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일기 - 아직은 아무 것도 아닌 나
김그래 글.그림 / 레진코믹스(레진엔터테인먼트) / 2017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래’라는 이름만 보면 자연스럽게 <미생>의 장그래가 떠오른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장그래처럼 대기업의 인턴사원이 아니다. 미대를 졸업하고 자신의 작업실을 가진 만화가다. 이 책은 그가 일상을 그린 것을 모아 내놓은 두 번째 책이다. 페이스북에 잠깐 들어가보니 지금도 연재하고 있다. 처음에 생각한 것보다 나이가 더 어려서 잠시 혼란스러웠다. 이 혼란을 뒤로 하고 그래의 이야기로 들어가면 나의 젊은 시절 모습도 잠깐 잠깐 보인다. 이 모습보다 더 공감하는 것은 그녀의 일상이고 감상이고 물음들이다.

 

책을 펴고 목차를 보았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왜 사계절로 장을 나누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이렇게 세 장으로 나누었다. 봄이 점점 짧아지고 있다고 하지만 가을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하기에 이 구분이 살짝 궁금했다. 예상한대로 점점 사라지고 있는 봄 때문에 이 둘을 묶은 것 같았다. 그리고 한 장 가득 그려진 그래의 일기를 조심스럽게 읽기 시작했다. 처음 읽은 거룩한 취미에서 학창 시절 억지로 했던 계획 세우기를 만났다. 지금도 계획이라면 아주 싫어하는 나이기에 이 취미는 낯설었다. 물론 그 계획을 가볍게 넘어가는 모습은 딱 나의 모습과 겹쳐지지만.

 

그래는 스마트폰을 끼고 산다. 고장 났을 때 에피소드는 왜 다른 폰을 구해서 사용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먼저 들었다. 이 부분만 놓고 보면 중독은 내가 더 심한 것 같다. 집에서 시간나면 이북을 열심히 보던 나를 생각하면 더더욱. 이제 20대인 그래가 나이듦을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서 처음에는 그녀의 나이를 착각했다. 나중에 알고 난 후에 살짝 웃게 되었다. 겨우 그 나이에, 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나도 학창시절 20대에 1~2년 후배들에게 얼마나 나이가 든 척, 잘난 척 한 적이 여러 번 있기에 조금은 공감한다. 뭐 지나고 나면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일들인데 말이다.

 

사실을 말하면 이 책 속에 기발한 상상력이 샘솟듯이 나오지는 않는다. 아주 의외의 에피소드들이 나와 웃음을 자극하지도 않는다. 읽다 보면 이름처럼 ‘그래 그래’라고 고개를 끄덕이는 공감대가 조금씩 형성될 뿐이다. 그래의 고민이 당사자에게는 엄청 어렵고 힘든 것이겠지만 그 시기를 지나왔고 다른 고민을 하고 있는 나에게는 하나의 통과의례처럼 보인다. 아마 이 일기를 읽고 더 많이 공감할 수 있는 연령대는 20대이거나 방금 20대를 지난 30대 초반일 것이다. 같은 미대생이라면 조금 더 많이 공감할 것이다. 나 같은 중늙은이도 적지 않게 공감하는 부분이 있으니까.

 

이 일기에 나오는 에피소드 중 꽤 많은 것들은 게시판에서 본 것들과 비슷하다. 이 말은 만화가가 게시판에서 본 것을 그림으로 그렸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이와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의미다. 나 혼자만의 고민이고 고통이라고 생각한 것이 나중에 알고 보니 누군가 겪었던 일이란 것을 알게 된 순간이 떠올랐다. 미대생의 졸전에 대한 이야기는 팟캐스트를 통해 이미 너무 들었기에 오히려 친숙하다. 엄마들이 자식들에게 하는 말 중에 ‘나중에 너 같은 아들 혹은 딸을 낳아서 키워봐라’라는 말처럼 자신을 돌아보고 놀라는 말은 없을 것이다. 가끔은 나만큼만 자라준다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내일의 나’ 이야기는 현재의 내 이야기이기도 하다. 지금 할 것을 잠시 미루었다가 내일로 넘어가고, 이것이 또 뒤로 밀리는 일이 최근에, 아니 이전부터 자주 있었다. 귀차니즘, 졸림, 먼저 놀고 같은 뻔한 이유는 식상할 정도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다. 매월 일정한 급여가 나오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 주는 삶의 무거움도 엿보이고, 친구와 간 일본 여행의 작은 이벤트들은 마음이 잘 맞아 보기 좋았다. 처음에는 그래의 성별을 몰라 남자라고 착각했던 일도 있다. 옆으로 누운 얼굴 표정을 보고 어색하게 느낀 순간도 있다. 이런 장면들과 감상이 차분하게 마음속으로 들어온다. 일상의 순간을 이렇게 멋지게 남길 수 있다는 것이 부럽다. 아무 것도 아닌 나라고 말하지만 이미 많은 것을 해놓았다. 어른의 세계로 들어온 그래가 지금처럼 일상의 작은 일들을 계속 그려주었으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