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혼자가 되다
이자벨 오티시에르 지음, 서준환 옮김 / 자음과모음 / 2017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가독성이 생각보다 좋다. 제목과 책 소개를 통해 예상한 장면들보다 조금 약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놀라운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아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 유명한 윌리엄 디포의 <로빈슨 크루스>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고 할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로 이 책의 가치는 후반부에 있다고 생각한다. 정말 혼자가 된 후 일어난 일들이 다시 인간사회로 왔을 때 벌어진 일들과 겹쳐지고 다시 돌이켜보게 만든다. 그래서인지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 이야기 속에서 전반부는 관찰자였고, 후반부는 저절로 감정이입이 조금씩 되었다.

 

소설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저편과 이곳이다. ‘저편에서’는 루이스와 뤼도비크가 남미 대륙의 끝인 파타고니아와 혼 곶 사이의 무인도에 갇히면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다룬다. ‘이곳에서’는 루이스가 구조된 후 그녀를 둘러싼 기자의 시선과 살아남은 그녀의 고뇌와 혼돈을 차분하게 보여준다. 개인적으로 더 흥미로웠던 것은 역시 살아남은 후의 이야기다. 예전 같으면 살아남기 위한 과정에 더 집중했을지 모르지만 이미 많은 책이나 영화 등을 통해 이와 비슷한 설정을 보았기에 갑자기 혼자가 된 그녀가 느끼는 감정들에 더 관심이 갔다. 실제 이야기의 분량만 놓고 본다면 ‘저편에서’가 훨씬 많다.

 

‘저편에서’의 장을 보면 이 커플은 모험심 강한 평범한 사람들이다. 자신들의 모험과 경험을 남들에게 자랑할 정도의 목적으로 이 섬에 왔다. 기후 상황 등을 봤을 때 몇 번 돌아갈 기회가 있었지만 뤼도비크의 고집과 원시적인 아름다움에 취해 그 시기를 놓치고 말았다. 그리고 그들이 이 섬에 상륙한 것도 사실은 불법이다. 불법과 안이한 몇 가지 상황 때문에 갑자기 몰아친 폭풍에 그들이 타고 온 배가 사라진 것이다. 가까운 섬이라도 있다면 유일한 동력선인 모터보트를 타고 갔겠지만 사방 어디에도 없다. 그들은 완전히 고립되었다.

 

재미난 점은 그들이 고립된 섬이 이전에는 활발한 경제활동이 있었던 섬이란 것이다. 고래, 강치 등을 잡아 기름을 짜고, 가죽을 만드는 등의 호황 속에서 발전했던 섬이다. 그 흔적이 섬 곳곳에 남아 있다. 그들이 머문 집도 그 당시에 지어진 집이다. 물론 방치된 세월만큼 많이 파손되었지만 비바람을 피할 정도는 되었다. 하지만 먹는 문제가 남는다. 물은 섬에서 구할 수 있지만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니 다른 음식이 전혀 없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펭귄을 잡아먹는 것이다. 상당한 양의 펭귄을 잡지만 보관 실패, 요리 기술 부족 등으로 음식이 부족하다. 강치를 잡기 위한 장면을 보면 평범한 성인 남녀가 이런 사냥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서툰지, 위험한지 잘 보여준다.

 

생존을 위해 이 두 남녀가 펼치는 행동은 아주 원시적이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이전에 섬에 살던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도구가 있다. 불을 피우는 라이터도 있다. 이런 도구는 고립된 곳에 사람이 떨어져나갔을 때 아주 유익한 도구가 된다. 그렇다고 해도 문명 속에서 안락한 삶을 누린 사람들에게 사냥과 재료 손질과 음식 보관 등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극지탐험가들이 쓴 수기에 나오는 간단한 문장 하나 뒤에 숨겨진 힘겨움을 깨닫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리고 둘의 갈등은 생각과 경험의 차이에서 비롯해 점점 자란다. 그래도 이 연인은 혼자 된다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생존을 위해 둘은 협력한다.

 

‘이곳에서’는 극지에서 생존한 현대판 로빈슨 크루소라는 이미지로 루이스가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 그녀를 심층취재하려는 기자가 있고, 그녀를 매니저하는 사람도 나온다. 하지만 가장 중심에 있는 인물은 루이스다. 혼자 살아남았다는 것에 혼란을 겪고 있다. 엄청난 죄책감이 시달리는 낌새도 크게 보이지 않는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 그녀가 보여준 몇 가지 행동은 도덕적으로 지탄을 받을지 모르지만 한 개인의 생존을 생각하면 충분히 수긍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극한 생존 경험이 주는 정신과 의지의 공백은 때로는 일상의 평범함처럼 보인다. 그래서인지 일상으로 돌아오는 과정은 오히려 더 힘겹다. 연인의 부모에게 전화하는 것도 몇 번이나 망설이다 하게 되고, 갑자기 찾아온 죄책감에 휩싸인다. 삶의 의지조차 없는 것처럼 보인다. 사람들을 떠난 그녀가 일상을 벗어나면서 자신을 다시 되돌아보고,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을 경험한다. 개인적으로 이 과정이 시선을 끈다. 조금씩 감정이입하게 된다. 새로운 삶을 살길 바라면서 그녀를 응원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블라인드 코너 방의강 시리즈
방진호 지음 / 새파란상상(파란미디어) / 2017년 2월
평점 :
품절


호쾌한 액션물이다. 거침없이 질주하는 주인공에 초점을 맞추었다. 무협의 현대물 버전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이야기의 기본은 복수다. 아내를 죽인 자를 찾아서 복수한다는 줄거리인데 그 과정이 아주 단순하다. 물론 이 단순함에 복선을 깔고, 반전을 집어넣어 살짝 다른 느낌을 준다. 개인적으로 이 마지막 부분이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다. 빠르고 신나게 읽히는 부분에서 문제점이 많이 나오지만 장르의 특성상 그냥 넘어가야 할 부분이 많다. 그렇지 않으면 외국의 킬러물처럼 아주 꼼꼼하고 치밀한 조사가 있어야 한다. 한국 장르 특성 상 이런 경우는 흔하지 않다.

 

평온한 일상의 풍경으로 시작한다. 정체를 숨긴 전설적인 킬러는 자기 집에 머무는 고양이와 눈싸움을 한다. 이것을 본 아내가 한심한 듯 말한다. 아내가 밖으로 나간 후 자동차 사고 소리가 들린다. 아내가 차에 치인 것이다. 병원에 아내를 데리고 간다. 목숨이 위태롭다. 다행히 급한 것은 중단된 것 같은데 집에 설치한 CCTV를 확인하러 간 사이에 누군가가 아내를 죽이려고 한다. 이 장면을 본 그는 폭발한다. 범인을 잡고 그 윗단계를 하나씩 찾아올라간다. 그는 이 과정에서 결코 알고 싶지 않은 사실을 알게 된다. 바로 아내의 불륜이다.

 

사람을 죽여 모은 돈을 숨겨놓고 평범한 일상을 산다. 아내는 이 일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다. 그런데 누군가가 그녀를 죽였다. 처음 든 생각은 그에 대한 복수였다. 그런데 아니다. 우연한 사고일까? 그렇다면 그의 집에 들어와 CCTV를 들고 간 사람은 왜 그런 것인가? 아내를 죽이려고 한 인물의 배후는 또 누군가? 이런 의문은 아내가 죽었다는 말에 그냥 사라진다. 이성은 사라지고, 폭발할 듯한 복수의 감정만 남아 불탄다. 첫 조사에서 마주한 배후의 일원에게서 가져온 핸드폰 자료와 함께 아내의 불륜도 드러난다. 하지만 이 불륜이 그의 복수심을 사라지게 만들지는 못한다.

 

그 다음은 복수를 위해 움직이는 그와 그를 돕는 사람과 그를 죽이려는 사람들의 대결이다. 시체를 처리하는 청소업자가 나오고, 청부업을 중개하는 사람도 나온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아내를 죽인 범인이다. 명확하게 이 부분을 정하지 않고 이야기는 진행된다. 누구일 것이란 추측만 하게 만든 상태에서 말이다. 항상 이런 부정확함은 살인 대상의 확대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단계를 한 번 더 거쳐야 하고, 적도 이에 준비할 시간이 생기기 때문이다. 덕분에 더 많은 액션이 펼쳐지고, 시체는 더 늘어난다. 이 와중에 행운도 작용하고, 실력은 더욱 빛난다. 주저함이 없는 살인은 아마추어들이 막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가볍게 보기 좋다. 이런 살인물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별로일지 모른다. 무협을 앞에서 말한 것도 바로 가볍고 살인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조연들의 무의미한 죽음과 강력한 주인공의 액션과 적당한 수준의 악당들. 하지만 뭔가 치밀하고 정보가 풍부하면서 점진적으로 진행되는 이야기를 원한다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그렇지만 그냥 먼치킨 같은 주인공의 활약을 보려고 한다면 권하고 싶다. 재벌 같은 권력자의 무책임하고 자극적인 행동에 대한 통쾌한 복수는 또 하나의 덤이다. 그리고 곳곳에 살짝 심어놓은 단서는 마지막에 분명하게 그 의미를 보여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악마의 증명
도진기 지음 / 비채 / 2017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판사에서 변호사로 변한 작가의 첫 작품집이다. 이 단편집에 실린 단편들은 대부분 다른 책에 실렸던 적이 있다. 나에게 다행이라면 가지고 있지만 읽지 않은 단편집 속 작품들이란 것이다. 물론 <미스테리아> 같은 책은 현재 가지고 있지 않다. 그리고 이 책의 마지막에 작가는 이 작품들에 대한 설명을 간단하게 덧붙여 놓았다. 개인적으로 모든 단편을 읽고 난 후 봤을 때 그렇게 많은 단서를 제공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이야기 속에 눈길을 끄는 이야기 하나가 있었다. 현실 사건을 바탕으로 쓴 소설이 있지만 발표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보는 순간 무슨 사건일까? 언제쯤 나올까? 하는 호기심과 기대로 가득해졌다.

 

전직 판사였지만 그가 법정극을 그렇게 많이 쓰지는 않았다. 그가 쓴다면 가장 잘 아는 부분이 될 텐데 그는 먼길을 돌아갔다. 이 작품집 속에서도 법정극이라고 부를 수 있는 작품은 두 편 정도다. 표제작인 <악마의 증명>과 다른 작품의 이름을 빌린 <구석의 노인>이다. <악마의 증명>은 그 유명한 모리우치 세이치의 <인간의 증명>을 자연스럽게 떠올려준다. 하지만 이야기의 기본은 그것과 다르다. 악마의 증명은 살인자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일사부재리의 원칙을 트릭으로 이용한 것을 두고 말한다. 같은 사건으로 두 번 기소할 수 없다는 그 법칙 말이다. 작가는 미묘한 서술 트릭을 사용하여 이 악마의 증명을 깨트리는데 조금 억지스러운 부분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구선의 노인>은 하나의 살인사건을 변론하는 젊고 패기만만한 변호사를 통해 이야기한다. 자신의 논리로 사건을 잘 해결해나가는 그의 모습은 멋지다. 하지만 그가 놓치는 것이 있다. 이것을 지켜본 한 노부인의 모습은 안락의자 탐정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변론하는 동안 본 동영상과 자료와 피의자의 머리와 반지 등을 가지고 그녀가 추론해낸 사실은 인생의 다양한 경험이 없다면 불가능한 것이다. 물론 이 추론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심정적으로 더 납득할만한 내용인 것은 분명하다. 재미난 것 하나는 이 할머니의 이름이 진짜 작가 어머니의 이름이란 것이다.

 

호러물로 구분할 수도 있는 작품도 두 편 있다. <외딴집에서>와 <죽음이 갈라놓을 때>다. <외딴집에서>는 시점을 이용해 반전처럼 공포를 극대화시킨다. 짧은 분량이지만 자극적인 장면과 연출로 예상을 빗나간 모습을 보여준다. <죽음이 갈라놓을 때>는 한 살인자의 수기 형식인데 친구와 친구의 애인을 살해한 자의 이야기에 몰입하는 정도에 따라 그 서늘함이 달라진다. 눈에 보이는 객관적 사실보다 무당이나 귀신이 씌였다는 등의 초자연적인 현상에 집중하면 사건의 핵심이 완전히 바뀐다. 이런 불안감과 서늘함을 도입부와 마무리를 맡은 판사의 심리와 행동이 배가시킨다.

 

판타지로 분류해도 큰 무리가 없을 두 편이 있다. <정글의 꿈>과 <시간의 뫼비우스>다. 사실 <정글의 꿈>을 읽을 때는 연쇄살인을 기대했다. 추리소설이란 장르와 분위기를 보았을 때 이전에 읽었던 작품과 같은 것이 아닐까 미리 짐작한 탓이다. 이 기대를 넘어선 것은 좋은데 다른 설정으로 바뀐 것은 조금 아쉽다. <시간의 뫼비우스>는 가장 길고 자전적인 요소가 많지 않나 생각한다. 같은 시간의 삶을 백여덟 번이나 산 남자의 이야기다. 판사였지만 너무 꼿꼿해서 혹은 여유가 없어 피의자 신분으로 떨어진 그의 이야기는 눈여겨 볼 대목이 많다. 판사를 하면서 친구가 한 명씩 떨어져나갔다고 할 때 제대로 된 판사란 이렇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사랑의 블랙홀>이 하루가 반복된다면 이 소설은 30년이란 것이 다르고, 자신이 변화를 만들어낼 방법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단순히 같은 경험을 다시 할 뿐이다.

 

<선택>과 <킬러퀸의 킬러>는 다른 작품들보다 추리적 요소가 강하다. <선택>의 변호사는 <악마의 증명> 속에서 기발한 발상을 한 호연정 검사다. 작가의 표현을 빌리면 더 많은 작품의 주인공으로 만들고 싶었지만 자신의 내면 속 모습이 부족해서 아쉬게 많은 출현을 못했다고 한다. 폭우와 고속으로 달리는 차, 단숨에 왼손목의 동맥을 자른 것과 추락한 것들이 엮어 내놓는 이야기는 법리 문제가 아니다. 강한 모성애와 추론의 영역이다. 사건을 해결하는 방식도 법정이 아니다. 감성의 영역이다. <킬러퀸의 킬러>는 좀 더 큰 스케일을 생각했다가 반전에 놀란 작품이다. 액션을 기대했는데 추리작가의 놀라운 추리 때문에 그 기대가 사라졌다. 현실 속 살인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대부분 우발적이고 감정적인 순간에 의해 발생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더 떠올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낌없이 뺏는 사랑
피터 스완슨 지음, 노진선 옮김 / 푸른숲 / 2017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죽여 마땅한 사람들>로 나로 사로잡은 작가의 처녀작이다. 아주 자극적인 제목으로 번역되어 나왔다. 흔하게 말하는 아낌없는 ‘주는’ 사랑이 아니라 ‘뺏는’ 사랑이다. 처음 이 제목을 보았을 때 오타가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책 소개를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전작에서도 악녀가 등장했는데 이번 작품도 마찬가지다. 다음 작품에서도 악녀가 등장한다면 악녀 전문 작가란 타이틀을 붙여줄까 생각중이다. 그런데 이번 악녀는 조금 다르다. 아니 어쩌면 더한지도 모르겠다. 왜냐고? 그녀의 숨겨진 시간 속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랑. 누구나 말하는 단어지만 진실로 삶을 뒤흔드는 사랑은 그렇게 흔하지 않다. 이 소설 속 주인공 조지 포스가 대학 1학년 때 경험한 사랑이 그 흔하지 않는 사랑이다. 첫사랑이기도 하다. 속된 말로 그는 첫사랑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믿지만 그 사랑은 그의 인생 전반에 걸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세상의 모든 여자를 볼 때마다 그녀의 흔적이나 닮은 모습을 본다. 20년이란 시간이 지나도 변함없다. 그 긴 시간이 흐른 뒤에 전 여자 친구를 만난 술집에서 그녀를 보았을 때 긴가민가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행동이다. 다시 돌아가 그녀를 확인한 것도 역시 당연한 행동이다. 그렇게 그는 첫사랑의 그녀 리아나를 만난다.

 

소설의 구성은 현재와 과거가 교차하는 방식이다. 현재는 리아나를 만난 후 사건 속으로 휘말려들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면, 과거는 리아나를 둘러싼 추억과 사건을 다룬다. 이 교차하는 과정 속에서 작가는 아주 뛰어난 연출력을 보여준다. 첫사랑 오드리와의 만남과 그녀의 죽음이란 자극적인 상황을 보여주면서 20년만에 만난 그녀가 아니라고 생각하게 만든 후 그가 알던 오드리의 진실에 한 발씩 다가간다. 그리고 오드리의 집에서 그가 마주한 오드리의 진짜 모습은 다른 사람이었다. 실제 학교에서 그가 사귄 여자는 자살한 오드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누군가가 그녀의 이름을 빌려 학교 생활을 했다. 이렇게 과거 속에서 리아나의 실체에 대한 진실 일부분을 조금씩 보여준다.

 

현실에서 다시 만난 리아나는 도망자 신분이다. 그녀의 정체를 말하는 순간 경찰에 잡혀가야 한다. 하지만 정확하게 그녀의 죄가 무엇인지 말해주지 않는다. 이 부분은 과거 속에서 드러난다. 그녀가 어떻게 그를 찾아왔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단지 그의 도움이 필요해서라고 말한다. 그의 도움이란 것도 사실 특별한 것이 아니다. 그녀가 부자 매클레인에게 훔친 돈을 돌려주는 일이다. 매클레인과 그녀가 어떤 관계였는지도 설명해준다. 그녀를 만나는 사이에 한 명의 무서운 사내가 등장한다. 리아나를 뒤쫓고 있고 DJ 라는 이름을 말하면서 그를 때리고 겁준다. 리아나의 부탁을 들어주고 이 공포에서 벗어나고 싶다. 이렇게 그는 새로운 사건 속으로 빌을 내딛게 된다.

 

조지의 행동을 보면 정말 멍청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가 느낀 공포나 두려움은 잠시만 생각해도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평온한 일상에 갑자기 끼어든 폭력은 공권력을 불러 해결할 생각을 쉽게 하지 못하게 막는다. 아니 자신이 부른 경찰 때문에 그의 여자들이 다칠 수 있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가 우는 장면을 볼 때 조금 불편했는데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속에서 나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20년만에 찾아온 그녀의 매력에 다시 빠져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하는 모습은 바로 미련이나 집착을 넘어 영혼에 각인된 감정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과도한 부탁이 아니라는 것도 한 역할했을 것이다.

 

조지가 평범한 소시민인 남자를 맡았다면 리아나는 연약한 듯한 모습을 보여주지만 재빠른 계산과 계획으로 남자들을 옭아맨다. 그녀에게 빠진 남자들은 순간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연약한 모습 뒤에 숨겨진 간악한 계획을 파악하기에는 그녀가 너무 매력적이다. 설사 안다고 해도 그들은 순간적으로 그 매력에 굴복한다. 전혀 이성적인 행동이 아니지만 인간은 자주 감성적인 행동을 한다. 작가는 바로 이 부분을 파고들어 이야기를 만든다. 리아나가 아주 매력적이지만 누구나 빠지는 것도 아니고, 그녀의 탐욕을 아는 사람도 생긴다. 이 허점이 그녀를 떠돌게 만들었다. 다른 사람의 삶을 사는 것을 둘러싼 조지와 리아나의 대화는 이 둘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그대로 보여준다. 마지막 조지의 행동은 너무나도 평범하고 일상적이었던 그의 삶에 아주 큰 변화가 생기고 있음을 알려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여행과 독서 - 2016년 타이베이 국제도서전 대상 수상작
잔홍즈 지음, 오하나 옮김 / 시그마북스 / 2017년 5월
평점 :
품절


간단한 제목이다. 그런데 이 둘 모두 내가 좋아하는 것이다. 여행을 바로 가지 못할 때는 독서를 통해 여행을 한다. 여행을 가면 책 속에 나온 곳을 여행한다. 이렇게 이 둘은 뗄 수 없는 상관관계다. 하지만 여행 가서 책을 많이 읽지는 못한다. 책에 나온 곳을 여행으로 바로 가는 것도 아니다. 이 아쉬움은 언제나 있다. 대표적으로 제주가 그렇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제주편>에서 오름에 대한 이야기를 실컷 읽고 이번 제주 여행에서는 여러 오름을 올라야지 마음먹고 가지만 실제는 맛집만 열심히 찾아다녔다. 비와 아이 핑계를 대면서 말이다.

 

이 책의 저자인 잔홍즈는 독서광이다. 그의 이력을 보면 언제 책을 읽을까 할 정도지만 상당한 양의 책을 읽는다. 그리고 아주 많은 곳을 여행했다. 그 여행지의 일부분은 독서와 관계있다. 이 책은 바로 그 관계 속에서 탄생했다. 저자는 “그저 발길 닿는 대로 움직인 여정과, 그 여정 위에 ‘책과 함께한’ 개인적인 이야기를 조금 더했을 뿐이다.”라면서 이 책의 특징을 말한다. 이때의 책은 세상의 모든 종류의 책이다. 어떤 때는 가이드북이 되고, 어떤 때는 소설의 한 구절이 된다. 누군가의 여행기가 그의 시선을 끌어 여행지로 오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면 당연히 그 장면을 재현하려고 한다.

 

얇은 책이 아닌데 다루고 있는 곳은 열 곳 정도다. 첫 장에서 이탈리아와 스위스를 다루고 있는 것을 제외하면 한 나라를 넘어가는 경우가 없다. 인터넷 서점 책 광고에 나오는 사진 속 장면은 바로 여기서 비롯했다. 책을 그대로 믿고 따라한 것이다. 스위스에서도 책을 믿고 그대로 했다가 낭패를 봤다. 실제 이런 일 때문에 실종 사고나 죽음에 이르는 경우가 가끔 있다고 한다. 상호확인의 중요성을 알려주지만 나의 시선을 끈 것은 이런 교훈적인 내용이 아니라 그들 부부의 고생이다. 첫 고비에서 돌아갔으면 됐을 텐데 하고 생각하며 다음 고비는 무엇이고 종착점은 어떨까 하는 기대로 이어지는 그 과정 말이다. 이후 이런 고생은 더 보이지 않아 조금 아쉬웠다.

 

인도 이야기를 읽으면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속고 있구나’ 였다. 오마르 하이얌의 시를 읽고, 장중한 사유를 붙여 설명하지만 그의 시선을 잡아끈 것은 양탄자의 아름다움이다. 인도 여행기를 읽다 보면 늘 마주하는 것 중 하나가 사기인데 누구도 피해갈 수 없다고 한다. 한두 번은 꼭 당한다고 해야 하나. 독자에게는 빤히 보이는 것이 당사자에게는 왜 그렇게 매혹적인 것인지. 뭐 이것을 저자에게 한정할 것도 없다. 나 자신도 외국에 나가면 작은 돈이지만 늘 속지 않는가. 반면에 미식평론가로 오해받아 인도 호텔 주방을 들여다본 장면은 예상과 다른 결말로 이어졌다. 어떻게 보면 상황이 뒤바뀌었다고 해야 하나.

 

이 책 속에서 테러와 지진으로 피해 본 곳을 다녀온 이야기가 두 편 있다. 한 곳은 요즘 윤식당으로 인기 절정인 발리고, 다른 한 곳은 동일본이다. 발리 이야기는 호화로운 호텔에서 보내는 일정인데 너무 황량한 분위기가 강해 쓸쓸함만 강하게 남는다. 휴양지의 활력이 사라지고, 공포가 똬리를 튼 곳에서 어떤 모습이 보이는지 아주 잘 묘사했다. 동일본 대지진 이후 다시 그곳을 찾아간 그의 여행은 우리가 막연하게 알고 있던 곳의 현실을 새롭게 파악하게 만든다. 피해와 공포가 확대 해석된 상황임을 보여주고, 그 지역을 살리기 위해 현지인들이 어떤 노력을 기울이는지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일본과 대만의 관계가 살짝 보였고, 우리와 다른 방식으로 일제 강점기를 거친 그들의 역사가 떠올랐다.

 

자연을 있는 그대로 경험한 곳도 두 곳 있다. 아프리카 초원과 알래스카다. 알래스카 편을 읽으면서 얼마전 휴가를 내고 이곳으로 여행을 떠난 직원이 떠올랐다. 비록 저자처럼 긴 시간은 아니지만. 아프리카 보츠와나에서 보낸 며칠 동안은 야생 속 현대의 삶이다. 머무는 곳은 현대식으로 깔끔하고, 그 경계를 벗어나면 사자들이 먹이를 잡아먹는 잔혹한 야생의 삶이 있다. 모험가, 탐험가의 시대가 끝난 후에도 인간들은 야생의 맛을 보기 위해 많은 돈을 들여 이곳에 온다. 단순히 동물만 보려면 각 나라에 있는 동물원으로 충분한 텐데 말이다. 알래스카 이야기는 여행보다 여행을 가기 전에 있었던 사소하지만 중요한 몇 가지 에피소드들이 더 재미있었다.

 

식도락의 즐거움은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다. 한때 오사카에 가고 싶었던 것도 일본의 주방이라는 말과 흘러넘치던 맛집 정도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책에서 다루는 장소는 교토와 도쿄였다. 교토에서 그가 맛본 음식들은 단품이나 길거리 음식이 아니다. 예약을 해야 갈 수 있는 식당들이다. ‘카모메’의 상대적으로 저렴하지만 맛난 음식은 최상의 식재료를 최고의 스시 명인이 만드는 오노 지로의 스시와 비교해볼 수 있는 재미를 준다. 늘 회전초밥과 뷔페 초밥을 먹다가 스시집에서 주방장이 직접 만들어주는 것을 먹고 깜짝 놀랐던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그 예약하기 힘들다는 오노 지로의 스시를 먹고 쓴 글은 맛있다는 말 너머의 뭔가를 생각하게 만든 모양이다.

 

이렇게 미식에 대한 글들이 나를 유혹하는 와중에 터키가 나왔다. 양 머리라는 부분에서 조금 질색을 하지만 우리가 소머리와 돼지 머리를 먹는 것을 생각하면 특별한 것도 없다. 예전에 시장에 가면 얼마나 돼지머리가 얼마나 많이, 자주 보였던가. 이렇게 이 책은 멋진 풍경의 묘사보다 관광지의 아름다운 자연경관보다 책과 음식에 더 집착한다. 물론 아름다운 풍경의 묘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사실적인 장면도 적지 않다. 그렇지만 압도적인 것은 먹고 마시는 것이다. 먹기 위해 여행은 간 곳이 한두 곳이 아니다. 뭐 이런 곳에 간 것도 책 때문이다. 서문을 보면 1/3을 줄인 것이라고 하는데 몇 곳은 더 손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그리고 살짝 그 줄인 2/3가 궁금해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