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트 마케팅 - 시장의 새로운 우상들 예영 현대문화신서 4
노르베르트 볼츠 & 다비트 보스하르트 지음, 고재성 옮김 / 예영커뮤니케이션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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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유명한 지식인 노르베르트 볼츠의 1995년도 저서 <컬트 마케팅>중 일부를 옮겨본다. /믿음이 사라지면 스타일의 차이가 흥미를 끈다. 삶은 예술작품의 한 재료가 된다. 자기 연출(Self-fashioning)기술이 중요하다.이 말은 니체가 '미국인의 신념'이라고 말하던 것인데,곧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믿는 태도를 말한다.삶은 소비를 고급예술로 보는 끊임없는 자신의 노래이다.이러다 보니 우리는 유행과 여가시간 활용과 육체 숭배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제 가치의 변화는 오늘날 철학자나 계몽가들이 증오하던 이를,곧 의식주를 의미 있게 다루는 것을 일컫는다. 중요한 것은 위대한 사상들이 아니라 사소한 일상이다. -42쪽

추세 연구가들은 명명(命名)하는 사람들이다.다수의 사람들은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도 이름이 붙은 다름에야 비로소 그 존재를 볼 수 있다.그래서 흔히 추세는 발명된 것이라는 인상을 풍기는데,실제로는 이름만 붙였을 뿐이다.오늘날 추세 연구는 벌써 역사가 되었고 지난 몇십 년 동안 추세 연구가들이 퍼트린 이름이 '추세용어사전'하나를 만들 정도다.-45쪽

추세는 다음과 같아야 한다. 상징적으로 축약되어야 한다.보여져야 한다.곧 어떤 프로그램도 포함하지 않아야 하고 불확실해야 한다.사회적 의사소통의 기반이 안정되어서 개인의 주관적인 차원을 떠나야 한다.결정적인 작용을 해야 하는데,이것이 추세가 유행과 다른 점이다.-48쪽

'길거리 패션'이나 '독립 프로덕션'은 끊임없이 귀중한 창의력을 제공할 수 있고 도회적 삶의 느낌을 표현하고 여기에 힘을 실어 주는 것이기는 하지만 '반문화'와 '반문화'가 대중화하는 시차가 점차 줄어들고 있다.-100쪽

어떤 초감각적인 것을 감각을 통해서 파악하는 것은 종교적 상징의 세계에서만 가능하다.사실 마르크스는 상품세계를 종교세계와 유사하다는 측면에서 분석한다.이를 통해서 그는 엄청난 사실을 깨닫게 된다.곧 상품의 비밀은 절대 그 상품의 사용가치와 상관이 없다는 사실이다.상품은 단순한 소비를 위한 물건이 아니다. 상품은 어떤 구체적인 욕구들을 충족시키기보다는 토템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차원의 무언가를 구현한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상품시장에 나타나는 생산품을 사회적 '상형문자'(Hieroglyphe)라고 불렀다.-1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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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의 이해 - 전면2개정판
김창남 지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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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세대 문화연구자 김창남 교수의 저서 <대중문화의 이해(2003년 전면개정판)>중 팬과 마니아의 개념 설명에 대한 구절을 일부 옮겨본다. / 팬은 누구인가: 대량생산되어 대중적으로 전파된 문화 생산물의 레퍼토리 가운데 특정한 연기자, 혹은 연주가, 혹은 특정 텍스트를 선택하여 자신의 문화속에 수용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팬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사실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런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모이고 서로의 취향을 적극적으로 공유할 때 팬이라는 의미에 좀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흔히 일반적인 대중문화의 수용자들을 그저 막연히 팬이라 부르는 관습에 익숙하지만, 그보다 좀더 적극적으로 자기의 취향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팬이라고 할 수 있다. -300쪽

마니아의 두 측면 : 능동적 문화 주체 혹은 소비의 귀족주의 / 요즘 대중문화에서 매우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는 주체가 마니아라는 집단이다. 우리말로 한다면 무슨 무슨 광정도의 의미를 가지는 마니아는 영화,음악,만화,스포츠 등 다양한 대중문화 영역에서 빠르게 늘어가고 있다. 마니아들은 우선 특정한 문화 텍스트(그것이 영화일수도 있고 음악일 수도 있고 또 특정한 스타일수도 있다)에 대해 대단히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또 상당히 풍부한 정보와 지식을 가지고 있는 준전문가 수준의 수용자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대중문화의 주류적 분야, 즉 스타 시스템이 작동하는 분야는 팬이라는 말이 자연스럽지만 상대적으로 소(307)외된 장르나 문화상품 자체에 관해서는 팬보다는 마니아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쓰인다. -307,308쪽

마니아의 등장은 일단 우리 대중문화가 그만큼 다양화되고 전문화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또 대중문화의 환경이 과거에 비해 상당 정도 민주화되었다는 사실과도 관련이 있다. 대중문화 전반에 대해 정치권력의 간섭이 극심했던 유신시대나 5공화국 시대에는 마니아가 많이 나올 수 없었다. 당시에도 마니아들이 없지 않았지만 이들의 문화는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졌을 뿐 하나의 사회적 현상으로 존재하지는 않았다. 말하자면 마니아의 등장은 대중문화에 대한 정치권력의 입김이 줄어들고 그만큼 대중문화의 영역이 다양화되면서 이루어진 것이다. -308쪽

그러나 요즘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만나게 되는 마니아 집단은 꼭 그렇게 긍정적인 측면만을 보여주는 것 같지는 않다. 그것은 마니아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에 대한 지식과 정보가 경우에 따라서 또 다른 의미의 권력으로 작용한다는 데서 볼 수 있다. 특정한 문화 텍스트에 대해 광적인 애정과 집착을 보이고, 그래서 그만큼 많은 지식과 정보를 가지고 있는 마니아들은 때로 매우 배타적이며 독선적이다. 그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문화에 대한 애정과 정보를 과신하며 그래서 다른 사람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는다. (중략) 일부 마니아들이 추구하는 지식과 정보의 성격도 문제이다. 어떤 경우 마니아들은 매우 지엽적이고 앨범 제목과 무슨 무슨 구석진 에피소드들을 늘어놓으며 그것이 자신의 마니아적 취향을 대변하는 것인 양 우쭐해한다. -30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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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란 무엇인가?
앙드레 바쟁 지음, 박상규 옮김 / 시각과언어 / 199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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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미이라 콤플렉스 비유가 나오는 앙드레 바쟁의 <사진적 영상의 존재론> 중 일부를 옮겨본다. / 조형예술에 대한 정신분석을 해본다면 시체의 방부보존 관습이 조형예술 발생의 기본요인이 되는 것으로 생산될 수가 있다. 회화와 조각의 기원에는 미이라 콤플렉스가 놓여 있다는 사실을 알게 했었을 것이다. 이집트 종교는 인간심리의 기본적인 욕구, 즉 시간의 흐름에 대한 방어의 욕구를 충족시켰다. 죽음은 시간의 승리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인간의 육신의 외관을 인위적으로 보존하는 것은 말하자면 지속적인 시간의 흐름에서 그것을 떼어내는 것, 곧 그것을 생명권 내에 안치시키는 일이다.그러니까 죽음이라고 하는 현실 자체에 직면하여 그의 살과 뼈를 보존함으로써 이러한 외관을 지속시킨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13쪽

초상화(영상)의 제작은 온갖 인간중심적인 공리주의로부터 벗어나게 한 것이다. 더 이상 인간 사후의 영생이라고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를 않고 좀더 일반적으로,그것 자체로서 자율적으로 지상적인 운명을 띠고 있는 현실의 모습은 근사한 어떤 이상적인 우주의 창조 그것이 문제로 되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만일 우리가 회화작품에 대한 인간의 더할 수 없는 찬탄 밑에서, 외형의 영속성을 통해 시간을 이겨낸다고 하는 이 원초적 욕구가 가려져 있음을 간파하지 못한다면 '회화란 얼마나 덧없는 것인가!' 만일 조형예술의 역사가 단지 그 미학의 역사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 심리학의 역사라고 한다면, 그것은 본질적으로 유사성의 역사,(혹 이렇게 불리기를 원한다면) 리얼리즘의 역사라고 해도 좋다.(14) 이렇게 사회학적 시야에서 본 사진과 영화는 지난 세기 중엽에 발생한 근대회화의 정신적, 기술적인 중대 위기를 매우 자연스럽게 설명해줄 것이다. -14,15쪽

인간의 손이 개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화상 위에 어떤 의혹의 그림자를 던지게 한다. 실제로 바로크 회화로부터 사진으로의 이행에 있어 본질적인 현상은(모방의)단순한 물리적 완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색채의 모방이라고 하는 점에서는 사진은 오랫동안 회화보다 열등한 채로 남을 것이다).(사진이)인간을 배제한 기계적인 재현이라는 것에 의해 우리의 착각에의 욕구가 완전히 만족되어진다고 하는,하나의 심(17)리적 사실에 있는 것이다.-17,18쪽

양식과의 모델에의 유사성과의 사이의 갈등이 비교적 근대적 현상이어서, 사진건판의 발명 이전에는 그 갈등의 흔적이란 거의 발견되지를 않는다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샤르댕의 그 매력적인 관객성이 사진과의 객관성과 전혀 다르다는 것은 명백한 일이다.피카소를 오늘날 신화가 되게 하고 조형예술의 형식적 존재성을 규정하는 여러 조건과 동시에 이것들의 사회학적 기반을 모두 의문에 부치게 한 리얼리즘의 위기가 실제로 시작된 것은 바로 19세기이다. 유사성의 콤플렉스에서 해방된 근대 화가는 그것을 대중의 손에 넘겨주었고 대중은 그 때부터 유사성을 한편에선 사진과,또 한편에선 오로지 사실에만 전념하는 류의 회화와 동일시하려고 했다. -18쪽

사진가의 개성은 피사체의 선택, 그것은 어떤 각도에서 잡는가, 또 그 사상의 교시능력이 어느 만큼 있는가 하는 데 의해서만 작동을 하는 것이다. 비록 그 개성이 최후의 작품에 눈에 뛸 만치 반영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화가의 개성과 똑같은 자격으로 거기에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예술은 인간존재를 기반으로 하여 성립하는 바, 오직 사진에서만이 우리는 인간의 부재를 향유할 수가 있는 것이다. -19쪽

회화는 동시에 더 이상 유사성이라고 하는 점에서는 사진보다 열등한 기법의 하나, 몇 가지 재현방법의 대용수단ersatz의 하나에 불과하다.우리의 무의식의 저 근저에는 사물에 대하여 그것을 대강 전사한것이 아닌, 그 사물 자체의, 그러나 일시적인 우연성으로부터 해방된 그 사물 자체를 좀더 완전하게 무언가에 의해 대체시켜보고자 하는 욕구가 있는 바, 이러한 욕구를 충분히 발산시킬 수 있을 것 같은 사물의 화상을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사진 렌즈밖에 없다. 사진의 영상도 핀트가 안맞았거나 형이 왜곡되었거나 혹은 색이 변해 자료적 가치가 없다고 할 수도 있을지 모르나 그것이 생겨나게 된 과정을 생각해보면 그것은 역시 모델의 본체로부터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곧 모델 그 자체인 것이다. 앨범 사진의 매력은 거기에서 유래한다.-20쪽

거의 알아볼 수 없는 유령 같은 회색 또는 갈색의 저 그림자들, 그것들은 더 이상 전통적인 가족 초상화가 아니다.그것은 예술의 마술적인 효과에 의해서가 아니라 비정한 기계장치의 효과에 의해 자신의 시간 속에 정지되어서 자신의 운명으로부터 자유로와진 생명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현존인 것이다. 왜냐하면 사진은 예술처럼 영원을 창출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에 대해 방부처리를 행하여 다만 시간을 그 자신의 부패로부터 지킬 뿐이기 때문이다. -20쪽

초현실주의는 그 조형상의 번태론을 창출키 위해 사진건판의 젤러틴 감광막에 도움을 구했을 때 이미 그같은 것을 예견하고 있었다. 초현실주의에게는 미학적 목표가 우리의 정신에 대한 영상의 기계적인 효과와 분리될 수 없음이 이런 까닭에서이다. 상상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 사이의 논리적인 구별은 초현실주의가 출현한 이래 사라져가는 경향이 있다. 모든 영상은 사물로 느껴지고 모든 사물은 영상으로 느껴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중략)해방이면서 동시에 하나의 완성이기도 한 사진은 서양회화가 사실에의 집념을 결정적으로 떨어버리고 그 미학적인 자율성을 회복할 수 있게했던 것이다. -23쪽

<완전영화의 신화>중 일부를 옮겨본다 / 영화는 관념론적인 현상이다. 사람들이 영화에 대해 갖는 관념은 영화가 실현하기 이전부터 그들의 두뇌 속에서 순전히 이념적인 세계에 속하는 것으로서 지극히 확고하게 존재했던 것이다. 따라서 무엇보다도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기술이 탐구자들의 상상력에 준 시사보다도 관념에 대한 물질의 강인한 저항 쪽에 있다. 더구나 영화는 과학적 정신의 도움을 거의 받은 바가 없다.-25쪽

영화는 산업상의 발견에 거의 항상 선행하여 존재하는 관념이 대략 근사하게 그리고 복잡화한 형으로 실현시킨 것에 다름 아니요. 산업상의 발견은 그런 관념을 실제로 적용하는 길을 열어줄 수 있었던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와 같이 하여 영화가 그 가장 초보적인 형태에서조차 투명하고 유연하며 내구력이 있는 지지체와 순간적인 상을 포착할 수 있는 건조한 감광유제를(그밖의 것이라곤 18세기의 시계보다도 훨씬 구조가 간단한 기계장치였을 뿐이다) 이용할 필요가 있었다고 하는 것을 오늘날 우리가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인다고 한다면 영(26)화의 발명에 이르는 결정적인 단계들은 모두가 그같은 필요조건이 충족되기 이전에 벌써 도달되었다는 것을 알게 한다. -26쪽

영화가 스스로에게 첨가해가는 온갖 개량은 모두가,역설적으로 말하면, 영화를 그 기원에로 근접케 하는 것일 따름이다.요컨대 영화는 아직 발명되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과학적인 발견들이나 산업적인 기술들은 영화의 발전에 있어 대단히 큰 위치를 차지하고는 있으나 그것들을 영화 발명의 제일 원인으로서 위치시킴은 적어도 심리학적인 견지에 서서 보면 인과관계의 구체적인 순서를 뒤집는 일이 될 것이다. -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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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29 02: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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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30 00: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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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의 사회
장 보드리야르 지음, 이상률 옮김 / 문예출판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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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가의 비극 또는 시간낭비의 불가능>중 일부를 옮겨본다 / 이 자유시간의 질, 리듬, 내용 등 - 자유시간이 노동이라고 하는 강제 후의 잔여의 시간이든 아니면 '자율적인' 시간이든 -모든 것이 또 다시 개인간의,사회범주간의, 사회계급간의 차이표시기호가 되고 있다. -228쪽

어쨌든 대부분의 사물은 이론적으로는 교환가치와 분리할 수 있는 일정한 사용가치를 지니고 있지만, 시간은 어떠한가? 어떤 객관적 기능이나 특수한 용도에 의해 규정될 수 있는 시간의 사용가치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러한 의문을 제기하는 이유는 시간에 그 사용가치를 되돌려주는 것,시간을 비어 있는 차원으로 해방시켜서 개인의 자유로 가득 채우는 것이야말로 '자유'시간의 근저에 있는 요구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의 체계에서 시간은 사물로서,즉 각 사람이 '의향에 따라서' 투자해야 하는 해,시,일,주 등의 엄밀한 의미에서의 시간적 자본으로서만 '해방'될 수 있다.시간은 계량된다고 하는 점에서 생산체계의 추상성이라고 하는 완전한 추상성에 지배되고 있기 때문에 더이상 진정으로 '자유로울'수 없다. -230쪽

소유되고 소비되는 하나하나의 사물에서와 같이, 자유시간의 일분 일분 속에서도 각각의 사람은 자신의 욕망을 만족시키고 싶거나 아니면 만족시켰다고 믿고 있다. 그렇지만 소유된 사물 및 실현된 충족 속에도, '자유롭게 처분하는' 시간 속에도 욕망은 이미 존재하지 않으며 또 존재할 리가 없는 것이다. 그곳에 있는 것은 '소비'된 욕망의 잔재에 불과하다.-231쪽

시간이 사물인 것과 똑같이, 모든 생산물은 결정화된 시간으로 간주(232)될 수 있다(그것들의 상품가치를 형성하는 노동시간뿐만 아니라 기술혁신에 의해 생산된 상품이 사용자의 시간을 '절약해'주어, 이 절약이 구매대상이 되는 한에서는 여가시간의 결정이기도 한 것이다. 주부에게 있어서 전기세탁기는 자유시간을 의미한다. 그것은 매매될 수 있도록 사물로 변형된 잠재적 자유시간이다(이 자유시간을 주부는 텔레비전을 보는 데 쓸 수도 있고 그렇지 않으면 다른 전기세탁기의 선전을 보는 데 쓸지도 모른다!)-232,233쪽

교환가치 및 생산력으로서의 시간의 이러한 법칙은 여가 전체에 침투한다. 여가만이 노동시간을 규제하는 모든 강제와 구속으로부터 기적적으로 벗어나고 있다고 말해서는 안된다. 생산체계의 법칙은 휴식을 취하지 않는다. 그 법칙은 계속해서 또 어디에서나(도로에서든,해수욕장에서든,클럽에서든) 시간을 생산력으로서 재생산한다.시간을 노동시간과 여가시간으로 분할하고 후자를 자유의 초월적 공간의 시작으로 삼는 피상적인 견해는 신화에 불과하다.-233쪽

시간을 여봐란 듯이 헛되이 보내는 경우에도 우리는 자신의 시간을 '활용'하지 않으면 안된다. 바캉스라고 하는 자유시간은 여전히 휴가를 얻은 자의 사유재산이며, 1년간 땀을 흘려서 얻은 하나의 재이다. -234쪽

따라서 여가와 바캉스에서,노동의 영역에서 볼 수 있는 것과 똑같은 목적달성에서의 도덕적,이상주의적 집념,즉 강제의 윤리를 볼 수 있다. 여가는 완전히 소비의 일부이지만,소비와 똑같이 충족을 위한 행위가 아니다. 적어도 겉으로는 충족을 위한 행위일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햇볕에 살을 그을리는 것에 대한 강박관념,이탈리아와 에스파냐로의 관광여행 및 각지의 미술관 순례, 의무적이 된 해변에서의 일광욕 및 체조, 특히 피곤(236)한 줄 모르는 '미소'와 '사는 즐거움' 등은 모두 사람들이 의무와 희생 그리고 금욕의 원칙에 맹종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다. 이것이 리스먼이 말하는 '오락 도덕'이며, 여가와 쾌락 속에서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순수하게 윤리적인 차원-다른 목적달성의 기준에 따라서 자신의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다면 모르되 - 이제부터는 그 누구도 면죄될 수 없는 차원이다. -236쪽

오늘날에도 평균적인 인간이 바캉스 및 자유시간을 통해서 요구하는 것은 '자기실현의 자유'(어떠한 자기를 실현하고, 어떤 숨겨진 본질을 나타낸다는 것인가?)가 아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의 무용성, 즉 흥청망청 쓸 수 있는 자본(부라고 해도 좋다)으로서의 여분의 시간을 갖고 있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 자유를 그는 우선 요구하는 것이다. 여가의 시간은 소비의 시간과 마찬가지로 일반적으로 가치를 생산하는 극히 중요한 사회적 시간이 된다. -240쪽

여가의 근본적인 의의는 노동시간과의 차이를 나타내라고 하는 강제이다. 따라서 여가는 자율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노동시간의 부재에 의해 규정된다. 여가의 본질적 가치를 만드는 이 차이는 도처에서 그 내포된 의미가 나타나고 있으며, 과장되고 지나치게 노출되어 있다. 여가의 모든 기호,(241)태도,실천 속에서, 또한 여가가 화제가 되는 모든 언설에서 여가는 그러한 과시와 끊임없는 과장으로 살아가며, 자기선전에 의해서 성립하고 있다. 여가에서 모든 것을 탈취할 수 있는데, 이 사실만은 삭제할 수 없다. 이것이야말로 여가의 본질을 규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2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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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비평 92호 - 2010.가을 역사비평 92
역사문제연구소 엮음 / 역사비평사 / 2010년 8월
품절


천정환 선생의 <신자유주의 대학체제의 평가제도와 글쓰기>중 일부를 옮겨본다. / '학진 시스템'은 학문적으로 기여한 바가 많다.젊은 학자들이 정당한 학문적 이니셔티브를 갖게 됐으며,지원제도가 없으면 불가능했을 대규모 기초연구가 수행됐다. 또한 고식적인 학문 간 경계가 흔들리고 융합적 학문연구도 확산되었다.그러나 그늘도 깊어지고 있다. 그것은 우선 학의 세계를 평균화,전일화,국가화하며,모든 학자와 연구를 거대한 하나의 창구,하나의 틀 속에 밀어넣고 있다.그럼으로써'학진 시스템'은 모든 '외부'를 재빨리 지워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 의미는 무엇일까?-194쪽

'국가 안에서의'학의 자율성은 외관상 커졌지만,인문학이 가져야 할 가치인 '자유'는 위축되고 있다. 이는 양가성을 갖는다. '국가'는 인문학의 최후 보루이며,동시에 '인문학의 위기'를 오히려 극단화시키는 장본인이다.특별한 실천력과 신념을 가진 극소수를 제외한 모든 연구자의 모든(194) '연구 성과'가 거기 '등재'되도록 하고 있다. 이는 한국에서 근대적 글쓰기와 근대자가 탄생한 이래 미증유의 일이며,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힘들 것이라 본다. '학진 시스템'하에서 우리 모두는 '국가-학자'인 것이다.그래서 '학진 시스템'은 지식 생산의 문화를 전변시켜 인문,사회과학자의 존재방식을 바꾸어놓았다.'지식인'은 이제 소멸했다.'연구자'혹은'전문가'만 존재한다.'국가'에 대한 인문학자의 의존성은 지나치케 커졌다.-194,195쪽

2000년대 초에 일어난 '인문학의 위기'담론은 인문학에 대한 국가의 지원을 상시제도화하다시피 했다.이제 그것은 모종의 중독상태를 만들고 있다.이제 HK--BK같은 제도가 없는 한국 인문학을 상상할 수 있는가? 이 과정에서 '학진'은 그 자체로 무소불위의 리바이어던이 되던가,또는 리바이어던의 한쪽 팔이 되어 인문학을 지배하고 있다.'국가'에 의한 지원이란 언제나 정치(논리)와 절합될 가능성도 있다.과연 이 거대한 기계-동물을 제어할 수 있을까?-195쪽

'학진 시스템'하의 '학문'의 어떤 마디들은 점점 희화화,화석화되고 있다.학회의 정착,확산과 심사제도의 일상화는 '관습'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작용하게 마련이기 때문일 것이다.특히 '글쓰기'가 획일화되고 있다. 비슷한 문체,구성을 가진 수없이 많은 '논문'이,거의 똑같은 '원고 투고 규정'을 가진 '학회지'에 의해 대량생산되고 있다.모두가 [등재]학술지에 논문 쓰기와 심사평가-업적 보고에 목을 매달고 있지만,그것을 진실하고 온전한 인문학 활동이라 생각하는 인문학자는 별로 없을 것이다.그럼에도 이 제도는 그야말로 움직이기 힘든 '현실'로 실정화되었다.그래서 본연성에 대한 의식과 별도로 '현실'에 맞추어 살기 위한 적응력과 테크닉이 점점 고도화된다.또한 서론-본론-결론의 구성과 국문 초록-영문 초록-국문 핵심어-영문 핵심어 등의'액세서리'는 거추장스러운 '현실'이면서,점점 글쓰기의 본연을 잊게 만드는 매개다. -196쪽

더 큰 문제는 등재지 학술논문 중심의 '학진 시스템'인정구조가 강력한 경계벽이 되어 대학과 현실,학문과 현실 사이에 높은 벽을 쌓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논문'은 그야말로 양산되어 인문학이 발전하고 있는 듯하지만(196),그것은 '글쓰기'의 다른 존재방식인 비평과 '책'을 죽이는 방향으로 작동하고 있다.-196,197쪽

'인문학의 위기'가 중,고등학생들까지 입에 올리고 다니는 상투어가 된 것이 2006~2007년경이다.그런데 불과 3~4년 사이에 작지 않은 변화가 있었다.오늘날 '인문성'을 규정짓는 한 변수가 시민을 향한,시민을 위한 인문학을 표방하는 인문학 강좌의 붐이다.전국의 지자체와 큰 지역 도서관과 대학 뿐 아니라,고급 백화점이나 대기업들도 '인문학'을 위해 나서고 있다.그리하여 이전에는 상상해보기 어렵던,극적이고 때론 코믹한 광경이 '인문학'덕분에 벌어지고 있다. -200쪽

'인문학'과는 가장 거리가 먼, 한국 사회의 양극에 있는 집단들이 각각 인문학 강좌를 듣고 있다.가장 돈 많고 권세 많은 대기업 CEO와 고위 공무원,그리고 '돈과 명예'양면에서 가장 '비천한'자리에 있는 노숙자,성매매 피해 여성, 재소자들이 그들이다. 인문학 강좌를 들은 CEO들이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의 실행자로 변신할 것이라고는 전혀 상상되지 않는다.또한 '인문학'이 가장 가진 것 없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그 '비참'을 덜 수 있는 힘과 보람이 될지에 대한 확신은 없다. -200쪽

그럼에도 인문(200)학자가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는 분명할 것이다. 그리고 그 중간에 무수한 스펙트럼의 '시민'들이 인문학 강좌를 듣고 있다.요컨대,몇 년 사이에 인문학 독서시장은 황폐해지고 대학원생도 줄고 있는데,'인문학'은 교양시장의 새로운 트렌드가 되어 '시민'과의 접촉 부면을 넓힐 것이다.따라서 '편수'나 '논문 쓰기'는 제도 내부의 인문학과 외부의 인문학의 성격 및 주체를 지금보다 더 확연히 갈라놓을 가능성도 높다. 그러하기에 누가 '시민 인문학'의 주체이며,시장의 '인문학 서적'이 과연 어떤 것인지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그리고 인문학자들이 이런 흐름을 적극적으로 성찰하거나 동참할 필요가 있다. 이는 '학진 시스템'과 '업적 점수'에 타락하고 있는 '제도' 종속적인 정신을 세척하는 물줄기를 트는 일이다. 공부 결과를 '공공적인'생산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200,2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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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 2010-09-13 0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리한 지적이 많네요. 전 정권에서 시작된 이 사업은 아마 곧 종료되겠지만, 저희 과도 bk를 받는 입장에서 평소에 느꼈던 답답함이 잘 드러난 것 같습니다. 언젠가 도서관에서 하이데거의 <세계상의 시대Die Zeit des Weltbildes>를 빌려봤는데 하이데거도 이미 그런 말을 써 놨더라구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데 '철학은 이제 사유denken하지 않고 연구나forschen 하고 있다'였나? 그 여백에도 어김없이 누군가 bk라고 써 놨었지요; 사실 제일 역겨운 것 중 하나가 최고지도자 인문학 과정인지 뭔지 하는 거 같아요.

얼그레이효과 2010-09-13 02:22   좋아요 0 | URL
바라님 오랜만입니다. 아, 하이데거가 그런 말을 했었군요. 좋은데요. 천정환 선생이 우려하는 걸 좀 감히 줄여보면 결국 '인문학의 국가화'와 '인문학의 (과한) 사회화(?)' 같은데요..요즘 제 주변도 그렇고,,'아카데미 내의 일정한 패배주의'라고 할까요..그런게 느껴져서 두렵더군요. 더 두려운 건 그 패배주의를 극복할 방안을 함께 모색하지 않고,그냥 돈 좀 내고..아카데미 바깥에서 좀 더 배우고 오면 되지와 같은 움직임들이 특히 인문/사회과학 분야에 강하던데..천정환 선생 글을 읽으면서,,고민을 더 해보게 되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바라님이 전념하시는 연구 분야와 이런 학문 '사업'의 결합에서 바라님을 포함한 공부하시는 분들의 상처 같은 게 감히 떠올려지네요..어떤 선까지 악수를 해야 하고, 어떤 선까지 거부를 해야 하는지 점점 그 고민의 두께가 두터워지는 요즘입니다. 그 시기에 또 이런 아티클이 다가왔네요..크윽. ㅜ.ㅜ (독립영화도 관변화하려는 이 시대에,,인문학의 국가화라..가끔 제가 콘텐츠 생산자는 아닌가하는 고민도 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