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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녀 - 전혜린, 그리고 읽고 쓰는 여자들을 위한 변호
김용언 지음 / 반비 / 2017년 6월
평점 :
문학소녀를 사전에서 찾으니 “문학을 좋아하고 문학 작품의 창작에 뜻이 있는 소녀. 또는 문학적 분위기를 좋아하는 낭만적인 소녀.”라는 정의가 보인다. 이 정의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던 것이다. 그런데 저자는 이 정의에 의문을 제기하고, 기존의 인식을 반박한다. 미문 취향, 낭만적 감수성, 서구 동경, 소녀 감성 등으로 폄하받은 수많은 여성 작가들과 기존의 남성 작가들이 어떻게 차별받았는지도 같이 다룬다. 읽으면서 내가 가지고 있던 인식의 한계를 느꼈고, 현재는 전혀 구분하지 않는 성별에 의한 작품 성향도 같이 생각하게 되었다.
문학소녀에 대한 논의의 시작은 전혜린으로 잡았다. 내가 알고 있는 전혜린은 사실 거의 없다. 집에 찾아보면 예전에 사놓은 그녀의 에세이가 있을지 모르지만 제대로 읽은 적은 없다. 전혜린이란 이름을 알게 된 것도 다른 작가의 글을 통해서다. 그녀가 번역한 소설도 나의 시대에는 맞지 않다. 당연히 읽은 기억이 없다. 아주 피상적이지만 그 이름은 잘 알고 있는 인물이 바로 전혜린이다. 너무 많이 들었기에 그녀에 대한 관심이 있었고, 그녀를 통해 문학소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이란 생각에 선택했다. 좀더 쉽고 가볍게 읽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 예상은 상당히 많이 틀어졌다.
이 책의 앞부분은 전혜린을 분석하고 이해하는 과정을 다루었다. 그녀가 어떤 환경에서 자랐는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인상적으로 보여준다. 놀라운 친일이력을 가진 아버지의 귀여움을 독차지한 그녀가 독일에서 어려운 생활을 했다고 했을 때 왜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를 도와주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너무 유명한 이야기라 생략된 것일까? 아니면 내가 놓친 것일까? 독일 유학시절 빈곤하게 산 그녀가 생계를 위해 선택한 것이 번역이다. 나중에 귀국해서 문학전집 등을 편집할 때 지금은 너무나도 유명한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과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 같은 작품을 넣었다고 할 때는 그 안목에 놀랐다. 지금도 검색하면 그녀가 번역한 책들이 출간되고 있다.
전혜린으로 시작한 이야기는 각 시대 속에서 여성작가들이 어떤 평가를 받았는지로 이어진다. 남성작가와 같은 내용이지만 다른 평가는 그냥 보기에도 편견으로 가득하다. 이름을 여자로 착각한 후에 쓴 평론 해프닝은 짧은 에피소드지만 아주 분명하게 문학소녀에 대한 남성의 편견을 보여준다. 이것이 단순히 남자들만의 것이 아니라고 할 때 그 시대의 분위기를 읽을 수 있다. 하나의 이데올로기로써 소녀란 단어가 통용되고 ‘10대라는 특정 시기를 거치는 주체가 아니라 여성-어머니가 되는 직전 단계로 간주’되었다. 저자의 이런 지적은 기존 학자들의 연구 결과이지만 전혜린과 결합하면서 그 의미가 더 분명해졌다.
잘 몰랐던 사실 중 하나가 전혜린의 에세이를 둘러싼 사실과 에피소드다. 그녀의 사후에 지인들이 글을 모아 출간했다는 것과 당시 최고의 인기 문인인 이어령을 학생 김화영이 찾아가 서문을 부탁했다는 것이다. 단 한 편의 소설도 출간한 적이 없다는 사실과 루이제 린저 같은 소설을 쓰고 싶어했다는 사실도 흥미로웠다. 그리고 이 사실들이 그녀를 공격하는 무기가 되었다. 그래서 창작물을 내지 못했다는 사실 혹은 그녀의 수필이나 일기나 편지가 지나치게 감상적이고 소녀적이란 부분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그녀가 쓴 수필과 번역한 작품들이 한국문학계 혹은 동시대 청춘들의 정신세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보자고 말한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고 이윤기 작가가 떠올랐다. 그가 번역한 작품들이 얼마나 많은 한국작가와 독자에게 영향을 미쳤던가.
실제 책을 읽다보면 전혜린에게 영향을 받은 수많은 작가들을 만나게 된다. 전경린도 그랬다고 했을 때는 조금 놀라기도 했다. 실제 그녀가 가진 한계도 분명하다. 이 부분을 저자가 무시하지 않는다. 그녀의 고민 혹은 허세도 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작품을 선택하고 번역하는 작업에 관해서는 결코 폄하할 수 없다. 아직까지 그녀의 번역본이 나오고 있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저자의 마지막 문장은 의미심장하다. “문학소녀. 나도, 당신도 전혜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