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브리맨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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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삶은 평등하지 않다. 특히나 자본주의 시스템 아래서는 인간은 가진 것에 따라 클래스가 나뉜다. 하지만 딱 한 가지 평등한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죽음이다. 아무리 많은 재산과 권력을 가진 인간도 죽음이라는 운명을 피할 수는 없다. 그렇게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살아 있는 동안, 누릴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누리려고 하는 걸까? 언젠가 버킷 리스트가 유행한 적이 있는데, 죽음 앞에 서게 되면 그 버킷 리스트조차 무의미해지지 않을까 싶다.

 

필립 로스가 73살의 나이(올해 그는 82세라고 한다)에 발표한 <에브리맨>을 오래전부터 읽어 보려고 노력해 왔다. 도서관에서 수도 없이 책을 빌렸는데 항상 우선순위에서 밀렸다. 그러다 지난주부터 필립 로스 바람이 불었는지(촉발제는 <네메시스>였다), <네메시스>와 <포트노이의 불평> 그리고 <에브리맨>까지 연달아 읽었다. 이번 주말에 있을 독서모임에 가기 전에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도 읽으면 좋겠지만 분량이 상당해서 가능할지 모르겠다. 지난주에 도서관에 최근에 출간된 그의 <죽어가는 짐승>을 빌리러 갔었는데 찾을 수가 없어서(?) 포기했다. 대신 읽은 책이 바로 <에브리맨>이다.

 

어디선가 필립 로스의 책들이 유대인 문학으로 분류된다는 글을 본 적이 있는데 그의 작품에 일관되게 등장하는 유대인 주인공들의 면면을 유심하게 살펴본다면 충분히 이해가 간다. 이제 죽음이라는 삶의 순간을 맞닥뜨리게 된 노작가는 이름 없는 무명인을 내레이터로 삼아 이야기를 풀어간다. 이야기는 망자의 장례식에서 그를 기억하는 이들이 남기는 고별사로 시작된다. 장례식이 끝나고, 조객들이 떠나고 홀로 남은 망자는 비로소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작가가 사랑해 마지않는 동네 뉴저지 뉴어크 시의 엘리자베스가 내레이터가 나고 자란 고향이었던가. <에브리맨 보석상>의 주인이었던 그의 아버지 슬하에서 형 하위와 내레이터가 자라 사회적 성공을 거두고 잘 먹고 살다가, 노년에 이런 저런 수술을 하며 죽음과 맞서 싸운다는 것이 소설 <에브리맨>의 얼개다. 물론 고인은 전혀 평범하지 않은 삶을 살았다. 자그마치 세 번이나 결혼을 했고, 노년에는 911테러로 공포에 휩싸인 삶의 무대였던 뉴욕 시티를 떠나 바닷가 콘도미니엄에 거처를 정하고 오랫동안 꿈꿔 왔던 화가로서의 삶을 살기 시작한다. 주인공이 꿈꿔온 그림그리기는 아트 디렉터로 정신없이 바쁘던 시절 그의 로망이자 탈출구였지만, 정작 은퇴 후에 그림그리기는 아무 의미 없었다는 걸 깨닫게 된다.

 

첫 번째 부인이었던 세실리아와 결혼해서 낳은 두 아들과의 지속적인 불화는 그의 삶을 더 외롭게 만든다. 그나마 두 번째 헌신적인 부인이었던 피비 사이에서 낳은 딸 낸시만이 그의 유일한 삶의 낙이라고 해야 할까. 마지막 부인이었던 메레테와의 결혼은 왜 그런 결정을 내렸을까라고 자꾸만 되묻게 되는 그런 최악의 결정이었다. 세 번의 결혼이 주인공의 삶에서 어떤 변이의 과정이었다면, 그 변이를 촉발하게 만드는 사건으로 일련의 수술들을 꼽고 있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신체 기관이 정상기능을 하지 못하고 부모님들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A/S 받으며 생명연장을 하는 거라고 늘상 듣곤 했는데 소설 <에브리맨>에서는 정말 그 어느 누구도 피해나갈 수 없는 그런 숙명, 죽음과 사투를 벌여야 하는 개인의 ‘부질없는’ 노력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200쪽 남짓한 이 짧은 소설은 가히 삶의 압축 버전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동생인 주인공은 물질적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둔 천만장자 형 하위를 질투한다. 그런데 그 이유는 물질적 소유권에 관한 것이 아니라 바로 그의 건강이다. 7년 연속으로 입원해서 6개의 (최근 어느 회장님이 시술 받아 죽음의 고비를 넘겼다는) 스텐트와 카테터를 삽입하고 심지어 약한 심장을 위해 제세동기라는 기묘한 장치까지 몸에 넣은 주인공은 병치레 한 번 하지 않은 하위를 부러워하는 것이다. 게다가 일흔 살의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젊은 여자들을 꾀는 모습은 애처롭기까지 하다. 그러니까 주인공은 어떤 의미에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거부한다고 해야 할까. 이걸 늙은이의 노망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살아 있는 인간의 생존의지라고 해야 할지 잠시 헷갈렸다.

 

희한하게도 대부분의 소설에 등장하는 이들은 현실세계의 물질적 궁핍을 걱정하는 이들은 드물다. 대신 다른 고민에 빠져 산다. 이건 명백하게 현실과 문학세계 사이의 괴리라고 불러야 마땅하지 않을까. 어쩌면 막장드라마에 나올 법한 초현실적인 이야기야말로 괴로운 현실계를 잊게 해주는 마약 같은 처방이라는 생각도 든다. 어쨌든 노년에 물질적 걱정 없이 멋진 콘도에서 그림교실을 운영하며 유유자적한 삶을 사는 그를 아들들은 “행복한 신기료장수”라며 비아냥거린다. 물론 그도 아들들과의 화해를 시도해 보지 않은 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자신들과 어머니를 배신한 아버지를 랜디와 로니는 그들만의 방식으로 응징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일련의 과정들은 노년의 주인공이 바란 관계의 원치 않는 소거로 귀결된다. 그가 유일하게 사랑하는 혈육인 낸시조차 편두통 때문에 쓰러진 엄마 피비에게 돌아가고, 주변의 지인들이 하나둘씩 세상을 뜨는 상황은 그가 계획한 뉴욕 복귀를 무산시킨다. 그리고 마지막 에피소드에 해당하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묻힌 쇠락해 가는 유대인 공동묘지에서 어쩌면 자신의 묘를 팔지도 모를 무덤 파는 사람과의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소설 <에브리맨>은 망자가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는 점에서 특정한 내레이터가 소설을 이끄는 기존의 필립 로스의 소설과 변별점을 보여준다. 또 한편에서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 누구나에게 언젠가는 찾아올 죽음에 대해 보다 객관적인 시선을 갖게 만들어 주는 지도 모르겠다. 모두 실패한 결혼생활에서 언제나 자유로운 영혼이었던 주인공이 말년에 돌아갈 가정이 없다는 이유로 외로워하는 장면은 역설적이다. 젊어서는 그렇게 될 줄 몰랐단 말인가. 형 하위가 형수와 반세기에 가까운 행복한 가정생활을 하고(그 나이에 심지어 티벳 여행까지도 나선다), 네 명이나 되는 아들들과 손자들과 더불어 누리는 물질적 성공과 건강에 대한 주인공의 시기와 질투는 어쩌면 의무와 책임감보다 아내에게조차 감출 수 없었던 욕망에 충실했던 자기 삶을 비추는 거울이 아니었을까. 그런 주인공의 욕망은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소거된다.

 

바로 직전에 <포트노이의 불평>을 읽어서 그런진 몰라도, 죄의식과 욕구불만에 시달리던 삼십대의 마마보이 앨릭스 포트노이가 <에브리맨>의 칠십대 주인공이 된 건 아닐까 뭐 그런 엉뚱한 상상이 됐다. 이 책이 자그마치 11쇄나 찍었다고 하는데, 다른 필립 로스의 책에 비해 우리나라에서 인기있는 모양이다. 간결하면서도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제대로 담아낸 대가다운 솜씨가 아닐 수 없다. 누구나 피하고 싶은 죽음을 자신만의 유머로 부드럽게 블랜딩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멋지다.

 

[리딩데이트] 2015년 11월 22일 ~ 23일 1시 2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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