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뮤지컬 <스프링 어웨이크닝>을 보고 오면서 몇 년 적 기억을 떠올렸다. 나는 대학교 교수님의 제안으로 모 청소년 영상제에 심사위원을 맡게 되었는데, 솔직히 말해 고민들이 너무 착했다. 그 많은 심사대상작들을 보면서, 나는 혹시 이 아이들이 너무 영악해져서, '좋은 상'을 받기 위해 이런 '평이한 고민'들을 소재로 삼은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술 문제, 담배 문제, 이성 교제 문제, 그 뻔하디 뻔한 문제 의식들..나는 누군가가 그 시기엔 다 그 문제로 고민하지 않아요? 반문하겠지만, 나는 그건 고민의 게으름이라고 본다. 그래서 새싹들의 파릇파릇함을 응원하기 위한 진부한 위로와 응원의 심사평 대신, 좀 혹독한 매질의 시각을 심어줄 필요가 있겠다 싶었다. 나중에 팜플렛에 실린 내 냉평을 본 내 학교 동창이 "너무 깐 것 아니냐"고 걱정해주었지만, 나는 당시 내 결정을 후회하지 않는다.  

토니상을 몇 개나 받았고, 한국에서도 엄청 좋은 평을 받았다는 것. 내겐 다 그저 그런 문제이다. 내가 문제삼고 싶은 건 이런 류의 고민들이 1980년대 <조찬 클럽>과 별 다를 바 없는 차원이다. 나는 두 가지 측면을 문제삼고 싶다. 진부한 일 단계 지적. 그래. 사회가 '여전히' 변한 것이 없다는 차원이다. 그러면 개인은 좀 위로받을 지 모르겠다. 여전히 변한 것이 없기 때문에, 우린 이 문제에 눈물을 흘릴 이유가 있다는 것. 이 문제에 환호하고, 이 문제에 내재된 억압이란 것들, 성의 문제란 것들, 사춘기의 방황이란 것들. 이런 것에 공감할 권리가 있다고. 근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건 '평이한 위안'의 문제다. 좀 거시적으로 말하자면, 이건 높은 단계의 고민을 막는 우리 사회의 분위기라고 보고 싶다. '적당한 수준'의 성찰. '적당한 수준'의 공감. 그래서 이런 '평이함'을 즐기면서, 이런 '일반성'을 적절히 소비하면서, 그 날 하루를 버티는 것이다. 그래서 개인은 더 많은 정보를 습득하지만, 지성의 성장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예전보다 똑똑해졌다고 하지만, 그것이 지성의 배가라고 생각하진 않은 사람으로서, 나는 <스프링 어웨이크닝>이 던지는 '청춘의 언어'들이 너무나 식상하고 맛이 없었다. 그 언어가 던지는 몇몇의 풍경들은, 우리 시대가 이제는 떨쳐버려야 할 진부함이 아닐까 싶었다. 내가 말하는 진부함은 비단 새로운 소재 찾기에 골몰하라는 촉구가 아니다. 다만 이런 진부한 단계에 갇혀, '비혁신적'인 혁신에 환호하는 그 어떤 수준에 일갈하는 이들이 아무도 없다는 것이 아쉽다.  

나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비혁신적' 혁신의 분위기가 두렵다. 이것은 자신이 정말 성장하고 있다는 거짓된 위안을 심어줄 뿐, 그 실체는 허약하다. 매번 포장되는 '혁신의 가면'을 쓴 언어들이 결국 우리에게 강요하는 건 '평이한 위안' , 적당한 눈물과 적당한 웃음뿐이라면 이 짧은 삶. 너무 우울하지 않은가. 그 틈에서 게으른 미디어들이 다루는 단어들이란 고작 '파격'이란 것일 뿐.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월따 2009-12-09 1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스프링 어웨이크닝 보셨군요. 보희샘 추천을 받았을때도, 저 제목에서 딱 풍기는 뭔가 상투적인 그것 때문에 약간 긴가민가하긴 했었죠; (아 저는 ㅂㅎㅈ임다 ㅋ)

얼그레이효과 2009-12-13 1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컨디숀이 안 좋을 때 봐서..다시 봐야할 것 같기도 하구요.+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