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 양을 잃다 - 책과 인간의 운명을 탐구해온 한 편집자의 동서고금 독서 박물지
쓰루가야 신이치 지음, 최경국 옮김 / 이순(웅진)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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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책을 알게 된 건 정민 선생의 <책벌레와 메모광> 덕분이다. 항상 하는 말이지만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는 정말 즐겁다. 아마 선생도 당신의 책에 실린 글 중에 쓰루가야 신이치의 신세를 진 부분도 있지 않을까? 그럴 정도로 책모퉁이에 새겨진 동서고금을 아우르는 독서 박물지라는 주석이 바로 와 닿는다.

 

이 책을 지난달 30일에 사서 바로 읽기 시작했는데 그동안 하도 다른 책들을 읽어 대는 바람에 무려 한 달이나 걸려서 읽게 됐다. 사실 이런 에세이류의 책들은 마음먹고 읽기 시작하면 금세 다 읽을 수도 있지만 또 그렇게 되지 않는 게 현실이다. 생각 같아서는 아무 때나 죽 펼쳐서 궁금한 것부터 읽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그랬다가는 완독이 되지 않을 것 같아 이번에는 순서대로 차근차근 읽었다.

 

쓰루가야 신이치라는 분은 아마 일본의 저명한 독서가인 것으로 사료된다. 그만큼 동서를 아우르는 박학한 지식을 바탕으로 책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책 사이에 은행나무 이파리를 끼워 놓아, 책벌레를 쫓아다는 이야기는 이미 정민 선생의 책에서도 소개된 바 있다. 꽤 오래 전에 중국 당나라 시대를 배경으로 한 <명판관 디 공> 시리즈 중의 한 권인 <황금살인자>를 읽은 적이 있는데 네덜란드 출신 로베르트 반 훌릭에 대한 소개도 이 책에 실려 있다. 나가사키를 통해 서양문물을 적극적으로 일본에 전파해준 화란(네덜란드)에 대한 후의가 담뿍 담겨져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도치기현에 있었던 화적상이 알고 보니 네덜란드 로테르담에서 만들어진 에라스무스의 목상이었노라는 기원을 찾는 이야기 또한 흥미롭다. 바다 건너 네덜란드에서 만들어진 목상이 일본으로 건너가 신묘한 힘을 발휘했다는 설화까지 곁들여져 지금은 일본의 국보가 되었다고 하던가.

 

사실 저자만큼 일본 고전문학과 데라다 도라히코 같은 문인들의 이름이 낯설어서 그런 진 몰라도 숱하게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한 주석이 없다면(사실 주석을 읽느라 시간이 많이 소용됐다) 이 박물지는 좀 지루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을 수도 있다. 일본 사람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모르는 이가 없는 김소월이나 박목월 같은 시인들 그리고 최치원이나 설총 같은 당대의 석학들의 이름을 어떻게 알겠는가 말이다. 지식의 모자람 때문에 책에 몰입할 수 없음이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오래 전에는 책을 읽을 적에 음독이 대세를 이루었으나, 근대로 넘어오면서부터 묵독으로 바뀌게 되었다는 설명도 재밌다. 하긴 요즘에는 책 자체를 대하는 이들이 적어져서 묵독이건 음독이건 간에 지하철에서 독서하는 사람을 찾는 놀이까지 생겼다고 하지 않던가. 책 읽는 것을 사명으로 여겨 하루에 9센티미터씩 책을 읽었다고 하는 다독가에 대한 이야기도 등장하는데, 이렇게 책을 사랑하던 이들이 존재하던 시절 이야기는 이제 전설처럼 아련할 따름이다. 책이 귀하던 시절에는 책이 너무나 소중해 책읽기 역시 게을리 하지 않았지만, 근대가 되면서 대량생산과 교육의 결과로 누구나 책을 접할 수 있게 되면서 상대적으로 책읽기에 무관심하게 된 건 아닐까. 하긴 니체의 말마따나 책을 소장하는 것과 읽는 행위 그리고 그 책을 이해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

 

16세기 말, 명나라 시대 남창에서 예수회 수도사였던 마테오 리치가 기발한 기억술을 선보였다는 사실도 쓰루가야 신이치는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그 전에 특별한 연관성을 사물에 부여해서 기억하면, 아무리 양이 많더라도 수월하게 기억할 수 있다는 말도 있는데 나같이 만날 깜빡깜빡 하는 사람에겐 그 방법이 통할지 모르겠다. 미국 예일대 출신의 조너선 스펜스 교수가 쓴 <마테오 리치, 기억의 궁전>이란 책을 무려 5년 전에 읽었는데 지금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으니 허망할 따름이다. 그 책을 읽느라 제법 고생한 기억만 남아있다. 함께 소개된 고대 그리스 시인 시모니데스의 일화도 어디선가 읽었는데 당최 기억이 나지 않아 안타까웠다.

 

<정독>편에서는 책을 무게로 달아 읽었다는 것이 자랑이 아니라 무식하다고 핀잔을 주며 단 몇 권의 책이라도 바르게 읽는 것이야말로 중요한 것이 아니냐고 독자에게 묻는다. 그 글을 읽으며 난삽한 독서를 하는 나같이 우매한 독자에게 훈계하는 고수의 죽비 같이 들렸다고 하면 과언일까. 자기변명 같지만, 세상은 넓고 읽어야할 책은 너무 많기에 한 권의 책을 꾸준하게 몇 번씩 읽을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고 말하고 싶다. 도대체 쓰루가야 신이치 같은 고수들은 어느 시간에 그렇게 많은 독서를 한 걸까. 책읽기가 업이 아닌 바에야 도무지 신기하기만 할 뿐이다.

 

유시민 선생은 자신에게 흥미롭지 않은 책은 과감하게 던져 버리라고 했는데, 쓰루가야 신이치 작가는 다른 방식의 독서를 후기에서 권하고 있다. 지금 읽는 책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해서 내던져 버릴 것인가. 저자는 잘 모르면 모르는 대로 꾸준하게 독서하라고 충고해주고 있다. 인생을 살며 체험이 쌓이고, 독해력이 향상되면(그러기 위해선 독서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새로운 인식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모든 경우에 적용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충분한 시간을 들여 자신만의 것으로 소화시키고 변용시키는 과정이야말로 우리 독서인들이 가져야 할 마음가짐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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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병사와 함께한 여름
베티 그린 지음, 권혜림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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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인데 그 어느 때보다 부지런히 책을 읽고 있다. 공쿠르 수상작인 리디 살베르의 <울지 않기>를 필두로 다이 시지에의 <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소녀> 등등해서 이책저책 참 많이도 읽는구나. 문학동네에서 출간된 베티 그린의 <독일병사와 함께한 여름>을 크리스마스 기간 동안 읽었다. 2차 세계대전이라는 주제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이 소설 역시 전쟁 중에 일어난 사건을 소재로 해서 그런지 더 재밌게 읽을 수가 있었다. 예전에 중원문화에서 <독일포로와 소녀>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적이 있는데, 이번에 새로운 제목과 번역으로 출간된 모양이다.

 

1940년대 어느 날, 주인공 퍼트리샤 앤 버건이 사는 1,200명 남짓한 사람들이 사는 아칸소 주 젠킨스빌에 일단의 독일군 포로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미국 남부 아칸소는 지독한 인종차별과 가부장적 시스템이 정착된 곳이다. 주인공 패티가 아버지 해리로부터 무자비한 가정폭력을 당하는 장면들이 소설에 계속해서 등장한다. 딱히 맞을 만한 이유도 없는데, 아무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해리는 작은딸 샤론을 편애하면서 큰딸 패티에게 폭언과 매질을 해댄다. 올해 열두 살 난 소녀 패티는 유대인이기 때문에 다른 친구들과 함께 침례교 수련회에도 가지 못하고, 도서관도 여름방학을 맞아 문을 닫았기 때문에 마땅히 읽을 책도 없이 그저 그런 시간을 보내고 있다. 아버지 해리가 운영하는 잡화점에도 자주 들르지만 아버지는 그녀를 귀찮아할 따름이다. 어머니 역시 딸에게 그다지 애정을 보여주지 않는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그녀를 이해해 주는 사람은 집안일을 도와주는 흑인 아줌마 루스뿐이다.

 

그렇게 외로운 생활을 하던 패티에게 잘 생기고 친절한 독일군 포로 프리드리히 안톤 라이커의 등장은 일종의 구원 같은 메시지였다. 농장에서 목화 딸 때 쓰기 위해, 밀짚모자를 사러 상점에 들른 독일군 포로들의 통역을 맡은 라이커와 이야기를 나누며 어린소녀는 그만 첫사랑에 빠져 버린다. 언어의 장벽을 피하기 위해 안톤 라이커가 거의 완벽에 가까운 영어를 구사할 수 있다는 설정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독일과 치열한 전쟁을 치르고 있던 시기라 보수적인 미국 남부 사람들에게 독일군 포로들은 그저 사악한 나치로 보일 뿐이다. 게다가 미국 해안에 특수임무를 띤 독일비밀공작원들이 상륙해서 비밀조직과 접선을 시도했다는 흉흉한 소문까지 나도는 판국이었다. 미국 법무부에서는 적군을 도와주는 이들을 반역죄로 처벌하겠다는 공표하기도 했다.

 

그러던 와중에 괴팅겐 대학 의과생 출신의 안톤 라이커는 기지를 발휘해서 포로수용소를 탈출하고 패티의 도움을 받아 패티네 버려진 차고에 은신하게 된다.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도 못하고, 가족으로부터 사랑도 받지 못하는 소녀에게 은밀한 비밀이 생긴 것이다. 패티는 적극적으로 라이커를 돕기 시작한다. 아버지에게 선물했던 고급셔츠를 건네주고, 집에서 음식을 몰래 빼돌려 라이커에게 전달해준다. 나치와 상극일 수밖에 운명의 유대인 소녀가 동정과 연민에 젖어 포로수용소를 탈출한 ‘위험한’ 적국 병사를 돕는 게 그렇게 나쁜 일이었을까. 전시라는 특수상황을 고려해봤을 때, 철부지 소녀의 인도주의 정신의 발로라고 여길 수 없는 상황이 아니었을까. FBI 수사관까지 동원돼서 심문에 나선 것을 보면 말이다.

 

책을 읽는 동안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안톤 라이커의 운명도 그렇고, 나이 어린 패티가 그를 도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아버지 해리가 그녀에게 가할 폭력의 수위를 도무지 가늠할 수가 없어서 더 그랬던 것 같다. 호기심 많은 우리 꼬마 숙녀는 지나가는 자동차에 돌멩이 던지기 놀이를 하다가 유리창을 깨는 사고를 내고, 아버지가 같이 놀지 말라는 프레디와 어울리다가 그만 사단이 나고 만다. 패티에게 행해지는 아버지 해리의 무자비한 폭력을 목격한 안톤 라이커는 은신처에 숨어 있다가 패티를 구하러 나와 그만 신분을 노출시킬 뻔한다. 그 모든 것을 목격한 경험 많은 루스는 근사한 아침식사로 안톤 라이커를 대접하고, 더 이상 위험해지기 전에 떠나겠다고 선언한 안톤 라이커를 말리지 않는다. 아침식사를 하던 식탁에서 흑인이 없으면, 청소는 누가 하느냐는 루스 아줌마의 질문에 답하는 안톤 라이커의 대답은 인상적이었다. 라이커는 떠나면서 패티에게 잊지 못할 선물을 남겨준다. 그렇게 홀로 남은 패티를 찾아온 운명은 가혹하기 짝이 없다.

 

베티 그린 작가는 전쟁 중에 적국 병사와 자아도취적 사랑에 빠져 그를 적극적으로 도운 유대인 소녀의 이야기를 <독일병사와 함께한 여름>을 통해 비극적으로 풀어냈다. 주류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유대인 가정 내의 불화를 바탕으로, 전쟁이라는 큰 형태의 폭력을 가정폭력과 비교하면서 어떤 것이 더 문제일까 하는 문제의식에 도달한다. 안톤 라이커는 패티에게 히틀러와 그녀의 아버지 해리가 본질적으로 비슷한 성향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다만 누가 어떤 종류의 권력을 더 가지고 있냐에 차이일 뿐이라는 지적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소설에 등장하는 가정폭력은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겠지만, KKK단이 암약하던 시기 미국 남부에 살던 흑인들에게 공손함과 복종만을 요구하던 지독한 인종차별과 더불어 시대상을 보여주는 좌표로 작동한다.

 

개인적으로 주인공 패티 버건이라는 소녀의 철없는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걱정이 됐다. 안톤 라이커에 대한 아련한 사랑을 그저 마음에 담아 두었으면 좋았을 것을, 그가 떠나기 전에 준 반지에 대해 아버지 가게에서 일하는 파커 언니에게 자랑한 것이 화근이 되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빚게 된다. 열두 살짜리 소녀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한 걸까. 어린 소녀에게 반역죄를 물어 소년원에서 교화시키는 결말 부분은 정말 끔찍했다. 비이성적 애국주의의 광풍이라고 해야 할까. 고향에 남은 부모님과 그들이 운영하는 상점에 가해지는 린치도 인종주의 이슈와 결합되면서 인종차별과 역인종차별을 당하게 되는 케이스에 대한 작가의 시선을 노출시킨다.

 

소설에 대한 상상력을 좀 더 확장해 본다면, 과연 6년이 지나 법적 성년이 된 패티는 바람대로 대학에 진학해서 기자가 되고 싶다는 자신의 꿈을 이뤘을까. 그리고 괴팅겐에 산다는 안톤 라이커의 부모님을 찾아가 그의 최후에 대해 어떻게 전해 주었을 지 궁금해졌다. 이 책의 후속작으로 <오랜 시간 뒤에 온 아침(Morning Is a Long Time Coming)>이라는 작품이 있다고 하는데, 그 책에 집으로 돌아간 패티의 또 다른 이야기들이 실려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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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소녀
다이 시지에 지음, 이원희 옮김 / 현대문학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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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독서모임에서 내년 첫 번째 독서모임 책으로 김숨 작가의 신간 <바느질하는 여자>를 골랐다. 그러다 나온 책의 제목 이름이 바로 중국 출신 작가 다이 시지에의 <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소녀>라는 책이었다. 같은 모임에서 헬렌님이 이 책 정말 좋다는 말을 듣고 주저하지 않고 인근 램프의 요정 서점에서 거의 새책 같은 <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소녀>를 발견하고 데려왔다. 이미 읽고 있던 리디 살베르의 신간을 읽고 나서 바로 <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소녀>를 집어들었다. 250쪽 남짓한 분량이었는데 너무 재밌어서 이틀 만에 다 읽었다. 고마워요 헬렌님.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1972년 중국의 어느 시골마을이다. 중국 대륙의 수령 마오쩌둥의 영도 아래 시작된 문화대혁명은 그야말로 야만의 기록이자 퇴행의 역사였다. 역설적으로 마오 주석의 명령을 치열하게 수행했던 바로 그 홍위병들이 인민의 적으로 몰려 숙청되고, 하방되어 시골마을로 내려가 기약 없는 농촌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이 소설의 주인공 (화자인) 나와 뤄가 홍위병이었다는 건 아니다. 그들은 지식인 계급의 자식들로 이제 겨우 열여덟 살 먹은 청년들이다. 마오 주석의 어록을 기록한 책 외에는 모든 서방 부르주아 세계를 그린 책들은 금서로 지정되고, 그런 책을 읽는 건 반동분자들의 파렴치한 행위로 치부되던 그런 중세 암흑기 같은 시절을 소설은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한 때 아편농사를 짓던 하늘긴꼬리닭마을의 촌장은 나와 뤄가 마을에 도착한 첫날, 소지품 검사를 하던 중에 생전 처음 보는 바이올린을 부르주아의 장난감이라며 불살라 버리려고 하지만, 타고난 이야기꾼인 뤄의 기지로 위기를 모면한다. 그 이후는 언제 재교육에서 벗어날지 모르는 기약없는 나와 뤄의 하방생활 생존기가 이어진다. 영화상영 시설이 부족했던 그 시절에, 나와 뤄는 촌장이 영화를 보고 나서, 구전영화를 상영하라는 기상천외한 임무를 수행하기도 한다. 단순하게 영화의 상황과 대사를 외우는 것만으로 영화 상영 시간을 맞출 수 없었으리라. 그렇게 다이 시지에 작가는 상상력과 암담한 상황 속에서도 피어나는 유머를 통해 이야기를 훌륭하게 전개해 나간다. 이즈음에 바느질 처녀라는 매력적인 캐릭터도 투입된다. 제목에 등장하는 바느질하는 중국소녀가 바로 바느질 처녀다.

 

나와 뤄처럼 하방된 안경잡이가 가지고 있는 금서가방의 존재를 알게 되면서 그들의 운명은 급속하게 소용돌이치기 시작한다. 하방에서 벗어날 수 있는 동아줄의 방법으로 방앗간 노인의 민요수집이라는 절호의 기회를 잡지만, 자신의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걸 알게 된 안경잡이는 나와 뤄에게 모종의 거래를 성사시키고 마침내 비밀의 금서를 획득하게 된다. 발자크의 <위르쉴 미루에>를 필두로 해서, 로맹 롤랑의 <장 크리스토프>와 알렉상드르 뒤마의 <몬테크리스토 백작> 같은 고전 걸작들을 그야말로 수백 페이지의 강물처럼 주인공을 덮쳤다. 재교육이라는 비참한 상황 가운데, 세계에 맞설 수 있다는 가능성만으로도 그 책들이 주는 위안은 대단했을 것이다.

 

화자가 고전문학 세계에 온전하게 정신이 팔린 동안, 뤄는 나름대로 사랑하는 바느질 처녀를 자신이 상상하는 문명인으로 교화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자신이 읽은 책의 내용을 그녀에게 전달하기 위해 고소공포증와 싸우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을 찾은 바느질 처녀의 아버지 재봉사에게 자신들이 읽은 소설을 구전으로 전달해 주던 나와 뤄는 집 밖에서 엿듣고 노회한 마을 촌장에게 발각되어 공안부에 끌려갈 위기에 처하게 된다. 그렇지 이렇게 이야기가 이렇다 할 위기 하나 없이 좋은 방향으로만 흘러갈 리가 없지. 그 위기를 한때 아편재배로 생계를 꾸려가다 골수공산당으로 변신한 촌장은 자신의 충치를 저명한 치과의사 아들인 뤄가 치료해 준다면 무마해 주겠다는 거래를 시도한다. 그리하여 재봉틀을 이용한 촌장의 썩은 치아 치료 과정에서 저자는 이 소설 최고의 희극적인 장면을 연출하기에 이른다. 앞서 말라리아에 걸린 뤄를 치료하기 위해 바느질 처녀가 소환한 네 명의 무당이 등장하는 장면에서 표면적으로는 사회주의 유물론이 지배하는 중국사회가 가진 이중성을 드러내지 않았던가. 안경잡이가 어렵사리 구한 민요 가사가 너무 저속하다며, 자신의 안위와 영달을 위해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맞게 표절하는 장면처럼 공산주의 시스템의 허위와 위선을 고발하는 것처럼 다가왔다. 사람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뤄와 바느질 처녀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화자 나에 대한 심리묘사가 돋보인다. 나는 뤄 못지않게 바느질 처녀를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지만, 기존의 도덕률 때문인지 나의 행보는 갈지자처럼 엇갈린다. 나는 무의식의 세계를 대변하는 일련의 개꿈을 통해 미래에 대한 예시 혹은 징조를 엿보지만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도리가 없다. 끝이 보이지 않는 야만의 시대를 사는 청년의 불안감을 형상화한 나의 꿈은 암울하기만 하다. 그렇기 때문에 금서에 대한 유혹은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현실이 암울할 때, 이상적인 탈출구로서 고전문학은 도피할 수 있는 강력한 이상향으로 작동한다는 것을 다이 시지에 작가는 <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소녀>를 통해 독자에게 전달해준다. 프랑스에서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저자는 영미문학의 저자들보다 상대적으로 프랑스 독자들에게 좀 더 쉽게 어필할 수 있는 발자크를 선택한 게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상상이 되기도 했다.

 

이 소설에서 하일라이트는 발자크 문학을 통해 자아의 정체성을 깨달은 바느질 처녀는 고향마을을 떠나기로 결정하는 장면이다. 그녀를 무식한 시골처녀로 인식하고 재교육의 대상으로 여긴 사이비 지식인 뤄의 생각은 오산이었다. 하방 중인 두 명의 청년들에게 무한한 사유와 상상력의 자유를 주었던 문학의 힘은 바느질 처녀에게도 마찬가지로 작동했고, 발자크 덕분에 그녀는 자신이 가진 아름다움의 비밀을 깨달았던 것이다. 어쩌면 혁명이 이루지 못한 사고의 혁신적인 전환을 문학 혹은 문화예술이 가능하게 할 수 있다는 상징이었을까. 대단히 멋진 결말이 아닐 수 없다. 다이 시지에 작가가 직접 연출한 동명의 영화도 있다고 하는데(그런데 자신이 직접 이 이야기만큼은 영화로 다루고 싶지 말하지 않았었나) 그 영화도 한 번 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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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주머니에 넣고 - 언더그라운드의 전설 찰스 부카우스키의 말년 일기
찰스 부카우스키 지음, 설준규 옮김, 로버트 크럼 그림 / 모멘토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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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수중에 넣은 찰스 부카우스키(부코스키보다 왠지 이렇게 부르는 게 더 멋지게 들린다 나는)의 <죽음을 주머니에 넣고>를 영화 <싱글맨>을 다 보고 나서 바로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책 너무 재밌다. 얼핏 보면 작가라기 보다 기인에 가까운 찰스 부카우스키라는 걸 그의 소설인 <우체국>과 <여자들>을 읽으면서 느낀 바 있지 않은가. 그의 자유분방한 삶은 경이스럽다고 해야 할 정도인데, 일흔 살을 넘긴 노작가의 삶도 왕년의 그것에 비해 전혀 달라진 게 없어 보인다. 그렇게 자유로운 삶을 살면서도 꾸준하게 글을 쓰고, 돈을 벌어 생계를 할 수 있다는 점이 그저 부러울 따름이다.

 

<죽음을 주머니에 넣고>는 표지에 나와 있는 것처럼 부카우스키의 말년 일기다. 그가 이 저널을 쓰고 난지 3년 뒤에 그는 책에서 입버릇처럼 말하는 ‘하데스의 세계’로 위치이동을 했다. 과연 부카우스키는 왼쪽 주머니에 죽음을 찔러 넣고 다니며 언제라도 만날 준비가 되어 있었을까? 어떤 회한 없이 먹고 마시고 섹스하면서 산 70평생을 마감 지을 무렵에 노작가는 마음의 준비가 단단히 되어 있던 모양이다. 인간이라면 모름지기 두려워할 법한 죽음조차도 이 작가가 가진 불굴의 또라이 정신은 꺾을 수가 없었던 모양이지. 대단하다 대단해 정말.

 

그의 저널에서 경마장 이야기는 거의 빠지지 않는다. 오랜 시간 복잡한 길을 거쳐 운전을 해 가야만 도달할 수 있는 경마장에 마치 인생의 비밀이라도 숨어 있다는 것처럼 부카우스키는 뻔뻔하게 경마장에서 자신이 보고 느낀 것들에 대해 스스럼없이 말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양반이 아주 또라이는 아닌 것을 증명하는 것이, 당시 아버지 조지 부시 행정부에 대해서 날카로운 비판하는 모습도 보인다. 별것도 아닌 전쟁에서 이긴 것(걸프전)을 가지고 으스대지만, 실상 경제는 이미 바닥을 치고 있더라는 냉정한 분석에 할리우드에서 수천만 달러를 들여 만든 거지같은 영화들이 소비되고 있는 현실에 대해 분노를 터뜨리기도 한다. 어라, 이 양반 보통 노인네가 아닌데 그래.

 

작가론도 눈여겨 볼만하다.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 없이 자기 자신을 위해 글쓰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역설하는 장면에서는 정말 압권이다. 하긴 그 시절만 하더라도 요즘처럼 SNS 같이 실시간으로 달리는 악플이 없었을 시절이니. 비록 사반세기 전의 일들이긴 하지만 아직까지 부카우스키가 살아 있가도 해도, 강철멘탈의 소유자인 이 늙다리 작가는 소통만능의 시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말들을 글로 내질르며, 술도 양껏 마시고 경마장에 출입하며 그렇게 살아겠지 싶다. 내가 가진 도덕률 때문에 그의 글들에 전적으로 공감할 수 없지만 묘하게도 공감하는 발언들이 이어진다.

 

시인들의 삶에 대한 예리한 지적도 눈길을 끈다. 도대체 전업시인으로 어떻게 먹고 살 수 있는지 부카우스키는 매우 궁금하다. 나 역시 그렇다. 주변에 보면 시를 읽는다는 사람은 찾아볼 수 없지 않은가 말이다. 나도 마찬가지고. 소설이나 다른 책들은 제법 읽지만 시 소비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가 알아낸 바에 의하면, 하나 같이 부르주아 계급 출신인 시인들은 부모님이 물려주신 부동산에서 나오는 수입 혹은 부모에게 급료를 받으며 풍족하게 산다는 것이다. 거 참... 심지어 어떤 시인의 어머니는 시인을 대신해서 시까지 써준다나. 세상은 참말로 요지경이다.

 

언더그라운드의 전설이 된 부카우스키를 만나고 싶어하는 이들이 참 많았던 모양이다. 대부분의 경우에 거절했지만, 인터뷰를 하겠다고 꼬시고 전문적으로 사진촬영을 하겠다고 덤비면 그도 어쩔 도리가 없었던 모양이다. 물론 그 후에 아무 연락이 없었던 경우가 부지기수라고 한다. 그들이 진짜 팬이라기보다, 이제는 전설이 된 작가가 어울려 술마시고 노닥거릴 수 있는 영광을 직접 체험해 보고 싶었던 것이리라. 그의 삶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겠다는 제안을 하면서, 편지에 현금을 보낸 케이스도 있다. 대단하지 않은가? 비록 다큐멘터리 제작은 엎어졌지만, 아마 받은 돈으로 우리의 부카우스키가 경마장으로 달려가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을 거라고 상상하면 그 또한 삶의 유쾌한 일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그런데 내가 부카우스키의 팬이었던가? 부카우스키의 새로운 책이 나왔을 걸 알게 된 순간 그의 책을 냉큼 사서 헐레벌떡 읽은 걸 보면 말이다. 그전에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우체국>과 <여자들>을 읽었는데 가히 충격적이었다. 아마 그래서 전자는 책을 읽고 나서 리뷰를 썼는데 후자는 아예 후기를 쓸 생각도 못한 것 같다. 내년에 다시 한 번 부카우스키를 읽어봐야겠다. 참, <죽음을 주머니에 넣고>의 원제목은 <선장은 점심 먹으러 나가버리고 선원들이 배를 접수했다>이다. 그런데 뭔 뜻인지는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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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깨비 2015-12-21 15: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님 덕분에 몰랐던 작가님 한 분을 소개받네요. 특히 우체국이 재밌을 것 같아요. 북플을 하다 보니 정말 세상에 재밌는 책이 참 많네요.

레삭매냐 2015-12-21 15:34   좋아요 0 | URL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
세상은 참 넓고 읽을 책은 감당해내지 못할
정도인 것 같습니다. 찰스 부카우스키 아주
재밌는 작가랍니다 :>
 
베를린이여 안녕 창비세계문학 46
크리스토퍼 이셔우드 지음, 성은애 옮김 / 창비 / 2015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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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통일독일의 수도 베를린은 삭막한 풍경이다. 2007년 5월의 베를린은 추웠다. 그 때 5유로를 주고 어느 백화점에서 산 스웨터를 아직도 입고 있다. 내가 베를린에 간 건 순전히 여행길에 만난 나그네에게 전해 들은 페르가몬 뮤지엄을 보기 위해서였는데, 낯설었지만 웅장했던 뮤지엄 기행은 대단히 만족스러웠다. 제국주의 시절 터키에 있는 타국의 신전을 통째로 뜯어온 약탈 행위에 대해서는 반대하지만 말이다. 나보다 수십 년 전에 베를린에서 이방인 생활을 했던 크리스 아이셔우드의 육성 기록인 <베를린이여 안녕>은 그런 점에서 더욱 개인적 감흥을 자극한다.

 

뉴욕타임즈에 실린 크리스 아이셔우드의 베를린 생활에 대한 기사를 살펴보니, 정확하게 그가 베를린에 머물기 시작한 것은 그가 25세였던 1929년이었다고 한다. 영국 출신의 이방인 게이 작가는 조국에서 환영받을 수 없는 존재였기(동성애 금지법, 1967년 폐지) 때문에, 온갖 형태의 자유연애가 판을 치던 바이마르 시절 베를린을 자신의 안식처로 삼았을 지도 모르겠다. 그가 살던 놀렌도르프 슈트라세는 이제 슬럼화된 지역이라고 하는데, 대신 베를린 밤문화의 중심지라고 한다. 아마 그 시절에 외국인은 경찰서에 체류등록을 해야 했던 모양이다. 경찰서에 외국인 등록을 하러 갔을 때, 자신이 그 지역의 유일한 영국인이라는 사실에 기뻐했다고 한다.

 

크리스 아이셔우드가 1939년에 발표한 <베를린이여 안녕>은 모두 6편의 중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제 곧 독자들이 익숙하게 될 이름인 슈뢰더 부인의 하숙집에 사는 다양한 인물군이 차례로 등장한다. 나치를 지지하는 요들가수 마이어 양, ‘직업여성’ 코스트 양, 인근 바에서 바텐더로 일하는 바비가 바로 그들이다. 1930년대 베를린의 소시민들을 대표하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 구성이다. 우리의 이시부 씨는 베를린의 부유한 부르주아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며 생활비를 번다. 소설의 화자 이시부 씨는 자존심이 상해 영어공부보다 계속해서 걸려오는 전화와 잡담 그리고 약속에 정신이 팔려 있던 제자 히피 베른슈타인 양에게 받은 교습비 5마르크를 공중으로 날려 버렸다가 허겁지겁 찾으러 간다. 절망과 가난에 빠진 이방인에게 무슨 선택의 여지가 있겠는가. 자유가 차고 넘치던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나치 시대로 급속하게 우경화하던 시절의 베를린에서 정치 대화는 종교 이야기 만큼이나 비현실적이었노라는 그의 고백이 당대 베를린 시민들이 미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대변해 준다.

 

이제 이 소설에서 가장 흥미로운 캐릭터인 샐리 볼스가 등장할 차례다. 크리스 아이셔우드가 한 때 함께 살았던(절대 애인은 아니었다) 진 로스(Jean Ross)라는 실제 인물을 소설화한 인물로 같은 영국 출신의 19살난 형편없는 실력의 나이트클럽 가수다. 정말 훗날 뮤지컬 <캬바레>의 주인공이 될 정도로 다채로운 성격을 가진 캐릭터가 아닐 수 없다. 자신의 가계에 대한 거짓말을 밥먹듯 하고, 젊은 피아니스트와 정분이 나질 않나, 백만장자와 사랑에 빠지는 막장드마라 같은 기획도 하고 노래와 춤 못하는 게 없는 그런 신여성의 선두주자라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 1966년에 뮤지컬로 만들어져서 브로드웨이에서 대히트를 기록하고 작년까지 숱한 리바이벌을 거듭해 왔다고 한다. 세상이 좋아져서 뉴욕의 브로드웨이까지 날아가지 않아도 컴퓨터 앞에 앉아서 유투브로 샐리 볼스 역을 맡은 엠마 스톤이 부른 <Don't Tell Mama>를 잠깐 감상해 보기도 했다. 역시 데카당스한 분위기의 다양한 문화 공간이었던 베를린의 분위기를 잠시 엿볼 수 있어 즐거운 경험이었다.

 

다음 에피소드는 휴양지 뤼겐 섬에서 피터 윌킨슨(영국인) 그리고 노동계급 출신의 오토 노바크와 함께 보낸 이야기다. 은근하게 게이 성향을 드러내는 피터는 날마다 댄스 파트너를 바꿔 놀러 다니는 오토를 질투한다.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토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자유를 만끽한다. 우리의 이시부 씨는 그런 상황을 모두 알고 있으면서도 중재에 나서지 않고 객관적인 자세를 유지하면서, 누구든 도움과 조언을 요청할 때마다 응한다. 그런 성격이 실제 크리스 아이셔우드의 모습인지도 궁금해졌다. 우울증에서 벗어나려고 피터는 정신과의사를 찾지만 공산주의를 정신병으로 치부해 버리는 나치사상에 경도된 의사가 도움이 될 리 없다. 해수욕장에 나치의 상징인 하켄크로이츠 깃발이 들어서고, 다섯살배기 어린아이가 나치 찬양가를 부르는 장면으로 파시즘이 일상에 스며들고 있었노라고 작가는 생생하게 증언한다. 식당에서 만난 독일 청년들과 대화 중에 그들의 지도자가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하자, 지난 전쟁에서 독가스 사용은 어떻게 된 거냐고 화자가 묻는다. 그랬더니 그들은 그건 “순전히 기술적인 문제”라며 반박하는 장면에서 곧바로 홀로코스트의 유령이 떠올랐다. 그 엄청난 사건이 누군가에게는 어디까지나 기술적인 문제였구나.

 

노바크가 사람들과 란다우어가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들이 가진 자산만큼이나 정말 대조적이다. 생활고에 찌든 밑바닥 삶을 노바크 집안에서 경험했다면, 베를린의 유명한 백화점을 소융한 유대인 란다우어 집안과의 교제는 또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이재와 사업에 그렇게 영민했던 란다우어들이 나치가 집권하면 당장에 그들에게 위협이 될 거라는 사실을 짐작조차 못했을까. 파시스트 세력이 그들이 가진 재산 뿐 아니라 목숨/존재까지도 요구하게 되리라는 예후를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이야말로 시대의 비극이 아니었을까.

 

우리의 이시부 씨는 결국 거대한 폭풍이 베를린을 뒤덮기 전에 정들었던 자신의 두 번째 고향을 떠날 수 있었다.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모든 이들에게 오픈시티였던 격변기의 베를린에 사는 사람들은 매순간마다 정치적 선택을 요구받았다. 결국 파국으로 치닫게 된 선택으로 귀결되긴 했지만, 역사의 현장을 목격한 이중 이방인은 그런 삶의 양상들을 훌륭하게 소설화했다. 소설 <베를린이여 안녕>은 한 때 자신이 사랑하던 도시가 서서히 몰락해 가는 과정을 지근거리에서 기록한 크리스 아이셔우드의 아련한 소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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