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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코너스톤 세계문학 컬렉션 2
조지 오웰 지음, 박유진 옮김, 박경서 / 코너스톤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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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카카오 감청과 국정교과서 채택을 둘러싼 논쟁을 보면서, 때마침 읽고 있던 조지 오웰의 마지막 소설 <1984>가 특별하게 다가왔다. 반세기도 전인 1949년에 이렇게 시대를 앞서간 작품을 써낸 작가의 천재성에 다시 한 번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빅 브라더와 당이 사회의 모든 것을 지배 감시하고, 이중사고(doublethink)로 무장된 사람들의 천국인 오세아니아는 현대인이 상상할 수 없는 최악의 디스토피아다. 근대 이래 계속된 기술문명의 진보가 미래에 인민에게 낙원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장밋빛 희망을 <1984>에서 조지 오웰은 통렬하게 박살내 버린다. 오히려 순수 권력을 추구하는 권력집단에게 사생활을 통제당하고, 모든 사람들이 무지가 힘이고 전쟁이 평화라는 반복되는 프로파간다에 세뇌된, 그야말로 살아 있는 좀비 같은 존재로 개조되는 미래사회는 암울할 수밖에 없다.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는 39세의 남자로 진리부 기록국에서 역사왜곡을 담당하는 일을 하고 있다. 소설은 사유하고 회의할 수 있는 주체적인 인간이라는 사실을 자각한 윈스턴이 일기를 쓰면서부터 시작된다. 어쩌면 7년 전, 정체를 알 수 없는 내부당원 오브라이언에게 들은 말 한 마디에서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사는 오세아니아는 항상적인 전쟁을 치르고 있다. 나중에 그가 입수한 반혁명당의 영수 골드스타인이 저술한 반정부 성향의 금서는 전쟁이야말로 권력의 영속화를 위한 필수적인 요소라고 강조한다. 자본주의는 타파되고, 영사(영국 사회주의)가 그 자리를 대신했지만 과잉생산을 항상적인 전쟁으로 소비하고 맹목적 애국심으로 무장한 인민이야말로 오세아니아 지배층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요소라고 골드스타인은 선언한다. 이길 수도 질 수도 없는 계속되는 전쟁은 가상의 적에 대한 항시적인 불안을 조성하면서, 순수권력의 영구적인 지배를 위한 정치적 기반을 제공한다. 어쩌면 소설에 등장하는 이야기가 이렇게 현실을 빼닮았는지 모르겠다. 세계를 휘두르는 경찰국가 미국에게 전쟁이야말로 군산복합체를 위한 꼭 필요가 아닌가. 2차 세계대전으로 대공황을 극복했고, 이어지는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그리고 최근의 이라크와 아프간 전쟁에 이르기까지 전쟁 없는 미국은 상상할 수조차 없다.

 

모든 것을 감시하는 사상경찰과 움직임, 목소리 어쩌면 감정까지 잡아내는 텔레스크린의 존재는 주민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비비(빅 브라더)의 강력한 무기다. 오세아니아에서는 그 누구도 믿을 수가 없다. 자식이 부모를 고발하고, 101호실의 가혹한 폭력에 굴복한 정범들을 살아남기 위해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가치도 주저 없이 버릴 준비가 되어 있다. 우리의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도 결국 그 길을 걷게 될 것이다. 더 무서운 것은 교육을 통한 주민의 통제라는 전통적 시스템을 내부당 인사들이 꿰뚫고 있다는 점이다. 과연 빅 브라더와 당이 사람의 머릿속까지 지배할 수 있을 것인가? 윈스턴 스미스는 그렇지 않을 거라고 항변하지만, 적인지 동지인지 구분이 되지 않다가 결국 체제의 수호자로 변신한 오브라이언은 그를 비웃으며 변형된 전체주의 국가 오세아니아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빅 브라더를 증오하는 감정을 지우고, 오히려 그를 사랑하게 될 거라고 자신하는 그의 모습은 정말 끔찍했다.

 

이십대 검은 머리 여자로 불리던 줄리아와 은밀한 로맨스를 즐기면서, 윈스턴은 위험한 일탈을 시도한다. 사상은 물론이고, 섹스마저도 철저하게 통제되는 사회에서 십오개월의 실패한 짧은 결혼생활을 경험한 주인공에게 비로소 스릴 넘치는 모험이 시작된 것이다. 한술 더 떠서, 비밀리에 오브라이언과 접촉하게 된 윈스턴은 형제단의 일원이라는 오브라이언의 술수에 넘어가 당과 빅 브라더를 타도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하겠다는 선서까지 하기에 이른다. 겉으로 당에 충성하는 사회구성원처럼 보이기 위해 노력하지만 실제로 구질서를 타파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줄리아와 달리, 오세아니아 지배계급의 실체를 알게 된 윈스턴은 골드스타인의 저서를 읽으면서 한층 각성된 모습을 보여준다. 오브라이언이 실제로는 내부당의 핵심인사로 훗날 101호실에서 자신에게 온갖 폭력을 행사할 지도 모른다는 가정을 윈스턴은 해보지 않았던 걸까. 이 문제적 인간에게 봄날의 행복과 즐거움의 순간은 너무 짧았고, 그 뒤에 찾아올 고통에 대해서는 알고 싶지 않았을 지도 모르겠다. 인간이란 죽음이라는 숙명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직면할 때까지 미루고 싶어하는 것처럼 말이다.

 

어쩌면 윈스턴은 자신과의 치열한 기억투쟁에서 실패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버지가 증발되고, 어머니와 여동생마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버린 사실에 대한 트라우마에 지속적으로 시달리면서도 현재를 포기할 수 없는 그의 모습은 기록국에서 과거를 지우고 왜곡하는 일을 하는 자신의 노동과 교묘하게 중첩된다. 자신은 부인하고 싶겠지만, 윈스턴 역시 오세아니아의 과거를 지우고 왜곡하는 일에 동원된 부역자가 아닌가. 조작과 왜곡을 통해, 현재는 물론이고 현재를 만들어낸 과거까지도 철저하게 지우고 새롭게 창조해내는 일을 해온 그가 어느 순간, 당과 빅 브라더를 타도하겠다고 나서게 된 과정이 매끄럽지 않다. 철저한 자기 부정과 반성이 따르지 않은 회개자가 과연 프롤(레타리아)이야말로 희망이라고 떠들어 대는 모습이 자못 우습기까지 하다.

 

디스토피아 소설 <1984>에서 조지 오웰이 지적한 또 다른 면은 바로 미래의 자원과 노동력 확보 경쟁이다. 1940년대와는 달리,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발달한 자본주의 경제는 당시에는 듣도 보도 못한 자원들을 필요로 하고 있다. 이른바 희토류라는 자원은 누구나 갖고 있는 자원이 아니기 때문에 확보가 지극히 어렵다. 소설에서는 전쟁이라는 폭력적 방법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지만, 현대사회에서는 그럴 수 없지 않은가. 물론 중동의 에너지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전쟁판에 몸소 뛰어든 국가도 있긴 하지만 말이다. 또 다른 희극으로는 자원외교라는 미명 아래 엄청난 국부를 유출하고 있는 나라의 경우도 있다. 한편 컴퓨터화된 기계문명의 눈부신 발전으로 기존 인간 노동력에 대한 수요는 점차 줄어들고 있는 실정이다. 대중의 점진적 노동으로부터의 소외는 소설에서는 언급되는 순수권력의 궁극적 지향점이 아닐까. 철저하게 통제되고 세뇌된 대중을 교육’(끊임없이 대중을 무지하게 만들기 위해 신어를 생산하는 것을 상상해 보라)을 통해 재생산해내는 영사 시스템의 설계자들은 혈연에 의한 권력 세습의 지속가능성보다 임명식 조직을 통해 자신들의 계급 특권을 유지할 수 있다는 비밀도 알고 있다. 어쩌면 두 번째 장에 소개된 형제단의 두목 이매뉴얼 골드스타인의 책 <과두적 집단주의의 이론과 실제>야말로 20세기 사회주의 실험과 공산주의 혁명을 모두 목격한 조지 오웰이 이 소설을 통해 하고 싶었던 권력의 속성에 대한 해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지 오웰의 마지막 소설 <1984>에는 너무나 많은 담론들이 들어 있어, 한 번의 독서만으로는 도저히 감당이 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름지기 고전이라면 다시 읽는다고 말해야 하는 이유를 이제야 깨닫게 된 모양이다. 쓰고 싶은 이야기들이 참 많았지만, 다 증발해 버리고 지극히 일부분만 쓴 것 같아 아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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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초상
오사 게렌발 지음, 강희진 옮김 / 우리나비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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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부터 읽고 싶었던 오사 게렌발의 <7층>과 <가족의 초상>을 연달아 읽었다. 사실 그렇데 많은 분량이 아니라(<에식스 카운티>와 비교해 보라), 금세 다 읽을 수가 있었다. <7층>도 마찬가지였지만, <가족의 초상> 역시 가벼운 이야기가 아니라 쉽지는 않았던 것 같다. 빨리 다 읽어야 한다는 강박에 쫓기듯 그렇게 휘리릭 읽고 나서도 여전히 머릿속에 잔영이 남아 있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가족의 초상>은 마리 요한슨 가족 구성원 4명과 외부인, 이른바 ‘가족의 친구’ 라그나르 아저씨가 말하는 다섯 가지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사람들은 누구나 다 자신의 이야기로 세상을 살아 나간다. 그런 점에서, 한 가지 사건을 경험했지만 해석하는 이들의 관점에 따라 달라지는 이야기라는 점은 영화 <라쇼몽>을 떠올리게 한다. 첫 번째 주자로 등장하는 라그나르 아저씨는 요한슨 가족의 친구이다. 그런데 이 아저씨, 그 집 큰 딸인 18살난 마리를 좋아한다. 반했다, 홀렸다라는 말을 두서없이 반복하지만, 그녀를 사랑하는 모양이다. 대책 없는 돼지라고 마리는 거침없이 폭언을 일삼는다. 그리고 마리 엄마와 아빠의 사이가 벌어진 틈을 파고 들어, 마리의 엄마와 재혼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여전히 마리의 환심을 사기 위해 노력 중이라나. 스웨덴판 막장 드라마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다.

 

다음은 마리 엄마의 변론이다. 마리 엄마는 자신의 재혼에 가장 결사적으로 반대한 마리와 화해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마리의 결사적인 반대와 노골적인 거부로 대화가 단절된 채 10년을 지내왔다. 그렇다고 해서 새로 결혼한 라그나르 씨를 사랑하는 것도 아닌 것 같다고 말한다. 자신이 가장 위로가 필요했을 때, 다른 꿍꿍이를 가지고 접근한 사람과 사는 것이 어떤 느낌일지 독자는 알지만 그녀 자신은 모르고 있다. 엄마로서의 삶보다,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다른 선택을 한 마리의 엄마. 그녀를 무조건적으로 비난할 수 있을까. 거시적인 점에서 본다면 그녀야말로 가장 힘든 결정을 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주인공 마리가 등장할 차례다. 어려서부터 독립적인 성향으로 무엇이든 혼자 해온 그녀 역시 타인의 도움이 필요할 때가 있는 법이다. 사회적 인간이 혼자의 힘으로 살 수 없다는 건 인류 역사가 증명해 오지 않았던가. 오, 물론 로빈슨 크루소 아저씨처럼 고립된 무인도에서 맨 정신으로 잘 살아왔다는 전설이 있기는 하지만 모두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만화의 맨 끝에 등장하는 여동생 스티나와는 달리 모든 면네서 비관적인 마리는 라그나르 씨와의 사건 후의 트라우마 때문인지 엄마의 재혼을 결사적으로 반대하면서, 라그나르냐 아니면 자신이냐고 엄마에게 선택을 강요하기도 한다. 그녀의 삶은 불평불만으로 가득하다. 게다가 비뇨기 감염으로 신체적 고통까지 감당해내야 하는 그녀의 정신발작은 시시때때로 도진다.

 

산부인과 앞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큰딸 마리를 픽업하러 간 아빠의 이야기도 이어진다. 그저 평화주의자인 아빠는 문제를 대면하고 해결하는 대신 회피하는 전략으로 가정의 붕괴에 일조한다. 마리는 새로 가족을 꾸린 아빠를 신랄하게 비판하지만, 이 나이에 무슨 사랑이냐며 능구렁이처럼 또 문제를 회피하려는 아빠 앞에서 다시 발작증세를 보인다. 답이 없구나 도대체 이 요한슨 가족. 어쩌면 먹고 살 걱정이 없어진 선진국병이라고 해야 할까. 당장의 생존이 눈앞에 있는 이들에게 요한슨 가족이 겪는 고통은 이해할 수 없는 문제이지 않을까.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라는 톨스토이의 그 유명한 문구가 연상된다. 화장실로 도망간 마리를 7분 정도 기다리다 떠나 버리는 아빠의 문제피하기 전법은 정말 답이 없어 보였다.

 

불평불만으로 가득한 언니 마리에 비해, 어려서부터 작은 천사였다는 스티나의 현재는 마리의 그것과 너무 대조적이다. 일체유심론을 설파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을 어떻게 받아 들이냐에 따라 천국과 지옥이 현실세계에 개입하게 되는 게 아닐까. 누구나 다 스티나 같은 삶을 살고 싶을 것이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응 개인적 성향 때문에 마리 같은 경우에 처해 있다면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이제 막 결혼을 앞두고, 막장 드라마에서나 등장할 법한 자신의 가족을 되돌아보며 한숨짓는 스티나의 모습에서 문득 나의 행복지수를 점검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정도는 ‘행복하자’는 즐거워 보이는 구호로 현실을 무감각하게 만들고 있는 건 아닐까. 하긴 행복을 거부 하고 싶은 사람이 어딨겠냐만서도.

 

말미에 오사 게렌발은 <가족의 초상>이 자신의 최악의 작품이라며 이 책을 읽지 말란다. 십년 전에 자신이 쓰고 그린 그림에 대한 부정인가. 만화에서 마리가 당한 부당함에 대해서도 다른 작품을 통해 그녀에게 보상했다고 한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예전 행동에 대해 이해가 가지 않을 때도 있는 법이다. 그 땐 그랬지 하고, 미소 짓게 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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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층
오사 게렌발 지음, 강희진 옮김 / 우리나비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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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인터넷 논객의 데이트 폭력이 논란이 되었던 적이 있었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폭력이 잘못되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여지가 없을 것 같다. 그런데 정작 피해자의 목소리에 대해 자세히 들어본 적은 없는 것 같다. 다시 생각해 보고 싶지 않은 과거를 들춰 내는 것이 반가울 리가 없어서가 아닐까. 스웨덴 출신의 오사 게렌발은 자신의 경험에 기반한 <7층>에서 데이트 폭력에 대한 상세한 고찰을 독자에게 들려준다.

 

이야기는 주인공 ‘블랙’ 오사가 아트 스쿨에 진학해서, 운명의 남자(과연?) 닐을 만나면서부터 시작된다. 약간 맛이 간듯 하지만 좋은 친구들과 자신을 타인화시키지 않는 환경에 적응하기가 무섭게 흑기사처럼 등장한 닐의 존재는 오사에게 큰 힘이 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닐은 사사건건 오사의 과거를 부정하고 새로 거듭나라는 강요를 일삼는다. 그리고 주변과 남성과 잦은 데이트를 하는 여성을 창녀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오사의 삶에서 흑기사처럼 등장했던 닐은 흑마술로 그녀의 과거를 지우기 시작한다.

 

건전한 남녀관계란 어떤 것인가를 생각하게 만드는 오사와 닐의 관계에서, 닐은 상대방을 존중하는 모습 대신 일방적으로 자신을 따르라는 시대에 뒤떨어진 가부장적 모습으로 오사를 대한다. 그녀의 화장, 옷가지, 예전에 받은 엽서들, 포스터, 음악CD와 그녀가 어울리는 친구들에 이르기까지 닐의 마음에 드는 것은 하나도 없다. 이 정도까지 문제가 진전되었다면, 해결책은 딱 하나인데 오사는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주저한다. 그것은 닐이 언제나 그녀를 너무나 사랑해서 그런 거라고 말하는 데 무너지기 때문이다. 오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닐에게 길들여져 버린 것일까. 어린왕자의 그것과는 판이하게 다른 방식으로 길들여진 그녀의 모습이 처량하기 짝이 없다.

 

만화에 등장하는 것처럼, 닐의 오사에 대한 집착은 도를 넘어서기 일쑤다. 그녀가 말하기 전에, 아니 더 큰 사고가 나기 전에 정신병원에 가서 상담이라도 받아야 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결국 미연에 방지하지 못한 닐과 오사의 위험한 관계는 폭력을 동반한 파국으로 치닫기 시작한다. 오사의 과거를 의심한 닐은 오사에게 극도의 순결을 요구하고, 오사는 과거를 지우기 위해 노력하다 밤을 하얗게 세울 지경이다. 게다가 다리미를 내던지지 않나, 오사가 자동차를 운전하는 도중에 그녀의 손을 물어뜯은 닐의 행동은 정말 도를 넘어섰다. 결국 오사는 닐과의 결별을 선언하고 아버지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이른다.

 

여기까지는 어쩌면 데이트 폭력의 일반적인 수순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오사는 자신에게 가혹한 폭력을 행사한 전 남자친구인 닐을 고소하기에 이른다. 법정에서 전 남자친구를 만나는 장면은 정말 낯설었다. 하지만, 이별 즈음에 병원에서 받은 진단서가 결정적으로 닐의 데이트 폭력을 입증하는 자료로 사용되면서 닐은 집행유예 선고를 받게 된다. 그리고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기 위해 오사는 부단한 노력을 기울이지만, 무너지고 다시 세우기의 반복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새로운 여자친구를 만난 닐의 모습을 보며 자신을 대신해서 새로운 희생양이 된 그녀의 모습에서 오사는 묘한 안도감을 느낀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이에 갈등과 반목 그리고 해소가 빈번하다고 하지만, 해결방법으로 폭력이 동원되는 건 절대 반대한다. 말미에 프랑스에서 벌어지는 배우자의 의한 살인사건이 사흘에 한 번 꼴로 발생한다고 하는데, 애증이 개입된 관계의 치명적 결말이 얼마나 무서운지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다. 도서관에서 이 책을 빌려 읽었는데, 이 만화가 사회과학 분야로 분류된 것도 주목할 점이다. 데이트 폭력이 개인 간의 문제가 아닌, 사회적 현상이라는 것일까. 자신의 체험담을 바탕으로 생생한 리포트를 전해준, 오사 게렌발의 용기에도 찬사를 보내고 싶다. 그녀의 만화는 유럽 스타일답게, 정교하기보다 투박한 그림체이지만 그 안에 담긴 이야기의 무게는 묵직하게 다가왔다.

 

[리딩데이트] 2015년 10월 8일 오후 12시 3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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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타로 맛보는 후룩후룩 이탈리아 역사 이케가미 슌이치 유럽사 시리즈
이케가미 슌이치 지음, 김경원 옮김, 김중석 그림 / 돌베개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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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냉장고를 부탁해>라는 프로그램에서 성자 셰프라 불리는 이가 방송에 출연한 연예인의 냉장고에서 찾아낸 재료로 자신의 주특기인 알리오올리오 파스타를 만드는 과정을 지켜 보았다. 15분이라는 제한된 시간을 가지고, 역시 빈약한 재료로 그런 놀라운 요리를 만들어내는 속도와 창의력에 감탄했다. 이케가미 슌이치 작가는 바로 그 파스타를 가지고 원고장이라고 할 수 있는 이탈리아 역사를 풀어냈다.

 

개인적으로는 아주 느끼한 까르보나라 파스타를 즐겨 먹곤 하는데, 작가가 들려준 이야기처럼 그렇게 다양한 파스타에 대한 이야기가 숨어 있는 줄 미처 몰랐다. 파스타의 종류가 엄청나게 많다는 건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중공업이 발달한 북이탈리아에서는 연질밀을 이용한 생파스타가 그리고 농업이 발달한 남이탈리아에서는 예로부터 경질밀을 이용한 건조 파스타가 주류를 이뤘다고 한다. 사실 곡물을 이용해서 만든 파스타가 물을 만나면서 오늘날에 우리가 즐기는 진짜 파스타가 된 건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미 그리스 로마 시대부터 밀을 이용한 빵을 이탈리아 사람들은 먹었지만, 게르만족의 침입으로 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이어지는 랑고바르드 그리고 노르만 족들은 모두 육식 위주의 식단을 즐겨서 로마 제국 이래 곡류를 즐겨 섭취하던 식습관 자체가 바뀌었다고 한다.

 

중세 르네상스 시절에 이르러 비로소 다시 부활한 파스타는 여전히 평민의 음식이 아니었다. 저자는 특히 도시국가가 발전한 르네상스 시기 생산을 담당하던 농촌을 사실상 지배하던 특수한 상황에 주목한다. 계속해서 외세의 침략과 간섭을 받던 이탈리아는 1860년대 들어서 비로소 통일국가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그 결과 지금까지도 이탈리아에서는 국가보다 자신의 지역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많은 것 같다. 예전에 로마에서 수학하던 사촌형이 공부하던 수도원에 들렀을 때, 베네치아 출신 수사를 한 분 만난 적이 있는데 그 분인 자신이 이탈리아 사람이 아니라 베네토 사람이라고 당당하게 이야기했었다.

 

오랜 시간 동안 이탈리아에서 사랑받아온 마케로니/마카로니, 오늘날의 파스타는 대항해시대로 신대륙의 새로운 작물들이 유럽에 전파되면서 일대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하게 됐다. 특히 한때 관상용으로 재배되던 토마토와 고추는 미네스트라라고 불리던 파스타 요리의 세계화에 지대한 공헌을 하기에 이른다. 요즘은 케첩을 이용한 미국식 나폴리 파스타가 대세지만, 여전히 본고장 이탈리아에서는 지중해에서 잡히는 앤초비를 비롯해서 프로슈토, 살라미 등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재료로 만든 파스타를 즐기고 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라자냐나 중세에는 잔치 때나 맛볼 수 있었다는 만두 파스타(라비올리)도 좋아하는데, 언제나 이탈리아에 다시 한 번 본고장 파스타 맛을 제대로 볼 수 있는지 모르겠다.

 

이케가미 슌이치는 피자와 함께 전 세계인의 식탁을 점령하다시피 한 파스타의 위기에 대해서도 빼놓지 않는다. 이탈리아 미래파를 대표하는 시인 필리포 마리네티는 파스타가 시대의 유행에 뒤쳐진 음식이자 부조리한 신앙이라고 혹평하면서, 영양 없는 파스타 대신 고기와 생선을 섭생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엄마 파스타의 맛을 잊지 못해 몰래 먹는 장면이 목격되기도 했단다. 이탈리아의 독재자 무솔리니 역시 파스타의 적대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적극적으로 금지하지 않은 것으로 아마 그도 엄마 파스타의 맛을 포기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모든 것이 빨리빨리란 구호 아래 속도전으로 진행되는 패스트푸드 시대에 손이 많이 가는 파스타야말로 어쩌면 슬로푸드의 대명사가 아닐까. 정치 권력과 함께 이탈리아의 정신 세계를 오랫동안 지배해온 교회가 선도하는 가부장 이데올로기는 집에서 엄마가 만들어주는 파스타야말로 최고의 음식이고, 지고의 선이라는 선전을 맡아온 모양이다. 여성의 사회 진출로 이제 엄마표 파스타는 점점 더 맛볼 기회가 줄어드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 어쩌면 엄마 파스타란 여성의 사회진출을 저지하고 가정에 구속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 아니었을까.

 

영양학적으로나 건강에도 좋은 파스타가 본고장 이탈리아를 넘어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음식이 되는 과정을 추적한 이케가미 슌이치의 음식사적 접근이 즐기기에 부담 없는 파스타처럼 너무 진지해서 무겁지 않고, 가벼운 안티파스토 같은 느낌이 들었다. 원래 파스타는 혼자 먹는 음식이 아니라, 푸짐하게 장만해서 같이 나눠먹는 음식이었다고 하는데 공동체가 함께 즐길 수 있는 음식으로도 이만한 음식이 또 있을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점심은 파스타에게 부탁해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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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의 노래 - 가토 슈이치 자서전
가토 슈이치 지음, 이목 옮김 / 글항아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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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서경식 교수님의 추천으로 유심히 보고 있었는데, 출간이 되었네요. 굿 타이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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