도 들어간 것처럼 멋져 보이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종이에 스미지 않고 박락이 떨어지면서 사라진다는 것이다. 이 오징어 먹물로 사기꾼들이 계약서 작성 등에 장난질을 치기도 했다니 색다른 소재를 이용한 글쓰기의 운치를 즐기는 선비들의 풍류에 비할 바가 아닌 것 같다.

 

4년 전 선생의 <삶을 바꾼 만남> 온라인 연재를 인연으로 출판사가 주최한 강진답사를 함께 한 적이 있다. 오래전 역사학도로 수많은 답사를 다녀봤지만, 개인적으로 그 답사를 최고로 꼽고 싶다. 남도답사를 직접 인도해 주시며 방문한 곳곳에 얽힌 사연을 설명해 주시던 선생의 모습을 보고 이 분이야말로 21세기 모바일시대에 풍유를 아는 보기 드문 선비구나 싶었다. 그 때도 그랬지만 여전히 당신의 분야에서 학문에 정진하시는 모습을 <책벌레와 메모광>을 통해 다시 볼 수 있어 감개무량했다. 아울러 선생 삶의 천진한 즐거움을 일별할 수 있어 좋았다. 강진답사 4행시 장원으로 받은 부채는 아까워 쓰지 못하고 고이 모셔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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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11-29 2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약용의 초서 방법을 직접 실행해보고 싶은데, 손으로 기록하는 일이 쉽지 않을 것 같아요. 저는 한글 워드로 책의 문장을 베껴서 치는데 이것도 의외로 시간이 많이 들어요.

레삭매냐 2015-11-30 09:17   좋아요 0 | URL
요즘 필사를 위한 책들이 또 트렌드인가 봅니다.
그전에는 컬러링 책들이 트렌드였는데 말이죠.

전 손글씨가 엉망이라 차마 도전도 못해보겠네요.
그래도 대단하시네요, 워드로 치는 것도 쉽지 않
을 것 같은데요 :)

대장물방울 2015-12-10 2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그러신 레삭매냐 님도 축하드려요. 흐흣 : )

레삭매냐 2015-12-14 13:40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대장물방울님 ~
 
비잔티움 제국 최후의 날
로저 크롤리 지음, 이재황 옮김 / 산처럼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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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날 소설만 읽다가 간만에 역사 서적을 읽었다. 며칠 전 출판사 대표들이(책만사) 뽑은 올해의 책 인문사회자연과학 부분에 선정됐다는 기사가 결정적이었다. 지난 화요일부터 읽기 시작했는데 가독성이 나도 깜짝 놀랄 정도로 폭발해서 금세 다 읽을 수가 있었다. 어젯밤에 피크를 올려서 오늘 아침에 완독했다. 처음 들어본 작가였는데 영국 출신 교사이자 역사가인 로저 크롤리의 <비잔티움 제국 최후의 날>이 바로 그 책이다. 지중해 세계와 오스만 제국을 주력으로 삼는 작가로 기존에 <바다의 제국들>과 <부의 도시, 베네치아>가 출간됐다. 세 책 모두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것이 특이하다.

 

오래 전에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존 줄리어스 노리치 경의 대작 <비잔티움 연대기>와 시오노 나나미의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을 다룬 책도 읽어서 그런지 그 때 읽었던 이야기들이 새록새록 떠오르고 공방전의 실제적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오스만 제국의 메흐메트 2세와 수석대신 할릴 파샤 그리고 비잔티움 제국의 콘스탄티노스 11세와 제노바 출신 용병대장 조반니 주스티니아니 같은 이름들이 낯설지 않게 다가왔다. 1453년 5월 29일 화요일, 당대 그리스인들이 그리고 튀르크인들이 모두 로마제국(룸)이라 불리던 지중해의 진주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됐다. 이 사건은 로저 크롤리 작가가 본격적인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이 시작되기 전, 다룬 프롤로그 부분에서 역사의 결정적 순간이었다고 적었던 말라즈기르트(만지케르트) 전투를 능가하는 시대의 변곡점이었다.

 

콘스탄티노플 함락은 단순하게 어느 한 도시가 이슬람 세력에게 함락된 것이 아니라, 15세기 발흥하던 이슬람 세력의 대표선수 오스만 제국의 서방진출을 최전방에서 막고 있던 기독교세계의 보루가 무너진 결정적 순간이었다. 더 나아가 중세시대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분기점이기도 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건설된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현재 이스탄불)은 천년 넘게 수많은 적들의 침략 앞에 선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서쪽 유럽 쪽의 삼중장벽은 침공군에게 숱한 좌절을 안겨 주었으며, 크리소케라스 만은 쇠사슬 장벽으로 그리고 동쪽의 마르마라 해는 빠른 물살 때문에 바다에서의 공격을 막아 주고 있었다. 그렇게 제국의 수도는 4차 십자군 전쟁 때 같은 기독교도들에게 약탈당한 것과 내전 때 내부세력의 협력으로 성문이 열린 것을 제외하면 침략자에게 공략당한 적이 없었다.

 

7세기 발흥한 이슬람 세력의 무자비한 공격을 ‘그리스의 불’이라는 당대 최고의 공격력을 지닌 비밀병기로 제압하면서 난공불락이라는 콘스탄티노플의 명성은 하늘을 찔렀다. 하지만 달도 차면 기우는 법, 천년역사를 자랑하는 비잔티움 제국은 1299년 건국된 오스만 제국을 비롯해서 기존의 셀주크투르크, 십자군 원정과 발칸 반도의 불가르 족 등의 계속되는 침입과 서방 가톨릭 세계와 필리오퀘로 대변되는 신학적 교리 논쟁, 숱한 내전을 겪으면서 쇠락해 가기 시작했다. 46쪽에 나오는 빵 가격과 목욕물을 데우면서도 성자와 성부의 품격 논쟁을 인용한 부분에서는 저자의 유머 감각이 느껴지기도 했다. 한편, 제국을 유지하는데 핵심적 자원과 인적 보고였던 동방의 아나톨리아를 오스만 제국에게 상실하면서 제국의 쇠퇴는 되돌릴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사실 15세기 초반 제국의 영토는 펠레폰네소스 반도의 일부와 콘스탄티노플 그리고 흑해 연안의 일부 도시가 전부였다. 영락한 과거의 제국은 인공호흡기에 의존해서 생명을 연장하고 있었다.

 

1451년 19세의 나이로 오스만 제국의 다섯 번째 술탄의 자리에 오른 청년 메흐메트 2세는 아버지 무라트 2세가 죽고 형제들을 일소하면서 최고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암호명 “빨간 사과”라 불리는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해서 새로운 제국의 수도로 삼아야겠다는 야망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뛰어난 정복가였던 무라트 2세를 이은 청년 술탄의 야심을 얕잡아 본 서방의 교황과 기독교왕국들은 가톨릭과 정교회 통합에 부정적이었던 비잔티움 제국의 위기를 파악하고 있었으면서도 지원을 꺼렸다. 해상을 주름잡던 베네치아 공화국과 제노바 역시 자신의 이권 챙기기에만 몰두했지 오스만 제국의 콘스탄티노플 공략이 훗날 지중해 무역과 자신들의 거점 유지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술탄은 즉위 초기 친위대의 반란을 제압하고, 현상유지를 주장하는 할릴 파샤로 대표되는 보수파 대신들을 설득해서 마침내 빨간 사과 공략을 결정하기에 이른다.

 

카이사르와 알렉산드로스를 잇는 세계제국의 지배자가 되겠다는 야심을 품은 메흐메트 2세는 즉위와 동시에 빨간 사과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겠다는 계획 아래, 비밀리에 공략 준비를 진행시키기 시작했다. 헝가리인 오르한이라는 대포기술자를 채용해서, 비잔티움 제국의 심장부인 삼중장벽을 쳐부술 막강한 화력의 대포를 제작하기에 이른다. 오늘날 터키에 해당하는 아나톨리아 대부분과 발칸 반도를 실제적으로 지배하고 있던 술탄에게 신성한 무슬림 전사로서 지하드 성전을 수행하는 가지 전사의 이미지로 무슬림 전사들의 참전 의지를 고취시켰다.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는 그가 말하던 대로 ‘알라의 목에 걸린 가시’ 같은 존재로 이슬람 세력이 차지하지 않으면 언제 다시 유럽의 십자군 원정 같은 침략의 전초기지로 활용될지 모를 일이었다. 아울러 화승총과 대포 같은 최신식 군사기술 그리고 전쟁에서 고래로 무엇보다 중요한 병참 보급의 중요성을 잘 파악하고 술탄은 자신이 가진 모든 자원을 동원해서 콘스탄티노플 공략에 나서게 된다. 보스포로스 해협을 통한 해상보급을 차단하게 위해 유럽 대륙 쪽의 가공할 만한 요새 보아즈켄(루멜리 히사르)을 건설해서 콘스탄티노플의 목을 죄기 시작한다.

 

이렇게 화려한 공격군에 비하면 방어군의 현실은 암담하기만 했다. 자발적으로 참전한 주스티아니를 비롯한 유럽 지원군을 비롯한 대략 7,000명 남짓한 방어군으로 조금 과장되긴 했겠지만 20만에 달하는 공격군을 상대하는 그야말로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었다. 사방으로 포위된 콘스탄티노플의 비잔티움 수뇌부는 서방세계의 지원을 애타게 기다렸지만 교황의 파문 조치와 필리오퀘 논쟁 그리고 250년 전 4차십자군 원정 때 당한 기억을 잊지 않은 그리스인들이 가진 상호간의 불신 그리고 서방세계의 분열은 십자군 원정 같은 단일대오로 이슬람세력에 대항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서방세계에서 원조가 끊긴 콘스탄티노플 함락은 이제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메흐메트 2세가 이끄는 공격군의 승리가 손쉽게 이루어지진 않았다. 해상전투에 여전히 약점을 가지고 있던 오스만군의 해상공략 작전은 번번이 실패로 귀결되었고, 크리소케라스만에 해상 전투함을 투입시키는 상상을 초월하는 작전도 방어군에게 상당한 심리적 부담을 안겨 주긴 했지만, 공략전에서 큰 의미를 가지지 못했던 것 같다. 콘스탄티노플 공략을 무한정으로 끌 수 없었던 술탄은 이탈리아 함대를 필두로 한 서방지원군과 육상에서 “가공할 백기사” 헝가리의 후녀디 야노시가 이끄는 십자군이 도나우 강을 건넜다는 낭설이 오스만 병영에 퍼지면서 병사들이 소요하기 시작했다는 사실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최후가 될 공세에서 메흐메트 2세는 자신이 가진 모든 자원을 총동원해서 마지막 승부를 걸기로 결심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로저 크롤리는 세심하게 나뉜 공격 시간대를 거슬러 올라가며 비잔티움 제국 최후를 명징하게 기술한다. 비잔티움 제국은 오스만 군대의 최후 공격을 막을 수도 있었으나, 언제나 전쟁의 승부가 그렇듯 의도하지 않은 사소한 우연의 개입으로 결과는 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 술탄의 승리로 끝났다.

 

로저 크롤리는 주로 패자인 기독교 세계의 역사가들이 남긴 기록에 중도적인 입장에서 접근하는 신중한 태도를 보여준다. 함락 직후 콘스탄티노플 시내에서 벌어진 비극적인 약탈극에 대해서도, 중세 시점에 봤을 때 그렇게 잔혹한 것만은 아니었노라고 변론하고 있다. 사실 술탄에게 장기간의 포위전에 지친 병사들을 자극하기 위해 무슬림 율법에 정한 대로 사흘 간의 약탈을 허락할 수 밖에 없었던 상황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원문에는 어떻게 표현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미신을 빼면 시체’였다는 메흐메트 2세에 대해서도 훗날 서방세계에서 묘사한 대로 흡혈귀 같은 존재라기 보다 주어진 현실주의자로서 냉혹한 판단력을 지닌 군주로 그리고 있다. 사실 술탄은 이슬람 원칙에 충실한 독실한 무슬림은 아니었고, 하나의 종교를 바탕으로 하나의 제국을 건설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세속화된 군주의 전형이었다.

 

에필로그 부분에서 저자가 밝혔듯이, 당대에는 미처 몰랐던 콘스탄티노플 함락 이후의 상황에 대해서도 탁월한 식견을 보여준다. 콘스탄티노플에서 오스만의 서진을 손놓고 지켜보고 있던 기독교 국가들은 서방을 모두 집어 삼키려는 술탄의 정복전쟁이 발등에 떨어진 뒤에야 비로소 얼마나 위험한지 깨닫게 됐다. ‘빨간 사과’ 함락 이후 장장 2세기에 걸친 오스만의 서방원정은 빈에서 간신히 기독교 연합군이 막은 후에야 끝이 났다. 순망치한이라는 말처럼 제노바 식민지였던 갈라타(페라)는 콘스탄티노플 함락 이후, 술탄의 수중에 들어가게 됐다. 베네치아 역시 동방무역을 위한 지중해 거점들을 모두 상실하고, 본국조차 위기에 빠지기도 했다. 지중해 무역을 대신해서 신대륙이 개발되면서 세계 역사의 중심은 대서양으로 이동했다. 활자인쇄술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콘스탄티노플 공략전은 수많은 기록자들에 의해 전승되었다. 구전으로 전승되던 기록들은 이제 문자화되어 역사에 남게 되었다. 아울러 야만적인 튀르크인들이라는 이미지도 이 과정에서 형성되어 굳어지기 시작했다. 어쩌면 여전히 서구사회에 횡행하는 무슬림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의 원형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로저 크롤리는 방대한 양을 자랑하는 문헌들을 참고하면서, 신뢰할만한 기록뿐만 아니라 과장되거나 야사로 치부될 수 있는 흥미로운 다양한 자료들에 대해서도 빼놓지 않는다. 훈련 받은 역사가답게, 취사선택할 부분을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다. 과학기술의 발전에 따른 전쟁 양태의 변화는 물론이고, 기독교 종파 분쟁의 뿌리, 오스만과 비잔티움 제국 왕위 계승문제, 복잡한 각국의 외교 관계, 합리적 이성 대신 미신에 근거한 (위서를 바탕으로 한) 예언과 징조, 전쟁터에서의 잔혹행위, 각자의 유일신을 믿는 이들의 광신적인 행동에 이르는 다양한 면들을 이 책을 통해 만날 수 있었다. 요즘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는 국정화 교과서 파동이 한창인데, 왜 역사서술의 다양성이 필요한지 로저 크롤리의 저술이 그 답을 제시해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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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트노이의 불평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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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부터 시작한 모던 라이브러리 100 리스트에 9번째로 필립 로스의 초기 걸작이라고 칭송받는 <포트노이의 불평>을 추가했다. 작년에 책을 사서 읽기 시작했는데, 반절쯤 읽고 나서 덮어 두었다가 지난주에 다시 도전해서 완독했다. 출간된 지 46년이 지나도록 필립 로스가 구사하는 언어는 영화 <아메리칸 파이>(이 영화도 이제 한물갔지만)의 그것을 능가할 정도로 원색적이면서도, 섹스에 미친 주인공 앨릭잰더 포트노이의 심리분석 혹은 자기 내면적 고백을 통해 현대인의 욕구불만의 원천을 탐색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아울러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 고난을 당한 지난 이천년 동안 핍박받아온 유대인의 억압된 리비도를 비록 지면으로나마 마음껏 분출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올해 서른세 살 먹은 뉴욕의 잘나가는 엘리트 변호사 앨릭스 포트노이는 시민의 공복으로 근무하고 있다. 월반을 밥먹듯이 하고 고등학교 수석졸업은 물론이고, 중부의 앤티오크 대학을 졸업하고 그야말로 성공의 탄탄대로를 달리고 있는 중이다. 그런 그가 지금 슈필포겔이라는 정신과 의사 앞에서 자신의 수치스럽고 어두운 과거에 대해 남김없이 까발리고 있는 중이다. 인간기회위원회 부감독관이라는 지위에 맞지 않을 법한 상스러운 비속어를 남발하는 이 유대인 청년에게 도대체 무슨 문제가 있는 걸까.

 

보험쟁이로 정식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아버지 잭 포트노이는 평생 변비에 시달리며 주인공 앨릭스와 누이 해너를 키어왔다. 아버지보다 포트노이를 더 괴롭히는 가족 구성원은 바로 어머니 소피다. 유대 율법에 따라 자식들을 키워내는 것이야말로 자기 삶의 진정한 목표라고 설정한 어머니는 사춘기로 이제 막 접어드는 아들 포트노이를 옥죄기 시작한다. 이에 대한 반항이라고 해야 할까? 이성 그것도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 여성에 대한 성적 상상으로 앨릭스는 희대의 마스터베이션 전문가가 되기에 이른다. 우윳병, 양말, 야구글러브 심지어 저녁식사로 먹을 간에까지 손을 대기 시작한 포트노이의 성적 일탈은 그 끝을 모르고 뻗어 나가기 시작한다. 이 음침한 청년의 과거 고백이 시간당 수백 달러가 드는 뉴욕의 어느 정신과 클리닉에서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포트노이에게는 이런 이야기를 나눌 상대가 없었던 걸까? 정신과 상담이 자신의 치료(?)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주인공은 시간과 금전을 투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만큼 그의 억압된 리비도는 말을 나눌 상대 혹은 공격대상을 찾고 있었던 게 아닐까. 하지만 마마보이로 착한 아이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는 청년은 오랜 체험을 바탕으로 자아를 억눌러야만 했다. 이에 대한 반작용처럼 거의 일방적인 포트노이의 모놀로그가 끝없이 이어진다.

 

초기작 <포트노이의 불평>에서 필립 로스는 훗날 자기 문학의 전매특허가 되는 성을 통한 모든 문제의 해석이라는 주제의식을 수립한다. 우디 앨런의 영화에 등장하는 잘난 유대인의 전형이라는 이미지는 그의 소설 속에서도 다르지 않다. 어떤 의미에서 필립 로스 소설에 등장하는 성공한 일련의 유대인들의 이미지는 유년 시절부터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비범한 학업 성취에서부터 비롯되는 것 같다. 성공한 변호사라든가 대학교수, 작가 혹은 아트 디렉터들의 이야기 심지어 불평마저도 매력적으로 들리지만, 대척점에 서 있는 성공하지 못한 이들의 인생은 그렇지 못한 것이 사실이 아닌가. 이 성숙하지 못한 유대인 남자 주인공들은 하나 같이 자신이 만나는 여성들을 독립적인 인격체로 대하지 못하고 그저 하룻밤의 정사 상대로 생각하는 경향을 눈에 띄게 드러낸다. <포트노이의 불평>에서도 자신이 꿈꿔온 모든 성적 판타지를 완성시켜준 이방인 여자친구 메리 제인 리드를 멍키라고 폄하하며 훈육시키려는 모습에서 경악할 수밖에 없다. 상대방은 자신을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고 싶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포트노이에게는 어림도 없는 수작에 불과하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그는 나쁜 남자의 모범답안 같은 존재다. 그동안 자신을 성적으로 착취한 포트노이를 멍키가 언론에 다 까발리겠다고 하자 불안에 벌벌 떠는 찌질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차별을 철폐하기 위해 어려서부터 직접 행동에 나선 교육받은 진보적 사회주의자로 행세하면서도 실상은 그렇지 않은 위선적인 모습이 그대로 노출되기도 한다.

 

매력적인 금발 이방인 여자를 정복하는 것이야말로 신이 주신 자신의 사명이라고 여기는 듯 행동하는 포트노이의 행동방식은 개인적으로 수긍하기 어렵다. 누가 보기에도 무신론자인 포트노이가 얼토당토않은 선민의식을 발동시켜서 임신했다고 착각한 케이 캠벨에게 유대인으로 개종하라는 건 또 무슨 짓인가. 바로 그런 의미에서 앨릭스 어머니 소피의 집요한 세뇌공작은 성공을 거둔 것인지도 모르겠다. 자신도 모르는 부지불식간에 자기 민족의 정체성을 타자에게 요구하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그들이 가진 도덕적 우월감의 또다른 표현방식이 아니었을까. 그런 치졸한 방식의 정신승리야말로 앨릭스 포트노이가 극복하려는 강박관념의 원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역설적이게도 그런 심리적 압박이야말로 그들이 이방인들의 세계에서 정체성을 잃지 않고 살아남아 성공을 거둔 원동력이기도 하겠지만 말이다.

 

한편, 주인공은 어린 나이에 엄청난 부담감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등진 천재 피아니스트로 또다른 유대인 어머니의 자랑거리였던 로널드 림킨의 유서를 빗대어 조롱하기도 하지만, 결국 자신 역시 어머니의 심리적 조종에서 전혀 자유롭지 못한 다 자란 엄마의 마리오네트일 뿐이다. 매순간 매력 넘치는 멋진 이방인 여성과의 무분별한 섹스를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증명하고 싶은 수컷에 지나지 않는다고 자신의 카운슬러 닥터 슈필포겔에게 악을 쓴다. 도대체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이런 개인의 성적 혼돈상태는 여권신장, 인종차별철폐 그리고 반전평화운동이 전 미국을 뒤덮던 1960년대 말의 시대상을 상징한다. 과연 슈필포겔 박사는 우리의 불쌍한 포트노이에게 어떤 처방을 선사할 것인가. 아니 그가 과연 치료는 가능한 걸까?

 

필립 로스의 소설 <포트노이의 불평>은 야누스의 얼굴 같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혹자에게는 전무후무할 정도로 파렴치한 외설적인 소설로 읽힐 수도 있고, 또다른 이에겐 부모의 억압 아래 자란 불쌍한 청년의 신경쇠약을 극복하기 위한 파란만장한 성적 오딧세이로도 읽힐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포트노이의 불평>은 어느 단편적인 해석에 의존하기에는 너무 다채로우면서도 논쟁적인 소재들을 품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필립 로스는 이 소설이 발표된 후에 비난과 찬사를 동시에 받았던 것 같다. 최근 읽은 필립 로스 후기 소설에 비해, 그의 초기작에 해당하는 <포트노이의 불평>은 거칠고 도발적이다. 그 점의 이 소설의 또다른 매력이라는 점도 부인할 수 없지만 말이다. 누구 말대로 이 책을 두 번 읽는 건 정말 어리석은 일인지 궁금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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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브리맨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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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삶은 평등하지 않다. 특히나 자본주의 시스템 아래서는 인간은 가진 것에 따라 클래스가 나뉜다. 하지만 딱 한 가지 평등한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죽음이다. 아무리 많은 재산과 권력을 가진 인간도 죽음이라는 운명을 피할 수는 없다. 그렇게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살아 있는 동안, 누릴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누리려고 하는 걸까? 언젠가 버킷 리스트가 유행한 적이 있는데, 죽음 앞에 서게 되면 그 버킷 리스트조차 무의미해지지 않을까 싶다.

 

필립 로스가 73살의 나이(올해 그는 82세라고 한다)에 발표한 <에브리맨>을 오래전부터 읽어 보려고 노력해 왔다. 도서관에서 수도 없이 책을 빌렸는데 항상 우선순위에서 밀렸다. 그러다 지난주부터 필립 로스 바람이 불었는지(촉발제는 <네메시스>였다), <네메시스>와 <포트노이의 불평> 그리고 <에브리맨>까지 연달아 읽었다. 이번 주말에 있을 독서모임에 가기 전에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도 읽으면 좋겠지만 분량이 상당해서 가능할지 모르겠다. 지난주에 도서관에 최근에 출간된 그의 <죽어가는 짐승>을 빌리러 갔었는데 찾을 수가 없어서(?) 포기했다. 대신 읽은 책이 바로 <에브리맨>이다.

 

어디선가 필립 로스의 책들이 유대인 문학으로 분류된다는 글을 본 적이 있는데 그의 작품에 일관되게 등장하는 유대인 주인공들의 면면을 유심하게 살펴본다면 충분히 이해가 간다. 이제 죽음이라는 삶의 순간을 맞닥뜨리게 된 노작가는 이름 없는 무명인을 내레이터로 삼아 이야기를 풀어간다. 이야기는 망자의 장례식에서 그를 기억하는 이들이 남기는 고별사로 시작된다. 장례식이 끝나고, 조객들이 떠나고 홀로 남은 망자는 비로소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작가가 사랑해 마지않는 동네 뉴저지 뉴어크 시의 엘리자베스가 내레이터가 나고 자란 고향이었던가. <에브리맨 보석상>의 주인이었던 그의 아버지 슬하에서 형 하위와 내레이터가 자라 사회적 성공을 거두고 잘 먹고 살다가, 노년에 이런 저런 수술을 하며 죽음과 맞서 싸운다는 것이 소설 <에브리맨>의 얼개다. 물론 고인은 전혀 평범하지 않은 삶을 살았다. 자그마치 세 번이나 결혼을 했고, 노년에는 911테러로 공포에 휩싸인 삶의 무대였던 뉴욕 시티를 떠나 바닷가 콘도미니엄에 거처를 정하고 오랫동안 꿈꿔 왔던 화가로서의 삶을 살기 시작한다. 주인공이 꿈꿔온 그림그리기는 아트 디렉터로 정신없이 바쁘던 시절 그의 로망이자 탈출구였지만, 정작 은퇴 후에 그림그리기는 아무 의미 없었다는 걸 깨닫게 된다.

 

첫 번째 부인이었던 세실리아와 결혼해서 낳은 두 아들과의 지속적인 불화는 그의 삶을 더 외롭게 만든다. 그나마 두 번째 헌신적인 부인이었던 피비 사이에서 낳은 딸 낸시만이 그의 유일한 삶의 낙이라고 해야 할까. 마지막 부인이었던 메레테와의 결혼은 왜 그런 결정을 내렸을까라고 자꾸만 되묻게 되는 그런 최악의 결정이었다. 세 번의 결혼이 주인공의 삶에서 어떤 변이의 과정이었다면, 그 변이를 촉발하게 만드는 사건으로 일련의 수술들을 꼽고 있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신체 기관이 정상기능을 하지 못하고 부모님들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A/S 받으며 생명연장을 하는 거라고 늘상 듣곤 했는데 소설 <에브리맨>에서는 정말 그 어느 누구도 피해나갈 수 없는 그런 숙명, 죽음과 사투를 벌여야 하는 개인의 ‘부질없는’ 노력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200쪽 남짓한 이 짧은 소설은 가히 삶의 압축 버전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동생인 주인공은 물질적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둔 천만장자 형 하위를 질투한다. 그런데 그 이유는 물질적 소유권에 관한 것이 아니라 바로 그의 건강이다. 7년 연속으로 입원해서 6개의 (최근 어느 회장님이 시술 받아 죽음의 고비를 넘겼다는) 스텐트와 카테터를 삽입하고 심지어 약한 심장을 위해 제세동기라는 기묘한 장치까지 몸에 넣은 주인공은 병치레 한 번 하지 않은 하위를 부러워하는 것이다. 게다가 일흔 살의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젊은 여자들을 꾀는 모습은 애처롭기까지 하다. 그러니까 주인공은 어떤 의미에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거부한다고 해야 할까. 이걸 늙은이의 노망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살아 있는 인간의 생존의지라고 해야 할지 잠시 헷갈렸다.

 

희한하게도 대부분의 소설에 등장하는 이들은 현실세계의 물질적 궁핍을 걱정하는 이들은 드물다. 대신 다른 고민에 빠져 산다. 이건 명백하게 현실과 문학세계 사이의 괴리라고 불러야 마땅하지 않을까. 어쩌면 막장드라마에 나올 법한 초현실적인 이야기야말로 괴로운 현실계를 잊게 해주는 마약 같은 처방이라는 생각도 든다. 어쨌든 노년에 물질적 걱정 없이 멋진 콘도에서 그림교실을 운영하며 유유자적한 삶을 사는 그를 아들들은 “행복한 신기료장수”라며 비아냥거린다. 물론 그도 아들들과의 화해를 시도해 보지 않은 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자신들과 어머니를 배신한 아버지를 랜디와 로니는 그들만의 방식으로 응징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일련의 과정들은 노년의 주인공이 바란 관계의 원치 않는 소거로 귀결된다. 그가 유일하게 사랑하는 혈육인 낸시조차 편두통 때문에 쓰러진 엄마 피비에게 돌아가고, 주변의 지인들이 하나둘씩 세상을 뜨는 상황은 그가 계획한 뉴욕 복귀를 무산시킨다. 그리고 마지막 에피소드에 해당하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묻힌 쇠락해 가는 유대인 공동묘지에서 어쩌면 자신의 묘를 팔지도 모를 무덤 파는 사람과의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소설 <에브리맨>은 망자가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는 점에서 특정한 내레이터가 소설을 이끄는 기존의 필립 로스의 소설과 변별점을 보여준다. 또 한편에서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 누구나에게 언젠가는 찾아올 죽음에 대해 보다 객관적인 시선을 갖게 만들어 주는 지도 모르겠다. 모두 실패한 결혼생활에서 언제나 자유로운 영혼이었던 주인공이 말년에 돌아갈 가정이 없다는 이유로 외로워하는 장면은 역설적이다. 젊어서는 그렇게 될 줄 몰랐단 말인가. 형 하위가 형수와 반세기에 가까운 행복한 가정생활을 하고(그 나이에 심지어 티벳 여행까지도 나선다), 네 명이나 되는 아들들과 손자들과 더불어 누리는 물질적 성공과 건강에 대한 주인공의 시기와 질투는 어쩌면 의무와 책임감보다 아내에게조차 감출 수 없었던 욕망에 충실했던 자기 삶을 비추는 거울이 아니었을까. 그런 주인공의 욕망은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소거된다.

 

바로 직전에 <포트노이의 불평>을 읽어서 그런진 몰라도, 죄의식과 욕구불만에 시달리던 삼십대의 마마보이 앨릭스 포트노이가 <에브리맨>의 칠십대 주인공이 된 건 아닐까 뭐 그런 엉뚱한 상상이 됐다. 이 책이 자그마치 11쇄나 찍었다고 하는데, 다른 필립 로스의 책에 비해 우리나라에서 인기있는 모양이다. 간결하면서도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제대로 담아낸 대가다운 솜씨가 아닐 수 없다. 누구나 피하고 싶은 죽음을 자신만의 유머로 부드럽게 블랜딩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멋지다.

 

[리딩데이트] 2015년 11월 22일 ~ 23일 1시 2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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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메시스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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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로스의 열혈 팬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출간되는 그의 책들을 꾸준하게 사모으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정작 그의 책을 다 완독한 게 몇 권이나 되지? <휴먼 스테인>은 다 읽었고, <유령 퇴장>도 각별한 인연으로 만났었다.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와 <포트노이의 불평>은 읽다가 도중에 그만 뒀다. 그리고 다음 주에 있을 독서모임을 위해 그가 다 쓰고 나서 절필 선언을 했다는 <네메시스>를 집어 들었다. 지난 여름, 메르스 광풍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적당한 분량의 흡입력 있는 대가의 마지막 작품이라는 생각이었을까 이번에는 무사히 완독에 성공했다.

 

소설 <네메시스>의 주인공 유진 “버키” 캔터는 올해 23살 먹은 뉴저지 뉴어크에 사는 청년이다. 버키의 어머니는 그를 낳다가 죽고, 아버지는 절도죄로 복역한 전과자 출신이다. 그래서 버키의 조부모가 부모를 대신해서 버키를 키웠다. 시대적 배경은 1944년 6월이다. 저지대 뉴어크를 강타한 폴리오의 발병으로 뒤숭숭하기 그지없는 시절이다. 자신이 직접 폴리오의 희생자였던 FDR(프랭클린 델라노 루즈벨트)의 영도 아래 미국은 대공황이라는 전대미문의 위기를 2차세계대전을 통해 탈출할 수가 있었다. 피끓는 청년들이라면 조국과 민주주의 수호라는 대의 아래, 일본과 독일을 상대하는 전쟁터로 향했겠지만 우리의 주인공 버키는 형편없는 시력 때문에 병역 면제를 받았다. 그것은 그에게 혜택이었을까 아니면 수치였을까. 필립 로스는 소설의 시작부터 독자에게 예민한 이슈들을 던지기 시작한다.

 

총탄이 빗발치는 전쟁터 대신 뉴어크 위퀘이크 거리에서 여름 놀이터를 감독하는 체육교사가 된 버키 캔터 선생님은 전쟁에 버금갈 만한 공포와 맞닥뜨리게 된다. 그것은 바로 폴리오라는 치명적인 전염병이었다. 다른 말로는 소아마비라고도 불리는 폴리오가 뉴어크 전역에 창궐했는데, 소설의 주무대가 되는 위퀘이크 지역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불량한 이탈리아 건달들을 혼자 힘으로 제압한 버키 캔터 선생님(분명 이 소설은 내레이터가 진행하고 있는데 왜 자꾸만 캔터 선생님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는지 궁금했는데, 그 이유는 마지막 <재회> 편에서 설명이 된다)은 유대인 소년소녀 그리고 그들 부모의 우상이 되기에 이른다. 자신 역시 유대인이었던 필립 로스는 미국사회의 여전히 뜨거운 감자 같은 이슈라고 할 수 있는 인종문제도 살짝 터치해 주는 멋진 센스를 발휘해주신다. 소설의 모든 장치를 작가가 고안한다고 가정했을 때, 무엇 하나 허투루 볼 수가 없을 것 같다.

 

비록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전과자 아버지의 사랑도 받지 못한 채 할아버지에게 강인한 용기와 투쟁정신을 물려받고 어머니를 대신한 할머니로부터 따스한 사랑을 받고 자란 버키 캔터에게 또하나의 축복이 주어졌다. 그것은 동료교소 마샤 스타인버그와의 만남 그리고 사랑이었다. 폴리오의 공포로부터 멀리 떨어진 포코노 산맥에 있는 인디언 힐 캠프에 가 있던 마샤는 버키에게 하루가 멀다 하고 사망자가 발생하는 위퀘이크로부터 안전하고 평화로운 그리고 사랑하는 애인이 있는 인디언 힐로 오라고 간청한다. 버키의 선택지는 하루가 갈수록 좁아진다. 위퀘이크의 놀이터에서 자신이 가르치던 아이들이 하나둘씩 폴리오의 희생자가 되어 치르는 장례식의 비통함은 이루 표현할 수가 없을 지경이다. 도대체 어떤 이유 때문에 아이들이 유대인들이 그렇게 믿는 야훼 신의 소위 “정당한” 분노의 대상이 되어야 한단 말인가. 이미 신은 버키로부터 어머니를 빼앗아 가지 않았던가. 프랑스에서 전투 중에 전사한 친구 제이크의 경우는 또 어떤가. 생의 대부분을 함께 하고, 미래도 같이 하리라고 생각한 소중한 이를 아무리 우연의 작용이라고 하지만 잃은 후의 트라우마는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버키가 느낀 종교적 분노의 연장선에는 소설의 시간적 배경이 되었던 1940년대 유럽대륙에서 히틀러의 나치일당에 의해 진행된 홀로코스트 비극이 맞닿아 있다. 수백만의 유대인들이 어떤 잘못을 했기에 신으로부터 그런 부당한 대우와 가혹한 죽음을 당해야 했단 말인가. 프래그머티즘과 합리주의적 사고가 지배하는 신대륙에서도 유대인들의 처지는 다르지 않다고 작가는 소설을 통해 증언한다. 폴리오가 공동체에 확산되어 가면서 서로를 불신하고 희생양을 찾느라 혈안이 된 가운데, 유대인들이 발병의 원인이라는 근거 없는 낭설이 퍼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필립 로스는 이성에 우선하는 죽음, 다시 말해 존재의 소멸이라는 극한의 공포가 주는 야만의 시대를 문학이라는 방식을 통해 독자에게 전달한다. 우리도 이미 지난 여름의 메르스 사태를 통해, 확인되지 않은 유언비어가 난무하는 가운데 함께 살기보다 각자도생을 권하는 사회가 숨기고 싶어했던 추한 민낯을 확인하지 않았던가.

 

그에 비한다면 주인공 버키 캔터 선생님의 영혼은 순수하다 못해, 옛 제자에게 왜에 미친 순교자라고 불릴 정도다. 자신이 해야 할 의무를 수행하지 못하고, 포코노 산맥의 인디언 힐로 도망친 죄에 대한 “네메시스”를 평생지고 가야할 업으로 생각하고 자신이 그나마 가지고 있던 행복할 수 있었던 기회를 저버린 이야기로 이어지는 남자의 고백은 너무 슬프다. 폴리오를 겪고 나서 불구의 몸이 된 버키가 내린 되돌릴 수 없는 결정은 그야말로 마스터클래스급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폭풍우가 가신 뒤의 인디언 힐에 내리쪼이는 눈부신 햇살은 그만큼 불안의 전주곡처럼 찬란하다. 바로 그 지점에서 필립 로스는 다시 독자에게 묻는다. 왜 이렇게 우리 사회의 건강하고 아름다운 청년(개인)이 그런 무거운 짐을 짊어져야 하느냐고 말이다. 소설 <네메시스>의 진짜 내레이터 아널드 메스니코프(오래전 놀이터 시절의 캔터 선생님의 제자)가 아무리 버키에게 논리정연한 죄사함을 들려준다고 해도, 지난 27년은 되돌아오지 않는다. 신 외에 누가 버키에게 보상을 해줄 수 있을 것인가.

 

필립 로스 작가의 전매특허라고 할 수 있는 독자의 감정개입과 분리의 순간을 절묘하게 만들어주는 내레이션 기법과 인생의 정점에서 나락으로 추락하는 인물에 대한 심도 깊은 분석은 <네메시스>에서도 빛을 발한다. 버키 캔터 선생님이 시시각각 확산되는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충실했다는 것만으로도 그의 삶은 높이 평가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는가? 필립 로스도 그가 할 줄 아는 전부가 삶에 천착한 놀라운 이야기들을 직조해내는 것이라면, 계속해서 그 일을 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리딩데이트] 2015년 11월 11일 ~ 20일 11시 3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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