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의 심장부에서
존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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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속도로 쿳시 작가의 <나라의 심장부에서>를 읽었다. 아무 생각 없이 어제 저녁부터 읽기 시작했는데 오늘 새벽에 다 읽었다. 그만큼 탁탁 치고 나가는 문장의 가독성이 뛰어나다고 해야 할까. 모든 건 이번 주말 달궁 독서 모임을 앞둔 덕분이지 싶다. 바로 이어서 <철의 시대>도 읽기 시작했는데 토요일 전에 <서머타임>까지 읽을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다.

 

<나라의 심장부에서>1977년 발표된 쿳시의 두 번째 소설이다. 그의 소설을 일관하는 식민주의/제국주의에 대한 비판과 그것에 공모한 자들의 양심의 갈등이 <나라의 심장부에서>도 확연하게 드러난다. 소설의 화자는 아프리카 초원 농장주의 딸 마그다다. 마그다의 어머니는 농장에서 일할 젊은 일꾼의 생산을 원하는 아버지의 출산 요구에 시달리다 결국 출산 중에 돌아가셨다. , 아버지와 마그다의 갈등이 어떨지 짐작이 가는가. 철저한 부계지설의 신봉자인 아버지가 새 엄마를 들이는 상상을 하고, 그 둘을 죽이는 존속살해의 끔찍한 망상에 젖기도 하는 마그다. 결국 그녀는 다른 사건 때문에 그것을 실행에 옮기게 된다.

 

마그다가 시달리는 편두통이 어쩌면 문제의 시발점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마그다는 농장의 하인 헨드릭과 다를 게 없는 존재다. 헨드릭이 외부에서 농장 일을 도맡아 한다면, 마그다는 안주인으로 가사를 전담한다. 거의 독재자 아버지의 몸종처럼 그렇게 부려진다. 이러니 문제가 생기지 않을 수가 있나.

 

사단은 헨드릭의 아내 클라인(작은) 안나가 등장하면서부터다. 아버지는 클라인-안나에게 필요 이상의 관심을 보이고,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 캔디와 금전으로 클라인-안나를 유혹한다. 그리고 클라인-안나의 남편인 헨드릭을 농장 멀리 일하러 보낸 사이, 마그다의 아버지가 클라인-안나를 범한다. 소설은 처음부터 마그다의 환상, 착각 그리고 망상으로 점철되어 있는데 결국 아버지의 부정에 분노한 마그다는 리엔필드 엽총으로 아버지를 쏜다.

 

쿳시가 <나라의 심장부에서>에서 설정한 모든 이야기들은 폭력적 방식을 수반한다. 아버지의 부재는 결국 농장의 파멸을 초래한다. 적절한 보수를 마그다에게 받지 못한 헨드릭은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노동의 대가를 받기를 원한다. 그 또한 폭력적일 수밖에 없다. 아버지 대에 설립된 위계질서는 그의 부재 때문에 전복되기에 이른다.

 

나는 이 지점에서 백인들의 지배가 존속되던 시절에서, 아프리카인들에게 권력이 이양된 시절의 남아프리카 역사를 되돌아보게 만든다. 그렇다면 쿳시는 백인들이 지배하던 시절이 좋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아닐 것 같다. 권력이 이전되던 시절의 혼란과 무질서에 작가는 방점을 찍고 싶었던 게 아닐까. 동시에 흑인과 백인이 공존하는 시절의 도래에 대한 두려움도 일견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인간은 모름지기 자신이 경험해 보지 못한 것에 대한 생래적 공포가 있지 않은가.

 

폭력적인 방식으로 봉합된 역사 가운데 개인의 구원 이슈가 등장한다는 것도 흥미롭다. 자신 역시 폭력적인 방식으로 아버지의 독재를 종식시킨 마그다가 자신은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는지 스스로 묻는 장면을 보라. 농장을 존속시키기 위해 갈등하면서 헨드릭의 호의에 의지해야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를 직시한 마그다의 변신은 그저 놀라울 뿐이다. 아프리카에서 흑인들에게 정권을 빼앗긴 백인들이 그나마 자본을 유지했다면, 약속의 땅으로 상징되는 농장의 상속자가 된 마그다에게 남은 건 아무 것도 없다. 그녀는 아버지의 돈도 그리고 농장을 가꿀 노동도 없기에 자신의 하인이었던 헨드릭의 포로 신세로 전락한다. 어느 날 갑자기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순식간에 바뀌는 가치 전도의 순간에 순응할 수 있을까. 마그다는 그렇게 무력한 공모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쿳시 작가가 초기작부터 자신의 작품에 일관된 주제가 <나라의 심장부에서>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쿳시는 역자 왕은철 교수가 어디선가 지적한 대로 이데올로기의 허구성을 안으로부터 폭로함과 동시에 그것에 대한 자신의 공모성을 부각시키는데 성공했다. 백인 지배 이데올로기가 붕괴되자, 아노미 상태에 빠진 백인들의 이중적 태도에 대한 저자의 비판이 그래서 더욱 돋보인다. 자 이제 <철의 시대>를 읽을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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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인을 기다리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4
J. M.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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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맥스웰 쿳시의 <야만인을 기다리며>를 다시 읽었다. 이번에는 이달의 달궁 독서모임 책으로 선정되어서 읽게 되었다. 사실 책의 분량으로 보면 금세 다 읽을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근 한 달이 걸려서 읽었다. 이번에 읽으면서 기존의 다른 리뷰들을 읽고 자료도 취합하고 그러다 보니 쿳시의 큰그림을 볼 수가 있었다, 역시 이래서 고전급 소설들은 재독해야 하는가 보다.

 

올해 베니스 영화제에서 영화화된 <야만인을 기다리며>가 상영되어 관심을 끈 모양이다. 정보부 소속 냉혈한 졸 대령 역을 자니 뎁이 맡아 화제를 모았다. 소설 <야만인을 기다리며>는 제국의 전초기지 역할을 하는 어느 지역을 배경으로 한다. 시절도, 특정한 지역임을 알 수 있는 정보는 전무하다. 그저 제국의 영토라는 점만을 알 수 있다. 소설의 화자는 변제국의 변경에서 지난 30년 동안 행정권을 행사해온 치안판사다. 이제 곧 은퇴를 앞둔 치안판사는 그저 아무 일 없이, 자신의 일상을 영유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

 

개인의 의지는 역사의 도도한 흐름에 반해서 진행되기 마련이다. 정보부 소속 졸 대령은 북쪽 지방의 야만인들이 준동한다는 첩보를 바탕으로 야만인들을 체포해서 고문하고 죽이기까지 한다. 졸 대령과 치안판사로 대변되는 문명 제국의 하수인들은 그렇게 제국의 영속을 위해 부역하는 존재들이다. 그리고 제국은 영속하기 위해 상시적 불안이 필요했고, 변경의 야만인들이야말로 불안 조성에 안성맞춤이었다. 아마 야만인들이 조직화된 문명 제국의 일원이었다면, 제국은 쉽게 원정대를 파견하는 위험을 무릅쓰지 않았을 것이다. 제국 군인들은 야만인들을 우습게 여겼고, 그들을 쉽게 제압할 거라고 생각하고 원정에 나섰다.

 

제국 통치의 일원이었지만, 행동하는 양심적 인사로 거듭나는 치안판사는 졸 대령과 같은 부류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하지만 그의 부인은 위선에 지나지 않았다. 제국 변경의 통치라는 제국의 영속을 위한 거대한 시스템 속에서 일개 치안판사의 저항이 무슨 의미란 말인가. 게다가 그는 주변에 너무 많은 허점을 지니고 있었다. 군인들의 고문으로 시력을 잃은 야만인 소녀를 고향에 데려다 주고 돌아온 치안판사는 반역적 내통이라는 어마무시한 혐의를 뒤집어쓰고 나락으로 떨어진다.

 

이것은 어쩌면 탈식민주의 이데올로기를 주창하는 쿳시다운 설정이 아닐 수 없다. 폭력적 식민지배에 부역한 인사의 추락이 주는 전복적 쾌락 말이다. 치안판사는 야만인들이 자신들의 원래 생활방식 대로 살아가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변경 요새의 안락함을 깨닫게 된 야만인들은 그것을 거부한다. 한편 치안판사는 변경에서의 지난 경험을 바탕으로 야만인들이 자신들을 공격할 이유가 없다고, 군인들을 설득하지만 야만인들의 존재를 제국의 모든 문제의 해결책으로 규정한 그들에게 치안판사의 논리는 전혀 먹히지 않는다.

 

치안판사의 야만인 여자들에 대한 탐닉도 주목할 점이다. 제국에 부역하는 대가로 치안판사는 변경 지역에서 권위를 다지는 동시에, 성적 욕망의 해소에도 적극적이었다. 졸 대령이 떠난 변경의 책임자가 된 만델에게 치안판사가 탄핵되는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그런 문란한 사생활이었다. 치안판사의 입장에서 야만인들과의 반역적 내통 혐의는 말도 되지 않았지만, 정황을 놓고 본다면 치안판사가 목숨을 걸고 사막지대를 통과해서 야만인 출신 장님 소녀를 고향에 돌려보낸 이유가 내통이라는 게 훨씬 논리적이지 않았을까.

 

졸 대령의 야만인 섬멸 원정대는 변경 오지의 보이지 않는 적들과 싸우면서 결국 자멸한다. 그들의 원정은 치안판사의 예언대로 실패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적이 없는데 누구와 싸운단 말인가. 군인들이 만들어낸 유언비어에 변경의 주민들은 오랫동안 살아온 삶의 터전을 떠나 수도로 향한다. 비상 계엄령 하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던 군인들은 야만인들보다 더 무섭게 주민들의 재산을 약탈한다. 포로로 잡힌 야만인들의 볼과 손을 철사로 꿴 군인들이 더 야만적이지 않은가. 제국에 아무런 위해도 끼치지 않는 이들을 잡아 고문하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대하는 제국의 하수인들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야만인들이 아니었을까.

 

변경의 최고위 행정을 담당하던 치안판사는 하루아침에 죄수 신세가 되어 감옥에 투옥된다. 그가 꿈꾸던 소소한 일상은 더 이상 기대할 수가 없게 되었다. 한 때 당당했던 변경의 행정 책임자가 어느새 하루의 끼니와 악취는 풍기는 그런 거지같은 존재가 되었던 것이다. 조용하게 인생의 마지막 장을 준비하던 치안판사는 이런 생존의 위기를 겪으면서 각성한 인격체로 거듭난다. 개인의 고난은 모름지기 기존의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그것을 이식하기 위한 하나가 기회로 규정된다. 그는 포로로 잡힌 야만인들을 야만적인 방식으로 처형하려는 졸 대령의 처분에 격렬하게 저항을 시도한다. 물론 그에 대한 반대급부로 팔이 부러질 정도로 얻어맞지만, 쿳시는 이 지점에서 탈식민주의 시대를 사는 지식인의 굳건한 초상을 그려낸다. 한 때, 식민주의/제국주의에 봉사했지만 시절이 바뀌었으니 보편 인류의 평등한 삶을 옹호해야 한다는 주장이었을까.

 

존 맥스웰 쿳시가 <야만인을 기다리며>에서 그리는 다양한 주제들은 우리가 사는 지구별의 어디에 적용시켜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당장 가짜 뉴스가 증오와 분노를 유발시켜 사회적 갈등을 조장하는 우리의 그것과 절묘한 공명을 이루고 있지 않은가. 소설에 등장하는 제국의 옹호자들은 기존 질서의 기득권층으로 대치된다. 야만인이라는 이름의 타자화는 현재 진행형이다. 내가 어떤 이유에서 타자화의 대상인 야만인이 된다면 어떨까. 아니 내가 다른 야만인들을 공격한 건 아닌가? 객관적 성찰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쿳시는 내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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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9-10-21 17: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종횡무진 레삭매냐님이십니다 쿳시 책도 읽으셨네요 화이팅!

레삭매냐 2019-10-21 17:58   좋아요 2 | URL
넵, 작년에 읽고 이번에 독서모임으로
다시 한 번 읽게 되었네요 :>

주말 전에 <철의 시대>도 읽었으면
좋겠네요.

물감 2019-10-22 07: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읽고싶게 만드는 완벽한 리뷰입니다. 저도 독서모임에서 이 책을 선정해봐야겠어요!

레삭매냐 2019-10-22 09:23   좋아요 1 | URL
저도 이번 주말이 기대되네요...

그전에 <나라의 심장부에서>는 읽었는데
과연 <철의 시대> 그리고 <서머타임>도
읽을 수 있을 지 모르겠습니다.
 
핏빛 자오선 민음사 모던 클래식 6
코맥 매카시 지음, 김시현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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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에 코맥 매카시의 어느 책을 보고 기겁해서 다시는 그의 책을 보지 않겠다 뭐 그런 생각을 품고 있었던 것 같다. <로드>도 읽어 보았지만 그렇게 대단하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그러다 올해 <노인들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읽고 나서 그의 작품 세계가 궁금해졌다. 현대판 서부 스릴러는 나로 하여금 그의 전작들을 검토해 만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의 다음 선택은 1985년에 발표된 그의 다섯 번째 소설 <핏빛 자오선>이었다.

 

어려서 서부 영화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돌아온 튜니티를 좋아했고, 장고가 판초 사이로 악당들을 쏘아 대는 권총의 향연에 환호했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미국의 서부 개척사가 그렇게 영화에서 보여 주듯이 정의로웠던 것은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리고 소설 <핏빛 자오선>에서 매카시 작가는 그런 사실을 여실하게 드러낸다.

 

<핏빛 자오선>은 존 조엘 글랜턴 갱이라는 역사에 실존했던 인물이 이끌던 폭력 집단에 대한 소설적 고찰이라고 부를 만하다. 그리고 작가에 의해 소설은 서부 개척 연대기가 되지 않을까하는 게 나의 추정이다. 내러티브 픽션이 레전드가 되어 가는 과정에 나도 동참한 건지도 모르겠다.

 

리뷰의 타이틀을 서부개척사로 뽑긴 했지만, <핏빛 자오선>에는 서부개척에 대한 이야기는 등장하지 않는다. 내심 마디로 말해서 서부개척이라는 미국의 신화를 저격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동양의 어느 독자는 독후감으로, 그리고 원저자는 내러티브로 비슷한 의제에 도전한다.

 

동부에서 시작된 미국 건국의 역사는 점차 서부로 뻗쳐 나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멕시코와의 전쟁을 통해 서부에 어마어마한 영토를 확보하는데 성공한다. 유럽에서 이주한 동부의 고착된 계급 사회에서 벗어나 누구에게나 기회가 열린 서부로의 이주는 위험천만한 모험이 아닐 수 없었다. 수많은 이주민들이 길에서 죽어나갔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의 하나는 인디언들의 공격이었다. 언제나처럼 백인들은 외부의 공격을 환영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존 글랜턴 갱들이 등장할 차례다.

 

정규군이 아닌 민병대 혹은 유격대 같은 수준의 소규모 무장폭력집단은 멕시코 주지자의 의뢰를 받아 멕시코 사람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아파치 인디언 사냥에 나선다. 문제는 돈에 눈이 먼 용병들이 아파치 인디언뿐만 아니라, 자기 동료 혹은 멕시코 사람들의 머리가죽마저 벗겼다는 점이다. 아니 머리가죽은 인디언들이 백인들을 죽이고 한 만행이 아니냐고? 백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스캘프헌터(scalp-hunter)들에게 머리가죽은 영수증일 따름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전투력이 뛰어났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 한참 이야기하다 보니 주인공 소년(the kid)에 대한 소개를 잊었다. 미국 어디선가 천애고아가 된 소년은 아무렇게나 굴러먹다가 글랜턴 갱의 일원으로 합류하게 된다. 술집에서 난동을 부리기도 하고, 사막을 헤매다 죽을 뻔하기도 했으며, 또 체포되어 교도소 신세도 졌다가, 실크해트와 연미복 심지어 면사포까지 뒤집어 쓴 코만치 인디언 전사들의 공격(초반에 가장 인상적인 시퀀스였다)에 포위되었다가 사지에서 벗어나는 등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서부개척사 만큼이나 복잡다단한 삶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어쨌든 글랜턴 갱들이 소설에서 보여주는 폭력과 약탈의 연대기는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하다. 그 땐 그랬지.

 

글랜턴보다도 더 소설에서 중요하게 묘사되는 인물은 바로 판사 홀든이다. 그가 정말 판사였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글랜턴 갱의 실질적인 리더는 글랜턴이 아니라 판사가 아니었을까. 다양한 방면에 박식한 판사의 말에 갱들은 순한 양처럼 머리를 조아린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판사의 행동이 지식인다운 건 절대 아니었다. 어쩌면 집단에서 가장 악랄한 악당이야말로 판사가 아니었을까. 화약이 떨어진 채 인디언들에게 추적당하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내몰린 갱들을 자연에서 채취한 재료로 화약을 만들어 반격에 나서는 장면은 정말 압권이었다. 그리고 소설은 후반으로 갈수록 자연스레 소년과 판사가 대결하는 구도로 흘러간다.

 

판사가 어디선가 말했듯이 폭력과 약탈에 참가한 갱들에게 모든 것은 그저 두둑한 판돈을 건 게임일 따름이었다. 그들이 판돈으로 건 것은 바로 그들의 목숨이었고, 대가는 한 줌의 머리가죽 영수증을 넘긴 대가로 돌아온 금화였다. 과연 그만한 대가가 따랐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도대체 그들이 원했던 건 무엇일까? 판사가 주장하는 게임 이론만으로는 도저히 설명이 되지 않는다. 한편, 글랜턴 갱의 전투 실력은 멕시코 정규군을 상대하기에 역부족이었지만, 소수의 평화롭게 사는 인디언들이나 멕시코 사람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기껏 용병들을 고용해서 약자를 보호하라고 주문했더니, 반대로 그들을 억압하는 세력이 되어 주정부의 금품을 갈취하는 깡패로 변신한 모습에 그저 놀랄 뿐이었다.

 

코맥 매카시의 <핏빛 자오선>에 등장하는 폭력과 약탈로 얼룩진 서부개척에 대한 소설적 접근 방식은 인상적이었다. 국가라는 피상적 존재가 하지 못하는 일을, 일개 문학가가 나서서 역사를 재구성하고 진실을 밝히는 여정에 도전했다는 점만으로도 이 작품은 높게 평가받을 만하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의도적으로 멀리 했던 코맥 매카시의 작품들, 특히 국경 3부작을 만나볼 시간이 이제 되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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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19-10-17 19: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매카시하고는 영 궁합이 맞지 않는 거 같더라고요. 제 감상과 별개로 좋은 의견 잘 읽었습니다.

레삭매냐 2019-10-17 21:12   좋아요 0 | URL
저도 그래서 근 십 년을 멀리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모두 네 권의 매카시 책을
읽었는데, 그 중에 세 권이 올해 읽은
책이네요.

단발머리 2019-10-17 22: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코맥 매카시 왕팬과 같이 사는 1인입니다.
제게 자꾸 매카시를 권해서 난감한 차에, 레삭매냐님 글 읽고 나니 함 도전해볼까, 건설적인(?) 생각이 듭니다.
언제나처럼, 잘 읽고 배우고 갑니다!!

레삭매냐 2019-10-18 08:12   좋아요 0 | URL
응원하는 바입니다 -

모든 책에는 시절인연이 있는가
봅니다.

제가 다시 코맥 매카시의 책을
읽게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래.

카알벨루치 2019-10-18 09: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추억의 이름, “장고” ㅎㅎㅎㅎ

레삭매냐 2019-10-18 09:44   좋아요 1 | URL
마카로니 웨스턴의 광팬이었죠 ~

요즘 서부영화는 그런 재미가 없더라구요.

뒷북소녀 2019-10-18 18: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래전에 미친듯이 읽고 떨어져 나왔는데(제 스타일이 아니라서요), 그래도 알라딘에 내다팔지는 않고 소장하고 있어서, 저도 언젠가는 다시 들춰보겠죠.

레삭매냐 2019-10-19 21:05   좋아요 0 | URL
저는 매카시 늦바람이 들어서 이제
읽기 시작했네요.

소장각 !!! 묘한 재미가 있어서 일단
컬렉션에 들어갑니다.
 
들판
로베르트 제탈러 지음, 이기숙 옮김 / 그러나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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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자필멸(生者必滅), 태어난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 어떤 예외도 없다. 사람은 죽음을 생각하는 순간부터 죽기 시작했다고 했던가. 내가 애정해 마지않는 작가 로베르트 제탈러의 <들판>의 주제다. 제탈러는 <들판>에서 가상의 작은 마을 파울슈타트 공동묘지에 묻힌 혹은 앞으로 그곳 들판으로 가게 될 29명의 목소리를 담았다.

 

나는 <한평생>으로 제탈러 작가를 알게 됐고, <담배 가게 소년>을 읽으면서 그의 열렬한 팬이 되었다. 이번에 나온 <들판>2018년에 발표된 그야말로 따끈따끈한 신작이다. 거의 빛의 속도로 제탈러 작가의 책을 내준 그러나 출판사에 감사를 표한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왜 소설을, 문학을 읽는가에 대해 생각해 봤다. 이야기꾼에 해당하는 작가가 들려주는 타인의 이야기에 대한 호기심과 궁금증이 내가 책을 읽는 이유이자 독서의 원동력이 아닐까. 그런데 제탈러 작가는 특이하게도 행복한 순간들이라기보다, 어쩌면 그 반대에 서 있는 망자의 이야기를 주제로 삼는다.

 

다스 펠트(Das Feld), 들판은 죽음을 상징한다. 소설의 공간적 배경이 되는 가상의 장소 파울슈타트는 많은 이야기들을 품고 있다. 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고 했던가. 죽음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인간의 삶은 공정하지 않지만, 딱 한 가지 모두가 피해갈 수 없는 운명이 있다. 바로 죽음이다. 과연 죽음에 대처하는 파울슈타트 사람들의 이야기는 어떤가.

 

어떤 신부는 자신이 모시는 주님의 집에 불을 지르고 놀라운 환영 속에 죽음을 선택한다. 어느 노동자는 노름과 도박에 빠져 자신을 정말로 사랑하는 애인에게 버림받는다. 꽃집 주인은 죽은 지 한참이 지난 뒤에야 발견이 되기도 하고. 마을의 권력자라고 할 수 있는 시장의 엽색행각, 뇌물수수는 이야기 축에도 끼지 못한다. 그들의 삶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무엇인가. 우리네 삶의 모습은 어디에서나 비슷하면서도 동시에 제각각 다른 스펙트럼을 가진다는 것이다.

 

어느 순간 그렇다면 미래 삶의 결과를 안다면 우리의 삶을 바꾸려는 노력이 과연 합당할까라는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백년을 넘게 산 할머니의 지혜를 빌려 보자. 일정한 나이가 되면 더 이상 할 일이 남아 있지 않을 거라는 건 착각이라고 할머니는 준엄하게 선언한다. 그렇다, 꾸준하게 책을 읽는다고 해서 세상의 모든 책을 읽을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나이가 들면 나이가 드는 대로 그리고 또 새로운 책에 대한 갈급을 채우기 위해 새로운 도전에 나서게 되겠지. 다른 건 몰라도 읽을거리가 내 삶 속에서 부재할 이유는 없을 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그건 행복한 전조가 아닌가.

 

<들판>의 흥미로운 지점 중의 하나는 주인공들이 사는 파울슈타트 마을을 매개로 어떤 인연으로 닿아 있다는 점이다. 누구는 호베르크 신부가 불타는 모습을 목격하기도 했고, 또 누구는 시장의 비석에 오줌을 갈기기도 했다. 비록 원주민은 아니지만 채소장수 나비드 알 바크리는 파울슈타트의 진정한 시민으로 인정받았다. 알 바크리 같은 이야말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지향적 인간이 아닌 진정한 의미에서의 세계시민이 아닐까. 진실이 무엇인지 몰랐지만, 39년 동안 파울슈타트의 소식을 활자화한 기자, 편집자인 동시에 식자공이었던 인사는 또 어떤가. 그런 면면에서 나는 제탈러가 추구하는 이상적 공동체에 대한 생각들을 읽을 수가 있었다. 그 외에도 독서하는 동안 떠오른 수많은 생각들이 있었지만, 짧은 글에 다 담을 수 없다는 게 그저 아쉬울 따름이다. 정말 너무 멋진 글이 아닐 수 없다, 가히 전율적이다.

 

산 자가 죽음을 생각한다는 것. 자신이 필멸의 존재라는 걸 깨닫게 되는 순간. 쉽지 않은 주제를 29명의 주인공들을 통해 능숙하게 풀어낸 제탈러의 능력에 다시 한 번 감탄했다. 아주 진부하지만 다음의 구절로 독후감을 마무리하고 싶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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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해목 2019-10-16 18: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레삭매냐님 덕분에 제탈러 작가를 알게 되었는데 반가운 신간소식이군요! 일단은 찜 합니다. ㅎㅎ

레삭매냐 2019-10-16 19:09   좋아요 1 | URL
신간이 나왔다는 소식에 어제
달려 나가서 사서 읽었답니다.

동시대 작가의 책을 읽는 즐거
움이란 정말...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3
페터 한트케 지음, 윤용호 옮김 / 민음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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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모독>으로 일약 스타 작가가 된 청년 페터 한트케는 여전히 이십대다. 그리고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을 발표했다.

 

전통적인 선형적 내러티브를 선호하는 독자에게 <골키퍼>의 줄거리는 싱겁다. 예전 유명 골키퍼였던 주인공 요제프 블로흐는 건설 공사장의 조립공으로 일한다. 그러니까 축구 선수도 먹고 살기 위해서는 예전의 영광은 잊고 노동자로 변신해야 한다는 말이다. 한 때 나치 제3제국의 일원이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의 후손들도 예외는 없다는 설정이다.

 

블로흐라는 친구는 현장감독의 수신호를 해고로 오해하고 일자리를 떠난다. 그리고 바로 실업이라는 불안 속으로 침잠하기 시작한다. 빈의 곳곳을 누비는 남자의 모습은 왠지 마틴 스코시즈의 <택시 드라이버>에 나오는 트래비스를 연상시킨다.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베테랑 용사는 뉴욕에서 택시를 몰고, 축구 선수로 아메리카 대륙도 밟았던 왕년의 골키퍼는 불안감에 시달리며 빈의 이곳저곳을 헤맨다. 불안은 개인의 방랑을 그리고 그 방랑은 살인으로 이어진다.

 

극장 매표원 아가씨 게르다 T를 우연히 죽인 블로흐는 머물고 있던 호텔에 가서 짐을 싸서 도주에 나선다. 살인이라는 극단적 폭력은 필연적으로 또 다른 폭력을 잉태한다. 자신을 검문하려는 순경을 전화번호부로 기절시키는 신공을 보여주는 블로흐. 그리고 그는 남쪽 국경 부근에서 여인숙을 경영하는 헤르타를 찾아간다. 몸이 피곤한 탓인지 어쩐지 이 부분은 정말 지루했다. 인근 켈러나 성당을 누비며 무언가 건수를 찾는 듯한 블로흐에게 더블데이트 제안도 들어오지만, 남자는 시큰둥하다. 내재된 불안이 초래할 거대한 파도가 곧 다가온다는 걸 잘 알지만, 사내의 일상은 지극히 단조롭고 평온해 보인다.

 

사실 소설에서 발생할 만한 일들은 모두 초반에 발생했다. 나머지는 운동선수라기보다 철학자에 가까운 듯한 언어유희를 즐기는 블로흐의 일상에 대한 스케치다. 살인을 저지르고 도주 중인 블로흐의 불안에 소설은 방점을 찍고 있다. 과연 블로흐는 관원들에게 체포되어 법의 심판을 받고 자신의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를 것인가. 페터 한트케는 그런 질문에 대한 대답 대신, 누적된 현대인의 불안을 보라고 주문한다.

 

우리가 느끼는 불안의 근원은 무엇인가?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경제 상황 앞에서 우리는 실업의 공포를 느낀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실업은 곧 생존의 문제와 직면하게 된다. 일자리를 잃고 돈을 벌지 못한다면 무슨 수로 소비생활을 이어갈 수 있단 말인가. 우리가 살기 위해,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 돈이 필요한 것처럼 블로흐 역시 도주 자금이 필요하다. 지금 당장이야 실업수당 혹은 퇴직금으로 어찌어찌 버틸 수 있겠지만 일자리 없이 지속적인 도주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그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우체국 시퀀스에서 페터 한트케 작가의 대리인인 블로흐의 언어유희가 가장 돋보인다. 그리고 전처에게(그는 이혼남이었다) 우편환을 보내 달라고 전화로 부탁한다. 전처가 그 부탁을 들어 주었을까? 물론 아니다. 한편, 블로흐는 도주하면서도 계속해서 지인들과 소통을 시도한다. 국경마을로 도주했으면서도 은신하는 대신, 동네 청년들과 싸움질을 마다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런 혈기가 지금의 나락으로 블로흐를 밀어 넣은 원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칠칠치 못한 블로흐는 범죄 현장 곳곳에 자신이 범인이라는 증거(미국 동전들)를 뿌리고 다닌다. 아마 그는 곧 지명 수배되어 잡힐 것이다.

 

세관원과의 대화는 앞으로 벌어질 순경/경찰과의 대치 상황을 대비한 블로흐의 팁이라고나 할까. 블로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도주할 것이다. 페널티킥을 막 차려는 키커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이란 바로 그것을 가리키는 게 아닐까. 어쩌면 일생일대의 도박에 나서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마치 체스나 장기판의 고수들처럼 몇 수 앞을 내다본 치열한 수싸움의 문학적 표현일 지도.

 

<페널티킥>은 나의 두 번째 노벨상 숟가락이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을 과감하게 패스했고(이해할 능력도 의지도 없는 게 나의 문제다), 내가 수용 가능한 것들만 골라 먹었다. 나도 페터 한트케를 읽었다는 것으로 만족하련다. 자족적인 나의 독서, 멋지다. 그러나 저러나 페터 한트케에 대한 논란이 가열차게 진행 중인데, 과연 스웨덴 한림원은 일절의 정치적 고려 없이 작가의 문학적 성과만 가지고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단 말인가. 그런 거짓말을 낯빛 하나 바꾸지 않고 뻔뻔하게 해대는 그네들의 강철멘탈에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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