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벌레와 메모광
정민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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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을 읽으면서 지식 혹은 깨달음의 지평을 넓히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모름지기 책 읽는 이들이라면, 책을 통해 얻게 된 사유를 행동으로 전환시켜서 실천에 옮겨야 하는데 대부분 그러지 못하는 것 같아 아쉽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읽게 된 정민 선생의 <책벌레와 메모광>은 개인적으로 앞으로 나의 책읽기에 대해 어떤 지향점을 제시해 준 것 같아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저자인 정민 선생은 한양대 국문과 교수님이라고 하는데, 내게는 왠지 한학을 하시는 선비라는 느낌으로 다가왔다. 선생은 우리 선현들이 남긴 한문 글들을 집중적으로 연구하시고 계신 것 같다. 방대한 저작을 남긴 다산 선생의 편지글들을 모으시고, 다산 학풍의 바탕이 되는 초서에 대해서도 자세한 설명을 마다하지 않으신다. 바다 건너 하버드 대학 옌칭도서관에 연구를 하러 가셔서도 자료 수집에 여념이 없었다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됐다.

 

쓰신 글의 소개 순서가 좀 엇갈리긴 하지만 연구 과정에서 수집한 자료들과 당신이 남기신 메모를 딱풀로 책제본하시는 광경을 보면 모든 것이 속도로 결정되는 디지털 시대의 아날로그 방식을 고수하는 전형적인 선비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선생의 제본 철학은 단순하게 모은 자료를 남기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렇게 정선한 자료들을 하나로 만드는 과정에서 다시 한 번 공부하게 된다는 지론이다. 기계적으로 딱풀을 이용해서 책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료를 수집하게 된 과정을 메모로 남기고(선생은 포스트잇을 사용하시기 보다 선현들의 발자취를 따라 붓과 먹을 이용해서 첨언 남기시길 즐기시는 모양이다) 다시 한 번 읽어 보시면서 비로소 수집한 자료를 완성하는 것이다. 메모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다는 듯, 당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설득력 있는 메아리라고 부르고 싶다.

 

책읽기가 개인의 사유를 자극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생각이라는 건 항상 그렇지만, 너무 휘발성이 강하기 때문에 그 때 그 때 기록하지 않으면 달아나 버리기 마련이다. 개인적으로 책 읽고 나서 보잘 것 없는 독후감을 쓰기 위해서 상세하게 메모를 한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를 비교해 보면 전자의 품질이 월등하게 낫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다만 그러기 위해선 메모 공책을 따로 준비해서 책 읽다 말고 영감을 받은 내용들을 그 때마다 적어야 하는데, 이게 보통 귀찮은 일이 아니다. 그러다 보면 책 읽기의 맥이 빠지기도 하니 말이다. 하지만 정민 선생의 쓰신 대로 생각에 날개를 달리게 하고, 사고에 엔진을 붙이려면 이 정도 수고는 마다해야지 않을까.

 

책벌레 이야기보다 메모광 이야기가 먼저 튀어 나왔는데, 우리 선현 중에는 간서치라는 별명으로 널리 알려진 이덕무 선생에 관한 고사가 책에서 자주 등장한다. 가난 때문에 집에 불을 때지 못해 동상에 걸려 가면서 독서와 필사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에서는 가슴 한편에 찡한 감동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비싼 책 가격을 감당하기 어려워, 누가 희귀한 고서를 소장하고 있다는 말을 들으면 여러 번 청해 구해다가 독서와 필사를 하고 약속대로 반드시 돌려주었다고 한다. 그런 신뢰가 바탕이 되어 책주인이 먼저 나서서 책을 빌려 주겠다고 제안하기도 했다고 했던가. 멋진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나도 멋진 장서인을 하나 갖고 싶다는 생각을 몇 년 전부터 해왔지만, 가격이 만만치 않아 여전히 주문을 망설이고 있는 중이다. 그런 점에서 책의 권두를 시작하는 한중일 삼국의 장서인 비교도 흥미롭다. 한국의 경우에는 책을 훼절시켜 가면서까지 장서인의 기록을 지우려고 했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소유 관계의 단절을 뜻하는 ()”라는 글자를 찍었단다. 좀 정감이 없다고 해야 할까. 중국에서는 책을 소유할 때마다 개의치 않고 줄줄이 장서인을 찍어댔다. 정민 선생의 글 중에 책 읽는 사람이 주인이다라는 표현을 얼핏 본 것 같은데, 바로 공감할 수가 있었다. 어제도 독서모임에서 개인이 집에서 소장할 수 있는 책의 양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그렇게 책을 사 모은들 읽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며(왠지 찔끔하다)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 책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들도 널리 읽을 수 있도록 선물로 주거나 기증하는 게 독서라는 책의 본령을 위해서도 좋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실천은 쉽지 않겠지만 말이다.

 

꾸준한 책읽기와 그에 따른 메모하는 습관을 권장하는 이 책의 메인 테마 외에도 소소하면서도 유용한 독서 정보들이 <책벌레와 메모광>에는 담뿍 담겨 있다. 가령 예를 들어 누군가 책에 꽂아둔 은행나무 잎의 경우를 살펴보자. 나도 개인적으로 그런 적이 몇 번 있는데 가을날의 독서를 즐기다 바닥에 떨어진 은행 이파리를 그냥 재미로 책에 꽂아둔 게 아닌가 싶었는데, 선현들은 책벌레의 공격으로부터 책을 보호하기 위해 은행나무 잎을 책에 꽂았다고 한다. 한 수 배웠다. 그리고 진한 향기의 운초도 비슷한 효과를 거두기에 적합하다고 한다. 두어(蠹魚)라 불리는 책벌레는 물론 이와 벼룩 퇴치에도 효과만점이라고. 오징어 먹물 이야기는 또 어떤가. 요즘 오징어 먹물을 이용한 파스타나 염색약 이야기는 들어 봤어도 붓글씨를 오징어 먹물로 쓴다는 말은 또 처음 들어봤다. 오징어 먹물로 글을 쓰면 마치 펄이라도 들어간 것처럼 멋져 보이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종이에 스미지 않고 박락이 떨어지면서 사라진다는 것이다. 이 오징어 먹물로 사기꾼들이 계약서 작성 등에 장난질을 치기도 했다니 색다른 소재를 이용한 글쓰기의 운치를 즐기는 선비들의 풍류에 비할 바가 아닌 것 같다.

 

4년 전 선생의 <삶을 바꾼 만남> 온라인 연재를 인연으로 출판사가 주최한 강진답사를 함께 한 적이 있다. 오래전 역사학도로 수많은 답사를 다녀봤지만, 개인적으로 그 답사를 최고로 꼽고 싶다. 남도답사를 직접 인도해 주시며 방문한 곳곳에 얽힌 사연을 설명해 주시던 선생의 모습을 보고 이 분이야말로 21세기 모바일시대에 풍유를 아는 보기 드문 선비구나 싶었다. 그 때도 그랬지만 여전히 당신의 분야에서 학문에 정진하시는 모습을 <책벌레와 메모광>을 통해 다시 볼 수 있어 감개무량했다. 아울러 선생 삶의 천진한 즐거움을 일별할 수 있어 좋았다. 강진답사 4행시 장원으로 받은 부채는 아까워 쓰지 못하고 고이 모셔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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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11-29 2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약용의 초서 방법을 직접 실행해보고 싶은데, 손으로 기록하는 일이 쉽지 않을 것 같아요. 저는 한글 워드로 책의 문장을 베껴서 치는데 이것도 의외로 시간이 많이 들어요.

레삭매냐 2015-11-30 09:17   좋아요 0 | URL
요즘 필사를 위한 책들이 또 트렌드인가 봅니다.
그전에는 컬러링 책들이 트렌드였는데 말이죠.

전 손글씨가 엉망이라 차마 도전도 못해보겠네요.
그래도 대단하시네요, 워드로 치는 것도 쉽지 않
을 것 같은데요 :)

대장물방울 2015-12-10 2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그러신 레삭매냐 님도 축하드려요. 흐흣 : )

레삭매냐 2015-12-14 13:40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대장물방울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