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ddanzi.com/news/7253.html 

이것은 온라인 민주주의가 만들어 낸 혁명적 사건이다.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쉰의 이 오랜 노래 '킬링 인 더 네임'이 영국 크리스마스 차트에서 '엑스 팩터' 승자들이 늘상 갖던 왕좌를 뺐었다.  페이스북을 개설한 한 영국 부부의 제안으로 시작된 RATM 크리스마스 차트 1위 만들어주기 운동은 결국 놀라운 해피엔딩을 만들어냈다.

Awesome! 이럴 때 쓰라고 '졸라'라는 말이 있는 것이다. 멋있다. 팬들이여. RATM의 기타리스트 톰 모렐로의 공언대로 영국에서의 무료 공연이 성사될 것인가!  

온라인 민주주의가 만들어 낸 이 참여 혁명! 나는 이 광경을 한국에서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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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그레이효과 2009-12-21 2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론, RATM이 자본을 이용하는 어떤 우연적 전략의 역사를, 태클거는 이도 분명 많을거다. 근데 그게 이제 다시 '구린' 비판의 논지가 된 듯한 이상한 시간의 전개..
 

프랑스의 철학자 레이몽 부동은 자유주의를 옹호하는 한 책에서, 칼 맑스와 미셸 푸코를 '의혹의 철학자'들이라고 불렀다. 맑스는 다들 알다시피, 모든 것을 의심하라는 격언을 남겼고, 푸코 또한 자신의 연구를 통해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긴 것들을 '파헤치는 데' 몰두한 지식인이었다. 의혹이 매력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가 흔히 의혹과 함께 자주 사용하는 표현은 '드러나다'이다. 의혹의 숙명은 바로 이 '드러남'이라고 할 수 있는데, 텔레비전에서 매일 보는 뉴스라든지, 혹은 경찰들의 체포 현장을 찍은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보더라도, '의혹'은 그 드러남의 시간에 차이가 있을 뿐, 언젠가는 그 알몸을 보여줘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 의혹이 더 매력적인 이유는 의혹의 알몸을 보기 이전에, 그 알몸을 마음껏 상상할 수 있는 여백 때문이다. 이 여백이 오늘날 고도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쾌락의 상품으로 작용하면서, 사람들은 진실보다는 진실 이전의 상황에서 자신이 제시하는 '답 던지기'를 즐기는 듯하다.  이러한 '답 던지기'는 인터넷 커뮤니티가 발달하면서, 더욱 활발한 놀이로 규모가 커졌으며, 스포츠신문과 같은 올드미디어들은 이 대세에 따라 노골적으로 철자 게임을 기사화한다.  

이는 비단 연예면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의혹은 정치가 미디어와 결탁하여 만들어내는 대표적인 술수라고 할 수 있다. 진실이 어떻든, 의혹은 '진실이 나올 것 같은 상황'만 연출해주면 그 소임은 다한 것이다. '나올 것 같은 상황'에서 시작되는 '답 던지기'게임에서, 무수한 답들이 공개되고, 그 답이 갖고 있는 각각의 화살표들은 사건의 진실을 뒤덮을만한 쾌락의 시간을 구성한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소비되는 하나의 사건에서, 그 사건이 감당하고 있는 진실의 드러남은 오히려 드러남 이전보다 그 쾌락의 농도가 얕다. 아주 예전부터 사회학자와 정치학자들이 작금의 정치현실을 수긍하는 형태로 제시한 '정치 소비'라는 개념 속에서, 의혹의 소비는 그나마 정치에 무관심한 개인이 정치에 발을 담그도록 하는 유망주인 것이다.  의혹은 어쩌면 우리 시대에 가장 정치적인 언어다라는 탈을 쓴 가장 탈정치적인 언어인지 모른다. 혹은 정치를 도덕에만 등치시킨 채, 정치의 후퇴를 촉진하는 보수적 언어일 수 있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이런 의혹의 소비가 진행될수록, 대중들은 희망을 가질 만한 이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점에 한 숨을 쉬고 있다는 것이며, 이것이 우리 시대의 '상식'이 되어버렸다는 점이다. 허나 우리가 "그  나물에 그 밥"이란 옛 말을 언제까지 수긍하고만 살 수는 없을 것이다. 보수란 이름도 붙이기 아까운 그 집단은 대중들이 사실 그 말을  영원히 갖고 살길 바라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슬프게도 정치꾼들이 영원히 감추고 싶어하는 의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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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뮤지컬 <스프링 어웨이크닝>을 보고 오면서 몇 년 적 기억을 떠올렸다. 나는 대학교 교수님의 제안으로 모 청소년 영상제에 심사위원을 맡게 되었는데, 솔직히 말해 고민들이 너무 착했다. 그 많은 심사대상작들을 보면서, 나는 혹시 이 아이들이 너무 영악해져서, '좋은 상'을 받기 위해 이런 '평이한 고민'들을 소재로 삼은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술 문제, 담배 문제, 이성 교제 문제, 그 뻔하디 뻔한 문제 의식들..나는 누군가가 그 시기엔 다 그 문제로 고민하지 않아요? 반문하겠지만, 나는 그건 고민의 게으름이라고 본다. 그래서 새싹들의 파릇파릇함을 응원하기 위한 진부한 위로와 응원의 심사평 대신, 좀 혹독한 매질의 시각을 심어줄 필요가 있겠다 싶었다. 나중에 팜플렛에 실린 내 냉평을 본 내 학교 동창이 "너무 깐 것 아니냐"고 걱정해주었지만, 나는 당시 내 결정을 후회하지 않는다.  

토니상을 몇 개나 받았고, 한국에서도 엄청 좋은 평을 받았다는 것. 내겐 다 그저 그런 문제이다. 내가 문제삼고 싶은 건 이런 류의 고민들이 1980년대 <조찬 클럽>과 별 다를 바 없는 차원이다. 나는 두 가지 측면을 문제삼고 싶다. 진부한 일 단계 지적. 그래. 사회가 '여전히' 변한 것이 없다는 차원이다. 그러면 개인은 좀 위로받을 지 모르겠다. 여전히 변한 것이 없기 때문에, 우린 이 문제에 눈물을 흘릴 이유가 있다는 것. 이 문제에 환호하고, 이 문제에 내재된 억압이란 것들, 성의 문제란 것들, 사춘기의 방황이란 것들. 이런 것에 공감할 권리가 있다고. 근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건 '평이한 위안'의 문제다. 좀 거시적으로 말하자면, 이건 높은 단계의 고민을 막는 우리 사회의 분위기라고 보고 싶다. '적당한 수준'의 성찰. '적당한 수준'의 공감. 그래서 이런 '평이함'을 즐기면서, 이런 '일반성'을 적절히 소비하면서, 그 날 하루를 버티는 것이다. 그래서 개인은 더 많은 정보를 습득하지만, 지성의 성장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예전보다 똑똑해졌다고 하지만, 그것이 지성의 배가라고 생각하진 않은 사람으로서, 나는 <스프링 어웨이크닝>이 던지는 '청춘의 언어'들이 너무나 식상하고 맛이 없었다. 그 언어가 던지는 몇몇의 풍경들은, 우리 시대가 이제는 떨쳐버려야 할 진부함이 아닐까 싶었다. 내가 말하는 진부함은 비단 새로운 소재 찾기에 골몰하라는 촉구가 아니다. 다만 이런 진부한 단계에 갇혀, '비혁신적'인 혁신에 환호하는 그 어떤 수준에 일갈하는 이들이 아무도 없다는 것이 아쉽다.  

나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비혁신적' 혁신의 분위기가 두렵다. 이것은 자신이 정말 성장하고 있다는 거짓된 위안을 심어줄 뿐, 그 실체는 허약하다. 매번 포장되는 '혁신의 가면'을 쓴 언어들이 결국 우리에게 강요하는 건 '평이한 위안' , 적당한 눈물과 적당한 웃음뿐이라면 이 짧은 삶. 너무 우울하지 않은가. 그 틈에서 게으른 미디어들이 다루는 단어들이란 고작 '파격'이란 것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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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따 2009-12-09 1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스프링 어웨이크닝 보셨군요. 보희샘 추천을 받았을때도, 저 제목에서 딱 풍기는 뭔가 상투적인 그것 때문에 약간 긴가민가하긴 했었죠; (아 저는 ㅂㅎㅈ임다 ㅋ)

얼그레이효과 2009-12-13 1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컨디숀이 안 좋을 때 봐서..다시 봐야할 것 같기도 하구요.+_+
 

솔직히 30살이 되는 것보다, 27일만 있으면 다가오는 '29'살이 더 두렵다. 단순히 아홉수는 아닌 것 같고. 뭐랄까. 내 주위의 문제들에 대해 참 열심히 부딪혀 왔다가도, 별 성과가 없는 것 같다는 일종의 무기력증과 자책감 같은 것. 그래서 타인에 대한 질투심도 나고, 그 질투심이 나를 더 여유롭게 만들지 못하는 것 같다. 그러다가도 얼마 전에 만난 한 후배의 꿈처럼 귀농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귀농을 해서, 그냥 열심히, 열심히 살았을 때의 그 순수한 느낌을 가져보고 싶기도 하고.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하는 내가, 휴대폰에 모르는 번호가 떠 "누구야?"하고 신경질 비슷한 것을 부릴 때, 그런데 그 짜증의 대상이 하필 나를 좋아해주는 지인들이었을 때의 당혹감이란. 내가 대학원에 와서 어떤 나눔을 하고 살았는지 고민하게 만든다.  

하고 싶은 건 없는데, 읽고 싶은 것은 많고. 보고 싶은 것도 많고. 듣고 싶은 것도 많다. 이 '부지런함주의'가 뭔가 타인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데. 이러한 희망은 늘 타인의 아픔을 목도하고나서야 다가온다. 그래서 늘 이 씁쓸함을 제거하려고 몸부리치는 플러스 한 살을 일찍 꿈꿔본다. 

갈수록 짠 맛을 좋아하시는 부모님 걱정도 되고. 은행에 가면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내 습성을 멀리하고 통장을 어느 정도는 가까이 해야 하는 나이같다는 생각도 든다. 조금만 놓아두면 금방금방 자라는 수염 녀석은 쉬지도 않는다.  

논문은 가장 먼저 준비해놓았다가. 가장 늦게 만들 것 같다. 시기는 문제가 아니라고. 과정에서 뭔가 묵직한 한 방을 때릴 걸 만들면 된다고 위안 삼지만. "너 이번 학기 논문 써?"라는 진부한 '대학원생들의 인사'는 곤욕이자 한 편의 숨겨놓은 공포다. 이런 곳에서 마음이 피폐해질 친구들을 보노라면, 도시락 싸서 말리고 싶은 데, 그래도 전화가 오면, 웃으면서 이 곳을 오라고 손짓한다. 쉬어가자. 친구들아. 쉬어가자 마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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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09-12-04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돌아보면 저도 29살때 더 우울했던거 같아요.

얼그레이효과 2009-12-04 1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휘모리님 오랜만입니다. '29살의 우울'같은 노래 누가 만들어줬으면 좋겠네요.(인생 선배님들에게는 죄송) '서른즈음에'가서 콜콜한 맥주 한 잔 하고 싶은 날입니다.

무해한모리군 2009-12-04 12:43   좋아요 0 | URL
어 저도 학교다닐댄 거기 자주 다녔는데.
레드생 맛나죠 으흐흐흐

2009-12-04 13: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2-04 14: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롱롱 2009-12-09 0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어 그러고보니, 저도 '서른 즈음에'를 한 번 가본 기억이 있어요. 김광석 노래를 줄창 신청했던 기억이..^^;;

얼그레이효과 2009-12-09 0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매년 수능시험이 되면 저는 솔직히 지각하지 않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하는 수험생들, 그들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두 손 모은 부모들, 선배들을 응원하기 위해 새벽부터 나온 후배들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습니다. 어느새 '무관심'이 되어버린 것 같은 '수능거부 시위'를 하러 온 학생들은 여전히 제 관심 안에 있습니다. 솔직히 말해, 수능이 될 때마다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공감합니다'가 아닌, '또 저런 짓이야?' 가 이제는 더 큰 것 같습니다. "그렇게 피켓 들고 서 있을 시간에, 너희 친구들처럼 글 한자라도 더 보렴"이라는 반응은 올해 수능거부 시위를 벌이는 학생들에게 돌아오는 '당연한 반응'이 된 듯합니다. 

긴 설명 필요없이 학벌중심주의를 비판하기 위해선, 비판자의 학벌이 좋은 측면은 사실 그것을 바라보는 요즘 대중들에겐 한 편의 '성공학'이 될 수 있으리란 생각입니다. 어렸을땐, 이런 상황을 통해 대중들이 "칫, 지는 서울대, 연고대 나와 놓고..남한테는.."이런 생각을 많이 했다고 보는데,,요즘은 "그래 학벌 비판도..좀 유식한 놈, 머리 좋은 놈이 해야지..뽀대 나지 않아?"라는 생각이 더 팽배해진 듯 합니다. 이러한 의식의 확산이 결국 '수능거부시위'에서 '그래서 당장 뭐 바뀐 게 있냐'는 실리주의적 시선이 큰 호응을 얻지요. 그 실리주의는 '생활보수주의'로 바뀝니다. 그냥 입 닫고 공부 열심히해서 부모님 속 썩이지 말라고, 네가 사회 생활 해보면, 네가 지금 그러는 행동 피눈물 날거라고.   그들은 수능을 거부했지만, 세상은 그들의 의사를 거부하려고 하는 비극. 이 비극은 결국 그들의 행동을 매년 다가오는 수능처럼, 그들의 의지를 치부한다는 것이겠지요. 그래서 언론도 아예 그들에게 매년 '올해도..'라는 표현을 서슴치 않습니다. '그들'의 자리는 매년 바뀌지만, 바뀜의 효과는 더 차디찬 냉소라는 반응과의 접촉입니다.

차가운 반응 가운데, 제게 가장 무서운 냉소는 사실 "그 시간에 차라리 책이나 보라"는 반응이 아닙니다. "이러지 말고 차라리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 가서, 그 대학에서 네가 펼치고 싶은 꿈을 펼치라고. 네가 하고싶은 시위의 정당성도..영향력도 그때 커질거야"라는 말들입니다. 그러나, 냉정히 말해서 수능거부 시위를 하는 친구들에게 수능이란 현실을 택해서, 그 수능이란 과정의 최정점의 결과를 통해 그 영향력을 행사해보라라는 게 오늘날 그들의 의지보다, 그들의 프로필에 기입된 '최종학력'을 소비하고픈 대중의 욕망에 더 가까운 게 아닌지 고민해 봅니다..  결국 대중들이 바라는 욕망은, 세상의 모순을 극복해야 한다는 한 개인의 의지와 그 의지를 표출하기 위해 보인 과정들의 발견이 아니라, "정말 공감합니다..글 잘 쓰시네요..역시..개념이시네요.."와 같은 딱 자신의 삶에서 적절한 개입선의 측정일 겁니다. 그러면서 그 공감의 반응들이 만드는 건, 학벌중심주의를 비판하는 이들이 체득한 학벌 자체를 선망함으로써, 끝나버리는.  

이제는 '대안학교'도 교육의 대안이 아닌,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한 대안으로서 낙인이 찍힌 느낌이 든 지 오래입니다. 이 현실이 스며든 '기업화된 가정'의 울타리를 벗어나 '수능 추위'를 극복하고, 한국 사회의 모순도 극복해보려는 수능거부 시위자들의 움직임에 대해 우리 사회가 냉소로 화답하는 것이 관례가 되고 있는 요즘이 안타깝고, 또 안타깝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학력 차별을 점점 바라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래야 이 '수능거부 시위자'들에게라도 실컷 냉소를 퍼부을 수 있는 자기위안의 안전망에 자신을 집어넣고, '대학'에 들어간 나는 "그래도 너보다 나은 것 같다'는 자족감 하나로 이 세상을 살아갈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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