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잔티움 제국 최후의 날
로저 크롤리 지음, 이재황 옮김 / 산처럼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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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날 소설만 읽다가 간만에 역사 서적을 읽었다. 며칠 전 출판사 대표들이(책만사) 뽑은 올해의 책 인문사회자연과학 부분에 선정됐다는 기사가 결정적이었다. 지난 화요일부터 읽기 시작했는데 가독성이 나도 깜짝 놀랄 정도로 폭발해서 금세 다 읽을 수가 있었다. 어젯밤에 피크를 올려서 오늘 아침에 완독했다. 처음 들어본 작가였는데 영국 출신 교사이자 역사가인 로저 크롤리의 <비잔티움 제국 최후의 날>이 바로 그 책이다. 지중해 세계와 오스만 제국을 주력으로 삼는 작가로 기존에 <바다의 제국들>과 <부의 도시, 베네치아>가 출간됐다. 세 책 모두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것이 특이하다.

 

오래 전에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존 줄리어스 노리치 경의 대작 <비잔티움 연대기>와 시오노 나나미의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을 다룬 책도 읽어서 그런지 그 때 읽었던 이야기들이 새록새록 떠오르고 공방전의 실제적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오스만 제국의 메흐메트 2세와 수석대신 할릴 파샤 그리고 비잔티움 제국의 콘스탄티노스 11세와 제노바 출신 용병대장 조반니 주스티니아니 같은 이름들이 낯설지 않게 다가왔다. 1453년 5월 29일 화요일, 당대 그리스인들이 그리고 튀르크인들이 모두 로마제국(룸)이라 불리던 지중해의 진주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됐다. 이 사건은 로저 크롤리 작가가 본격적인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이 시작되기 전, 다룬 프롤로그 부분에서 역사의 결정적 순간이었다고 적었던 말라즈기르트(만지케르트) 전투를 능가하는 시대의 변곡점이었다.

 

콘스탄티노플 함락은 단순하게 어느 한 도시가 이슬람 세력에게 함락된 것이 아니라, 15세기 발흥하던 이슬람 세력의 대표선수 오스만 제국의 서방진출을 최전방에서 막고 있던 기독교세계의 보루가 무너진 결정적 순간이었다. 더 나아가 중세시대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분기점이기도 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건설된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현재 이스탄불)은 천년 넘게 수많은 적들의 침략 앞에 선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서쪽 유럽 쪽의 삼중장벽은 침공군에게 숱한 좌절을 안겨 주었으며, 크리소케라스 만은 쇠사슬 장벽으로 그리고 동쪽의 마르마라 해는 빠른 물살 때문에 바다에서의 공격을 막아 주고 있었다. 그렇게 제국의 수도는 4차 십자군 전쟁 때 같은 기독교도들에게 약탈당한 것과 내전 때 내부세력의 협력으로 성문이 열린 것을 제외하면 침략자에게 공략당한 적이 없었다.

 

7세기 발흥한 이슬람 세력의 무자비한 공격을 ‘그리스의 불’이라는 당대 최고의 공격력을 지닌 비밀병기로 제압하면서 난공불락이라는 콘스탄티노플의 명성은 하늘을 찔렀다. 하지만 달도 차면 기우는 법, 천년역사를 자랑하는 비잔티움 제국은 1299년 건국된 오스만 제국을 비롯해서 기존의 셀주크투르크, 십자군 원정과 발칸 반도의 불가르 족 등의 계속되는 침입과 서방 가톨릭 세계와 필리오퀘로 대변되는 신학적 교리 논쟁, 숱한 내전을 겪으면서 쇠락해 가기 시작했다. 46쪽에 나오는 빵 가격과 목욕물을 데우면서도 성자와 성부의 품격 논쟁을 인용한 부분에서는 저자의 유머 감각이 느껴지기도 했다. 한편, 제국을 유지하는데 핵심적 자원과 인적 보고였던 동방의 아나톨리아를 오스만 제국에게 상실하면서 제국의 쇠퇴는 되돌릴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사실 15세기 초반 제국의 영토는 펠레폰네소스 반도의 일부와 콘스탄티노플 그리고 흑해 연안의 일부 도시가 전부였다. 영락한 과거의 제국은 인공호흡기에 의존해서 생명을 연장하고 있었다.

 

1451년 19세의 나이로 오스만 제국의 다섯 번째 술탄의 자리에 오른 청년 메흐메트 2세는 아버지 무라트 2세가 죽고 형제들을 일소하면서 최고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암호명 “빨간 사과”라 불리는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해서 새로운 제국의 수도로 삼아야겠다는 야망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뛰어난 정복가였던 무라트 2세를 이은 청년 술탄의 야심을 얕잡아 본 서방의 교황과 기독교왕국들은 가톨릭과 정교회 통합에 부정적이었던 비잔티움 제국의 위기를 파악하고 있었으면서도 지원을 꺼렸다. 해상을 주름잡던 베네치아 공화국과 제노바 역시 자신의 이권 챙기기에만 몰두했지 오스만 제국의 콘스탄티노플 공략이 훗날 지중해 무역과 자신들의 거점 유지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술탄은 즉위 초기 친위대의 반란을 제압하고, 현상유지를 주장하는 할릴 파샤로 대표되는 보수파 대신들을 설득해서 마침내 빨간 사과 공략을 결정하기에 이른다.

 

카이사르와 알렉산드로스를 잇는 세계제국의 지배자가 되겠다는 야심을 품은 메흐메트 2세는 즉위와 동시에 빨간 사과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겠다는 계획 아래, 비밀리에 공략 준비를 진행시키기 시작했다. 헝가리인 오르한이라는 대포기술자를 채용해서, 비잔티움 제국의 심장부인 삼중장벽을 쳐부술 막강한 화력의 대포를 제작하기에 이른다. 오늘날 터키에 해당하는 아나톨리아 대부분과 발칸 반도를 실제적으로 지배하고 있던 술탄에게 신성한 무슬림 전사로서 지하드 성전을 수행하는 가지 전사의 이미지로 무슬림 전사들의 참전 의지를 고취시켰다.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는 그가 말하던 대로 ‘알라의 목에 걸린 가시’ 같은 존재로 이슬람 세력이 차지하지 않으면 언제 다시 유럽의 십자군 원정 같은 침략의 전초기지로 활용될지 모를 일이었다. 아울러 화승총과 대포 같은 최신식 군사기술 그리고 전쟁에서 고래로 무엇보다 중요한 병참 보급의 중요성을 잘 파악하고 술탄은 자신이 가진 모든 자원을 동원해서 콘스탄티노플 공략에 나서게 된다. 보스포로스 해협을 통한 해상보급을 차단하게 위해 유럽 대륙 쪽의 가공할 만한 요새 보아즈켄(루멜리 히사르)을 건설해서 콘스탄티노플의 목을 죄기 시작한다.

 

이렇게 화려한 공격군에 비하면 방어군의 현실은 암담하기만 했다. 자발적으로 참전한 주스티아니를 비롯한 유럽 지원군을 비롯한 대략 7,000명 남짓한 방어군으로 조금 과장되긴 했겠지만 20만에 달하는 공격군을 상대하는 그야말로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었다. 사방으로 포위된 콘스탄티노플의 비잔티움 수뇌부는 서방세계의 지원을 애타게 기다렸지만 교황의 파문 조치와 필리오퀘 논쟁 그리고 250년 전 4차십자군 원정 때 당한 기억을 잊지 않은 그리스인들이 가진 상호간의 불신 그리고 서방세계의 분열은 십자군 원정 같은 단일대오로 이슬람세력에 대항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서방세계에서 원조가 끊긴 콘스탄티노플 함락은 이제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메흐메트 2세가 이끄는 공격군의 승리가 손쉽게 이루어지진 않았다. 해상전투에 여전히 약점을 가지고 있던 오스만군의 해상공략 작전은 번번이 실패로 귀결되었고, 크리소케라스만에 해상 전투함을 투입시키는 상상을 초월하는 작전도 방어군에게 상당한 심리적 부담을 안겨 주긴 했지만, 공략전에서 큰 의미를 가지지 못했던 것 같다. 콘스탄티노플 공략을 무한정으로 끌 수 없었던 술탄은 이탈리아 함대를 필두로 한 서방지원군과 육상에서 “가공할 백기사” 헝가리의 후녀디 야노시가 이끄는 십자군이 도나우 강을 건넜다는 낭설이 오스만 병영에 퍼지면서 병사들이 소요하기 시작했다는 사실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최후가 될 공세에서 메흐메트 2세는 자신이 가진 모든 자원을 총동원해서 마지막 승부를 걸기로 결심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로저 크롤리는 세심하게 나뉜 공격 시간대를 거슬러 올라가며 비잔티움 제국 최후를 명징하게 기술한다. 비잔티움 제국은 오스만 군대의 최후 공격을 막을 수도 있었으나, 언제나 전쟁의 승부가 그렇듯 의도하지 않은 사소한 우연의 개입으로 결과는 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 술탄의 승리로 끝났다.

 

로저 크롤리는 주로 패자인 기독교 세계의 역사가들이 남긴 기록에 중도적인 입장에서 접근하는 신중한 태도를 보여준다. 함락 직후 콘스탄티노플 시내에서 벌어진 비극적인 약탈극에 대해서도, 중세 시점에 봤을 때 그렇게 잔혹한 것만은 아니었노라고 변론하고 있다. 사실 술탄에게 장기간의 포위전에 지친 병사들을 자극하기 위해 무슬림 율법에 정한 대로 사흘 간의 약탈을 허락할 수 밖에 없었던 상황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원문에는 어떻게 표현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미신을 빼면 시체’였다는 메흐메트 2세에 대해서도 훗날 서방세계에서 묘사한 대로 흡혈귀 같은 존재라기 보다 주어진 현실주의자로서 냉혹한 판단력을 지닌 군주로 그리고 있다. 사실 술탄은 이슬람 원칙에 충실한 독실한 무슬림은 아니었고, 하나의 종교를 바탕으로 하나의 제국을 건설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세속화된 군주의 전형이었다.

 

에필로그 부분에서 저자가 밝혔듯이, 당대에는 미처 몰랐던 콘스탄티노플 함락 이후의 상황에 대해서도 탁월한 식견을 보여준다. 콘스탄티노플에서 오스만의 서진을 손놓고 지켜보고 있던 기독교 국가들은 서방을 모두 집어 삼키려는 술탄의 정복전쟁이 발등에 떨어진 뒤에야 비로소 얼마나 위험한지 깨닫게 됐다. ‘빨간 사과’ 함락 이후 장장 2세기에 걸친 오스만의 서방원정은 빈에서 간신히 기독교 연합군이 막은 후에야 끝이 났다. 순망치한이라는 말처럼 제노바 식민지였던 갈라타(페라)는 콘스탄티노플 함락 이후, 술탄의 수중에 들어가게 됐다. 베네치아 역시 동방무역을 위한 지중해 거점들을 모두 상실하고, 본국조차 위기에 빠지기도 했다. 지중해 무역을 대신해서 신대륙이 개발되면서 세계 역사의 중심은 대서양으로 이동했다. 활자인쇄술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콘스탄티노플 공략전은 수많은 기록자들에 의해 전승되었다. 구전으로 전승되던 기록들은 이제 문자화되어 역사에 남게 되었다. 아울러 야만적인 튀르크인들이라는 이미지도 이 과정에서 형성되어 굳어지기 시작했다. 어쩌면 여전히 서구사회에 횡행하는 무슬림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의 원형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로저 크롤리는 방대한 양을 자랑하는 문헌들을 참고하면서, 신뢰할만한 기록뿐만 아니라 과장되거나 야사로 치부될 수 있는 흥미로운 다양한 자료들에 대해서도 빼놓지 않는다. 훈련 받은 역사가답게, 취사선택할 부분을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다. 과학기술의 발전에 따른 전쟁 양태의 변화는 물론이고, 기독교 종파 분쟁의 뿌리, 오스만과 비잔티움 제국 왕위 계승문제, 복잡한 각국의 외교 관계, 합리적 이성 대신 미신에 근거한 (위서를 바탕으로 한) 예언과 징조, 전쟁터에서의 잔혹행위, 각자의 유일신을 믿는 이들의 광신적인 행동에 이르는 다양한 면들을 이 책을 통해 만날 수 있었다. 요즘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는 국정화 교과서 파동이 한창인데, 왜 역사서술의 다양성이 필요한지 로저 크롤리의 저술이 그 답을 제시해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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