론도의 노래 - 2015 볼로냐아동도서전 라가치상 수상작 산하작은아이들 51
로마나 로마니신.안드리 레시프 지음, 최혜기 옮김 / 산하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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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도의 노래』는 2015년 볼로냐 국제아동도서전에서 뉴호라이즌 부문 라가치 상을 수상한 작품입니다. 두 명의 작가가 함께 작업한 작품인데, 이분들은 ‘아그라프카’라는 이름으로 함께 활동하고 있다고 하네요. 우크라이나의 아름다운 도시 르보프에서 살면서, 이 책을 함께 쓰고 그렸다고 하는데, 바로 자신들이 사는 나라에 작년에 일어난 전쟁으로 인한 아픔 때문에 탄생하게 된 책입니다.

 

론도라는 도시는 평화로운 곳입니다. 이런 평화로운 곳 론도에서 단코와 파비안, 지르카, 세 친구는 평범한 일상의 삶을 즐기며 살아갑니다. 론도는 평범한 일상이 보장되어 있고, 꽃들이 피어나며, 노래가 울려 퍼지는 곳이랍니다. 얼마나 좋은 곳인가요? 이곳엔 언제나 ‘론도의 노래’가 울려 퍼집니다.

 

하지만, 이처럼 평화로운 땅에 어느 날 전쟁이 몰아닥칩니다. 전쟁이 무언지도 알지 못하던 론도의 사람들은 점차 전쟁의 끔찍함을 알아가게 됩니다. 이제 론도에는 노래가 사라졌습니다. 온통 어두움과 파괴뿐이죠.

 

작가는 말합니다. “전쟁에는 심장이 없다.”고 말입니다. 이제 심장이 없는 전쟁으로 인해, 론도의 사람들은 하나 둘 사라지고, 숨게 됩니다. 거리는 텅 비어 버렸고, 세상은 어두워졌습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 단코는 ‘론도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깨닫게 되죠. 노래의 힘이 얼마나 큰지를 말입니다.

 

단코는 이제 모든 걸 알게 되었어요. 전쟁은 모두가 한마음으로 부르는 노래를 두려워한다는 걸요. 아주 약한 빛으로도 어둠을 쫓아낼 수 있다는 걸요. 전쟁을 멈추려면 빛을 만드는 기계가 필요했어요. 노래하는 꽃들을 지키고, 어둠을 무너뜨려야 하니까요.

 

이제 사람들은 다시 희망을 품고 한마음으로 일하기 시작합니다. 전쟁을 멈추도록 ‘빛을 만드는 기계’를 만들어야 하거든요. 드디어 빛이 어둡던 론도에 비취기 시작하고, 전쟁은 서서히 물러나기 시작합니다. 이제 어둠도 걷히게 되고, 론도의 노래가 다시 울려 퍼지게 됩니다. 하지만, 상처는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게 되죠. 사람들은 가슴속 깊은 곳에 슬픈 기억을 갖게 된 겁니다. 그리고 전쟁의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의미로 붉은 양귀비꽃이 론도에는 가득 피어나게 됩니다.

 

『론도의 노래』는 전쟁의 끔찍함을 상징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쟁을 몰아내기 위해선 무엇보다 사람들이 한마음이 되어 희망의 노래, 평화의 노래를 불러야 함을 이야기하죠. 전쟁은 결코 같은 폭력으로는 이겨낼 수 없습니다. 이게 작가들이 말하는 메시지입니다. 아무리 폭력을 행한들 전쟁은 깨닫지 못하고, 아파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전쟁은 심장이 없거든요. 그렇기에 같은 폭력은 전쟁을 아프게 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전쟁은 빛과 노래처럼 아름답고 밝은 것으로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린 함께 평화의 노래를 불러야 합니다. 게다가 아무리 전쟁에서 이긴다 할지라도 상처는 끝내 남게 됩니다. 그러니, 전쟁은 이겨야 할 대상이 아닌, 멀리해야 할 대상인 거죠. 전쟁은 이긴 편도 진 편도 씻을 수 없는 슬픈 기억을 갖게 되니 말입니다. 이 땅에 전쟁이 아닌, 평화의 노래가 언제나 울려 퍼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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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포 아이들 아이앤북 문학나눔 16
박남희 지음, 김현영 그림 / 아이앤북(I&BOOK)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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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곳곳에는 지금도 ‘적산가옥’이라 불리는 건물들이 산재해 있습니다. ‘적산’이란 말 그대로 적의 재산이란 뜻입니다. 그러니, 일제치하 우리의 적이었던 일본사람들이 살던 집을 적산가옥이라 부르죠. 이런 적산가옥들은 대체로 항구도시에 밀집해 있습니다. 부산, 인천, 군산, 포항, 마산, 진해, 목포, 강경 등 항구도시에 일본인들이 밀집해 살고 있었던 거죠. 왜냐하면, 그곳을 통해, 우리의 농산물이나 군수 물자, 그리고 문화재 등 가져갈 수 있는 것들을 실어 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적산가옥들이 남아 있는 곳 가운데 하나가 바로 포항 구룡포라는 곳입니다. 이곳은 지금은 근대문화역사거리라고 하여 재정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곳에서는 무엇을 일본으로 실어 날랐을까요? 농토도 척박한 땅이고, 육지의 물자를 구룡포로 가져가기에는 접근성이 떨어지는 곳인데 말입니다. 이곳 구룡포에서는 인근 바다의 수산물을 잡아 일본으로 가져갔던 겁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고래입니다. 지금은 고래를 찾아보기 쉽지 않지만, 우리나라는 고래가 많던 나라 가운데 하나였답니다. 어쩌면, 이 동화 속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앞날을 생각하지 않고 눈앞의 이익만을 위해 마구 고래를 잡아대던 일본의 탐욕 때문에 지금 우리 곁에서 고래가 사라진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이 동화 『고래포 아이들』은 바로 이런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구룡포 마을에서 모티브를 얻은 동화속의 마을 고래포에는 일본 사람들이 많습니다. 조선 사람들은 바로 이들 일본의 힘에 눌려 통제받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주인공 웅이네 아빠는 고래를 잡는 일의 조선 인부들의 책임자입니다. 고래의 보존을 위해서는 고래를 잡는 일에 완급조절이 필요함을 잘 알고 있지만, 일제의 탐욕과 독주로 인해 고래를 잡을 수밖에 없는 아픔을 떠안고 있죠.

 

이런 가운데, 잡아서는 안 되는 귀신고래를 잡게 되고, 그 잡힌 고래가 새끼가 있는 어미 고래임을 알게 됩니다. 한편, 웅이와 누나 분이는 우연히 새끼 고래가 해변 가까이 와 있음을 발견하게 되고, 새끼 고래를 돌보며 나중엔 먼 바다로 보내려는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과연 이 계획은 성공할 수 있을까요?

 

이처럼 고래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동화 『고래포 아이들』에는 이 외에도 일제의 횡포에 맞서는 행동하는 지식인을 대표하는 기득이의 형 상득이가 등장하며, 또한 당시 일제의 속삭임에 미혹되어 알 수 없는 곳으로 끌려간 수많은 여성들을 대표하는 웅이의 누나 분이가 등장합니다. 뿐 아니라, 일제의 앞잡이가 되어 출세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기회주의자들을 대표하는 노무라도 등장하고요. 이들 모두의 모습이 일제 치하에서 겪었던 우리의 민족의 아픔이었기에 먹먹함을 금할 수 없네요.

 

하지만, 이 동화에서 가장 두드러진 갈등 구조는 같은 동무로 성장하였음에도 어느 순간부터 가까워질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하는 웅이와 기득, 그리고 유키코의 관계입니다. 일본아이와는 동무가 될 수 없느냐는 웅이의 질문에 누나 분이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와 안 되겠노.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 마음속에 일본을 미워하는 마음이 가득 들어있고 일본 사람들도 우리를 무시하는 마음이 있는데 우째 좋은 동무가 되겠노.(69쪽)

 

서로 진정한 동무가 되기 위해선 상대를 무시하고 핍박하는 자세가 없어야 할 것이며, 아울러 미움의 감정도 씻겨 나갈 때임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장면은 새끼고래를 살려내기 위한 아이들의 동일한 마음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비록 입장의 차이가 있고, 지배하는 나라의 백성과 지배당하는 백성이라는 차이가 있음에도 고래를 살려내기 위해 함께 배를 저어가는 모습이야말로 감동적인 장면이며, 이 동화를 통해 작가가 꿈꾸는 새로운 세상이 아닐까 싶네요.

 

이처럼 생명을 살려내는 일로 우리 모두가 하나 될 수 있다면 좋겠네요. 또한 작가의 바람처럼, 귀신고래가 우리 곁에 다시 찾아올 날도 꿈꿔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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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슬머리 화랑 야나 숨 쉬는 역사 4
박신식 글, 오윤화 그림 / 청어람주니어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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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의 괘릉(원성왕릉)이란 곳에 가면 그곳엔 다른 릉과는 다른 무인석(릉을 지키는 일종의 무사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이 있다고 합니다. 무엇이 다르냐 하면, 이곳에 있는 무인석은 신라인이 아닌, 서역인의 형태를 띠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은 신라시대에 서역과 무역을 한 증거 가운데 하나라고 말하기도 하죠.

 

『곱슬머리 화랑 야나』는 바로 이곳 괘릉에 세워진 서역인 무인석에서 모티브를 가져 왔습니다. 당시 서역에서 온 파란 눈에 노란 곱슬머리 무사가 왕의 호위무사로 수고했다는 접근입니다. 바로 그 호위 무사의 아들이 자신의 꿈을 찾아 가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물론, 역사적 사실에 근거를 둔 작가의 상상에 의한 창작 동화입니다.

 

야나는 자신의 생김새 때문에 또래 아이들에게 따돌림을 당합니다. 야나는 신라 아이들과 다르게 노란 곱슬머리에 파란 눈을 가졌거든요. 이렇게 또래 아이들에게 생김새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따돌림을 당하는 소년, 야나. 그의 화랑이 되기 위한 도전기가 바로 이 동화입니다.

 

야나는 아버지처럼 무사가 되고 싶습니다. 그것도 신라의 무사가 말입니다. 남들은 야나를 같은 신라인으로 인정하지 않을지라도 야나 자신은 신라인임에 의심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신라에서 태어나 자랐거든요. 물론, 아빠는 서역인이지만, 엄마는 신라인이고요. 그러니 야나는 지금으로부터 약 1200여 년 전에 신라 땅에서 살아간 다문화 가정의 아이랍니다. 지금도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은 이곳에서 온전히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이질감이 없지 않은데, 당시에는 어땠을까 싶네요(물론 학자들에 따라서는 신라야 말로 외부 문명에 대한 포용력이 대단하였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시대적 한계로 인한 인종적 차별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겁니다.).

 

이처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차별받던 아이 야나, 그의 화랑이 되기 위한 애틋하고 힘겨운 노력이 돋보이는 동화입니다. 또한 다른 또래아이들에게 차별받음으로 갈등관계에 놓이지만, 이 관계가 화해로 나가는 장면 역시 멋지고요.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말이 있습니다. 다름은 틀림이 아니라는 말. 그렇습니다. 다르다는 것은 틀린 게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같은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음을 우린 기억해야 합니다. 사람은 공장에서 같은 기계로 일률적으로 찍어내는 제품이 아니니까 말입니다. 같다는 게 도리어 이상한 거죠. 그렇기에 나와 상대는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함이 우리에겐 필요합니다. 아울러 다양성이 존중받는 사회야말로 성숙하고 아름다운 사회죠. 모두의 생각과 사고를 같게 만들려는 세상은 끔찍할 따름이고요. 오늘 이 땅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야나’들이 다름으로 인해 차별받지 않는 세상이 빨리 왔으면 좋겠네요.

 

참, ‘야나’라는 이름의 뜻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하네요. 서로 다름을 넘어 서로가 서로를 포용하고 인정하는 세상이야말로 가장 좋은 세상이 아닐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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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필리아와 마법의 겨울 비룡소 걸작선 9
캐런 폭스리 지음, 정회성 옮김 / 비룡소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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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 달 전 엄마를 잃은 오필리아는 언니, 그리고 아빠와 함께 낯선 도시로 왔습니다. 검 전문가인 아빠가 그곳 도시의 박물관에서 큐레이터로 일하게 되었기 때문이죠. 이제 그곳 박물관에서 시간을 보내게 되는 오필리아는 3층의 <놀라운 소년> 벽화의 한 쪽에 문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고, 그 문의 열쇠구멍을 통해 안을 들여다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안에는 한 소년이 갇혀 있었는데, 소년은 자신은 세상을 집어 삼키려는 겨울 여왕으로부터 세상을 지켜내기 위해 마법사들에게 선택받은 소년이라고 밝힙니다. 겨울 여왕과 맞서 세상을 구할 사람이 나타나게 되는데, 그 사람에게 마법의 검을 전해주기 위해 선택된 소년 마법사라는 거죠. 하지만, 겨울 여왕의 죄수가 되어 이곳에서 303년 동안을 기다렸다는 겁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오필리아는 결코 믿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오필리아는 아동 과학협회의 회원으로서 과학적 사고 아니면 믿지 않는 똑똑한 아이거든요. 그런 그녀에게 소녀는 자신의 방문을 열 열쇠를 가져다 달라고 요청하는데, 과연 오필리아에게는 어떤 놀라운 일이 기다리고 있을까요? 그리고 소년에게서 검을 받아 겨울 여왕과 맞서 세상을 구할 사람은 또 누구일까요?

 

이 판타지 소년소설은 박물관 안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공간이 박물관이라는 작은 곳에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전혀 좁은 공간에서 일어나는 사건 같지 않네요. 오히려 스케일이 큰 영화를 보는 느낌도 갖게 됩니다.

 

이야기는 선과 악의 대립구도를 보여줍니다. 세상을 얼려버리려는 겨울 여왕이 악이라면 이에 맞서 세상을 구하려는 이들이 선의 자리에 서게 됩니다. 그런데, 이 선의 자리, 구원자의 자리에 서게 되는 이들이 사실은 별 볼 일 없는 아이들이랍니다. 마법사들에게 선택된 소년은 용감하지도 강하지도 훌륭하지도 않습니다. 단지 착하기 때문에 마법사들에게 선택된 거죠. 그러니, 소년에게는 외형적 능력이라고는 없답니다. 마법도 신통치 않죠. 게다가 303년 동안 전혀 성장하지 않는 꼬마에 불과합니다. 그나마 감옥에 갇혀 있고, 마법사들이 이름을 가져가버려 자신의 이름조차 모르는 아이죠.

 

이런 소년을 구해주려는 오필리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천식을 앓고 있어 수시로 흡입기로 호흡해야만 하죠. 게다가 안짱다리에 겁쟁이랍니다. 이처럼 두 약자들이 과연 어마 무시한 겨울여왕을 상대로 이겨낼 수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오필리아와 마법의 겨울』이 가장 통쾌한 것은 이처럼 약자의 반란을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누구도 눈 여겨 보지 않는 약자들이지만, 이 약자들이 세상을 구원해 낸답니다. 얼마나 통쾌합니까.

 

또 한 가지, 오필리아가 소년을 도와 세상을 구해내는 것은 과학적 생각, 이성적 생각을 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도리어 마음으로 생각할 때, 세상을 구할 수 있게 됩니다. 맞습니다. 때론 우리 내면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마음의 울림에 귀를 기울일 때, 세상을 구해낼 힘을 얻게 되는 거죠. 이것 또한 이 소설에서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과학적 사고에 익숙한 오필리아가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고, 그런 가운데, 죽은 엄마의 음성도 듣게 되죠. 마음의 울림이 갖는 위대한 힘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네요.

 

‘소년’이 마법사들에게 선택된 이유 역시 큰 울림을 주네요. 소년이 선택된 것은 소년에게 능력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지혜가 많아서도 아닙니다. 가문이 좋은 것도 아니죠. 단지, ‘착한’ 이유 하나입니다. 착하다는 것. 어쩌면 오늘 현대 사회에서는 무능함으로 여겨질 수 있는 덕목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결코 아닙니다. 착한 것이 힘을 발휘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판타지가 아닐까요? 오늘 우리 사회에 이런 판타지가 가득하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 착함의 판타지야말로 『오필리아와 마법의 겨울』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선물이 아닐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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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 장영희 에세이
장영희 지음, 정일 그림 / 샘터사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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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책꽂이에서 잠자고 있던 고 장영희 교수님의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을 다시 읽었습니다. 그 간 여러 차례 이사를 하며 제법 많은 책들을 정리했는데, 여전히 책꽂이에 남아 있어 줘서 고맙다는 생각을 하며 책을 읽었답니다(제법 책을 정리하고도 아직 많은 책들이 처가와 친가에 남겨져 있는데, 이렇게 좁은 집까지 가져온 것을 보면 장영희 교수님의 글을 꽤나 남다르게 여겨졌나 보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이 책을 읽으며, 비록 우리 곁을 일찍 떠난 아쉬움은 크지만, 그럼에도 이렇게 그 분의 글은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 때론 위로가 되고, 때론 기쁨이 되며, 때론 힘이 되는구나 싶은 생각이 드네요. 무엇보다 편안하게 말을 이어가는 그 내공이 다시 한 번 느껴지고요. 수필을 어떻게 써나가야 하는구나 하는 배움도 갖게 되는 글들입니다.

 

많은 글들이 가슴을 울렸지만, 에필로그에 실린 글이 가슴을 먹먹하게 합니다. 한 눈먼 소녀가 아주 작은 섬 꼭대기에 앉아 언젠가는 배가 와서 자신을 구해 줄 것을 기다리며 희망의 노래를 비파로 연주합니다. 하지만, 물이 자꾸 차올라 결국 섬은 물에 잠기고 소녀 역시 자신에게 어떤 운명이 찾아오는지도 모르고 여전히 희망의 노래를 부르다 죽어갔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누군가는 이런 허망한 희망이 너무 비참하지 않나 말하겠지만, 저자는 결코 비참하지 않다고. 어차피 물은 차오를 것이고, 그럴 바엔 희망의 노래를 부르는 게 낫다고 말합니다. 아울러 희망의 힘이 생명을 연장시킬 수 있듯이 분명 희망은 운명도 뒤바꿀 수 있을 만큼 위대한 힘이라고 말이죠.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렇게 힘겨운 투병과정에서도 희망의 글을 써갔던 저자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기에 저자의 운명이 마치 눈먼 소녀와 같구나 싶어 먹먹했습니다. 그럼에도 마지막까지 비참함에 몸부림치다 떠난 것이 아니라, 희망이란 것으로 인해, 저자의 마지막 시간들은 절망이 아닌, 희망으로 채워진 시간이었겠구나 싶기도 하고요.

 

오늘 우리 앞엔 여전히 힘겨운 시간들이 기다리고 있겠죠. 하지만, 그럼에도 절망하기보다는 희망을 품고 살아간다면, 어쩌면, 내가 그리는 그 희망의 모습들이 내 삶에 실제 끌어당겨지지 않을까 싶은 마음을 품어봅니다. 또한 감사하네요. 그분이 마지막 순간까지 외친 희망의 노래들은 또 다른 누군가에게 여전히 희망을 선물하며, 또한 새봄을 기다릴 힘을 줄 테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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