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즈드 앤 컨퓨즈드 Dazed & Confused Korea 2011.6
미디어블링 편집부 엮음 / 렉스트림(잡지) / 2011년 5월
품절


경험의 한계가 사람을 편하게 만들어줄 때가 있습니다. 다양한 것들을 경험하고 그 경험을 통해 진리를 얻어 결국 인생을 달관하게 되는 사람이 물론 더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한계 지점 이상의 경험을 해보지 못한 사람은 그 한계 밖에 있는 가능성에 대한 걱정과 우려를 하지 않아도 되는 행운을 얻습니다. -16쪽

겉으로는 화려하고 속은 치열한 패션 업계에서 '이건 알아서 다행이다'하며 안도하는 경험들도 있지만, 곱게 곱게 피해가고 싶은 거친 경험들도 참으로 많습니다. 어디 패션 업계만 그렇겠습니까만은, 온실 안의 화초는 억새풀의 자유가 부럽고, 억새풀은 온실 속의 안정감이 질투 날 수 있는 거죠. - EIC 안나윤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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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와 사회 74호 - 2007.여름
한울 편집부 엮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07년 6월
품절


(계속 화두가 되고 있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괜찮은 연구논문, 이택면,박길성의 아티클을 옮겨본다. 제목은 <시장에서 책임으로>) / 세계화는 국가, 기업, 시민사회가 상호작용하는 방식에 커다란 변화를 초래했다. 세계화로 인해 국가의 개입-견제 능력은 약화되고 기업의 재량은 상대적으로 증가하였다. 그와 동시에 시민사회는 기업과 국가에 대해 조정자 및 균형자로서의 역할을 담당할 역량을 갖추기 시작했다.따라서 세계화 시대의 경제적 조정 문제는 '국가 대 시장'의 오래된 논의의 틀을 벗어나 기업과 시민사회간의 관계를 규율할 새로운 관할구조(governance structure)를 모색하도록 요구하고 있다.-227쪽

이 논문이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이 양자를(얼그레이효과 : 시장형 관할구조와 국가 개입 중심의 위계형 관할구조)(229) 절충하는 제3의 가능성, 즉 기업과 시민사회 구성원의 인센티브와 자율성을 손상시키지 않으면서도 기업의 사익추구에 의해 시민사회의 공익이 훼손당하는 것을 최대한 방지할 수 있는 제3의 관할구조가 형성되고 유지될 가능성이다. 이 논문은 이 혼합형 관할구조의 현실태로서 기업 지배구조 변화를 통한 기업의 사회적 책임(Coporate social responsibility, CSR) 강화에 주목하고자 한다. 기업의 이윤추구 행동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는 다양한 계층의 이해관계자 skateholder을 기업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시키는 기업 지배구조 개편을 통해 기업에게 이윤과 주주가치의 극대화 이외의 사회적 책무를 부과하는 것- 이것을 본 논ㄴ문은 기업과 시민사회 관계를 규율할 새로운 혼합형 관할구조의 실체라고 본다. -229,230쪽

글로벌 기업은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필요한 자원을 끌어오며, 여기에는 비단 물질적,경제적 자원뿐만 아니라 여러 다양한 사회와 집단의 도덕적,심미적,상징적 자원 또한 포함된다. 이러한 인풋을 동원하여 재화나 서비스를 만들어 내는 과정에도 기업은 특정 국가, 특정 집단에 국한된 욕구에만 부응하는 것이 아니라 전 지구의 다양한 소비자들의 다양하고 미묘한 욕구에까지도 민감하게 반응한다. 세계화 시대의 기업 활동은 전 세계의 자원과 자본과 인력, 나아가 전 세계 각 사회집단의 다양한 욕구와 도덕적 가치, 그리고 세계관과 접목되어 있다. 기업 활동의 결과물은 전 세계 사람들의 소득, 고용기회,가치관,건강,교육,차별,빈곤 등 광범한 영역을 좌우한다. -231쪽

세계화는 개별 국가의 수준에서 정부의 경제 통제력을 감소시키고 민주적 책임성에 대한 요구를 강화시키며 국가의 주권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게 만든다. 이것은 시민사회 조직이 정부 서비스의 대안적 공급자로서, 정부정책의 입안을 주도하는 주체이자 정책의 집행과정을 감시하는 감시자로서, 정책을 만들고 집행하는 데 참여하는 국가의 대등한 파트너로서, 새로운 대안과 비전을 만들어내는 사회적 혁신자로서 활약할 공간을 제공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하여 세계화의 힘은 시민사회 조직의 양적, 질적 성장을 부추긴다. -233쪽

미래 지향적 기업-시민사회 관계는 CSR과 기업 지배구조 개혁을 둘러싼 논의를 통해 의제화되었다. 기업은 오직 이윤을 축적함으로써 주주와 투자자에게 이익을 배당하고 고용을 촉진시키고 나아가 국가경제의 성장에 기여하는 '경제적 책무'만을 다하면 되는 것인가? 기업과 시민사회 구성원들과의 관계는 오직 자본시장, 노동시장, 생산물 시장 등에 참여하는 판매자와 구매자로서 시장의 구규율에 의해 매개,조정될 뿐인가? 세계화의 물결은 이제 경제 지상주의와 시장 중심의 기업-시민사회 관계를 뛰어넘어 기업과 시민사회가 기업지배구조 개펴늘 통해 의사결정 과정에 공동 참여하여 기업의 사회책임을 강화하는 '협치의 관계'로 나아가야 할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음에 본 논문은 주목한다. -2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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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정의인가? - 한국사회, <정의란 무엇인가>에 답하다
이택광 외 지음 / 마티 / 2011년 1월
절판


옮긴이(얼그레이효과) :<이 윤리적인 사회를 보라 : 신자유주의적 윤리로서의 정의>, 서동진 편 / 이 책에서 유일하게 건질 논의가 있었다고 보는 챕터였다. / '투명성'은 바로 신자유주의가 선호하고 채택하며 강제해 온 정의의 윤리 중 가장 으뜸가는 덕목이다. 투명성이란 신자유주의 사회의 부정적 효과를 제어하고 반성하며, 나아가 새로운 형태의 자본주의를 보호하기 위해 고안된 많은 윤리적 덕목에 속할 뿐 아니라 그 가운데서도 가장 선호되는 것 가운데 하나이다.-290쪽

신자유주의가 다른 점은 정의를 '시장의 윤리'에 가깝도록 대담하게 수정하고 또 이를 실현할 수 있는 광범한 테크놀로지를 생산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것이 거의 모든 사회적인 영역에 뿌리내(290)리도록 에씀으로써 '정의 사회'구현을 위해 분투한다는 점이다.그러므로 신자유주의적 사회가 더없이 정의롭다 말하는 것은 절대 비아냥거림이 아니다. 윤리도 일종의 이데올로기라고 할 수 있다면 그 역시 이데올로기가 지닌 속성에서 자유롭지 않을 것이다. 신자유주의적 윤리 역시 여느 이데올로기처럼 사회를 가로지르는 근본적인 적대를 부인한다. 그 대신 신자유주의적 윤리가 도입되는 사회에 관한 허구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내며 이를 통해 사회를 비판할 수 있는 언어를 만들어 낸다. -290,291쪽

기호학에서 쓰이는 표현을 빌려온다면 신자유주의는 자신에 고유한 윤리적 담론의 장르를 만들어내고 이를 구체화하는 다양한 스타일을 전개한다. 그 윤리적 담론의 장르를 우리는 '정의'의 담론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고 거기서 비롯되는 다양한 윤리적 담론의 스타일을 책무성, 투명성, 공정성, 청렴 등으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291쪽

여기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점은, 이데올로기는 자신이 관련을 맺는 대상을 비호하거나 예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가장 이데올로기적인 몸짓은 외려 이데올로기가 발생하면서부터 그 내부에 장착할 수 있다. 따라서 이데올로기는 그 어떤 비판으로부터 면역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유지하기 위한 힘 가운데 하나로서 비판을 동반한다. -291쪽

무엇이 정의의 윤리를 구성하는가, 과연 정의의 윤리를 거부해야 할 것인가를 따지는 짓은 어리석은 일이다. 외려 주의를 기울여야 할 점은, 자유주의가 자본주의를 비판되어야 하는 체제로 반성하면서도 동시에 절대로 근본적으로는 부정하지 못하게끔 하는 비판의 윤리를 어떻게 생산하고 동원해 왔는지를 분별하는 것이다. -292쪽

정의의 윤리는 무엇보다 개인적인 주체의 윤리라고 말할 수 있다.자유주의가 정의의 윤리를 선호하는 것도 이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전통적인 공동체를 윤리적 주체의 자리에 놓고자 했던 보수주의자들이나 아니면 그 자리에 '인민'이나 '근로 대중'을 놓으려 했던 사회주의자들은, 자유로운 개인이란 주체를 대신할 만한 효과적인 주체를 고안하지 못했다. 그 대신 사회주의자의 경우 이기심에 눈이 먼 탐욕스러운 공리주의자란 이유로 개인을 규탄하거나 보수주의자의 경우 보편적인 전통을 무시한 타락한 쾌락주의자란 이유로 그 개인을 성토했을 뿐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물론 자유주의는 그런 비판을 수용하거나 혹은 그와 타협하면서 개인을 윤리적 주체의 위치에 머무를 수 있도록 했다. -293쪽

환언하면 신자유주의는 자신을 보완할 윤리를 언제나 동반한다.이를테면 한국사회에서의 신자유주의적 전환을 돌이켜 보아도 좋을 것이다.흔히 말하는 87년 체제를 형성하면서 기존의 급진적인 사회운동이나 반정부운동이 제기했던 비판을 신자유주의적 비판으로 흡수할 수 있었(296)던 것은 정의의 윤리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신자유주의적인 전환의 기획을 관통하는 것이 바로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겠다는 윤리적 규범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대표하는 것을 꼽자면 바로 '감사(audit)'라고 할 수 있다. 마이클 파워는 1980년대 이후 영국과 미국을 중심으로 진행된 신자유주의적 전환을 '감사 사회'의 도래, 혹은 '감사 폭발(audit explosion)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296,297쪽

감사 사회란 단적으로 책무성(accountablity)이라는 윤리적 규범을 통해 개인이나 기업,공공부문 혹은 사회운동단체에 이르는 다양한 행위자들의 행동방식 혹은 행태(conduct)를 관찰,측정,평가하고 그 결과에 기반하여 그들을 규제하고 관리하는 것이다. 이는 기존의 직접적인 통제나 명령과는 달리, 다시 마이클 파워의 표현을 빌자면 '통제의 통제(control of control)'를 수행하는 것으로 간접적인 방식을 통해 각 개인이나 조직, 기관들의 행위를 지배하는 것이다.-297쪽

감사는 무엇보다 책무성이라는 윤리를 따르면서 수행되는 실천이다. 여기서 책무성이란 교사든 사회복지사든 아니면 기업가나 공무원이든 자신의 행위를 과연 공정한가, 형평성이 있는가, 투명한가와 같은 다양한 정의의 규범에 따라 스스로 되돌아보고 평가하며 점검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찰, 감리, 사정과 같은 다양한 감사 활동은 바로 정의의 윤리를 가리키는 신자유주의적 명칭인 '책무성'을 겨냥한다. -299쪽

물론 이제 책무성이란 말은 더 이상 회계 활동에 묶여 있지 않다. 책무성은 신자유주의적인 윤리의 규범들, 즉 투명성,형평성,대응성(responsiveness),책임성,청렴 나아가 경제성, 효율성(effectiveness)등을 망라하는 일반적인 윤리를 가리키는 것이 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책무성이 회계적인 실천과 아무 관련이 없다는 것은 전연 아니다. 아니 거꾸로 회계적인 실천은 책무서을 통해(300) 전보다 더욱 광범위하게 동원된다. 숫자를 세고 계산을 맞추며 장부를 기재하는 회계사는 또한 동시에 윤리의 수치를 측정하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300,301쪽

그렇다면 어떻게 정의의 윤리를 넘어설 수 있을까. 그것은 정의의 윤리가 기반하고 있는 자유주의적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길 뿐이다. 그때야 비로소 정의의 윤리는 다른 모습을 가진 정의의 윤리로 둔갑하거나 소멸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가능케 하는 일은 윤리 자체와 대면하는 것을 통해서는 성취될 수 없다. 윤리는 바로 그 자본주의 자체를 변혁하기 위한 투쟁의 부산물일 뿐이기 때문이다. -30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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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1-05-13 15: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이구 좀 어렵네요. ^^ 읽다가 텍스트를 잘 이해를 못하는 저를 발견합니다. 아직도 갈 길이 멀구나란 생각을 하구요. 저 책에는 박홍규 교수님도 저자로 포함돼 있어서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분이라 읽을까 망설이고 있어요. ^^
정의란 무엇인가란 책도 못 읽어 봤지만, 정말 사색을 엄청하고 살아야 할 듯해요. 헛소리하는 댓글만 남겨서 죄송해요.^^;;;

얼그레이효과 2011-05-14 00:12   좋아요 0 | URL
박홍규 선생님은 번역된 책으로만 선생님의 간접적 목소리를 느껴 언제 저작을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요 몇 년간 사회학에서 '책임성', '투명성'에 대한 연구들이 많이 나오더라구요. 어떤 학자는 시민사회 - 기업 간의 '협치'를 위한 대안으로,,어떤 학자는 제가 올린 서동진 선생의 본 글처럼 이런 '책임성'이 신자유주의의 새로운 통치 전략이라고 주장하는 대립각이 있더군요. 관심분야라서 한번 올려봤습니다.

루쉰P 2011-05-15 07:44   좋아요 0 | URL
전 박홍규 교수님 오타쿠라서 거의 모든 책을 사서 가지고만 있어요. ^^ 강준만 교수와 이 분의 책만 모두 모아 놓고 혼자 흡족해하는 독서인이죠. ㅋㅋ

호~'책임성'이 신자유주의의 새로운 통치전략이라는 의견은 왠지 설득력이 있는데요. 하나 하나씩 들어가는 사회학 지식 뿌듯한데요. ㅋ

얼그레이효과 2011-05-15 2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제 즐거운 박홍규 교수님 독서기 부탁드립니다.~
 
콘크리트 유토피아 자음과모음 하이브리드 총서 2
박해천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2월
평점 :
절판


 

# 1 -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분위기? 김수현이거나, 임성한이거나 

김수현 드라마의 그 조근조근한 태도로 삶을 되뇌이는 대사 맛 혹은 임성한 드라마의 인물들이 뜬금 없이 내던지는 한국 사회에 대한 현실, 그것을 기괴스럽게/ 속물스럽게 내는 맛. 박해천 선생의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읽으면서 이 두 맛이 느껴지는 듯 했다. 이 두 맛이 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이 책이 이야기하는 '아파트'란 놈은 우리가 습관적으로 틀어놓는 텔레비전 드라마 속 당연한 담론의 장소로 늘 우리를 초대한다. 우리는 그것에 대해 "또 그 이야기야?"하지만(여기에는 '막장'이라는 말을 쉽게 꺼내며 우리의 고단한 삶을 기괴하고 우스꽝스럽게 표현하려는 현대인들의 반복된 일상이 포함된),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어느새 '또 그 이야기'가 만들어내는 현실 속으로 들어와 있는 상황. 우리는 이를 "한국 사회의 무엇"이란 말로 제법 유식하게 포장하여 하룻밤을 지샐 준비가 되어 있거나, 또 누군가가 들려주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에이..말도 안 돼"라는 불신 섞인 반응과 함께 그 이야기를 더 믿기 위한 준비가 되어 있다. 저자는 아마 이런 사람들의 심리를 잘 알고 있는 감수성을 지닌 것 같다. 책을 읽어 보면 저자가 선택한 시선들은 저 삶 속에 지긋지긋하게 반복되지만, 그 반복된 이 한국의 / 도시의 / 서울의 이야기가 '반복의 재미'를 주고 있음을 저자 본인이 알아채고 말하는 듯한 '경험의 눈'을 가졌다. 그 눈으로 그려낸 이야기. 이것이 바로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분위기다. 

 

 

# 2 '1 픽션'의 효과에 대한 아쉬움

좀 에둘러가는 설명을 버리고, 이 책이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지 간략하게 읊조리자면, 저자는 "아파트는 한국의 시각 문화를 어떻게 변모시켰는가라는 질문을 내던지고 그에 대한 해법을 구해가는 여정을 담고"(7)싶었다 한다. 우선 이를 위해 '가짜 자서전' 혹은 '허구의 회고담'이라는 글쓰기-형식을 시도한다(이는 '1-픽션'이라는 챕터의 내용을 채운다). 이 형식을 이끌어가는 행위자는 "1960년대 초반 완공 당시의 마포아파트를 바라보던 항공 카메라의 시선, 반포에서 압구정을 거쳐 잠실로 이어지던 강남의 대규모 아파트 단지, 1970년대 후반 이후 최근까지 강남의 아파트에 거주해왔던 1940년대생의 강남 1세대, 그리고 최근 고급 가전제품을 상징하는 도상으로 각광받고 있는 꽃무늬 장식, 이렇게 1명의 인간과 3개의 비인간"(8)이다.   

저자는 "3개와 1명의 행위자들 뒤로 숨어"(8), "그들은 자신이 품고 있던 생각을 털어놓기 시작했다"(10)라는 표현으로 저자 자신의 시선을 '수줍게' 서문에서 예고하는데, 독자의 입장에서 이런 '숨기 효과'가 그렇게 재미있는 발상이라고 생각 들진 않았다. 인물의 회고 속에 그리고 비인물의 '의인화된' 시선 속에 들어간 '저자의 그 방대한 지식'이 저자가 택한 여러 소설의 구절과 엮이어 나는 글 속 내음이 군데군데 공감을 자아내기도 하지만, 여전히 저자가 조직해놓은 그 지식의 구성도가 주는 위압감은 '화자'의 생생한 맛을 잃어버리게 하는 효과로 나타난다는 느낌을 받았다. 굳이 '가상의 입'을 빌릴 필요가 있었을까. 오히려 그것을 신경쓰며 지식을 편집할 때 쓴 에너지(설정된 가상- '화자'의 입에 알맞게 배치될 저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생각하는 에너지)로 더 새로운/섬세한 이야기들을 하기 위한 장소를 마련하면 좋았을 걸.  

저자는 가상의 화자들을 설정함으로써 아마도 그 화자들을 둘러싼 진부한 담론들을 각개격파하고, 이로써 아파트에 대한 그리고 아파트를 관통하는 시각 문화에 대한 제 3의 관점을 설명/발굴하고 싶었는 듯 하지만, 읽는 사람이 '가상-화자'라는 주체에 대해 의식을 하게 만드는 독특함의 수준은 그리 높게 평할 수 없었다. 즉, 1명의 인간과 3개의 비인간의 입을 빌려, 저자 자신의 주장을 말하고 싶다는 솔직함, 그리고 당연히 독자들도 그 형식을 빌어 저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겠구나 하는 상식적인 이해는 이 책을 여행하기 전에 모두가 따르는 여행의 규칙임은 뭐 당연한 것이리라. 하지만, 이와 함께 떠오르는 또 하나의 기대감 즉,저자가 실험적으로 선보이는 그 가상-화자들이 '당사자'의 입장에서 내는 독창적인 목소리, 그것의 재현이 가능할까라는 기대감 차원에선  그것이 그렇게 돋보이지는 않았다는 아쉬움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저자가 한땀 한땀 뜬 '1-픽션의 형식이 챙기고 싶어하는 효과'에 대해선 그 정성 만큼에 비례하는 인정을/공감을 표할 수 없었다. 

 

 

# 3 디자인의 정치학/사회학이 건네는 몇 가지 메시지들 

 3.1 '지배의 미학'을 간파하기 -  계획과 구성, 도시 생산의 언어

 그러나, '1 픽션'의 형식-효과에 대한 아쉬움을 뒤로 할 만한 저자의 시선을 채우는 내용, 그것에서 새어 나오는 디자인과 사회적 관련성에 대한 저자의 문화학적 혜안은 (문화연구가 늘 그렇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일상의 문화가 (끊임없는 해석과 규정 속에서) 늘 자극 충만한 그리고 재미있는 것임을 알려주는 통로가 된다.  

"지배는 그 자체의 미학을 가진다" - 마르쿠제 

우선 저자의 시선에 동참하고 싶다면 당신은 간단한 워밍 업 정도는 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그것을 도와줄 수 있는 책이라면, 저자가 참여했던 단행본 기획서 중 <한국의 디자인 02 - 시각문화의 내밀한 연대기>(현실문화연구,2008)에서 <공전하는 파편들 / 80년대 시각문화에 대한 몇 가지 기억>정도는 읽어주면 좋다. 저자는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사회문화사적 관점을 빌어 아파트의 특수성과 한국 사회의 맥락을 연결짓는 언급을 자주 하는데, 그 내용을 좀 더 깊이 나누고 해석해보고 싶다면 권유할만한 글이다. (나도 이 글의 도움을 얻었다) 저자는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시작하면서 도시 공간을 둘러싼 계획, 그리고 그 계획을 관장하는 건축가, 그 의미를 해석하는 비평가, 또 그 건축가와 비평가가 무시할 수 없는 국가 /사회의 입장을 이야기한다. '계획'과 '구성' 그리고 자본주의라는 체제. 여기에 저자가 본격적으로 건드리려는 '한국 사회'라는 특수한 조건이 더해지면서 저자는 '계획'과 '구성'이 단순히 도시를 가꾸는 '디자인'적 언어를 넘어, 지배의 언어로 한국의 아파트에 연관되어왔음을 이야기한다. '지배의 미학' 그것은 '디자인의 정치학'으로 설명할/ 간파할 수 있는 상징이다. 우리가 리펜슈탈의 영화에서 느꼈던 그 '일치단결'에 대한 소스라침을 계속 곱씹어 본 적이 있었다면, 한국 사회를 관통하는 '디자인'의 언어에 정치가 들어간다는 것이 전혀 이상할 리 없을 것이다. 아파트는 집단, 집중, 집합의 상징으로 자리 잡으면서 '경제 개발'의 진취성을 알리고, 무엇보다 그 과정을 통해 아파트에 거주하게 될 사람들 자체를 '모델'로 삼아 한국의 근대화가 더욱 발전되어야 하는 당위를 계발하는 결과를 낳았다.  

  

 3.2 디자인의 사회성, 배출되는 문화  

 저자는 한국의 정치사 속에 내포된 정치 기획적인 디자인의 언어, 그것이 구성한 도시상 속에서 한국을 살아가는 개인들이 부딪힌 사물 그리고 그 사물에 밀착된 디자인의 의미를 집중적으로 조명한다. 마치 장 보드리야르의 <사물의 체계, 1968>를 연상하게 만드는 저자의 '구성된 눈'은 한국 사회가 집착해 온 '스위트 홈'의 욕망을 집 안에 배치된 사물 각각의 특성을 설명해가며 끄집어낸다. 저자는 한국 사회의 시각 문화라는 관점 속에서 거울/창(窓)의 의미, 베란다의 의미, 텔레비전의 의미, 세탁기의 의미, 욕실의 의미, 화장실의 의미, 거실의 의미 등등에 대한 설명을 해 나가는데, 여기에는 도시사회학,가정학,문화연구,역사학,여성학 등 다양한 학문 분과가 한 번씩은 밟아 나갔던 한국 근대화 과정과 주거 문화의 연관성에 대한 학술적 성과 참조, 그리고 도시성을 주제로 한 소설 구절들과의 조우 과정이 개입된다. 특히 저자가 신경 쓴 부분은 한국-서울-아파트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사람들이 섞는 생활 언어가 소설가 특유의 사색으로 조명된 몇몇 소설 구절의 인용, 그것에 대한 저자의 시선이다. 저자는 박완서의 <서울 사람들>, 정이현의 <특별 과외>, 김영하의 <이사>를 비롯한 여러 작가들의 작품을 인용하면서 서울을 살아간다는 것의 심정을 두텁게 표현하고 싶어한다. 이것은 (#2의 내용과 유사할 수도 있지만) 저자가 의도한 실험성일 수도 있지만, 나는 기본적으로 인문/사회학자들이 소설을 인용하면서 그 소설이 가진 깊이를 도구적으로 채용하는 부분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주제의식을 드러내는 데 있어 소설의 구절 각각이 갖는 공감과 저자가 이런 소설 구절이 갖는 삶에 대한 진득한 성찰에 기대어 선보이려는 또 하나의 효과에 대한 공감은 읽으면서 구분하고 싶었다.  

다만, 저자가 풍부한 참조를 통해 '스위트 홈'을 구성해 온 사물의 체계를 해부하고, 각 사물의 기능과 상징이 갖는 문화적 의미를 역사적 맥락과 성실하게 잇는 작업은 '디자인의 단독성'?(적당한 표현인지 모르겠지만)이 아닌 '디자인의 사회성'을 드러내기에 충분했다고 보여진다. 여기서. '디자인의 사회성'은, 즉 사물과 함께 하는 디자인이란 단순히 사물의 사용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 사물의 문화적 상징을 돋보이게 하며, 무엇보다 그 사물과 공존하며 의미를 만들어가는 인간의 육체적-정신적 특징과 늘 관계맺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이 관계가 인간의 문화를 배출시킨다.  이러한 '디자인의 사회학'은 인간의 감정을 (아파트의 기능과 함께)/ 동일한 형태의 아파트를 '구별 짓게' 장식하려는 사람들의 라이프스타일을 설명하는 방식이 된다. 그리고 저자가 강조하는 것처럼 아파트는 '재산 증식'으로서의 장소로 늘 경제와 인간 도덕의 틀 속에서 뻔한 비판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더 깊이 아파트의 문화적 의미를 보기 위해서 사람들이 아파트에 투영해 온 실천들을 관찰할 필요가 있음을 몸소 보여준다. 그 사례들이 하나, 둘 보여지면서 하고 싶은 아파트에 대한 저자의 변은  아래의 구절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 옮긴이 :박해천의 말을 전하는 가상의 화자)는 감각의 생산양식을 구축해 거주자들이 독특한 시각성의 논리를 체화하도록 노력했고, 일상성의 프로그램을 제공해 독특한 구별짓기의 알고리즘을 내면화하도록 만들었다. 나는 그들 내면의 윤곽을 주조하는 거푸집이었던 것이다"(67)

   

 3.3   디자인과 사물의 친밀성, 그 사이에 있는 인간 욕망의 내밀성 

 '디자인의 정치학'을 통해 지배의 언어를 간파하고, '디자인의 사회학'을 통해 아파트를 구성하고 있던 한국 사회 내 '스위트 홈'에 대한 욕망의 발견이 사실 저자의 독창적인 작업 성과라고만 볼 수 없다. 일찍이 린 슈피겔, 로저 실버스톤, 에릭 허쉬, 데이비드 몰리, 소냐 리빙스턴, 아르준 아파두라이 등 많은 미디어/문화연구자들이 '가족'의 상징성을 구성하는 사물 연구에 관심을 가져왔다. 이 당시 근대성의 역사적 전개 과정과 공적 영역/사적 영역의 구분, 발달된 소비 문화와 이와 유관한 가족 내 정체성의 재구성 등이 한때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까지 일상문화연구의 뜨거운 테마로 떠올랐다. 이 연구 과정은 가령, 사람들이 사용하는 사물이 곧 미디어이며, 그 미디어가 집 안에 어떻게 배치/활용되는가가 곧 그 집의 이미지, 그리고 그 집을 사는 사람들의 이미지를 가족 스스로에게 /타인에게 보여지는 기능을 한다는 점을 이론화 작업 및 사례 연구를 통해 보여주었다. (박해천의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더 쉽게 이해하고 싶다면 이 연구자들의 책을 구해서 읽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개인적으로 로저 실버스톤과 에릭 허쉬가 기획한 <Consuming Technologies, 1992>를 권하고 싶다.) 

이 연구들의 성과가 집적되면서, 그 집적된 결과물들의 혜택을 독서 과정을 통해 누려본 결과를 잠시 공유하자면 우리의 집을 구성하는 사물들, (학술적으로는 주로 '홈 테크놀로지'라는 개념을 쓰는데) 그 사물의 기능과 상징을 매개하는 것은 결국 인간이라는 사실이다. 사물, 사물을 휘감는 디자인과 인간의 관계는 '인간과 디자인의 상호관련성'이라는 그 진부한 메시지를 넘어 디자인이 어떻게 인간의 육체적-정신적 특수성을 닮아가려 하는지, 인간은 사물과 사물의 디자인의 기능과 상징에 어떤 영향을 받고, 그 받은 영향을 사회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표출하려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되묻는 게 필요한 것이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여기서 특히 한국 사회의 거주 문화를 집중 분석하면서 그 거주의 의미에 인간과 사물의 관계가 서로 끊임없이 맺어지고 있음을 강조하는 책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맺어짐은 사물의 기능에 단순히 끌려다니는 인간의 모습과 사물을 주체적으로 소유/활용함으로써 타인에게 자신을 '재현'하고 또 그것으로 인해 자신이 사회인임을 확인받는 오늘날 현대인의 일상을 설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기나긴 /반복적인 현대인의 싸움 가운데 아파트는 늘 핵심이 되어 왔다. 그리고 '피로감'이 될 정도로 우리는 아파트에 대한 이야기에 그 피로감은 둔감함으로 바꾸었나 할 정도로 또 아무렇지 않은 주거로 생각하고 있을지 모른다. 여기서 저자가 우리에게 부탁하는 것은 '솔직함'일 것이다. 저자가 정성을 들여가며 쪼개어 놓은 아파트의 의미, 아파트 속 방의 의미, 그 방을 채우는 사물의 의미에는 인간이  추구하고 싶은  내밀한 욕망이 있음을, 그리고 현대인은 스스로 늘 그 욕망이 우리 삶을 지탱하는 데 필요함을 은밀히 발설하고 있다는 점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 4. '곳'을 비우거나 또 채우거나

이 책을 읽고 나서 문득 내가 살고 있는 '곳'을 다 비우고 다시 채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이 '곳'을 다 비울 때 나타난 그 공백들(흰 벽지만이 남은)이 나에게 무슨 말을 걸까. 그 공백 자체가 디자인이라면, 그것을 바라보는 '나'는 그 순간 어떤 마음을 디자인하고 싶은 걸까라는 장면을 기대한다. 그리고 나는 '곳'을 비우며, 채워졌던 옛 시간에  남겨졌던 사물과 벽 간의 먼지, 그리고 검은 자욱들을 바라 보며 무슨 생각이 들까를 상상해보고 싶었다. 이 글을 마무리하는 내내 아직 구체적인 그림이 떠오르지 않는다. '나'는 나의 욕망에 솔직하지 못한 것일까. 아니면 나 이외에 이 집을 채우는 모든 사물들이 나 빼고 이미 친해져 있던 것일까. '곳'을 비우거나 또 채우거나. 사물에게 말 걸기. 디자인과 친해지기. 내 욕망에 솔직해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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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25 12: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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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25 13: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동문선 문예신서 142
미셸 푸코 지음, 박정자 옮김 / 동문선 / 1998년 12월
구판절판


차라리 이것은 앎들의 봉기이다. 한 과학의 내용이나 방법, 개념들에 대항해서가 아니라, 그 무엇보다도 우선 우리 사회와 같은 한 사회에서 형성된 한 과학적 담론의 기능과 제도화에 관련된 중앙집중적 권력의 효과에 대항하는 봉기이다. 이 과학적 담론의 제도화가 대학 안에서 또는 매우 광범위하게 교육장치 안에서 구체화되거나, 정신분석과 같은 상업적 이론의 망 안에서 혹은 마르크시즘의 경우처럼 그 모든 관련성과 함께(26)정치기구 안에서 구체화된다는 사실은 근본적으로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계보학이 싸워야 할 것은 소위 과학적이라고 간주되는 담론이 갖는 고유한 권력의 효과에 대항해서이다. -26,27쪽

따라서 계보학이란 앎들을 과학 고유의 권력의 위계질서 안에 편입시키는 것과는 달리, 역사적 앎들의 예속상태를 풀고 그것을 자유스럽게 만들기 위해, 다시 말하면 통일적이고 형식적이며 과학적인 이론적 담론의 강제성에 대항하여 투쟁하고 반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과업이다.(중략)고고학은 국부적 담론성의 분석에 적합한 방법이고, 계보학은 그렇게 묘사된 국부적 담론성에서부터 출발하여 거기서 끄집어 낸 앎들을 작동시키는 전술이다.이것은 전체적인 기획을 복원하기 위한 것이다.-28쪽

지난 몇 년 간의 강의에서 내가 말한 모든 것은, 물론 투쟁-억압의 도식편에 들어 있다. 내가 부각시키고자 했던 것은 바로 이 도식이었다. 그런데 그 작업을 해나가는 동안 나는 그것을 재검토하게 되었다. 그거슨 두 가지 이유 때문인데, 첫번째는 여러 관점에서 아직 그것이 충분히 다듬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며 - 전혀 다듬어 지지 않았다고 말하는 게 낫겠다-두번째로는 '억압'과 '전쟁'이라는 두 개념이 종국에 가서 포기되지 않으려면 적지 않은 부분이 수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여하튼 '억압'과 '전쟁'이라는 두 개념을 아주 가까이에서 관찰해야 할 것이다.-36쪽

어느 면에서 나의 문제는 다음과 같은 것이 될 터이다. 권력의 관계들이 진실의 담론을 생산하기 위해 작동시키는 규칙들은 무엇인가? 또는 우리 사회와 같은 사회에서 그토록 강력한 효과를 가진 진실의 담론을 생산할 수 있는 권력의 유형은 어떤 것인가?-42쪽

두번째 수칙은 권력을 의도나 결정의 차원에서 분석하지 말 것이다.즉 그것의 내면에서 포착하려 하지 말 것(중략) 다시 말하면 우리가 잠정적으로 권력의(46)대상이나 표적 또는 적용의 장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과,권력이 직,간접적으로 관계를 맺는 그 외적 측면에서 권력을 조사해 보아야 한다. 즉 권력이 뿌리를 내려 실제적인 효과를 발생하는 바로 그 장소에서 권력을 살펴보아야 한다는 말이다.(중략)그러니까 남의 육체를 예속시키고 그의 행동을 이끌며 그의 행위를 관장하는 그 지속적이며 끊임없는 과정 속에서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라고 물어야 한다.다시 말하면 "어떻게 군주가 저 높은 곳에 나타나는가?"라고 묻지 말고, 수많은 육체와 힘,에너지,물질,욕망,사유 들에서부터 어떻게 실제로 물질적,점진적으로 조금씩 조금씩 신하들 혹은 신민이 형성되는지를 알려고 노력해야 한다. -46,47쪽

결국 리바이어던의 모델을 제거해야만 한다. 인공적으로 만들어져 자동적이며 동시에 통일적이고 실제의 개인들을 모두 포함하고 모든 시민을 몸체로 가지고 있으면서 그러나 그 정신은 주권앤,그러한 인위적 인간의 모델을 제거해야만 한다.권력에 대한 연구는 리바이어던의 모델 밖에서,즉 국가제도와 사법적 주권에 의해 구획지어진 범위의 밖에서 이루어져야 하고,지배의 기술과 전술에서부터 그것을 분석해야 한다.-53쪽

결국 내가 지난 몇 년 사이에 보여 주고자 했던 것은,어떻게 정밀과학의 전진기지에서 인간행동의 불확실하고 까다롭고 희미한 영역이 조금식 과학에 병합되었는가가 아니었다.인간과학이 조금씩 형성된 것은 과학의 합리성의 진보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인간과학의 담론을 근본적으로 가능하게 했던 과정은 서로 완전히 이질적인 두 타입의 담론의 대립과 병렬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한편에는 주권 주변에 법의 조직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규율들에 의해 행사되는 강제들의 기제가 있다.우리 시대에 권력이 이 법과 기술들을 통해 행사된다는 것,규율에서부터 생겨난 이 담론들과 규율의 기술들이 법에 침투해 들어간다는 것,규격화의 과정이 점점 더 법의 과정들을 식민화한다는 것.이것이야말로 내가 소위 '규격화 사회'라고 이름짓는 것의 전체적 기능을 설명해주는 것이다.-58쪽

(전략)역사 안에서 하나의 세력으로 자리잡는다는 것은,그 첫단계로 자신을 의식하고 앎의 질서 안에 자신을 재편입시키는 것을 전제로 한다. -184쪽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일종의 지속적인 전쟁과 같은 힘의 관계를 사회 내부에 도입함으로써 불랭빌리에는 마키아벨리식의 분석을-그러나 이번에는 역사용어로-복원했다는 사실이다.그러나 마키아벨리에게 있어서는 힘의 관계가 근본적으로 군주의 손에 놓여져야 하는 정치적 테크닉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런데 그 이후에 힘의 관계는 군주 아닌 다른 어떤 것이-다시 말해서 민족 같은 것(귀족 혹은 나중에는 부르주아지 개념으로)-자신의 역사 한가운데에 표시하여 확정지을 수 있는 역사적 대상이 되었다.원래 정치적 대상이었던 힘의 관계는 이제 역사적 대상이 되었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역사-정치적 대상이 되었다.왜냐하면 귀족이 계급의식을 가지고 앎을 되찾아 정치세력의 장 안에서 다시 정치적 힘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이 힘의 관계를 분석함으로써였기 때문이다.-194쪽

자기 분석의 축과 무게 중심을 약간 바꾸어 놓음으로써 불랭빌리에는 아주 중요한 어떤 일을 했다.우선 소위 권력의 합리적 성격이라고 부를 수 있는 어떤 것의 원칙을 정했다.권력이란 소유의 가능성이 아니고, 상호관계가 작동하는 대립항의 차원에서만 연구해야 하는, 또는 연구할 수밖에 없는 하나의 관계일 뿐이다.(200-중략) 불랭빌리에에게 있어서(이것이 중요한 것인데)힘의 관계와 파워게임은 역사의 실체 그 자체이다. 역사가 있다는 것,사건이 있다는 것, 그리고 기억해야만 할 어떤 것이 일어났다는 것은 사람들 사이의 권력관계와 힘의 관계,어떤 파워게임이 작동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200,201쪽

다시 말하면 불랭빌리에는 그때까지 국가 경영의 합리성의 원칙이었던 것읅 역사의 이해원칙으로서 작동하게 했다.역사기술과 국가 경영이 서로 연속성을 갖게 된 것,이것이 바로 자본주의적 현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국가 경영의 합리성의 모델을 역사이해의 암호판으로 사용하는 것.그것이야말로 역사-정치적 연속체를 형성하는 것이다.이 연속체 덕분에 이제부터는 역사를 말하는 것과 국가 경영을 말하는 것은 같은 용어, 같은 암호판, 같은 산술계산에 의해 이루어질 것이다.-203쪽

문제는 역사 담론에서 내부적으로 통제되었던 전쟁관계가 어떻게 그 자리를 옮김(쇠퇴라고까지 할 수 없다 해도)을 통해 다시 나타나는지를 알아야 한다.전쟁관계가 다시 나타난다고는 하지만 이번에는 약간 외부적인 부정적 역할을 하면서이다.더 이상 역사를 구성하는 역할이 아니라 사회를 보존하고 보호하는 역할이며, 이때 전쟁은 더 이상 정치적 관계나 사회의 조건이 아니고,다만 그 정치적 관계 안에서의 생존조건이다.이때부터 사회 그 자체 속에서,그리고 사회 그 자체로부터 생겨나는 위험들에 대항해 사회를 지키기 위한 수호장치로서의 내적 전쟁의 개념이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다.그것은 사회적 전쟁이라는 사유가 역사에서 생물학으로,법률적인 것에서 의료적인 것으로 대선회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252쪽

(얼그레이효과 주 : 1976.3.17 강의분이 그 유명한 생정치에 대한 푸코의 견해가 나오는 대목이다.본 책 277쪽부터 시작) 19세기의 기본적인 현상 중의 하나는 소위 생명에 대한 권력의 관심인 것 같다. 권력이 생명체로서의 인간을 장악하는 것,생물학의 국유화라고나 할까,아니면 적어도 생물학의 국유화라고 부를 수 있는 어떤 것으로서의 경도현상이다.-277쪽

삶과 죽음의 권리란 사실상 무엇을 뜻하는가?그것은 물론 군주가 자기 마음대로 사람들을 살리고 죽일 수 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삶과 죽음의 권리는 항상 죽음의 편에서 불균형하게 행사된다.삶에 대한 군주권의 효력은 군주가 한 사람을 죽일 수 있을때부터 발생한다.그러니까 삶과 죽음의 권리란 결국 죽일 수 있는 권리이다.군주가 삶에 대해 권리를 행사하는 것은 오로지 그가 죽일 수 있는 순간에 한해서이다.그것은 근본적으로 칼의 권리이다.그러므로 삶의 권리와 죽음의 권리는 대칭이 아니다.그것은 살게 내버려두거나 죽게 내버려두는 권리가 아니라,죽게 만들고 살게 내버려두는 권리이다.이것이 명백한 비대칭성이다.-278쪽

19세기의 정치적 권리의 가장 큰 변화 가운데 하나는 이 오래된(278)군주의 권리-죽게 만들고 살게 내버려두는-를 새로운 권리로 대체까지는 아니다 하더라도,그것을 보완하는 것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이 새로운 권리는 구 권리를 지워 없애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침투하고 관통하고 수정하여 정반대의 권리,아니 차라리 살게'만들고' 죽게 '내버려두는'권력이 되었던 것이다. 군주의 권리는 죽게 만들고 살게 내버려두는 것이었다. 그런데 새롭게 정착된 이 권리는 살게 만들고 죽게 내버려두는 것이다.-278,279쪽

규율적이 아닌 이 새로운 권력기술이 적용되는 영역은-신체를 상대하는 규율과는 달리-사람들의 생명이다.인체가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극단적으로 말하면 종으로서의 인간을 상대한다.(중략)새롭게 정착한 기술은 다수의 인간을 상대하기는 하되,그것이 개체로 요약된다는 점에서가 아니라 이 다수가 모든 생명 고유의 과정인 출생과 사망,출산,질병 등 인류 전체의 과정에 영향받는 글로벌한(280)전체를 형성한다는 점에서이다.그러므로 개인화의 모델에 따라 권력이 인체를 장악한 후 두번째로 시도된 권력의 인체 장악은 개인화가 아니라 전체화였으며, 다시 말하면 육체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종으로서의 인간을 향해 행해지는 권력 행사였다.18세기에 이루어진 인체에 대한 해부-정치학 이후 18세기말에 더 이상 해부정치학이 아닌 어떤 것이 나타났는데, 나는 이것을 인종에 대한 '생물정치학'이라고 부르고 싶다.-280,281쪽

요컨대 질병을 인구현상으로 본 것이다. 더 이상 생명을 갑자기 덮치는 죽음-그것이 전염병이다-으로서가 아니라, 삶 속에 미끄러져 들어와 끈질기에 그것을 파먹고 점점 작게 만들어 마침내 그것을 약화시키는 그러한 점진적인 죽음으로서의 질병인 것이다.18세기말에 사람들이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 현상이었다.그리고 이것이 의료행위의 조정과 정보의 집중,앎의 규격화와 함께 공중보건을 주임무로 하는 의학을 만들어 냈다.이 의학은 전인구의 의료화와 보건교육 캠페인의 모습을 띠었다.그러므로 출산,출생률,사망률 등이 문제였다.-282쪽

생물정치에 의해 작동된 메커니즘은 우선 예측과 통계,그리고 전체적인 측정 다음에 그런 특정의 현상이나 개별적인 개인을 수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반적이고 글로벌한 현상의 결정 수준에서 개입을 한다. 사망률을 수정하고 낮추어야 하며,수명을 연장시키고 출산을 권장해야 한다.우연적인 요소가 많은 인구 전체 안에서 균형상태를 고착시키고,평균을 유지하며,일종의 항상성을 수립하고,보상을 확보할 수 있는,요컨대 살아 있는 사람들로 구성된 인구에 반드시 있게 마련인 우연적인 요소들 주변에 최대한의 보장장치를 마련하고, 삶의 질을 최적 수준으로 만드는 그러한 규제 장치를 수립해야 하는 것이다.-284쪽

죽음은 권력의 영향권 밖에 나오고,권력은 죽음을 전체적,일반적,통계적 수준에서만 장악하게 되었다.권력이 장악하고 있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사망률이다.이런 관점에서 죽음이 사적 영역으로 떨어진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중략)권력은 더 이상 죽음을 모른다. 엄밀하게 말하면 권력은 죽음을 내팽개쳤다.-2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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