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가는 짐승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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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 미국 대선을 앞두고 최초의 흑인 대통령에 이어 여성 대통령이 등장할 가능성이 높다고 언론에서 호들갑이다. 그 주인공은 바로 빌 클린턴의 퍼스트레이디이자, 전 미국무부장관이었던 힐러리 로댐 클린턴이다. 필립 로스의 <죽어가는 짐승> 리뷰에 앞서 웬 미국 대통령 타령이냐고? 전대미문의 지퍼게이트가 전 미국 나아가 전세계 토픽이 되던 시절을 바로 이 소설이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또 어쩌면 소설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 여피 출신 교수 데이비드 케페시와 그의 제자 콘수엘라 카스티요의 ‘부적절한 관계’가 묘하게 지퍼게이트의 주인공들의 이야기와 겹치기 때문이다.

 

소설 <죽어가는 짐승>은 화자 데이비드 케페시-누가 봐도 필립 로스의 페르소나라고 할만하다-가 8년 전에 자기의 연애상대였던 애제자 콘수엘라 카스티요에 대한 회상으로 시작한다. 케페시는 학기 중에는 절대 부적절한 행동을 삼가고-지도교수와의 면담 시간에도 항상 문을 열어 놓는 풍습이 미국 대학에는 있더라- 오로지 학기가 다 끝난 뒤에 사적인 파티를 통해 본격적인 사냥에 나선다. 이번에 그의 타깃이 된 콘수엘라도 벨라스케스의 그림과 피아노 연주로 유혹을 시작한다. 지금은 일흔살이 됐지만, 그 시절에도 이미 60세를 넘긴 나이였던 케페시는 24세의 나이로 인생에서 최고 절정기에 달한 쿠바계 미인 콘수엘라의 엉덩짝과 젖가슴을 탐했다. 그런데 이 노교수의 부적절한 섹스 행각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1956년 아내와 이혼한 이래, 줄곧 자신이 가르치는 여학생들과 사랑놀음을 계속해왔다.

 

뉴저지에서 걸출한 미학자이자 교수로 라디오 방송에도 출연하는 케페시는 자신이 가진 예술에 대한 권위를 이용해서 멈출 수 성적 충동과 일탈을 지속해왔다. 이제 42세가 된 자신의 유일한 혈육인 아들은 가정을 파괴한 주범인 아버지를 비난한다. 그리고 자신은 오로지 도덕적 자격을 갖춘 여자를 상대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시달린다. 삶의 아이러니는 그런 케페시의 아들 케니도 간통을 저지르고 있다는 점이다. 비난하면서 역시 아버지가 물려준 삶의 궤적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삶의 진실을 보여주고 있는 걸까. 자신의 역할이 어쩌면 도스토예프스키의 아버지 카라마조프 같다는 진술이 그런 점에서 아주 흥미롭다.

 

시간의 흐름에 따른 서술에 대한 이야기가 뒤죽박죽이 되었다. 케페시와 케니의 갈등 문제는 소설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이야기인데 말이다. 젊디젊은 콘수엘라의 완벽한 여체를 소유하고 싶다는 이루어질 수 없는 욕망에 사로잡힌 노교수는 필연적 질투심과 사투를 벌인다. 가끔씩 벌어지는 일탈 외에는 삶의 완벽한 평정을 이루었다고 생각하던 케페시의 삶은 가히 팜므 파탈이라고 할 수 있는 콘수엘라의 등장으로 엉망진창이 된다. 아직 이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케페시는 자신이 콘수엘라가 본격적인 연애로 가는 길에 일별한 빨간 신호등 정도라는 걸 잘 알고 있으면서도 본능적 충동을 억제할 수 없다. 그는 자신이 말했던 것처럼, 자기파괴적 포르노그래피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그나마 자신을 제어해 주던 친구 조지 오헌이 살아 있을 적에는 다행이었지만, 다섯달 전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그마저도 요원해졌다. 바로 그 순간, 콘수엘라로부터 기적적으로 연락이 온다.

 

8년 전 콘수엘라는 만났을 적에도 케페시는 또다른 연애를 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 상대는 40대의 캐럴린 라이언스, 그녀 역시 대학시절 케페시의 상대였다. 필립 로스는 자유주의와 평등 그리고 성해방의 물결이 넘실대던 1960년대를 그리워하는 듯한 서술을 전개한다. 그 시대를 살아 보지 않았으니, 알 도리가 있나. 하긴 그 시대를 비교해 보기 위해서는 그 전시대는 또 어떠했는지에 대해서도 알아야 하지 않을까. 1930년대에 태어난 데이비드 케페시가 아니라면 그런 비교는 불가능할 것이다. 오로지 소설 속 화자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필립 로스이기에 가능한 설정이라고 해야 할까. 소설에 나오는 대로, 쾌락과 평정의 자유로운 결합이야말로 그가 진정으로 추구하는 삶의 본질인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소설의 초반부에서 다루는 케페시의 콘수엘라에 대한 강박과 에로티시즘에 대한 서술은 근래 읽어본 책 중에 최고라도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아니 이렇게 야하면서도 품격이 있을 수가 있나 그래. 거장다운 실력이 느껴지는 서사가 압권이었다. 예술을 숭배하는 젊은 여성에게 예술비평의 고수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이 얼마나 매혹적이겠는가. 미술, 음악 그리고 문학이라는 예술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위안과 쾌락이 얼마나 달콤할 수 있는지 케페시/필립 로스는 도발적 실천을 통해 독자에게 전달한다. 소설은 케페시 교수의 콘수엘라 유혹이라는 행동에서, 점점 더 화자 내부의 침잠하는 번뇌와 갈등하는 욕망에 대한 이성적 통제를 가능케 하는 사유로 전이한다. 개인적으로 <죽어가는 짐승>을 읽으면서 필립 로스가 독자에게 자신의 본능에 충실한 케페시가 과연 부도덕한 인물이냐고 도발적으로 묻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닌, 존재와 본질의 문제가 아닌가.

 

지난달 독서모임에 이 책을 들고 가서 최근에 읽은 최고로 야한 책이고, <네메시스>에 비해 너무 재밌었노라고 소감을 피력했었다. 그런데 다 읽고 나니 처음의 생각과 조금 달라졌다. 이래서 책을 다 읽어야 하나. 필립 로스의 열혈팬이 아니라고 하면서 그의 모든 작품을 읽고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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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글맨
크리스토퍼 이셔우드 지음, 조동섭 옮김 / 그책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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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 아이셔우드의 <싱글맨>을 읽었다. 시대적 배경은 1962년, 미국과 쿠바 사이의 미사일 위기가 한참 고조되던 크리스마스 즈음의 주인공 조지의 하루를 그린 소설이다. 소설의 공간은 서던 캘리포니아인가 보다. 겨울의 캘리포니아는 어떤 분위기일까. 주인공 조지는 올해 58세로(정확하게 1904년생인 크리스 아이셔우드와 동갑이다) 인근 주립대학에서 영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최근 동성 파트너인 짐이 고향 오하이오에서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해 죽었다.

 

아침잠에서 깬 조지는 일상의 조지가 되기 위한 의례적인 준비에 나선다. 한 때 보헤미안 유토피아라고 불렸던 자신의 거처에 대한 짤막한 설명과 함께 하루를 시작한다. 이웃의 스트렁크 부인은 자신의 성적 취향에 대해 잘 알고 있지만, 정중한 이웃이 그렇듯 내색은 하지 않는 모양이다. 동물을 사랑하던 짐이 죽고 나자, 조지는 짐의 애완동물들을 하나씩 처분한다. 추억 혹은 기억 지우기에 나섰다고나 할까. 소설은 시시각각 변화하는 조지의 심리를 정밀하게 추적한다. 지구 종말론적 미사일 위기 때문에 사람들은 생존을 위한 물건사재기에 나서고, 방공호 구축에 여념이 없다. 그리고 자신이 확보한 물자와 가족이 들어가 살아남을 방공호를 지키기 위해 자동소총을 드는 것도 마다하지 않을 거란 조지의 예언이 섬뜩하게 다가온다.

 

일상으로 복귀할 준비를 마친 조지는 미국식 자본주의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캘리포니아의 고속도로를 타고 자신의 일터인 샌토마스 주립 대학교로 향한다. 한때 전 세계 총생산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엄청난 생산력을 자랑한 미국식 속도와 캘리포니아 미국인들의 삶을 규정해 버린 자동차라는 문명의 이기를 이 중년남자는 만끽한다. 그렇게 거의 기계적인 움직임으로 차를 운전해서 학교에 도착한 조지는 벌거벗다시피 하고 테니스를 치는 젊은이들에게 알듯말듯한 눈길을 보낸다. 개인적으로 크리스 아이셔우드가 쓴 이 소설 내용 중에 그의 신성한 일과인 대학생들을 상대로 한 올더스 헉슬리의 소설 <After Many a Summer(1939)>에 대한 강의 부분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솔직담백한 조지의 감정에 대한 서술도 인상적이었지만, 교수와 학생 간의 팽팽한 긴장감으로 가득 찬 강의실 분위기에 대한 묘사는 마치 그 강의를 현장에서 듯고 있다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대학에서 배우는 강의가 돈 버는 행위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인가라는 내용의 조지가 한 모놀로그는 반세기가 지난 지금 대한민국 대학에서 진행 중인 구조조정을 예언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사이비’(사이버가 아니다) 대학교육의 진실을 관통한다.

 

교수식당에서 미국식 패스트 식사와 동료 교수들과 짧은 대담을 마친 조지는 한 때 연적이자 지금은 병으로 죽어가고 있는 도리스를 방문한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가르는 현장에서 그의 방문은 무채색처럼 단조롭고 무의미하게 다가온다. 체육관에 들러 십대소년 웹스터와 윗몸일으키기 경쟁을 하며 기분전환을 하기도 한다. 근육질의 남성성이야말로 그가 추구해야 하는 플라톤이 제시한 이상향이라고 생각했던 걸까. 슈퍼마켓에 들렀다가 아침에 거절했던 같은 영국 출신의 이방인이자 싱글맘 샬럿의 초대를 다시 받아들인다. 크리스 아이셔우드의 원작소설을 바탕으로 패션디자이너 출신의 톰 포드가 2009년에 동명의 타이틀로 연출했다고 하는데, 과연 톰 포드가 샬럿의 집안과 그녀가 입고 있던 요란스러운 복장을 어떻게 영상화했는지 무척이나 궁금하다. 아침에는 거절했던 샬럿의 초대를 다시 받아들여 파트너를 상실한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려는 이기적인 사악한 계산(vicious calculation)이라고 해야 할까. 그것도 아니라면 오갈 데 없는 두 외로운 영혼의 의기투합으로 봐주어야 하나. 그렇게 인간의 관계란 복잡하기 짝이 없는 모양이다. 소설에서나 현실에서나 말이다.

 

샬럿과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현명하게 마무리한 조지는 한 잔 더 하러 인근 바에 들렀다 자신의 제자 케니 포터를 만나 누가 봐도 무모해 보이는 밤수영에 나선다. 내가 짧은 영화 트레일러에서 본 물 속에 잠긴 콜린 퍼스의 모습이 아마 이 장면을 형상화한 게 아닐까. 상황을 모르고 봤을 때는 약간 무섭기까지 했는데, 소설을 읽어 보니 충분히 이해가 가는 장면이었다. 그렇게 물에 흠뻑 젖은 케니를 자신의 집에 데려와, 그와 그의 애인 로이스 야마구치에게 사랑의 보금자리를 제안하며 스스로를 추잡한 늙은이라며 은근한 유혹을 이어간다. 도대체 이야기가 어떻게 끝날까.

 

소설 <싱글맨>의 전개는 놀랍다. 주인공 조지의 마지막 하루의 동선을 쫓아가는 동안, 독자들은 크리스 아이셔우드가 인도하는 대로 그의 일생을 더듬게 된다. 주인공이 가진 고민과 갈등 그리고 삶을 대하는 방식에 이르기까지 정말 섬세한 부분들이 대가의 기교로 독자의 심리를 파고드는 것이다. 문제는 번역이다. 누가 말한 대로 번역을 하랬더니, 소설을 썼냐 정도는 아니지만 다름이 아닌 틀림의 번역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 때마침 원서를 구해 비교대조해 가며 읽었는데, 많은 부분이 틀렸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시제는 물론이고, 역자의 임의적인 해석이 의심되는 부분은 어김없이 원서와 틀렸다. 어떤 의도를 가지고 그렇게 번역한 걸까, 알 수 없다.

 

그런 점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소설 <싱글맨>이 가진 장점들은 조금도 빛을 잃지 않는다. 상실의 시대를 사는 개인이 가진 고민들, 타인과의 관계 설정, 내 삶과 감정에 충실한 기술 등은 정말 절로 감탄을 자아내게 만드는 그런 매력을 품고 있다. 12월이 되면 어떻게 한 해가 갔는지 모르게 시간이 그렇게 지나갔음에 어리둥절하기만 하다. 그런 분주함 가운데 이런 걸작을 놓치지 않고 만나게 되어 반가울 따름이다. 이게 다 <베를린 이야기> 덕분이라는 점도 빼놓을 수 없겠지. 이제 영화 <싱글맨>을 감상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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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리스 씨 기차를 갈아타다 창비세계문학 45
크리스토퍼 이셔우드 지음, 성은애 옮김 / 창비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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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말 독서모임을 앞두고 국내에 출간된 크리스 아이셔우드의 책을 읽고 있는 중이다. 사실 지난달부터 읽기 시작했는데 잡다한 독서이력 때문에 미처 읽지 못하고 있다가 다시 에둘러 와서 다 읽었다. 사실 크리스 아이셔우드의 책은 <베를린이여 안녕>으로 시작했는데 순서대로 읽으려던 나의 결심을 애당초 틀려버렸다. 솔직하게 말해서 베를린 연작 중에 <노리스 씨 기차를 갈아타다>보다 <베를린이여 안녕>이 훨씬 재밌다. 지금은 절판되서 구할 수도 없는 <싱글맨>에 빠져 있는 중이다. 그런데 마침 원서도 구해서 같이 비교해 가면서 읽고 있는데 번역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누구처럼 소설을 쓴 건 아니지만 말이다.

 

창비에서 나온 책이라 마음에 들지 않지만 어쩌겠나 그래. 다른 버전을 구할 수 없으니 창비에서 나온 책을 읽는 수밖에. 서설이 길었구나. <노리스 씨 기차를 갈아타다>는 제목 그대로 화자인 윌리엄 브래드쇼(크리스 아이셔우드의 미들네임이기도 하다)가 베를린으로 가는 기차에서 50대의 아서 노리스 씨를 만나게 되면서 겪게 되는 일종의 경험담이다. 연작으로 나온 <베를린이여 안녕>보다 훨씬 더 정치적 색채가 짙고, 군데군데 자신의 성적 취향을 암시하는 그런 복선들이 깔려 있다는 점에 변별점을 가진다.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가 독일을 선거로 독일을 석권하기 이전까지 1930년대 초반 독일의 수도 베를린은 자유분방함이 넘치는 그런 도시였다. 데카당스한 분위기였다고나 할까. 그런 분위기 속에 영국 출신의 이방인 크리스 아이셔우드의 분신은 윌리엄 브래드쇼는 독일 사람들에게 영어교습을 하며, 유창한 독일어를 구사하면서 그들 사이를 파고든다. 소설은 그런 윌리엄 브래드쇼가 문제적 인간 아서 노리스와 얽히게 되는 일단의 과정을 예리하게 짚어내고 있다. 어느 정도 미스터리한 구성도 눈에 띈다. 독자는 도대체 아서 노리스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베를린과 파리를 오가며 무언가 거래를 하는 것 같은데, 소설의 서술자 빌리는 그게 밀수가 아닌가 짐작하지만 도대체 알 수가 없다.

 

잘 나가던 아서 노리스가 빌리 브래드쇼가 사는 아파트로 이사오면서 이야기는 한층 복잡해진다. 계속해서 정체불명의 마고란 인물이 파리에서 암호 같은 전보를 아서 노리스에게 보내고, 베를린 사교계의 마당발 노리스 씨를 따라 많은 사람들을 소개 받고 심지어 나치 국가사회주의당에 대척점에 서 있던 공산당 활동에까지 브래드쇼는 원치 않게 개입하게 된다. 그렇게 알게 된 루드비히 바이어란 미지의 인물로부터 빌리 브래드쇼는 충격적인 사실을 전해 듣게 된다.

 

크리스 아이셔우드는 명백하게 자신을 형상화한 윌리엄 브래드쇼란 캐릭터를 창조해냈다. 소설 속에서 브래드쇼는 누가 봐도 이성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는 성적소수자로 타인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미래의 소설가 지망생으로 지적 풍모를 가진 그런 남자로 그려진다. 그는 마치 소설 <수호전>에 나오는 급시우 송강처럼 어려운 상황에 빠진 친구들을 돕는 일을 마다하지 않는다. 누구나 인정하는 자신의 절친한 친구가 된 아서 노리스를 비롯해서, 나치가 득세하기 시작한 뒤 숙적 나치 돌격대원에게 쫓기는 오토를 성심껏, 하지만 자존심이 상하지 않게 상대를 배려하면서 최선을 다해 돕는다. 물론 때로는 베를린의 친구들과 불화를 경험하기도 하고, 냉소적인 면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객관적 자세를 대체로 유지한다. 한편 SM적인 성적 취향을 가진 항상 우물쭈물하는 노리스 씨가 주저하며 하지 못하는 말들을 정곡을 찌르는 특유의 화법으로 이끌어 나가기도 한다. 바로 그 점이야말로 어쩌면 독자들을 속 시원하게 만들어주려는 작가의 배려일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어느 작가의 작품세계를 알아보려면 적어도 3~5권의 책을 읽어봐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최근에 크리스 아이셔우드의 작품을 연달아 읽으면서 작가의 성향 혹은 작풍이 조금씩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자신이 거주하는 하숙집 주인 슈뢰더 부인도 빼놓을 수 없는 멋진 캐릭터다. 간전기 시대에 제국에 패배를 안겨준 적국 출신의 이방인 크리스 아이셔우드를 이시부 씨라 부르며(아 헷갈린다 <베를린이여 안녕>에서 그녀가 그렇게 불렀던가), 친근하게 대해주는 수다스럽고 푸근한 하숙집 아줌마 같은 존재라고 해야 할까. 세입자들이 장기간 방을 비울 때는 서슴지 않고 그들의 방에 침입하는 고약한 습관도 있지만, 노리스 씨를 괴롭히는 그의 전직 비서 슈미트가 하숙집을 습격했을 때는 초대 받지 않은 이 침입자를 공격해서 감금하는 기지도 발휘한다. 우리의 이시부 씨들의 영향으로 선거에서 공산당에 투표하기도 하지만, 또 나치 시대에도 잘 적응해서 혹심한 전쟁을 무사히 빠져 나오기도 했다. 어쩌면 슈뢰더 부인이야말로 나치 치하의 엄혹한 시절, 전쟁과 기아를 버텨낸 베를린 시민의 상징 같은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전쟁이 끝나고 이십년 만에 다시 만난 이시부 씨와 슈뢰더 부인의 해후는 정말 감동적인 에필로그였다. 어찌 됐든, 우리네 삶은 계속된다는 삶의 진실이야말로 크리스 아이셔우드가 하고 싶었던 말이 아닐까.

 

어쩌면 크리스 아이셔우드는 자유주의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나치 독재정권으로 이행기에 대한 기록은 은근한 방법으로 서술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은 유대인에 대한 본격적인 핍박이 시작되지 않았지만, 갈색셔츠(브래드쇼는 점증하는 나치에 대한 공포를 사방에서 갈색으로 포위된 상황에 비유하기도 한다)를 입은 청년들이 백주대낮에 반대파에 대한 테러를 자행하고 그것을 지켜보는 경찰들은 멀뚱하게 쳐다보고만 있었다는 증언이 낯설지 않게 다가온다. 어쩌면 그 당시만 하더라도, 베를린 시민들은 나치가 앞으로 저지르게 될 홀로코스트나 2차세계대전으로 독일이 입게 될 참화 그리고 뒤이은 분단에 대해 그들은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크리스 아이셔우드가 이방인 윌리엄 브래드쇼의 시선을 통해 베를린의 사회상을 들려주었다면, 베를린 통신원 신분의 헬렌 프랫은 보다 적극적인 목소리로 범죄에 가까운 나치의 실상을 서방세계에 전파했다. 대다수 온건한 독일 시민들은 사회주의 세력이 점증하는 나치의 부상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걸까. 냉온탕을 오가는 선거결과에 따라 희비가 엇갈리는 장면이 눈길을 끈다.

 

이방인으로 베를린에서 지내면서, 유창한 독일어 구사 능력 덕분에 각양각층의 사람들을 만난 체험은 크리스 아이셔우드의 <베를린 이야기> 연작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 같다. 이십대 청년의 가난, 정치적 증오 그리고 절망으로 가득했던 시절에 대한 진술은 그렇게 역사적 가치를 가지고 독자에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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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부대 - 2015년 제3회 제주 4.3 평화문학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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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에 기가 막힌 뉴스 하나를 보았다. 강남구청에서도 댓글부대를 운영하면서 현재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서울시를 공격했다는 내용이다. 지난 대선 당시 국정원 댓글사건에 관한 재판이 채 마무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공공연하게 이런 일들이 자행되고 있다는 사실이 기가 막힐 따름이다.

 

개인적으로 소셜미디어 확산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 바이라인이 달리지 않은 기사를 믿을 수가 없는 것처럼, 어느 개인의 생각을 바탕으로 생산된 정보들이 지나치게 범람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그런 우려 때문이다. 트위터나 페이스북 계정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그다지 유용하게 사용하지 않는다. 과다하게 생산되는 정보들이 언제부터인가 부담스러워지 시작해서 더 이상 보지 않게 됐다. 사실 그럴 시간도 없고.

 

2세대 덧글부대를 주제로 삼은 장강명 작가의 신작 소설 <댓글부대>는 소설 띠지에 둘러진 “가장 빠르고 가장 독”하다는 말 그대로다. 소설이 다루는 대강의 줄거리는 합포회라는 비밀조직이 팀-알렙이라는 온라인마케팅 업체를 동원해서 보수적 아젠다를 전파하고, 자신들의 생각과 대척점에 서 있는 일련의 진보적 카페들을 공격하고 파괴한다는 내용이다. 팀-알렙 소속의 찻탓캇, 삼궁 그리고 01査10 이렇게 세 명의 콤비들은 바이럴마케팅으로 진화하는 소셜미디어의 속성을 정확하게 파악해내고, 공격 타깃에 대한 예리한 분석을 바탕으로 주어진 임무를 멋지게 수행해낸다. 물론, 합포회에서는 그들의 이런 노고를 현금과 룸살롱에서의 접대로 치하한다. 한편, 찻탓캇이라는 미지의 인물은 임상진이라는 K신문사의 기자와 인터뷰를 진행하는데 후반으로 갈수록 이들의 이야기가 합포회라는 비밀조직에 대한 폭로를 준비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물론 끝에 가서 독자를 기다리고 있는 반전은 또다른 이야기지만.

 

팀-알렙을 조종하는 합포회 그리고 그 합포회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남산 노인이라는 권력구조는 태생적으로 말단에 있는 삼총사를 포식할 수밖에 없다. 과연 그들은 자신들이 큰그림에서 그려지는 바닥의 소모품에 불과하다는 걸 알고 있었을까? 삼총사 중에서 그나마 약삭빠른 삼궁은 이철수 팀장의 배포 큰 행동과 남산 노인과의 만남을 통해 그저 보수나 받으며 자신이 하던 사이버테러에 사명감을 가지고 본격적으로 나서게 된다. 어느 순간 댓글전투는 옳고 그름의 문제나 보상의 문제가 아니라, 교조적인 차원으로 승화하게 된 것이다. 그 바탕에는 삼궁 자신도 핵심권력에 다가서서 한몫 챙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얄팍한 노림수의 발로겠지만. 그것이 착각이었다는 걸 깨닫기엔 당장의 물질적 유혹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그런 상황이다.

 

기자 출신의 장강명 작가는 임상진이라는 문학적 페르소나를 통해 자신의 한때 밥벌이었던 기술을 유감없이 독자에게 선사한다. 소설에 등장하는 매장의 제목은 3제국의 악명 높은 선전기술자 괴벨스의 발언이라고 하는데(사실인지 확인은 안되었지만), 거짓보다 진실을 섞은 거짓이 보다 효과적이라는 프로파간다가 눈에 띈다. 프레임 설정에 뛰어난 수구세력의 전술 분석도 주목할 만하다. 가치관에 이미 확립된 20, 30대 보다 아직 가치관이 형성 중인 십대 청소년들을 타깃으로 삼아 ‘나강캠페인’을 전개한다는 팀-알렙의 전략에서는 약간의 전율이 일기도 했다. 십대를 지나온 지 너무 오래돼서 그네들의 심리에 대해 알 수가 없지만, 작가가 기술하는 내용에 대해 공감대가 형성됐기 때문이라고 할까. 얼마 전, 영화에서 처음으로 접한 파쿠르에 대해서 작가가 다룬 점도 흥미로웠다. 그리고 유투브 동영상으로 본 귓방망이 댄스에 관한 이야기도 나와서 좀 신기했다. 이젠 정말 B급전성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모양이다. 장강명 작가에게 세상 모든 이야기들은 어쩌면 소설의 소재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짧고 빠른 그리고 강력한 메시지 전달이야말로 앞으로 사회에 진출하게 될 청소년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핵심전략이라는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물론 그 메시지가 어떤 메시지냐가 중요하겠지만 말이다.

 

<덧글부대>에 등장한 것처럼 소수의 정보생산자들이 생산해낸 확인되지 않은 정보(언제부터인가 언론은 그들의 본령 중의 하나인 기사에 대한 팩트 체크조차 하지 않고 있다, 이것 역시 책에서 다루어진다)를 언론 혹은 다수의 개인이 받아서 확대재생산하고 다양한 방식의 상호작용을 통해 토네이도급의 나비효과를 초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개인적으로 소셜미디어가 우리 사회를 바꿀 수 있을 정도의 위력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자유로운 소통을 위해 만들어진 미디어가 정치적 암흑세력에 의해 조작될 수 있다는 가정은 상상만으로도 두렵다. 소설 <댓글부대>의 내용이 작가의 상상력 그대로만 존재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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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12-08 1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자 출신 작가답게 이번 신작에서도 인터뷰 장면을 실감나게 묘사했을 것 같아요. 이 책은 꼭 읽어보고 싶네요.

레삭매냐 2015-12-09 09:30   좋아요 0 | URL
모든 소설이 그렇지만 장단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
우선 소재는 파격적이고 최근 이슈를 포획했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다만, 더 핵심적인 곳을 독하고 강하게 그리고 빠르게
잡아내지 못하지 않았나 하는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소설은 참 재밌습니다.

재는재로 2015-12-09 20: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읽어봤는데참독해요 문제는읽고나니진짜보다더진짜같다는점이에요
인터넷의돌아다니는글 뉴스도이제못믿겠어요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눈물 - 알렉산드로스의 죽음과 제국의 왕관을 놓고 벌이는 살아남은 자들의 전쟁
제임스 롬 지음, 정영목 옮김 / 섬섬 / 2015년 11월
평점 :
품절


 

지난주부터 계속해서 일주일마다 한 권씩 역사물을 읽고 있다. 지난번에는 로저 크롤리의 <비잔티움 최후의 날>을 그리고 이번주에는 제임스 롬의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눈물>을 읽었다. 전공이 역사라 그런진 몰라도 역사책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오히려 소설보다 더 독서 진도가 빠르다.

 

세계 최초의 대제국을 건설했던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 신화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청년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 정복이라는 부왕 필리포스 2세의 꿈을 이어 받아 성공시켰다. 한발 더 나아가, 유럽과 아프리카 그리고 아시아라는 당시 알려진 세계 전부를 정복해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다인종 세계국가’를 건설하겠다는 명백한 비전을 가지고 정복전쟁에 나섰다. 그 결과, 페르시아와 이란 그리고 인도까지 원정에 나섰지만 오랜 전쟁에 지친 자신의 원정대 병사들도 알렉산드로스와 같은 생각을 가졌던 것은 아니었다. 마케도니아와 그리스군으로 이루어진 원정대의 핵심 병사들-그들은 실제적으로 용병에 가까웠다-에게 페르시아 제국으로 대변되는 동방세계는 그야말로 젖과 꿀이 흐르는 약탈의 대상이었을 뿐이다. 알렉산드로스의 원대한 비전은 자신의 휘하 장군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엄청난 능력과 이상을 가진 군주 밑에서 7명으로 이루어진 핵심 친위대 사령관들은 효율적인 전쟁기계로 활약했다. 하지만 이 모든 전제에는 한 가지 결정적 단서가 있었다. 가장 강한 알렉산드로스 밑에서라는.

 

오늘날 중앙아시아에 해당하는 박트리아를 거쳐 인도까지 성공적인 원정을 마치고, 자신의 아시아의 수도로 삼은 바빌론에서 아라비아 원정을 기획하던 중에 이 위대한 왕은 이유를 알 수 없는 원인으로 기원전 323년에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게 된다. 그의 사후, 이 놀라운 제국을 이을 후계자가 없었다는 것도 아이러니하다. 그의 박트리아 출신 왕비 록사네는 훗날 알렉산드로스 4세라 불리는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지만 당시 아이가 왕자가 될지 공주가 될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알렉산드로스의 제국의 운명은 7명의 친위대 장군들의 수중에 떨어졌다. 바로 그 지점부터 수십 년간에 걸친 유혈 내전의 서막이 오르게 된다.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알렉산드로스에 필적할 만한 업적이나 능력도, 그리고 웅대한 비전도 가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 시대의 비극이었다.

 

바로 이런 시대적 배경에 미국 뉴욕주의 바드대학에서 그리어스와 문학 그리고 역사를 가르치고 있는 제임스 롬 교수는 지금으로부터 2,300년 전의 역사적 신화에 도전한다. 알렉산드로스가 세계를 정복하고 있던 시대로부터 너무 많은 시간이 흘러서일까. 믿을 만한 사료들은 턱없이 부족하고, 그나마 남아 있는 사료들조차 신뢰하기에는 상이한 점들이 많아서 저자는 취사선택에 있어 신중에 신중을 기했을 것 같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기록되지 않은 혹은 기록에 남지는 않았지만 미지의 부분에 대해서는 최대한의 상상력을 발휘해서 접근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한때 역사학도로 무조건적으로 사료에만 의존하지 않으면 균형감각을 발휘하는 저자의 서술방식에 매료되었다. 아마 그래서 더 열심히 책을 읽을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알렉산드로스 제국 상실의 시대에 등장한 여러 명의 풍운아들의 삶이 호기심을 자극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위대한 군주가 유명을 달리했을 때, 권좌에 가장 가까웠던 인사는 바로 왕의 인장이 상징하는 제국의 대권을 공식적으로 추인받은 페르디카스였다. 알렉산드로스가 죽기 전 해에 세상을 뜬 사령관 헤파이스티온이 생존해 있었다면, 그가 알렉산드로스의 사후를 책임졌겠지만 다른 대안이 없었다. 최고지휘관 회의에서 본국 마케도니아를 실질적으로 통치하고 있던 안티파트로스와 병사들의 신망을 얻고 있던 유능한 장군 크라테로스에게 유럽을 맡기고 페르디카스와 레오나토스가 아시아의 섭정이 되어 알렉산드로스의 형제 필리포스를 허수아비 왕으로 삼는 것으로 제국의 위기를 봉합했다. 하지만 본국에 남아 아르가이 왕조를 지탱하던 한 축인 알렉산드로스의 모후 올림피아스의 생각은 달랐다. 그녀는 위대한 아들의 억울한 죽음-독살설이 지배적이었다-을 신원해야 했고, 비록 이방인 왕비에게서 났지만 자신의 손자 알렉산드로스가 왕위에 올라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권좌를 위한 격렬한 투쟁에 현장에 뛰어 들었다. 문제는 그녀에게 왕권을 강화시킬 수 있는 실질적인 병력이 없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딸인 클레오파트라 공주를 유망한 장군과 정략결혼시키겠다는 책략을 도모한다. 물론 그녀의 꿈은 결국 물거품이 되었지만 말이다.

 

한편, 마케도니아의 군사력 앞에 무릎 꿇고 복종하던 도시국가 아테네의 신민들은 동방에서 숙적 알렉산드로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한 번 자신들의 민주정과 영화를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반란의 깃발을 들게 된다. 아테네의 비둘기파를 대변하는 정치가 포키온은 필리포스 2세 사후, 젊은 알렉산드로스에게 도전했다가 그야말로 잿더미로 변한 이웃 테베의 비극적 참사와 더불어 굴욕적인 강화를 했던 옛 일을 상기시켰지만 카산드라의 예언처럼 동료 시민들에게 무시당했다. 이렇듯 신화가 된 전제군주의 죽음은 온 세계를 엄청난 격랑 속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올림피아스가 사윗감 후보로 삼은 레오나토스가 권력쟁투 레이스에서 첫 번째로 이탈하면서 각지에서 군웅할거 시대가 도래했다. 현실주의자 프톨레마이오스가 제국의 보석이라고 할 수 있는 이집트에서 현란한 선전술을 이용해서 앞으로 이어진 300년 통치의 기반을 닦고 있었고-유명한 클레오파트라의 선조가 된다- 프리기아의 사트랍(총독)이었던 애꾸눈 안티고노스가 뛰어난 전투감각을 바탕으로 아시아의 대표선수로 부상했다. 여기에 전략적 실패를 거듭하다가 결국 이집트 원정에서 자신의 핵심부대인 은방패부대의 쿠데타로 목숨을 잃은 페르디카스를 지지하던 그리스인 서기 출신 에우메네스의 존재는 확실히 특별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마케도니아 귀족 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알렉산드로스의 후계자가 될 수 없는 조건이었다. 이집트의 프롤레마이오스 못지않게 냉정한 현실주의자였던 에우메네스는 페르디카스가 죽은 뒤, 제국의 공적으로 지목되어 한때 무법자 생활을 하는 등 극한의 위기에 내몰리기도 했지만 다시 무대에 복귀해서 아시아의 최강자 안티고노스와 일합을 겨루는 위치에까지 올라가기도 했다. 결국 안티고노스와의 마지막 전투였던 가베네 전투에서 은방패부대의 배신으로 패하면서 그리스인의 꿈은 일장춘몽으로 스러지게 되었다. 서방의 카산드로스와 동방의 안티고노스가 최종 승리를 거두면서 알렉산드로스가 꿈꾸던 제국은 현재의 다극 세계와 비슷한 모습으로 귀결되었다.

 

배신과 동맹이 반복되고, 자기 휘하에 있는 병사와 지휘관들도 언제 상대방이 제시하는 달콤한 유혹에 넘어갈지 모르는 그야말로 약육강식의 전장을 지배한 알렉산드로스는 진정한 영웅이었다. 승부사 기질이 넘치는 알렉산드로스의 리더십이 없었다면 장기간에 걸친 원정 때문에 터져 나오는 병사들의 불만을 잠재울 수 없었을 것이다. 한편, 제왕의 동방원정에 자의반 타의반으로 따르게 병사들은 실제로 용병에 다를 바가 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병력을 동원하는데 자금력이 필요하다는 사실도 저자는 예리하게 짚어낸다. 숱한 패배에도 불구하고 무대의 주인공 중의 한 명인 에우메네스가 불사조처럼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힘 중의 하나는 본인이 가지고 있던 주어진 상황에 뛰어나게 대처할 수 있는 임기응변과 자금력이었다. 인도 원정에서 얻은 코끼리 부대 역시 이 대형동물을 보지 못한 서방세계 전사들에겐 공포의 대상이었다. 고대 전사들에게 코끼리 부대는 아마 현대전의 중전차 같은 충격이 아니었을까.

 

확실히 서방세계에 알려져 있던 모든 세계를 정복한 알렉산드로스의 세계통일 비전은 당시 유일무이한 아이디어였다. 정복민과 피정복민이라는 단순한 구도가 아니라, 서방의 그리스문화와 동방의 오리엔트 문화를 동화시키겠다는 청사진-그 결과 헬레니즘 문화가 탄생했다-을 바탕으로 그리스 고위 지휘관들과 페르시아 여인들과의 대규모 합동결혼식을 주선하는 실천력도 보여주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의 짧은 치세였다. 그가 장수하면서 자신의 비전을 계승할 수 있는 후계자를 키우는데 성공했더라면 현재의 역사는 과연 달라졌을까? 제임스 롬 교수가 지적하듯, 어쩌면 그것은 다양성을 추구하는 근대적 인간의 본성에 어긋나는 것이기에 군주의 혼혈정책에 반대하는 보수파 지배계급 마케도니아인들을 만족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스출신 병사들이 세계제국 건설이라는 알렉산드로스의 선전의 도구였다는 점도 주목할 만한 지적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정복전쟁이 동방으로 진행되면서 알렉산드로스가 서방의 합리적 군주의 모델이 아닌 오리엔트 전제군주의 그것, 더 나아가 아몬 신의 아들이라는 신화를 거부하지 않았다는 점도 특이할 만하다.

 

실존했던 역사가 빚어내는 스토리텔링의 힘은 압도적이다. 저자 제임스 롬은 고대와 현대를 아우르는 방대한 자료들을 스토리텔링에 얹고, 자신의 역사적 상상력을 양념 삼아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야망과 전쟁 그리고 상실이 그려내는 한 편의 대서사시를 창조해냈다. 알렉산드로스 사후 등장한 무대의 주인공들은 결정적 순간마다 숱한 선택을 강요받는다. 모두가 오랜 갈등과 번민 끝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선택을 했다고 생각했지만, 대부분 잘못된 판단이었고 오히려 역사의 흐름은 우연의 힘에 따라 좌우될 때가 많았다. 제국을 꿈꾸었던 영웅 알렉산드로스의 삶도 그러했는데 하물며 우리네 삶은 또 어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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