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갈증
미시마 유키오 지음, 송태욱 옮김 / 서커스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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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미시마 유키오에게 천황제 부활을 요구하는 쿠데타를 선동하다가 스스로 배를 째고 죽은 극우 파시스트 문인이라는 레테르를 붙이고 그의 책을 읽을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지난 여름, 한국을 대표한다는 소설가가 탐미주의로 유명한 미시마 유키오의 <우국>을 표절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그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도대체 어떤 작가이길래 베낄 정도인가 하고 말이다. 그의 장편소설 데뷔작이라는 <가면의 고백>은 독서모임 때문에 구입하긴 했지만 역시 읽지 않았다. 최근에 그의 대표작이라는 <금각사>도 구입하긴 했지만, 머뭇거리기만 하고 있었다. 그러다 서커스 출판사에서 나온, 하지만 이젠 절판되어 구할 수조차 없는 <사랑의 갈등>이라는 책의 존재를 알게 됐다. 인터넷 검색을 해서 내용을 살펴보니, 이건 1950년대판 막장 드라마가 아닌가. 탐미주의 작가가 쓴 막장드라마에 호기심이 발동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절판본이라니 더더욱.

 

지난 주에 독서모임에 나갔다 와서 미시마 유키오의 이름을 듣고 나서 도서관에서 <부도덕 교육 강좌>라는 50년대 에세이집을 읽기 시작했는데, 그 속에서 만난 미시마 유키오는 내가 알고 있던 극우 파시스트 미시마 유키오와는 너무 다른 유쾌한 모습이어서 좀 당황스러웠다. 특정인에 대한 편견에 대한 교정이 필요한 걸까.

 

미시마 유키오는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출신의 수재로, 대장성에 근무하기도 했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문재를 보인 이 천재작가는 일본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추천으로 문단에 등단했다. 그리고 <가면의 고백>(1949)과 <금각사>(1956)를 비롯한 일단의 작품을 발표하면서 일약 일본의 전후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됐다. 심지어 노벨문학상 후보에까지 오르기도 했다고 한다. 물론 노벨문학상 후보가 공식적으로 발표되는 것이 아니라 신빙성이 떨어지긴 하지만 말이다. 1960년대 후반부터 극우 파시스트로 서서히 변하기 시작하다가 결국 만 45세의 나이에 모두가 아는 것처럼 그런 희비극적인 죽음을 맞았다.

 

<사랑의 갈등>은 태평양 전쟁의 참담한 패전 후, 오사카 근처의 마이덴이라는 마을에서 벌어지는 치정극을 그 중심에 두고 있다. 스기모토 야키치는 도쿄 출신으로 고학으로 학교를 졸업하고, 오사카에서 상선회사에 다니면서 일가를 이룬 그야말로 입지전적 인물이다. 야키치는 특히 군부에 대해 악의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었는데, 질 수밖에 없는 전쟁에 나선 군부에 대한 미시마 유키오 사고의 투영이 아닐까 싶다. 소작농 아들 출신답게 마이덴 마을 근처에 1만평이나 되는 대지를 사고 은퇴 후, 식솔들을 거느리고 살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식솔들의 구성이 기이하다는 점이다. 징병에서 면제되고 징용도 피하기 위해 낙향한 장남 겐스케 내외, 시베리아에 잡혀 있는 유스케 그리고 상부(喪夫)한 둘째 며느리 에쓰코가 그 구성원이다. 소설은 주로 에쓰코의 시선을 중심으로 전개되는데, 전국시대 명장 집안의 규수인 에쓰코가 남편인 료스케를 장티푸스라는 치명적인 질병으로 잃고 시아버지의 부름을 받아, 촌마을에 내려와 산다. 듣기만 해도 무언가 이상하지 않은가.

 

야키치는 자신이 가진 재력을 바탕으로 스기모토 집안과 자신의 영토를 봉건영주처럼 지배한다. 자신이 소유한 전답에서 나는 가장 상품의 소출을 며느리 에쓰코와 독점하고, 심지어 손녀딸도 손대지 못하게 한다. 해골의 애무라는 표현에서 독자는 야키치가 에쓰코에게 남편을 잃은 며느리를 돌보는 것 이상의 용무가 있다는 것을 직감한다. 문제는 에쓰코에게는 다른 사랑의 대상이 있다는 점이다. 스기모토 집안에 일꾼으로 일하는 18세 소년 사부로가 주인공이다. 미시마 유키오는 이 비정상적인 관계를 전후 일본 사회에 비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태평양전쟁 이전에도 탈아입구(脫亞入歐)라는 해괴한 논리로 아시아 세계에서 탈출해서 세계열강 진입을 도모했지만, 미국과의 전쟁에서 참패하고 다시 주저앉은 상황을 그는 시아버지와 상부한 며느리의 동거라는 기묘하기 짝이 없는 방식으로 재현해냈다. 구질서가 상징하는 부와 권력은 새로 거듭나기를 원하는 신일본에게 전혀 매력적이지 않다는 것이 작가의 진단이다. 그렇기 때문에 에쓰코는 새로운 문물을 신속한 속도로 일본에 전파하고 있는 사부로/미국에게 알 수 없는 매력을 느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작가는 플래시백으로 에쓰코의 죽은 남편 료스케의 최후를 진술한다. 잘 나가던 남편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여자를 거느린 소위 능력있는 남자였다. 하지만 잘못 마신 우물물(일본 군국주의의 잘못된 선택) 때문에 치명적인 장티푸스(태평양전쟁의 패전)에게 걸려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다. 겐스케 부부로 대변되는 지식인들의 행동거지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은 모양이다. 그들은 사부로를 애정하는 에쓰코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지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 그저 돌아가는 상황에 대해 한담만 늘어놓을 따름이다. 어쩌면 미시마 유키오는 이런 인식을 바탕으로 해서, 자신이 직접 행동에 나서야겠다는 결심을 했던 것이 아닐까. 일본 사회에서 전공투로 대변되는 좌익 세력이 점차 세력을 확장하고 있던 시기, 그의 대척점에서 메이지 유신 때처럼 경제력에 바탕한 쇼와 시대의 화려한 부활이야말로 자학사관에서 벗어나 다시 한 번 세계강국으로 도약할 수 있는 기회라고 판단했을 지도 모르겠다.

 

죽어가는 남편 료스케를 필사적으로 간호하는 에쓰코의 모습은 일본의 전쟁을 금지한 평화헌법이라는 우리에 갇혀 발버둥치는 정치세력에 대한 비유일지도 모르겠다. 자신을 극한의 고통에 몰아넣지만, 결국 에쓰코가 원하는 것은 자신의 이기적 행복이 아니었던가. 이러한 설정들은 오른쪽으로도 그렇다고 해서 왼쪽으로도 갈 수 없는 처지에 처한 전후 일본 사회의 상징처럼 다가왔다. 신여성의 대표주자처럼 보이면서도 동시에 전국시대 이래 명장 가문의 후손이라는 계급의식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한 한계도 가진 에쓰코가 스기모토 집안의 머슴 사부로를 사랑한다는 고백부터 위악적이다. 에쓰코는 사부로의 애인이었던 미요를 내쫓고, 기어이 사부로로부터 자신을 사랑한다는 강요에 의한 고백을 듣지만 그것은 가학의 연장선일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해골이 하는 애무라는 용무를 가진 야키치로부터 벗어날 생각조차 안하는 그녀에게 선택지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그렇게 소설은 파멸로 치닫는다.

 

단순한 치정에 얽힌 사소설처럼 보이는 <사랑의 갈등>에 너무 많은 사회적 의미를 부여한 걸까. 아직 난 미시마 유키오의 상상력으로 무장한 극단적 탐미주의라는 이름의 모험 비행에까진 도달하지 못한 것 같다. 그래도 25세 청년이 쓴 글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정도의 등장인물들의 세밀한 묘사와 감정선에 대해서는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앞으로 차근차근 미시마 유키오를 읽어봐야겠다.

 

[리딩데이트] 2015년 11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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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 감독
에비사와 야스히사 지음, 김석중 옮김 / 서커스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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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메이저리그 월드시리즈가 한창이다. 특히나 극도의 집중력을 요하는 포스트시즌에서는 단 한 번의 실책이 승부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그야말로 미친 활약을 보여 주었던 뉴욕 메츠의 대니얼 머피가 월드시리즈 4차전에서 어처구니 없는 실수로 승리르 캔자스시티 로열즈에게 헌납하리라고 누가 예상했겠는가. 그렇다, 야구는 그렇게 만만한 경기가 아니다.

 

에비사와 야스히사 작가의 <야구 감독>의 원제는 간토쿠 그러니까 ‘감독’이다. 미국 메이저리그에 뉴욕 양키즈가 있다면, 일본 야구에는 요미우리 자이언츠라는 거성이 있다. 바로 이 팀에서 감독과의 불화로 쫓겨난 엔젤스라는 가상팀의 코치가 시즌 도중에 감독으로 승격해서, 패배주의에 물든 팀을 개선해서 V9에 빛나는 만년 우승예상팀인 센트럴리그의 자이언츠, 앞으로 교진이라고 호칭하겠다,에 도전하는 일종의 복수극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야구는 그렇게 만만한 경기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굉장히 미묘한 차이가 승리와 패배를 가르는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곤 한다. 주심의 콜 하나가, 그리고 선수들의 실책 또는 정말 멋진 플레이 하나가 연패로 작동할 수도 그리고 그 반대의 경우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공 하나에 인생이 달렸다고 생각할 정도라고나 할까. 그렇기 때문에 소설로 성공하기가 더 힘든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보니 우리나라에 제대로 된 야구 소설이 있었나 싶다.

 

교진 출신의 과거 명유격수 히로오카 타쓰로는 올림픽건설이 모회사로 있는 센트럴리그 엔젤스의 코치다. 엔젤스는 만년 하위팀으로 같은 리그의 교진과 경기할 때나 간신히 원정팬들의 힘으로 구장을 채울 수 있는 그런 팀이다. 만연한 패배주의로 승리의 기쁨조차 모르고, 선수들은 경기에 집중하는 대신 술과 담배 그리고 마작할 궁리만 하고 있다. 심지어 히로오카의 전임 감독은 선발 라인업조차 점쟁이에 의존할 정도라고 하니 말 다했다. 그러니 엔젤스의 구단주 오카다 시로가 감독을 자르는 건 시간문제일 따름이다. 그렇게 해서 히로오카가 감독이 되긴 했지만, 감독 혼자서 모든 걸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미 시즌도 다 지나간 마당에 누가 신출내기 감독의 말을 따른단 말인가. 게다가 명색이 프로선수 아닌가. 그렇다고 해서 선수들이 밥값을 하는 것도 아니지만 말이다. 한 술 더 떠서 차기 감독자리를 노리고 있는 엔젤스 출신 선수이자 선임 코치인 다카야나기는 선수들을 조장해서 팀의 기강을 잡으려는 히로오카의 리더십에 번번이 반기를 든다. 그야말로 안되는 팀의 전형이다.

 

우리 SK 와이번스의 전 감독이었던 야신이라 불리는 김성근 감독의 경우가 보여주듯, 흔히 일본 야구는 관리야구라고 불린다. 특히 그 정점에 선수들의 개성보다는 나가시마 시게오가 지휘하는 스타 감독이 즐비한 교진의 경우는 더더욱 그렇다. 어떤 면에서 본다면, 선수들은 팀이라는 배를 지휘하는 감독이 조종하는 로봇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감독이 지휘하는 작전에 아무리 스타 선수라고 하더라도 지시를 따라야 하는 것이 기본 룰이다. 물론 감독마다 스타일이 다르겠지만, 모든 스포츠 경기는 이기는 것이야말로 지고한 선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또 한편으로 야구는 공 한 개 한 개가 기록되는 경기이기도 하다. 시즌이 끝나고 성적에 따라 연봉협상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개인 타이틀이 중요하다. 시즌 막판에 도루왕에 도전하던 다카하라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휘자의 입장에서 보면, 개인 타이틀보다 팀의 승리에 공헌하는 선수가 더 낫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이기지 못하면 매일 매일 불면의 밤을 보내야 하는 감독의 마음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히로오카의 본격적인 시즌은 다음 시즌이었다. 구단주와 회사 중역들을 통해 감독의 자리르 흔들려는 음모는 구단주 오카다 시로의 단호한 히로오카에 대한 지지선언으로 분쇄되고, 냉정한 고과산정에 따른 연봉재협상으로 선수들은 가히 충격과 공포 상태로 돌입한다. 아무리 주전선수라고 하더라도 팀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가차 없이 트레이드 시켜 버리겠다는, 그리고 그동안 뛰어난 활약을 보여준 용병 허드슨 마저 다른 팀으로 트레이드 시켜 버린 현실 앞에서 선수들은 감독의 지휘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메이저리그 출신 좌완 강속구투수 찰스 헤밍웨이를 영입하고, 2군에서 뛰던 하고를 유격수로 승격시키면서 히로오카는 다음 시즌에 대한 철저한 대비를 하기 시작한다. 그동안 용병 선수들은 통역을 통해 대화를 시도했는데, 유창한 일본어를 구사하는 헤밍웨이의 에이스 선언에 다들 놀랄 따름이다. 사실 일본 야구에 대해서는 잘 몰랐지만 <야구 감독>의 주석에 달린 나가시마와 왕정치 그리고 장훈 같은 대타자를 비롯해서 에가와 같은 투수에 이르기까지 일본 프로야구사를 주름 잡은 대선수들이 실명이 등장하는 재미는 기대이상이었다.

 

선수시절 동료였던 캐스터 출신의 와타카이까지 영입해서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교진과의 개막 3연전을 모두 승리로 이끌면서 엔젤스는 승승장구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화무십일홍리라고 했던가 팀의 중심이었던 다카하라가 부상을 당하고, 선수들이 히로오카의 지나칠 정도로 꼼꼼한 작전 지시와 사인에 질리기 시작하면서 팀은 슬럼프에 빠지기 시작한다. 연승 가도를 달리며 리그 수위 경쟁을 할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였지만, 막상 슬럼프에 빠지기 시작하니 아무런 대책이 없다. 설상가상으로 다카야나기가 히로오카를 침몰시키기 위해 승부조작 스캔들까지 일으키면서 엔젤스 호는 침몰 직전까지 내몰리게 된다. 과연 히로오카는 이 위기를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에비사와 작가는 거의 야구의 모든 것을 이 짧은 소설 한 편에 담아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싶다. 이기는 팀이 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는 감독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론과 실재는 전혀 다를 수밖에 없다. 히로오카가 시즌 레이스 중에 경험했듯이, 어떤 순간에는 불가항력적인 요소들이 튀어 나오기 마련이다. 교진/자이언츠 같은 강팀은 어떤 방식으로든 꾸역꾸역 승리를 챙겨 가지만, 엔젤스 같은 약팀은 그런 위기상황에서 속절 없이 무너지기 마련이다. 또 한편으론 신뢰의 문제이기도 하다. 현재의 성적만으로 감독을 경질하는 방법만은 능사일까? 그렇지 않다고 본다. 오카다 구단주는 그렇기 때문에, 히로오카를 위해 방패막이를 자처하고 나서지 않았던가. 지속적인 투자와 꾸준한 인내는 어쩌면 바로 성적으로 직결되는 프로 세계와 상이한 요소일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많은 요소들을 가지고 광대처럼 저글링해야 하는 감독 자리야말로 바늘방석 같은 자리가 아닐까.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야구 감독 자리를 꿈꾸는 있다는 것은 그만큼 그 자리가 매력적이라는 방증이 아닐까 싶다.

 

보통 야구 경기를 각본 없는 드라마라고 부른다. 아무리 형편없는 스코어 차이로 지고 있더라도 결과는 알 수 없는 것이다. 특히 패배가 역력해 보이는 상황에서 극적인 역전에 성공했을 때의 기분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을 정도다. 한 때 야구에 미쳐 야구장 가는 낙에 살았던 사람의 증언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에비사와 야스히사의 정교한 야구 소설을 읽으면서 다시 한 번 옛시절을 떠올릴 수가 있었다. 응원하던 팀이 86년 짜리 저주를 깨고 난 다음에는 그전만큼 야구에 흥미를 가지지 않게 되었지만, 그래도 한 번 야구팬은 영원한 야구팬이다. 이제 곧 핫스토브 시즌이 시작되는데, 이번 비시즌에는 또 어떤 이야기들이 이 올드팬의 감상을 자극할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리딩데이트] 2015년 10월 31일~11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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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첫 번째 태양, 스페인 - 처음 만나는 스페인의 역사와 전설
서희석.호세 안토니오 팔마 지음 / 을유문화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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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유럽에서 가장 가보고 싶은 나라는 이탈리아였다. 이제는 그렇게 열광하지 않게된 시오노 나나미 여사의 <로마인 이야기>를 읽고 이탈리아에 너무 가보고 싶었다. 이제 이탈리아 다음으로 가보고 싶은 나라는 스페인이다. 전문 역사가가 아닌, 스페인이라는 나라가 좋아서 스페인에 머물면서 스페인 역사와 신화에 대해 서희석 씨가 쓴 <유럽의 첫 번재 태양, 스페인>은 그동안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스페인 역사의 입문서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 같다.

 

서유럽사에서 고대 로마 제국이 빠지면 안되는 것처럼 스페인 역시 마찬가지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헤라클레스가 세웠다는 안달루시아 지방의 세비야는 고대 스페인의 중심지였던 모양이다. 바로 그 세비야를 중심으로 한 고대사가 파노라마처럼 휘몰아치니 말이다. 레반트 지역에 기반을 두었던 페니키아 인들은 그리스 인들과 지중해 무역의 패권을 두고 경쟁하며 당시 세상의 끝이라고 알려졌던 스페인까지 진출한 모양이다. 페니키아 인들에 뒤를 이어 지중해 해상 무역을 독점한 카르타고 인들이 후속타자였다. 스페인의 물산과 은광은 북아프리카에 자리 잡은 본국 카르타고의 화수분이었던 모양이다. 세 차례에 걸친 포에니 전쟁으로 해상국가 카르타고를 제압하고, 한니발의 이탈리아 침공까지 막아낸 로마 제국의 부상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는 고대사의 흐름으로 보인다.

 

지중해 세계의 패자로 등장한 공화정 로마는 제국으로 이행되어 가면서 이민족의 끊임없는 침입과 그에 대비하기 위한 재정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다. 그 중에서도 갈리아와 더불어 히스파니아는 로마 속주 중의 우등생이었다. 심지어 트라야누스와 하드리아누스 같은 로마 제국 전성기의 황제들도 배출해낼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렇게 좋은 시절이 가고, 고대 말기로 가면서 서고트족과 동고트족 그리고 게르만족의 연이은 침입 앞에 결국 로마 제국은 멸망하고 이베리아 반도의 패권은 서고트족이 쥐게 되었다. 그전에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로마제국에 공인된 기독교 역시 이베리아 반도에 유입되었다. 역설적으로 이베리아 반도의 원주민들은 정통 가톨릭이었던 것에 반해, 지배계급인 서고트족의 귀족들은 정통 가톨릭 교리의 삼위일체를 부인하고 이단시된 아리우스 파였다는 사실이다. 이 시대 종교를 대표하는 인물로 스페인 출신의 산 이시도로는 형 레안드로의 뒤를 이어 세비야의 대주교가 되었는데, 고대 스페인 역사에 대해 걸출한 저작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그가 없었다면 스페인 역사는 공백으로 남겨 두어야 할 부분들이 많았을 지도 모르겠다.

 

세습제 왕조국가라기 보다는 귀족들의 추대에 의해 왕조가 유지되던 서고트왕국의 마지막 왕은 로드리고로, 그가 자신의 딸을 범했다는 사실에 격분한 세우타 총독 돈 훌리안이 아라비아 반도에서 발흥한 이슬람 세력을 끌어 들여 결국 이베리아 반도의 가톨릭 세력은 전멸하기에 이른다. 고대 이래 각종 물산이 풍부했던 이베리아 반도를 장악하는데 성공한 이슬람 세력은 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랑크 왕국까지 세력을 확장하려고 시도했지만, 732년 투르-프와티에 전투에서 칼 마르텔에게 패배하게 되었다. 그리고 1492년 이슬람 세력의 마지막 교두보였던 그라나다가 함락되기 전까지 780년간 이베리아 반도는 무슬림의 지배를 받았다고 책은 자세하게 서술해 준다.

 

산 이시도로에 이어 우리에게는 <엘 시드>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로드리고 디아스 데 비바르에 대한 신화에 대해서도 저자는 냉정하게 분석해 준다. 평민에서 가톨릭 세계를 수호한 기독교 영웅으로 칭송되고 있지만, 사실과 상당 부분 다르다는 것이 작가의 주장이다. 로드리고 디아스는 11세기 카스티야 귀족 출신으로, 처음에는 페르난도 1세의 휘하에서 뛰어난 지휘관으로 명성을 쌓기 시작했다. 하지만, 부왕의 뒤를 이은 산초 2세와 알폰소 6세의 왕위 다툼 과정에서 훗날 왕위에 오르게 되는 알폰소 6세에게 찍히는 바람에 추방당하는 신세가 되기도 했다. 자신의 능력을 높이 산 사라고사 타이파의 이슬람 군주 알무타만에게 충성을 다하기도 했다. 뛰어난 군인이자 정치가였던 엘 시드는 발렌시아 지역을 정복하고, 아예 자신의 영지로 만들어 버렸다. 11세기 후반, 스페인 정복에 나선 보수 이슬람 세력인 알모라비데족과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면서 비로소 엘 시드의 신화가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기독교 영웅이라기보다, 시류에 편승한 세일즈맨에 가까운 인물이었노라고 이 책에서 그를 평하고 있다.

 

8세기 초반, 이슬람 세력의 이베리아 반도 정복을 용이하게 했던 이유를 저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가톨릭 통치 아래 박해받던 유대인의 협력과 세력이 미흡하던 초기 이슬람의 관용적 태도에 기인한다고 분석한다. 12세기 알모아데족이 이베리아 반도에 진출해서 타이파 소왕국으로 나뉜 이슬람 세력을 다시 통일하면서 기세를 올리기도 하지만, 카스티야 왕국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 연합군에게 패하면서 알안달루스의 영광을 재현하는데 실패하게 된다. 또 스페인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유대인 박해도 고대 이래 계속되어 왔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재정복을 완성한 1492년에 대대적인 강제 개종과 추방 전에도 서고트 족 시대에도 그리고 세비야 유대인 대학살 같은 끔찍한 사건이 있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왕조 중심의 역사 이외에도 서희석 작가는 항간에 떠도는 민간 전승과 전설에도 주목할 만한 성과를 보여준다. 그 유명한 셰익스피어의 비극 <오셀로>의 원형이 되는 이야기도 사실은 스페인이 원조였다는 것도 새롭게 알게 됐다. 카스티야 왕국의 왕위 계승다툼 때문에 이베리아 반도에서 무슬림 세력을 축출하는데 1세기나 늦어진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스페인 알안달루스 시절의 긍정적인 면으로는 고대 그리스 로마 문헌의 번역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던 이슬람 지배층의 노력으로, 훗날 르네상스의 기초를 이루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중세 유럽에서는 기독교 문화의 전성으로 이교 문화로 단정되어 거의 사라지다시피 한 상황에서 그리스 로마의 고전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도 인상적이었다.

 

그렇게 해서 대항해시대의 도래와 재정복으로 마무리되는 스페인 역사가 상대적으로 아쉬웠다. 좀 더 나가서 근현대사에 대해서도 다뤘으면 어떨까 싶었다. 그동안 우리나라에 소개된 스페인 역사가 정사에 가까운 이야기들이었다면 이 책에서는 정통 역사를 줄기로 해서 그에 얽힌 재밌는 야사와 다양한 전설을 소개했다는 점을 높이 사고 싶다. 이 책을 읽고 나니 그동안 바르셀로나나 마드리드 같은 스페인의 대도시를 가보고 싶었는데, 그보다 진짜 스페인을 만날 수 있는 세비야나 코르도바(쿠루투바)에 더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읽을 만한 가치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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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혈육이 아니냐
정용준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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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에 출근하는데 시청 앞에 조성해둔 꽃밭이 눈에 들어왔다. 여러 가지 꽃들이 눈에 띄었는데, 그 중에서 유난히 흰색 소국만 다 시들어 죽어 있었다. 죽은 소국 때문인가, 어디선가 퀴퀴한 냄새가 나는 것처럼 느껴졌다. 꽃도 그렇듯이 우리네 인생도 유통기한이 다 되면 흙으로 돌아가겠지 하는 생각에 무상한 생각이 들었다. 지난 주말에 읽은 정용준 작가의 소설집 <우리는 혈육이 아니냐>에는 유난히 그런 죽음과 트라우마에 관한 이야기들이 많았던 것 같다.

 

모두 8개의 단편 소설이 들어 있는 <우리는 혈육이 아니냐>에는 군 의문사와 관련된 소설이 두 개나 들어있다. 건군 이래 해마다 1개 대대급 병사들이 군에서 알 수 없는 이유로 죽어갔다는 뉴스를 듣고 가슴이 먹먹해졌다. 정용준 작가는 <이국의 소년><안부>에서 바로 이 주제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전자에서는 베트남 전쟁 참전용사로 국가유공자인 아버지의 숨기고 싶은 과거를 의식 있고 정의로운 청년으로 성장한 아들의 현재에 대입시키고 있다. 이 정의로운 청년은 병영에서 총기자살을 시도했지만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병상에 누워 있다. 독자는 아버지의 독백을 통해, 남조선 용병으로 베트남에 파견된 아버지가 타국의 민주주의를 수호하겠다는 신념 아래 무슨 일을 했는지 담담한 어조로 고발하고 있다. 그 업보는 정의로운 아들이 짊어져야 한다는 것일까. 그 무게가 감당하기 힘들어 보인다.

 

<안부>에서는 6년 전에 의문사당한 아들 이준 소위를 잊지 못하는 어머니의 초상이 담겨 있다. 자식으로서 가장 큰 불효가 부모보다 먼저 가는 것이라고 했거늘, 금지옥엽 같은 아들을 그렇게 잃은 아버지마저 아들의 억울한 죽음을 신원하겠다며 쫓아다니다가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추락하는 이중의 비극이 찾아온다. 죽은 아들의 어머니는 아들의 시신 인수를 거부하고, 사인을 규명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지만 시스템의 조직적 은폐와 대중의 무관심 그리고 쏟아지는 경멸의 시선에 버거울 따름이다. 종교에서 의지가지를 찾아보려고도 하지만 그 역시 난망하기만 하다. 용서하라며 그리고 잊고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말에, 그럼 죽은 사람은 죽어야 하냐며 어머니는 울부짖는다. 그들에게 과연 진정한 위로와 격려는 어떤 형식이어야 하는지, 종교의 힘으로도 그리고 신의 대리인도 기피하는 죽음의 본질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개들>은 기묘한 이야기다. 역시 군대 시절 목격한 남한산성에서 진지구축 공사를 하다 개도축장에서 본 죽은 개들의 모습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아주 어려서 고기가 귀하던 시절, 무슨 고기인 줄도 모르고 정신없이 그렇게 먹던 고기가 개고기였다는 사실을 아주 나중에야 비로소 알게 됐다. 지금은 개고기를 먹지 않지만, 아는 동생이 텔레비전을 통해 방송된 개지옥 시리즈를 보고서는 그렇게 좋아하던 보신탕을 일절 끊었다는 이야기가 바로 연상됐다. 참고로 그 동생은 애견가이기도 하다. 개사랑과 먹거리로서의 사랑은 소용되는 지갑 속의 현찰의 두께 정도이려나. 사철탕과 건강원에서 소비되는 개들은 어디서 온 걸까. 그리고 식육으로서 저울에 올라가는 그네들의 살점들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작가는 마치 한 편의 리포트를 보여주듯 그렇게 상세하게 기술해준다. 주인공 나는 유사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곰사장에게 고아원에서 픽업되어 온 기술자이자 동업자다. 멀리 서양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까지 언급하지 않더라도, 우리 세대와 아버지 세대의 불화와 반목은 해결 불가능한 과제가 아니던가. 불화는 폭력을 낳고, 폭력은 그 이상의 끔찍한 결과를 불러오기 마련이다. 그렇게 엘리베이팅된 불화의 연쇄폭력의 종착점은 고통을 모르고 자라 기계처럼 작동하는 나의 유일한 친구 병구의 죽음으로 촉발된 곰사장에 대한 처절한 응징이고 개들의 간식거리다. 그래서인지 곰사장의 죽음은 이미 식육으로 변해 버린 개들처럼 무덤덤하게 그렇게 다가올 뿐이다.

 

표제작 <우리는 혈육이 아니냐>도 오래전 트라우마에 관한 이야기다. 화자는 어머니를 살해한 아버지의 자식이다. 그리고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았으며, 이모의 아들이 되어 무심하게 생을 살아왔다. 그의 삶에서 적당한 선과 거리감은 반드시 지켜져야 할 암묵적 약속이다. 그는 병원에서 간호조무사로 환자들의 신장 투석을 담당하고 있다. 문제의 발단은 감옥에서 있어야 할 아버지가 도저히 감옥에서는 치유할 수 없는 신장 투석 건으로 일시 형집행으로 가석방되어 화자가 일하는 병원에 와서 투석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교화대상자의 병을 고쳐 다시 형집행을 시키겠다는 당국의 설정도 우습지만, 아무런 감정이 없는 생물학적 아버지가 불쑥 우리는 그래도 혈육이 아니냐며 말을 건네는 장면은 희비극에 가깝다. 몸의 유독 물질을 제거하는 기능을 맡은 신장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면, 투석 과정을 통해 피를 필터에 걸려 맑게 하지만 우리가 살기 위해 섭생하는 과정 자체가 다시 피를 오염시킨다는 사실이 영원히 반복되는 무한 루프의 그것이 떠오른다. 삶에 대한 공복으로 주인공은아버지가 탐하는 계란을 두 쪽으로 내어 먹는 것으로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다.

 

마지막에 실린 <새들에게 물어보는 사람이 있네>는 어느 날 갑자기 9달된 딸아이를 남겨두고 훌쩍 세상을 떠나 버린 누이에 대한 제망매가다. 일을 그만두고 어머니에게 얹혀 무위도식하며 언젠가 소설가가 될 거라는 희망을 가지고 사는 나는 아버지도 모르는 조카딸이 그저 원망스러울 따름이다. 그리고 아이를 돌보다 어두운 욕망에 사로잡히기도 하는 그런 존재로 그려진다. 사고사로 처리된 누이는 가해자인 트럭운전사 말에 의하면, 고의로 길에 뛰어 들었다고 하는데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하는 걸까. 이른 치매기와 유방암 수술로 한쪽 가슴을 잃은 어머니가 과연 누이가 남긴 재인이를 돌볼 수 있을까? 소설 속의 화자는 내내 재인이에게는 가슴이 온전한 엄마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에 대한 마땅한 대안은 없어 보인다. 대학에서 러시아를 전공해서일까, 그는 이웃에 사는 우즈베키스탄 출신 마디나에게 기묘한 동질감을 느낀다. 그녀 남편의 황당한 제안은 혀를 내두르게 만들지만 말이다.

 

소설집 <우리는 혈육이 아니냐>는 가족이라는 사회의 최소 단위에서 벌어지는 어쩌면 외면하고 싶은 서사들의 모듬회라고 해야 할까. 정용준 작가가 선보인 8가지 이야기들은 무지개 플러스 원 같은 빛깔을 뿜어내며 독자를 유혹한다. 그렇게 작가의 신작 소설집에는 온통 죽음과 트라우마의 페이소스 냄새가 묻어난다. 그리고 등장인물들은 가족 특히 아버지와의 고질적 불화에 방점을 찍고 있다. 그들은 하나 같이 주가드(Jugaad;즉흥적 창의력) 같은 혁신적인 방법으로도 탈출할 수 없는 구조적 모순 속에서 허우적거린다. 그런데 묘하게 공감대가 만들어지니 그것도 신기하다. 전작 <바벨>에 비해 구름에서 내려와 지상에 안착했다고 해야 할까. <바벨>이 무언가 뜬구름 잡는 그런 작품이었다면 이번 소설집은 삶의 다양한 방식에 여러 가지 단상을 담은 무척이나 구체적인 그런 소설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채널을 돌릴 때마다 텔레비전 스크린에 등장하는 오감을 자극하는 그런 막장드라마보다 훨씬 더 현실감 넘치면서도 주변의 누군가에게 당장이라도 일어날 법한 그런 이야기들이 책장을 넘기는 손길을 분주하게 만든다.

 

나머지 이야기들은 이번 주말 독서모임에서 더 들어봐야겠다. 언제나 그렇듯, 다른 이들과 독서체험을 공유하는 것은 책읽기의 또다른 즐거움이다.

 

[리딩데이트] 20151017~18일 오후 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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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하나 2015-11-15 0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잘생긴 리뷰! 알라딘 정기 메일에 님 리뷰가 뜨기에 부리나케 달려왔습니다 ㅋ
나도 곧 올려야징! >ㅅ < (그나저나 좋아요`가 안 눌러져서 슬픔 ㅠ ㅜ 에러 뜨네요)

레삭매냐 2015-11-16 11:54   좋아요 0 | URL
북플에 가입하셔야 하는 게 아닌가요?
램프의 요정에서 보니 더 반갑습니다.
 
연적
김호연 지음 / 나무옆의자 / 2015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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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 아주 재밌다. 어떤 책은 읽기 전에 감이 오는 책이 있다. 내게는 오늘 새벽에 다 읽은 김호연 작가의 <연적>이 그랬다. 연적? 서예할 때 쓰는 도구인 연적을 말하는 건가 싶었지만, 소설의 제목은 그 연적이 아니라 한 여자를 사랑한 연적(戀敵)이었다. 시나리오 작가, 만화 기획자 그리고 출판 편집자라는 다양한 직업군을 거쳐 마침내 2013년 데뷔작 <망원동 브라더스>를 발표하면서 본격 소설가의 길을 걷고 있는 김호연 작가의 글을 읽으면서 어쩌면 영화화 될 전망이라는 전작에 이어 <연적>도 비슷한 궤적을 그리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했던 여자의 유골함을 들고, 그녀를 평안하게 보내 주기 위한 길에 나선 두 남자의 이야기. 듣기만 해도 존쿨하지 않은가 말이다.

 

네크로필리아도 아니고, 죽은 여자를 잊지 못해 낯선 여행길에 나서는 그들의 이야기는 어떻게 보면 로드무비 스타일에 딱 맞아 떨어지지 않던가. 게다가 장소가 다 그림 같은 곳들이다. 어쩔 수 없는 작년 세월호 트라우마를 떠올리게 하는 안산의 장례식장에서 출발해서, 남쪽바다의 대표선수들이라고 할 수 있는 남해와 여수를 거쳐 죽은 한재연이 그렇게 사랑하던 제주도의 이름 모를 ‘오름’을 찾는 여정은 상상만 해봐도 멋진 그림이 나온다. 어쩔 수 없이 영화화와 관련돼서, 이야기의 화자 고민중 역은 신하균에 제격이라는 느낌이다. 소설에서 고민중이 근육돼지라 부르며 짐승남에 가까운 앤디 강 혹은 강병균 역은 누가 맡으면 제격일지 아직 상상이 가지 않는다.

 

30평생을 모태솔로 살다가 자신이 다니는 출판사에 소설을 투고하러 온 한재연을 만나 짧은 연애를 즐기던 고민중은, 재연의 소설 출간이 엎어지면서 그녀와의 관계도 끝이 나게 된다. 그리고 오랜 시간 연락이 두절되었다가, 재연의 부고를 문자로 받게 된다. 아무리 간략화된 시절이라고 하지만 한 사람의 죽음조차 문자로 처리된다는 처연한 사실이 문득 서글퍼졌다. 5년간 부지런히 다닌 출판사 팀장으로 회사일도 봐야 하는 그는 출근길에 부고 문자를 받고 잠시 결정장애에 시달린다. 문상 가고, 부의금을 내지 않으면 내내 새로운 트라우마에 시달리게 되겠지. 위의 이야기들은 어디까지나 내가 소설을 읽고, 재구성한 것이지 이야기의 진행은 순서가 다르니 이해하시도록. 어찌어찌하여 1년이 지나, 그녀의 기일에 다시 만난 앤디 강과 의기투합해서 그녀의 유골을 훔쳐내는데 성공하고 두 남자는 그녀와의 추억을 회상하며 적과의 동침같은 여행길에 나서게 된다.

 

주인공은 이제 가고 없지만, 연적이라고 할 수 있는 두 사내의 갈등은 뻔히 예고된 사실이다. 게다가 김호연 작가는 앤디 강은 근육질의 짐승남으로 주먹 쓰는 일 따위는 아무 것도 아닌 건달바의 이미지를 차용하고 그 대척점에 서 있는 고민중은 먹물이라는 클리셰이로 설정해 두었다. 그러니 두 사람이 언제라도 물리적 대결을 벌이지 않으리라는 최소한의 안전판이라고 해야 할까.

 

남해와 여수 그리고 제주를 돌며 고민중과 앤디 강은 줄기차게 술판을 벌인다. 원하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엮이게 된 그들은 아버지에 대한 반발심과 사랑했던 여자에 대한 공통적인 추억을 안주 삼아 조금씩 동질감을 느끼고, 공감대를 형성해 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재연이 발표하려고 노력했던 <비 마이 고스트>의 시나리오가 문 감독이라는 악당에게 가로 채이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선 복수에 나서게 된다는 뭐 그런 이야기다. 사실 개인적으로 남해와 여수 그리고 제주로 이어지는 여정은 안정적이면서 소설의 핍진성을 제대로 짚어준다는 느낌이 들었다. 다만, 마지막에 해당하는 서울편은 좀 사족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사실 독자는 <연적>을 읽으면서 작가가 재연의 죽음에 관한 좀 더 자세한 정보를 전해 주리라고 기대했지만, 아쉽게도 그 부분은 블러링한 이미지로 남아 있을 뿐이다. 대신 권선징악이라는 클래식한 이야기로 마무리되는 그리고 그녀의 영전에 출간되지 못한 <비 마이 고스트>를 바친다는 클리셰이는 좀 아쉬울 따름이다. 결말에서 화끈한 한 방이 부족하다는 느낌이다.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상실감에서 비롯된 소설의 원심력은 화자 고민중의 심리 변화를 따른 다양한 스펙트럼을 그려낸다. 한 때 운동권으로 이름을 날렸던 아버지의 그늘 아래서 독립하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특유의 결정장애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그런 엉거주춤한 스탠스를 취하고 있던 고민중이, 회사를 땡땡이치고 옛 애인의 유골을 들고 튀면서부터 급격하게 변하기 시작하는 모습은 자못 흥미진진하다. 우리 모두가 내면에 그런 길들여지지 않은 순수한 욕망 덩어리를 한 개씩 가지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초면에 그렇게 경계해 마지않던 연적 앤디 강과의 관계도 티격태격하는 가운데 조금씩 서로를 이해하게 되는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는 모든 것을 내려놓으니 참말로 마음이 편해지더라는 해탈의 경지도 선보여 준다. 그렇다고 해서 이야기가 시종일관 그렇게 진지한 것만은 아니다. 문 감독에게 앤디 강이 보여준 인분테러 앞에서는 정말 빵 터져 버렸다. 중세 궁정에서 사람들을 현혹시키던 저글러처럼 김호연 작가는 참 다양한 스타일로 독자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한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고.

 

<연적>을 다 읽고 나서, 김호현 작가의 전작 <망원동 브라더스>가 읽고 싶어졌다. 시장의 반응이 좋았는지 연극으로도 제작되어 상연되었다고 하는데, 대강의 시놉시스를 보고 나니 왠지 천명관 작가의 <고령화 가족>이 떠올랐다. 소설-연극 그리고 영화화의 비슷한 경로를 거치지 않았나. 지난달에 이십 몇년만에 제주도에 다녀왔는데, 소설을 읽다 보니 보말해장국이니 갈치구이 같은 음식 이야기를 듣다 보니 그들과 함께 제주도 여행을 하고 있다는 느낌도 들었다. 아, 그리고 보니 재연이 사랑하던 오름 찾기의 결정적 단서를 제공한 공천포 카페 숑은 실제로 존재하는 카페였다. 이런 장소를 통한 공감대야말로 외국 소설에서는 접할 수 있는 우리 소설의 힘이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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