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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트노이의 불평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2월
평점 :
올해부터 시작한 모던 라이브러리 100 리스트에 9번째로 필립 로스의 초기 걸작이라고 칭송받는 <포트노이의 불평>을 추가했다. 작년에 책을 사서 읽기 시작했는데, 반절쯤 읽고 나서 덮어 두었다가 지난주에 다시 도전해서 완독했다. 출간된 지 46년이 지나도록 필립 로스가 구사하는 언어는 영화 <아메리칸 파이>(이 영화도 이제 한물갔지만)의 그것을 능가할 정도로 원색적이면서도, 섹스에 미친 주인공 앨릭잰더 포트노이의 심리분석 혹은 자기 내면적 고백을 통해 현대인의 욕구불만의 원천을 탐색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아울러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 고난을 당한 지난 이천년 동안 핍박받아온 유대인의 억압된 리비도를 비록 지면으로나마 마음껏 분출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올해 서른세 살 먹은 뉴욕의 잘나가는 엘리트 변호사 앨릭스 포트노이는 시민의 공복으로 근무하고 있다. 월반을 밥먹듯이 하고 고등학교 수석졸업은 물론이고, 중부의 앤티오크 대학을 졸업하고 그야말로 성공의 탄탄대로를 달리고 있는 중이다. 그런 그가 지금 슈필포겔이라는 정신과 의사 앞에서 자신의 수치스럽고 어두운 과거에 대해 남김없이 까발리고 있는 중이다. 인간기회위원회 부감독관이라는 지위에 맞지 않을 법한 상스러운 비속어를 남발하는 이 유대인 청년에게 도대체 무슨 문제가 있는 걸까.
보험쟁이로 정식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아버지 잭 포트노이는 평생 변비에 시달리며 주인공 앨릭스와 누이 해너를 키어왔다. 아버지보다 포트노이를 더 괴롭히는 가족 구성원은 바로 어머니 소피다. 유대 율법에 따라 자식들을 키워내는 것이야말로 자기 삶의 진정한 목표라고 설정한 어머니는 사춘기로 이제 막 접어드는 아들 포트노이를 옥죄기 시작한다. 이에 대한 반항이라고 해야 할까? 이성 그것도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 여성에 대한 성적 상상으로 앨릭스는 희대의 마스터베이션 전문가가 되기에 이른다. 우윳병, 양말, 야구글러브 심지어 저녁식사로 먹을 간에까지 손을 대기 시작한 포트노이의 성적 일탈은 그 끝을 모르고 뻗어 나가기 시작한다. 이 음침한 청년의 과거 고백이 시간당 수백 달러가 드는 뉴욕의 어느 정신과 클리닉에서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포트노이에게는 이런 이야기를 나눌 상대가 없었던 걸까? 정신과 상담이 자신의 치료(?)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주인공은 시간과 금전을 투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만큼 그의 억압된 리비도는 말을 나눌 상대 혹은 공격대상을 찾고 있었던 게 아닐까. 하지만 마마보이로 착한 아이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는 청년은 오랜 체험을 바탕으로 자아를 억눌러야만 했다. 이에 대한 반작용처럼 거의 일방적인 포트노이의 모놀로그가 끝없이 이어진다.
초기작 <포트노이의 불평>에서 필립 로스는 훗날 자기 문학의 전매특허가 되는 성을 통한 모든 문제의 해석이라는 주제의식을 수립한다. 우디 앨런의 영화에 등장하는 잘난 유대인의 전형이라는 이미지는 그의 소설 속에서도 다르지 않다. 어떤 의미에서 필립 로스 소설에 등장하는 성공한 일련의 유대인들의 이미지는 유년 시절부터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비범한 학업 성취에서부터 비롯되는 것 같다. 성공한 변호사라든가 대학교수, 작가 혹은 아트 디렉터들의 이야기 심지어 불평마저도 매력적으로 들리지만, 대척점에 서 있는 성공하지 못한 이들의 인생은 그렇지 못한 것이 사실이 아닌가. 이 성숙하지 못한 유대인 남자 주인공들은 하나 같이 자신이 만나는 여성들을 독립적인 인격체로 대하지 못하고 그저 하룻밤의 정사 상대로 생각하는 경향을 눈에 띄게 드러낸다. <포트노이의 불평>에서도 자신이 꿈꿔온 모든 성적 판타지를 완성시켜준 이방인 여자친구 메리 제인 리드를 “멍키”라고 폄하하며 훈육시키려는 모습에서 경악할 수밖에 없다. 상대방은 자신을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고 싶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포트노이에게는 어림도 없는 수작에 불과하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그는 나쁜 남자의 모범답안 같은 존재다. 그동안 자신을 성적으로 착취한 포트노이를 멍키가 언론에 다 까발리겠다고 하자 불안에 벌벌 떠는 찌질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차별을 철폐하기 위해 어려서부터 직접 행동에 나선 교육받은 진보적 사회주의자로 행세하면서도 실상은 그렇지 않은 위선적인 모습이 그대로 노출되기도 한다.
매력적인 금발 이방인 여자를 정복하는 것이야말로 신이 주신 자신의 사명이라고 여기는 듯 행동하는 포트노이의 행동방식은 개인적으로 수긍하기 어렵다. 누가 보기에도 무신론자인 포트노이가 얼토당토않은 선민의식을 발동시켜서 임신했다고 착각한 케이 캠벨에게 유대인으로 개종하라는 건 또 무슨 짓인가. 바로 그런 의미에서 앨릭스 어머니 소피의 집요한 세뇌공작은 성공을 거둔 것인지도 모르겠다. 자신도 모르는 부지불식간에 자기 민족의 정체성을 타자에게 요구하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그들이 가진 도덕적 우월감의 또다른 표현방식이 아니었을까. 그런 치졸한 방식의 정신승리야말로 앨릭스 포트노이가 극복하려는 강박관념의 원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역설적이게도 그런 심리적 압박이야말로 그들이 이방인들의 세계에서 정체성을 잃지 않고 살아남아 성공을 거둔 원동력이기도 하겠지만 말이다.
한편, 주인공은 어린 나이에 엄청난 부담감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등진 천재 피아니스트로 또다른 유대인 어머니의 자랑거리였던 로널드 림킨의 유서를 빗대어 조롱하기도 하지만, 결국 자신 역시 어머니의 심리적 조종에서 전혀 자유롭지 못한 다 자란 엄마의 마리오네트일 뿐이다. 매순간 매력 넘치는 멋진 이방인 여성과의 무분별한 섹스를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증명하고 싶은 수컷에 지나지 않는다고 자신의 카운슬러 닥터 슈필포겔에게 악을 쓴다. 도대체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이런 개인의 성적 혼돈상태는 여권신장, 인종차별철폐 그리고 반전평화운동이 전 미국을 뒤덮던 1960년대 말의 시대상을 상징한다. 과연 슈필포겔 박사는 우리의 불쌍한 포트노이에게 어떤 처방을 선사할 것인가. 아니 그가 과연 치료는 가능한 걸까?
필립 로스의 소설 <포트노이의 불평>은 야누스의 얼굴 같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혹자에게는 전무후무할 정도로 파렴치한 외설적인 소설로 읽힐 수도 있고, 또다른 이에겐 부모의 억압 아래 자란 불쌍한 청년의 신경쇠약을 극복하기 위한 파란만장한 성적 오딧세이로도 읽힐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포트노이의 불평>은 어느 단편적인 해석에 의존하기에는 너무 다채로우면서도 논쟁적인 소재들을 품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필립 로스는 이 소설이 발표된 후에 비난과 찬사를 동시에 받았던 것 같다. 최근 읽은 필립 로스 후기 소설에 비해, 그의 초기작에 해당하는 <포트노이의 불평>은 거칠고 도발적이다. 그 점의 이 소설의 또다른 매력이라는 점도 부인할 수 없지만 말이다. 누구 말대로 이 책을 두 번 읽는 건 정말 어리석은 일인지 궁금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