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언 크로즈 - 배들의 무덤, 치타공의 철까마귀
김예신 글.그림, 박봉남 원작 / 서해문집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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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한국 최초로 암스테르담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중편부문 대상 수상작인 <Iron Crows(철까마귀)>를 그래픽노블로 각색한 작품이다. 최근 이렇게 다큐나 애니 등으로 제작된 작품들이 그래픽노블로 다시 나오는 경우가 많다. 반가운 일이다. 영상은 흘러가면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지만 책은 보고 싶은 장면이나 문장을 오랫동안 들여다볼 수 있다. 어떻게 보면 독자의 참여가 필요하다. 하지만 이 그래픽노블을 읽으면서 그림보다 사진 한 장에 더 강한 인상을 받았다. 그보다 더한 것은 책 속에 담긴 이야기와 가슴 아픈 사연들이다.

 

치타공. 처음에는 이 단어가 지명을 가리킨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방글라데시의 바닷가란 것도 전혀 몰랐다. 직업의 한 종류로 착각했다. 하지만 이곳은 1965년 강력한 사이클론이 한 선박을 해안에 좌초시키면서 전 세계 선박해체산업의 중심지로 발돋움한다. 하루 일당 1 달러의 저임금 노동에 의존하는 재활용 산업이다. 여기에 철광석이 전혀 매장되어 있지 않은 방글라데시의 철강 산업이 의존하고 있고, 거대한 선박에서 나온 수많은 폐기물들은 입찰을 거친 후 재활용업자들에게 팔려나간다. 가난이 만들어낸 완벽한 재활용이란 표현이 딱 맞다.

 

선박 해체 작업은 아주 위험하다. 제대로 갖추어진 장비도 없고, 안전장치도 허술하다. 절단공의 작업은 조금만 방심을 해도 불의 위협에 빠질 수 있다. 절단 후 떨어지는 철근에 깔리거나, 자른 철을 올기는 과정에서 끊어진 철끈에 어떤 사고가 날지 모른다. 이 다큐멘터리 촬영 중에서 최소 두 번의 큰 사고 위험이 있었다. 한 번은 조종사의 순발력 덕을 본 것이고, 다른 한 번은 운이 좋았다 라고 밖에 할 수 없다. 이 운이라는 것이 언제나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치타공의 해변은 언제나 괴담처럼 사고에 대한 소문들이 떠돌아다닌다. 화재로 인해 일곱 명이 죽었다는 것 같은.

 

결코 좋은 소문이 나지 않는 이 치타공의 해체 공장으로 들어가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다. 인맥과 인맥을 통해 그들은 공장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그들의 노동 현장을 찍고, 해체 과정을 들여다본다. 이들은 대부분 북부의 못사는 지역에서 왔다. 러픽이 치타공을 ‘외국’이라고 부른다. 외국에 돈 벌러 가는 것과 똑같다는 의미에서 하는 말이다. 열한 살 소년이 이곳이 좋다고 할 때, 겨우 1달러 옷을 산 것에 너무 많은 돈을 쓴 것이 아니냐고 할 때 이들의 빈곤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하다. 가난과 굶주림보다는 이 힘든 노동이 오히려 낫다.

 

어린 노동자들 고용에 대한 여러 NGO 단체 등의 문제 제기는 원론적으로 옳다. 하지만 먹고 살기 위해 반드시 이 선박해체소에서 노동을 해야만 하는 게 현실인 방글라데시에서는 이 원론이 옳지 않다. 선박해체산업이 완벽한 재활용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그린피스 등의 반대는 무력해진다. 가끔 나 자신도 이런 원론적 올바름에 매몰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삶도 죽음도 그저 묵묵히 받아들이는 사람들’이란 표현에서 이 노동자들의 노동이 주는 의미가 갑자기 무게를 더한다. 무거운 와이어를 어깨에 지고 바다가 걸어오는 이들의 사진이 얼마나 강렬했던가.

 

가난은 슬프다. 그러나 아무리 척박한 곳이라도 버티고 살아가야 한다. 하나의 희망을 조용히 가슴에 품고 말이다. “하지만 내 자식은 달라. 내 자식의 운명은 다를 거야. 내가 반드시 그렇게 만들 거야.” 같은 희망이다. 우리의 부모 세대가 늘 말하는 바이기도 하다. 감독이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으로 그들의 육체를 말한다. 노동으로 단련된 탄탄한 근육, 어깨에 깊게 팬 상처들, 검게 이글거리는 피부, 경이로운 육체라고. 그리고 이 육체야 말로 한 시대를 만들어냈던 빛나는 노동이었고, 이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아쉽게도 그래픽노블에서 이 육체는 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읽으면서 몇 번이나 가슴을 뒤흔드는 사연을 만났고, 울컥했다. 이 다큐가 나온 지 거의 10년이 되었는데 치타공은 어떻게 변했을까? 많은 상념들이 머릿속을 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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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남극 탐험기
김근우 지음 / 나무옆의자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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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이름과 남극 탐험에 혹해서 선택했다. 조금 무거운 내용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는데 실제는 조금 가볍다. 무게 잡고 남극 탐험의 혹독함을 다룬다기보다 두 남자의 삶과 운명을 경쾌하게 풀어낸다. 남극 탐험의 혹독함을 생각한 것은 펭귄 고기 때문인데 나의 착각과 얼마 전 읽는 생존기도 한몫했다. 이런 몇 가지 이미지를 가지고 읽기 시작했는데 머릿속으로 언제 떠나는거야? 하는 의문이 계속 생겼다. 소설 중반까지 그들이 살아온 삶을 교차하면서 보여줬기에 이 의문은 더 강했다.

 

소설은 두 개의 교차 서술로 진행된다. 하나는 화자인 나와 현재의 섀클턴 박사고, 다른 하나는 나와 섀클턴 박사가 뭉친 후 100년 전 섀클턴 경의 이야기다. 이 두 개의 교차 서술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그리고 그 사이를 조용히 비현실적 존재가 비집고 들어온다. 첫 번째는 말하는 곰이고, 두 번째는 하늘을 나는 펭귄이다. 이보다 더 비현실적 일은 아마도 아마추어 두 사람이 제대로 된 준비도 없이 탐극 탐험을 떠난 일일 것이다. 아무리 현대 장비가 좋아졌다고 해도 단 두 사람이 스노모빌을 타고 다니기에는 남극은 너무 크고 거대하고 위험한 곳이다.

 

섀클턴 박사는 생후 2달 만에 시력을 잃었다. 영국 귀족 가문에서 자란 덕분에 교육도 받았지만 그가 살던 시기는 장애인을 제대로 대우하지 않았다. 여기다 귀족이 평민들이 다니는 학교에 왔으니 좋아할 리도 없다. 이 때문에 문제가 생기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은 섀클턴은 이것을 극복해낸다. 소설 중반까지 섀클턴 박사의 이야기는 나의 이야기와 교차하는데 둘의 삶의 궤적이 너무나도 다르다. 나의 삶이 결코 평범을 넘어서지 못했기 때문이다. 삼류지방대학 경제학과에 입학했지만 수학도 못하고, 학점 잘 주는 국문과 수업에 들어갔다가 국문과 운동경기의 용병으로 활약하는 정도 뿐이다. 중학교 때까지 야구 선수를 했고, 이때 닦은 실력으로 특출한 위력을 발휘했다.

 

섀클턴 박사가 케인즈주의자가 되어 신자유주의 경제를 반대할 때 ‘나’는 아직 학생이었다. 이 둘의 첫 만남은 그가 뛴 마지막 경기였다. 이 만남을 그 당시는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나는 의경으로 군복무한 후 자신이 잘 할 수 있을 것 같았던 체육교육학과에 입학하지만 임용고시에 떨어진다. 그런데 그냥 쓰고 싶었던 글을, 돈이 필요해서 보낸 소설이 문학상을 받는다. 작가의 탄생이지만 자신만의 스타일이 무너지면서 추락한다. 그 후 삶은 우리의 청춘들과 비슷하다. 이런 때 섀클턴 박사를 만난다. 박사가 한국에 오게 된 사연도 조금 억지고, 교수직을 던지고 한국에 머문 것은 더 억지지만 넘어가자. 이 만남 후 진짜 남극 모험을 하게 된다.

 

남극 모험 이야기는 한 편의 판타지다. 앞에서 말한 말하는 곰과 하늘을 나는 펭귄이 등장하면서 이것을 더욱 분명하게 한다. 그들이 겪게 되는 모험이 비현실적이기 때문이다. 아니 이 소설 전체가 판타지다. 100년 전 섀클턴 경이 등장하는 그 순간부터 말이다. 하지만 그 속에 담긴 이야기들은 현실을 아주 잘 반영하고 있다. 삼류대학 교수가 내뱉는 말에서 지독한 현실의 처절함이 그대로 묻어나고, 계속 흥행작을 써내지 못하는 작가는 매일 밥벌이를 걱정해야 한다. ‘나’의 이 현실은 어쩌면 작가가 절실하게 경험한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박사의 경험도 역시 마찬가지다. 물론 박사처럼 귀족은 아니었다.

 

생각한 것보다 빠르게 읽지 못했지만 예상한 것보다 몰입해서 금방 끝냈다. 가볍게 풀어내는 이야기 속에 자신의 생각을 적절하게 녹여내어 작가의 생각을 잠시 들여다볼 수도 있었다. 기본적으로 이야기를 만들고 엮는데 뛰어난 능력이 있는 작가이다 보니 읽는 내내 즐거웠다. 어둡지 않고 유쾌한 이야기와 돌출적인 존재들이 적절하게 어울려 큰 이질감을 느끼지 못했다. 아마 그의 판타지 소설을 읽었던 이력 덕분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발전하지 못한 것은 아쉽다. 그래도 변함없이 그의 새로운 작품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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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코리아 - 파란 눈의 미식가, 진짜 한국을 맛보다 처음 맞춤 여행
그레이엄 홀리데이 지음, 이현숙 옮김 / 처음북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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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을 선택한 이유는 간단하다. 전작 <맛있는 베트남>을 재밌게 읽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고 베트남 음식에 대한 이해가 조금 더 깊어졌다. 거리에서 항상 만나는 베트남 음식점과 베트남 출장을 다녀온 직원들의 이야기와 조금 다른 혹은 많이 다른 이야기였다. 가끔 베트남 쌀국수를 먹으로 가면 호치민 맛집을 예찬하는 말을 듣곤 했다. 이 경험들과 결합해서 그 책은 아주 흥미로웠고, 저자가 주목한 길거리 음식과 음식들에 대한 평가는 이전에 고정되어 있던 선입견을 단번에 깨트려주었다. 그래서 이번 책에서 그가 보고 맛 본 한국 음식은 어떤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20년 전 저자는 전북 익산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그때 맛보고 경험했던 강렬함을 기억하기에 한국으로 음식여행을 다시 온 것이다. <맛있는 베트남>과 다른 기획이다. 솔직히 내가 기대한 것은 전작과 같은 방식이었다. 그의 맛 여행은 서울에서 시작해 시계 방향으로 돌아 다시 서울에서 끝난다. 얼마나 긴 시간인지는 모르지만 버스와 기차로 이동하면서 현지 식당에 가서 그 음식을 맛보고 음식점 주인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리고 식당의 모습을 설명한다. 그는 이 과정을 비교적 상세하게 이야기한다. 실제는 더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갔겠지만 자신의 의도한 바를 계속해서 보여준다. 그것은 한국 음식이다.

 

한국 음식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김치와 된장이다. 그가 원하는 것은 이런 간단한 대답보다 정의다. “한국 음식을 한국 음식으로 만드는 핵심 요소는 음식의 재료예요. 오로지 한국에서만 나는 재료나 또는 한국에서 생산했을 때 최고의 맛을 내는 재료로 만든 음식이 한국 음식이죠.”이라는 황교익의 정의가 가장 명확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김치의 재료와 수입을 말한다. 이 간단한 정의와 문제 제기는 많은 논란을 불러올 수 있다. 김치의 정의와 한국 음식이라는 정의가 충돌한다. 된장도 마찬가지다. 수입 콩으로 메주와 된장과 간장을 만드는 현실을 생각하면 한국 음식은 한국에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나물무침에 들어가는 참기름도 수입 깨다. 새롭게 정의를 내리거나 무너지고 있는 한국 음식의 현실을 인정해야 할 부분이다.

 

그가 여행 다니면서 먹은 식당 중 가본 곳은 몇 곳 되지 않는다. 실제 그의 맛 여행은 아주 한정적이다. 너무 많은 지역을 다녔기에, 몇 사람의 이야기에 너무 집중했기에 피상적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 때문에 우리가 가지는 음식에 대한 선입견이나 잘못된 이해를 만날 수 있다. 외국인이란 필터를 통해 우리에게 전달되는 한국 음식에 대한 이미지들이다. 그리고 전라도를 여행하면서 여수와 순천을 뺐다는 부분에서 전라남도 음식을 제대로 맛보지 못했음을 알게 된다. 담양에서 맛 본 것으로 충분했던 것일까? 경남에서 진주가 들어가고 통영이 빠진 것은 의외다. 전주에서 비빔밥의 만들어진 이야기를 그대로 믿고 있는 부분에서는 아쉬움이 들었다. 반면에 새로운 전주 음식점을 알게 되어 반가웠다.

 

종로의 한 퓨전음식에서 시작하여 포장마차 산낙지로 끝나는 음식 여행은 즐겁고 신났다. 아는 식당이 나오면 ‘그곳에 갔군’ 하는 마음이 들고, 가끔은 왜 거기는 가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생겼다. 그리고 그가 먹은 음식들을 보면서 결코 쉽지 않은 도전이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내 경우에는 별로 어려움이 없는 것들이지만 호불호가 강한 한국인들에게도 어려운 음식들이 곳곳에 나오기 때문이다. 그가 잘못 주문해서 먹은 내장탕 에피소드는 누구나 여행에서 한번쯤은 경험하는 일이다. 홍어에 대한 강한 거부감은 주변에서 늘 보는 것이라 특별하지 않지만 특별한 에피소드를 일반적인 것으로 말하는 것은 조금 주의할 필요가 있다.

 

빠르게, 너무나도 빠르게 변하는 한국의 모습은 나에게도 낯설다. 그가 익산에서 경험한 급속한 변화는 결코 그곳만의 특정한 현상이 아니다. 이 변화를 그는 아주 날카롭게 지적한다. 음식에 대한 애정에서 시작한 여행이 여러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 사회문제 인식으로 발전한 것이다. 하지만 현재를 살고 있는 사람들은 그 변화를 잘 느끼지 못한다. 그 변화에 빠르게 적응하느라 바쁘기 때문이다. 다만 잠시 멈춰 뒤돌아보았을 때 그 급속한 변화를 느낄 수 있다. 이 책은 나에게 지난 시간을 돌아보게 만들었다. 나 같은 노땅들이 모여 이야기하다 잠시 빠지는 옛이야기처럼.

 

사실 전라도 여행을 거의 해본 적 없어 아주 피상적이다. 아주 좋았던 곳도 있지만 서울의 음식보다 특별히 좋았다고 느끼지 못한 경우가 태반이다. 식재료에서 차이가 나는 경우는 제외하면 더욱 그렇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내가 맛있는 서울 식당을 운 좋게 여러 곳을 다녀왔기 때문이거나 미각이 둔해서 일 것이다. 한때 열심히 다녔던 평양면옥에서 저자가 냉면을 먹는 방식을 보면서 의아함을 느꼈다. 식초와 겨자를 넣고 맛보았기 때문이다. 극찬이 나왔는데 몇 번을 읽어봐도 맛 포인트가 조금 이상하다. 그리고 그가 이 음식을 지금까지 맛보지 않았다고 했을 때 나는 그 질문의 답을 알고 있었다. 그가 살던 곳에서는 이 음식이 전혀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간단한 질문 속에 문화와 경험과 유행이 다 들어 있다.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던 한국 음식의 변화와 사라지는 음식점들 이야기가 한 이방인의 글로 나에게 다가왔다는 사실이 조금은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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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녀 - 전혜린, 그리고 읽고 쓰는 여자들을 위한 변호
김용언 지음 / 반비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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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녀를 사전에서 찾으니 “문학을 좋아하고 문학 작품의 창작에 뜻이 있는 소녀. 또는 문학적 분위기를 좋아하는 낭만적인 소녀.”라는 정의가 보인다. 이 정의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던 것이다. 그런데 저자는 이 정의에 의문을 제기하고, 기존의 인식을 반박한다. 미문 취향, 낭만적 감수성, 서구 동경, 소녀 감성 등으로 폄하받은 수많은 여성 작가들과 기존의 남성 작가들이 어떻게 차별받았는지도 같이 다룬다. 읽으면서 내가 가지고 있던 인식의 한계를 느꼈고, 현재는 전혀 구분하지 않는 성별에 의한 작품 성향도 같이 생각하게 되었다.

 

문학소녀에 대한 논의의 시작은 전혜린으로 잡았다. 내가 알고 있는 전혜린은 사실 거의 없다. 집에 찾아보면 예전에 사놓은 그녀의 에세이가 있을지 모르지만 제대로 읽은 적은 없다. 전혜린이란 이름을 알게 된 것도 다른 작가의 글을 통해서다. 그녀가 번역한 소설도 나의 시대에는 맞지 않다. 당연히 읽은 기억이 없다. 아주 피상적이지만 그 이름은 잘 알고 있는 인물이 바로 전혜린이다. 너무 많이 들었기에 그녀에 대한 관심이 있었고, 그녀를 통해 문학소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이란 생각에 선택했다. 좀더 쉽고 가볍게 읽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 예상은 상당히 많이 틀어졌다.

 

이 책의 앞부분은 전혜린을 분석하고 이해하는 과정을 다루었다. 그녀가 어떤 환경에서 자랐는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인상적으로 보여준다. 놀라운 친일이력을 가진 아버지의 귀여움을 독차지한 그녀가 독일에서 어려운 생활을 했다고 했을 때 왜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를 도와주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너무 유명한 이야기라 생략된 것일까? 아니면 내가 놓친 것일까? 독일 유학시절 빈곤하게 산 그녀가 생계를 위해 선택한 것이 번역이다. 나중에 귀국해서 문학전집 등을 편집할 때 지금은 너무나도 유명한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과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 같은 작품을 넣었다고 할 때는 그 안목에 놀랐다. 지금도 검색하면 그녀가 번역한 책들이 출간되고 있다.

 

전혜린으로 시작한 이야기는 각 시대 속에서 여성작가들이 어떤 평가를 받았는지로 이어진다. 남성작가와 같은 내용이지만 다른 평가는 그냥 보기에도 편견으로 가득하다. 이름을 여자로 착각한 후에 쓴 평론 해프닝은 짧은 에피소드지만 아주 분명하게 문학소녀에 대한 남성의 편견을 보여준다. 이것이 단순히 남자들만의 것이 아니라고 할 때 그 시대의 분위기를 읽을 수 있다. 하나의 이데올로기로써 소녀란 단어가 통용되고 ‘10대라는 특정 시기를 거치는 주체가 아니라 여성-어머니가 되는 직전 단계로 간주’되었다. 저자의 이런 지적은 기존 학자들의 연구 결과이지만 전혜린과 결합하면서 그 의미가 더 분명해졌다.

 

잘 몰랐던 사실 중 하나가 전혜린의 에세이를 둘러싼 사실과 에피소드다. 그녀의 사후에 지인들이 글을 모아 출간했다는 것과 당시 최고의 인기 문인인 이어령을 학생 김화영이 찾아가 서문을 부탁했다는 것이다. 단 한 편의 소설도 출간한 적이 없다는 사실과 루이제 린저 같은 소설을 쓰고 싶어했다는 사실도 흥미로웠다. 그리고 이 사실들이 그녀를 공격하는 무기가 되었다. 그래서 창작물을 내지 못했다는 사실 혹은 그녀의 수필이나 일기나 편지가 지나치게 감상적이고 소녀적이란 부분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그녀가 쓴 수필과 번역한 작품들이 한국문학계 혹은 동시대 청춘들의 정신세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보자고 말한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고 이윤기 작가가 떠올랐다. 그가 번역한 작품들이 얼마나 많은 한국작가와 독자에게 영향을 미쳤던가.

 

실제 책을 읽다보면 전혜린에게 영향을 받은 수많은 작가들을 만나게 된다. 전경린도 그랬다고 했을 때는 조금 놀라기도 했다. 실제 그녀가 가진 한계도 분명하다. 이 부분을 저자가 무시하지 않는다. 그녀의 고민 혹은 허세도 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작품을 선택하고 번역하는 작업에 관해서는 결코 폄하할 수 없다. 아직까지 그녀의 번역본이 나오고 있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저자의 마지막 문장은 의미심장하다. “문학소녀. 나도, 당신도 전혜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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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일기 - 아직은 아무 것도 아닌 나
김그래 글.그림 / 레진코믹스(레진엔터테인먼트)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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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라는 이름만 보면 자연스럽게 <미생>의 장그래가 떠오른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장그래처럼 대기업의 인턴사원이 아니다. 미대를 졸업하고 자신의 작업실을 가진 만화가다. 이 책은 그가 일상을 그린 것을 모아 내놓은 두 번째 책이다. 페이스북에 잠깐 들어가보니 지금도 연재하고 있다. 처음에 생각한 것보다 나이가 더 어려서 잠시 혼란스러웠다. 이 혼란을 뒤로 하고 그래의 이야기로 들어가면 나의 젊은 시절 모습도 잠깐 잠깐 보인다. 이 모습보다 더 공감하는 것은 그녀의 일상이고 감상이고 물음들이다.

 

책을 펴고 목차를 보았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왜 사계절로 장을 나누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이렇게 세 장으로 나누었다. 봄이 점점 짧아지고 있다고 하지만 가을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하기에 이 구분이 살짝 궁금했다. 예상한대로 점점 사라지고 있는 봄 때문에 이 둘을 묶은 것 같았다. 그리고 한 장 가득 그려진 그래의 일기를 조심스럽게 읽기 시작했다. 처음 읽은 거룩한 취미에서 학창 시절 억지로 했던 계획 세우기를 만났다. 지금도 계획이라면 아주 싫어하는 나이기에 이 취미는 낯설었다. 물론 그 계획을 가볍게 넘어가는 모습은 딱 나의 모습과 겹쳐지지만.

 

그래는 스마트폰을 끼고 산다. 고장 났을 때 에피소드는 왜 다른 폰을 구해서 사용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먼저 들었다. 이 부분만 놓고 보면 중독은 내가 더 심한 것 같다. 집에서 시간나면 이북을 열심히 보던 나를 생각하면 더더욱. 이제 20대인 그래가 나이듦을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서 처음에는 그녀의 나이를 착각했다. 나중에 알고 난 후에 살짝 웃게 되었다. 겨우 그 나이에, 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나도 학창시절 20대에 1~2년 후배들에게 얼마나 나이가 든 척, 잘난 척 한 적이 여러 번 있기에 조금은 공감한다. 뭐 지나고 나면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일들인데 말이다.

 

사실을 말하면 이 책 속에 기발한 상상력이 샘솟듯이 나오지는 않는다. 아주 의외의 에피소드들이 나와 웃음을 자극하지도 않는다. 읽다 보면 이름처럼 ‘그래 그래’라고 고개를 끄덕이는 공감대가 조금씩 형성될 뿐이다. 그래의 고민이 당사자에게는 엄청 어렵고 힘든 것이겠지만 그 시기를 지나왔고 다른 고민을 하고 있는 나에게는 하나의 통과의례처럼 보인다. 아마 이 일기를 읽고 더 많이 공감할 수 있는 연령대는 20대이거나 방금 20대를 지난 30대 초반일 것이다. 같은 미대생이라면 조금 더 많이 공감할 것이다. 나 같은 중늙은이도 적지 않게 공감하는 부분이 있으니까.

 

이 일기에 나오는 에피소드 중 꽤 많은 것들은 게시판에서 본 것들과 비슷하다. 이 말은 만화가가 게시판에서 본 것을 그림으로 그렸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이와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의미다. 나 혼자만의 고민이고 고통이라고 생각한 것이 나중에 알고 보니 누군가 겪었던 일이란 것을 알게 된 순간이 떠올랐다. 미대생의 졸전에 대한 이야기는 팟캐스트를 통해 이미 너무 들었기에 오히려 친숙하다. 엄마들이 자식들에게 하는 말 중에 ‘나중에 너 같은 아들 혹은 딸을 낳아서 키워봐라’라는 말처럼 자신을 돌아보고 놀라는 말은 없을 것이다. 가끔은 나만큼만 자라준다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내일의 나’ 이야기는 현재의 내 이야기이기도 하다. 지금 할 것을 잠시 미루었다가 내일로 넘어가고, 이것이 또 뒤로 밀리는 일이 최근에, 아니 이전부터 자주 있었다. 귀차니즘, 졸림, 먼저 놀고 같은 뻔한 이유는 식상할 정도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다. 매월 일정한 급여가 나오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 주는 삶의 무거움도 엿보이고, 친구와 간 일본 여행의 작은 이벤트들은 마음이 잘 맞아 보기 좋았다. 처음에는 그래의 성별을 몰라 남자라고 착각했던 일도 있다. 옆으로 누운 얼굴 표정을 보고 어색하게 느낀 순간도 있다. 이런 장면들과 감상이 차분하게 마음속으로 들어온다. 일상의 순간을 이렇게 멋지게 남길 수 있다는 것이 부럽다. 아무 것도 아닌 나라고 말하지만 이미 많은 것을 해놓았다. 어른의 세계로 들어온 그래가 지금처럼 일상의 작은 일들을 계속 그려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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