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발을 신는 일

나에게는 햇빛을 가리던 손차양과
손등에 고였다가 사라진 햇빛 같은 것이 있었는데

손가락을 신발 뒤축에 넣어 잘 신고
발끝을 탁탁 바닥에 부딪쳐도 보고
제대로 신었구나,
생각하는 것인데

아직 신발 속에 무엇이 있다.
자꾸 커지는 무엇이.
나와 함께 이동하는
내가 아닌
전 세계를 콕콕
찌르는

뾰족한 돌인가? 죽은 친구일 거야. 적이다. 아니
내가 한 말인가.

우리는 함께 걸어 다녔다.
그것은 이물질이었다가
나의 주인이었다가
차가운 생활이 되었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잘 자고 잘 걸어 다니고 낯선 사람들을 잘 만났는데 드디어
손가락을 들어 어디를 가리켰다. 목적지인가? 옛사랑인가? 오늘의 약속이라든가 사망시각
어쩌면
한 걸음 떨어진 곳

나는 그리로 걸어갔다.
그런데 왜 당신은 다리를 저십니까?
길에서 누가 물어왔다.
그의 눈과 코와 입이 영
보이지 않았다.

 

 

 

택시에 두고 내렸다

 

뒤늦게 나는

다른 세계를 깨달았다

방금 지나온 세계를.

 

그 세계에도 너라든가

너에게서 먼 곳 같은 것이 있을 텐데

깃털도 있고

깃털도 있으니 새도 있고

저녁의 하늘 쪽으로 쓰윽

사라져버리는 것이 있을 텐데

 

그러니까 그건 두고 내린 휴대전화인가

지갑인가

죽은 사람인가

 

나는 만취한 채 택시를 타지도 않았다

분실물 보관소가 어디 있는지 알 게 뭐야. 후회라니 그런건,

개에게나 줘버려! 그 순간 불현 듯,

 

나는 어둠이 매일 온다는 걸 처음 깨달은 사람이 되었다.

다른 하늘의 새 떼를 깨달은 사람이.

내가 없는 너의 하루를

가만히 수긍한 사람이.

 

차갑고 뒤늦은 곳에서 무엇인가 나를 불렀다.

목이 돌아가지 않는 곳에서

목소리만이 들려오는 곳에서

 

물질적인 생년월일

 

부고란에서 내 이름을 보고

장례를 치른 뒤

생일을 맞이했다. 축하한다고

즐거운 일들이 많았다고

목청껏 외치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아침식사를 하고 기도를 하고 출근을 했는데

시장이 나빠졌다고 한다.

내가 실직했다고 한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나는 또 태어나려고 했다.

잠자코 귀를 기울였다.

누가 농담을 했는데

그건 미래의 나와 내 부활에 대한 것.

꽤 정확한 악담을 뒤섞어서.

이건 그림자 같다는 둥

도마뱀 같다는 둥

 

나는 캘리포니아 같은 데서 조깅을 했다.

중국에서 중국인으로 살아갔다.

나이로비이 거리에서 조용한 성격이었다,

어디서나 돈이 부족했지만

꼬리는 없어서 자르지 못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아주 가까운 데서 당신과 대화를 나누었다.

조금 더 먼 데서 개죽음을 당했다.

하지만 아직 태어나지 않은 것처럼

사람들이 바라보지 않을 때

꿈틀,

 

기필코 움직이는 것.

나는 방금 또 죽어갔기 때문에

당신으로부터 축하를

진심 어린 축하를

 

이제 바닥에 긴 몸을 붙이고 잠을 자려는 욕망 외에 다른 어떤 것으로도 존재하지 않는 개에 대하여

 

그런 개에 대하여

 

내가 수동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워지고 있다고 믿지 않는다.

 

개에 대하여

개에 대하여

 

커다란 양은그릇에 담겨 있는 소시지와 나물과 흰 밥이 하나의

동일한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이 되어가는 세계에서

 

내가 개를 부르지 않고 개가 나를 향해 짖지 않고

나는 개이 기다란 혓바닥이 되고 개는 나를 호흡하는

이토록 긴 영원 속에서

대격전 속에서

우리는 전 세계에 가까워질 것이다.

무섭게 너그러워질 것이다.

 

나는 여전히 석양에 연루된 것으로서

개의 꿈이 아닌 것으로서

저기 저 지구 바깥을 돌고 있는 행성으로서

여전히 피투성이로서

 

개에 대하여

개에 대하여

 

불멸의 개

 

...나타나지 않은 개가 내 목을 물고

나타나지 않은 개가 꼬리를 치고

나는 골목의 어둠 속에 서서

바로 그 개를 바라보았다.

아주 단순한 눈으로



- 이장욱, 「영원이 아니라서 가능한」, 문학과지성사, 201607

볕뉘. 

 

1.   시 한 편 한 편. 이것은 `발견`에 가깝다. 일관성있는 ㆍㆍㆍㆍㆍㆍ

 

2. 바닥은 안타깝게도 애초에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밑바닥이라는 것. 그것이 있다고 여기는 순간 또 바닥으로 나락으로 떨어질 수 밖에 없다. 중앙역이라는 소설의 한 구석이 며칠 전 잡혔다. 모르겠다. 아무 것도 가늠할 수 없고 가늠되지 않는다.  ...

 

3. "나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다른 세계에서 급강하하는 빨간 점 하나를/ 그 순간 거리의 여자가 허리를 펴고 또박또박 제 갈 길을 갔다...../나는 그것이 옳다고 생각한다/그것이 세계라고 - 을지로에서" 

 

 " 여기서부터 저기까지라면 길이나 부피도 있고 인생이라는 것도 있을 텐데/어째서 기곳은 높이만 존재하는가?// 나는 심지어 기울어지지도 않았다/나는 완전히 세계에 포함된 것이다/외로운 역사가 시작될 것이다/드디어 이곳에서/발끝에서/무너지지 않는 각도로 - 튀어나온 곳에서"

 

"머리는 꿈속에 잇고 몸통은 굴러가기로 한다. 밤새 조금씩 움직이는 것만이 겨울이기 때문에 발자국들이 어지러운 밤이기 때문에 지금은 소리 없이 쌓여야 하기 때문에 - 아직 눈사람이 아닌 에서" 

 

 " 내부에 뜻밖의 계절을 만드는 나무 같은 것 오늘 아침은 영원이 아니라서 가능하다는 생각같은 것 알 수 없이 변하는 물의 표면을 닮은. 조금씩 녹아가면서 누군가  아아, 겨울이구나. 희미해. 중얼거렸다. - 얼음처럼에서"

 

 "오늘도 변함없이 죽은 사람들에게 조금 더 가까워집니다....아무래도 나는 어제의 옷을 다시 입고 오늘의 외출을 하는 것이었다. 거짓된 삶에 대하여 계속 무언가를 떠올렸다. - 일관된 생애에서"

 

 "지금 너에게는 안도 바깥도 없다. 실은 처음도 끝도 쏟아지는 물에게 그런 게 있을 리가...- 유리컵을 던질 대에서" "우리는 움직이지 않고도 벌레처럼 상상력이 깊다. 무한한 친구와 무한한 적이 동일하다. 평면과 깊이가 일치한다. 그것이 우리의 정의 - 식물의 그림자처럼에서" 

 

 "끝까지 포기한 사람이 망치를 들고 다가왔다. 당신이 막 상자에서 머리를 내미는 순간 툭, 떨어지는 빗방울처럼 - 박스에서"

 

3. 밤으로의 긴 여로......묶어두려하지 않는 순간....밤은 방향성을 갖는다고.....왜 위안을 얻고 돌이켜보게 되는 것일까.  배경이 되어야만 다음이 보인다고.........여운을 찾고 있다. 이 두툼하게 어둡고 두툼하게 뜨거운 주루룩 흘러내리는 비지땀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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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고 쓸고없기를

 

...사과 쪼개듯 시간을 반토막 낼 줄 아는

유일한 칼날이 실은 돌이었다

필요할 땐 주먹처럼 쥐라던 돌이었다....

 

...돌의 쓰임을 두고 머리를 맞대던 순간이

그러고 보면 사랑이었다....

 

엊그제 곡우

 

....뼈가 내는 아작 소리를 아삭하게 묘사해야...

 

들고나는 사랑의 패턴

...피동형

사랑도 일종의 달리자는 이야기

스타트가 있고 라스트가 있다는 이야기

혼자 뛸 때도 있고 둘이 뛸 때도 있는데

셋이 뛸 때 더 박진감이 넘친다는 이야기.....

 

....같은 팀인 우리

팀워크를 자랑해야 하는 우리

나 받아서 너 주고

너 받아서 쟤 줘야 하는 룰

내가 쟤 좋다고

너 제치고 쟤한테 달려가면

그야말로 코미디

실격이야 당연한 수순이라 치더라도......

 

시집 세계의 파편들

 

..문제는 솔직함이 아니라 유치함 같았다

...나는 병신 같은 게 아니라 진짜 병신이라고 내가 골백번도 더 말하지 않았수 달린 입으로 말은 바로 하랬다고 제발 그 같은좀 빼시구랴

..병신 같은 년이란 욕을 먹었다 그보다 더 정확할 수는 없어서 배시시 웃었다

..보도블록 틈새에 낀 그것이 그렇게 반짝일 줄은 몰랐다.

 

시를 재는 열두 시간

 

..매트리스 광고나 돌려 보는 밤 이밤에

..때로는 탁자 밑에 눌린 코딱지를 소재로 시를 쓰는 새벽 이 새벽에

..여성지용 권두에세이에나 실릴 법한 시를 쓰는 아침 이 아침에

..짜고도 다니까 매운불닭맛 삼각김밥 사러 편의점 기어나가는 정오 이 정오에

 

냄새란 유행에 뒤떨어지는 것

 

..노랗게 쩌들어 있었다

노랑이 쩌들면 누런 더러움인데

쪄들어 깨끗해지는 건 노란 옥수수라

 

..레모나 빈 껍데기 그 끄트머리에

뾰족한 압침처럼 박혀 있을 냄새여

 

밤에 뜨는 여인들

 

..몹시 문란하지 않으면

가족은 탄생할 수 없다

 

..남의 가정은 다 안락해 보이고

창문 저 안

나의 가정은 다 안락사로 보이듯

 

..몹시 문란한지 않으면

사랑은 탄생할 수 없다

 

..몹시 문란하지 않아면

이해는 탄생할 수 없다

 

..몹시 문란하지 않으면

국군 장교의 아내가 될 수 없었던

 

..쌍방울 모시메리를 단돈

천원에 파는

할머니가 있었다

꼭 엄마 같은 그림자다

 

보기가 아니라 비기가 싫다는 말

 

..이는 포즈를 나도 한 방 먹어본 적이 있어서 좀 아는데 치욕은 역사책만의 고유명사가 아닌 게 분명하고 여기까지 읽고도 누가 더 밉상인지 분간할 줄 모른다면 있지, 그게 나는 우리가 헤어진 이유라고 봐.

 

삼합

 

..누가 시켜서 하는 아낌이 아니니

이것이 화두인가 하였다

 

대서 데서

 

이 여름에 물이

이 얼음으로 얼어붙기까지

얼마나 이를 악물었을지

얼음을 깨물어보면 안다

 

이 여름에 얼음이

이 맹물로 짠맛을 낸다면

얼마나 땀을 삼켰을지

얼음에 혀를 대보면 안다...

 

자기는 너를 읽는다

 

..우리 서로 모르면서도 실은 척 보면 또 알잖아요

덜 익었으니 좀 두고 보자는 식은 그러니까...

 

상강

 

..생강

모든 열매 중에

가장 착하게 똑 부러져버릴 줄 아는

생각

 

근데 그녀는 했다

 

양망이라 쓰고 망양으로 읽기까지

메마르고 매도될 수밖에 없는 그것

사랑이라

오월의 바람이 있어 사랑은

사랑이 멀리 있어 슬픈 그것

 

 

 

 

 

 

 

 

 

 

 

 

 

 

 

볕뉘. 시집의 행간을 다시 들여다본다.  미처 눈치채지 못한 것들이 스며든다. 눈치채지 못한 일상들이 복리이자로 가끔 덥치는 것처럼 말이다. 이동하는 중에 최승자시집을 본다. 삶의 끝, 아니 삶의 끗을 숨기듯 너울질하는 모습은 무당의 요령소리를 너머선다. 보다나니 우울도 가시고 선명하게 눈을 찌른다. 전율에 가깝거나 신기에 가깝다. 시의 줄타기도 일상의 춤사위도.  이미 다 죽어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는 시 편, 깨진 파편들이 걸린다. 미처 읽지 못한 김소연시집도 챙겨본다. 다양하고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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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꽃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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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두가 되는 고통

 

왜 하필 벌레는

여기를 갉아 먹었을까요

 

나뭇잎 하나를 주워 들고 네가

질문을 만든다

 

나뭇잎 구멍에 눈을 대고

나는 하늘을 바라본다

나뭇잎 한 장에서 격투의 내력이 읽힌다

 

벌레에겐 그게 긍지였겠지

거긴 나뭇잎의 궁지였으니까

서로의 흉터에서 사는 우리처럼

 

그래서 우리는 아침마다

화분에 물을 준다

 

물조리개를 들 때에는 어김없이

산타클로스의 표정을 짓는다

 

보여요? 벌레들이 전부 선물이었으면 좋겠어요

새잎이 나고 새잎이 난다

 

시간이 여위어간다

아픔이 유순해진다

내가 알던 흉터들이 짙어진다

 

초록 옆에 파랑이 있다면

무지개,라고 말하듯이

 

파랑 옆에 보라가 있다면

,이라고 말해야 한다

 

행복보다 더 행복한 걸 궁지라고 부르는 시간

신비보다 더 신비한 걸 흉터라고 부르는 시간

벌레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나뭇잎 하나를 주워 든 네게서

새잎이 나고 새잎이 난다

 

 

생일

 

흰쌀이 익어 밥이 되는 기적을 기다린다

식기를 가지런히 엎어 두고

물기를 마르길 기다리듯이

 

푸릇한 것들의 꼭지를 따서 찬물에 헹군다

비릿한 것들의 상처를 벌려 내장을 꺼낸다

 

이 방은 대합실의 구조를 갖고 있다

한 정거장 한 정거장 파리함과 피곤함을 지나쳐 온 사람이

기다란 의자에 기다랗게 누워 구조를 완성한다

 

슬픔을 슬퍼하는 사람이 오로지 슬퍼 보인다

사람인 것에 지쳐가는 사람만이 오로지 사람다워 보인다

안식과 평화를 냉장고에서 꺼내 아침상을 차린다

 

나쁜 일들을 쓰다듬어주던

크나큰 두 손이 지붕 위에서 퍼드덕거릴 때

햇살이 집안을 만건곤하게 비출 때

 

미역이 제 몸을 부풀려 국물을 만드는 기적을

간장 냄새와 참기름 냄새가 돕고 있다

 

살점을 떼어낸 듯한 묵상이

눈물처럼 밥상에 뚝뚝 떨어진다

쪼그리고 앉아 무릎을 모은다

 

 

누군가 곁에서 자꾸 질문을 던진다

 

살구나무 아래 농익은 살구가 떨어져 뒹굴 듯이

내가 서 있는 자리에 너무 많은 질문들이

도착해 있다

 

다른 꽃이 피었던 자리에서 피는 꽃

다른 사람이 죽었던 자리에서 사는 한가족

몇 사람을 더 견디려고 몇 사람이 되어 살아간다

 

우리는 같은 사람을 나누어 가진 적이 있다

같은 슬픔을 자주 그리워한다

 

내가 누구인지 도무지 알 수 없을 때마다

나를 당신이라고 믿었던 적도 있었다

 

지난 연인들이 자꾸 나타나

자기 이야기를 겹쳐 쓰려 할 때마다

우리는 같은 사람이 되어간다

 

당신은 알라의 얼굴에서

예수의 표정이 묻어 나는 걸 보았다고 했다

내 걸음걸이에서 이제는

당신이 묻어 나오는 걸 아느냐고

당신에게 물어보았다

 

우리는

두 개의 바다가 만나는 해안에

도착해 있다

 

늙은 아기가 햇볕에 나와 앉아 바다를 보고 있다

바다가 질문들을 한없이 밀어내고 있다

 

우리에게 달라진 것은 장소뿐이었지만

어느새 우리들 기억이 달라져 있었다

나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강과 나

 

 

지금이라고 말해줄게, 강물이 흐르고 있다고, 깊지

는 않다고, 작은 배에 작은 노가 있다고, 강을 건널

준비가 다 됐다고 말해줄게.

 

등을 구부려 머리를 감고, 등을 세우고 머리를 빗

, 햇볕에 물기를 말리며 바위에 앉아 있다고 말해

줄게, 오리온 자리가 머리 위에 빛나던 밤과 소박한

구름이 해를 가리던 낮에, 지구 건너편 어떤 나라에

서 네가 존경하던 큰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을 나도 들

었다고 말해줄게,

 

돌멩이는 동그랗고 풀들은 얌전하다고 말해줄게,

나는 밥을 끊고 담배를 끊고 시간을 끊어버렸다고 말

해줄게, 일몰이 몰려오고, 알 수 없는 옛날 노래가 흘

러오고, 발가벗은 아이들이 발가벗고, 헤엄치는 물고

기가 헤엄치는 강가,

 

뿌리를 강물에 담근 교살무화과나무가 뿌리를 강물

에 담그고, 퍼덕이는 커다란 물고기가 할아버지의 낚

시 항아리에서 쉴 새 없이 퍼덕이고, 이 커다란 물고

기를 굽기 위해 조금 후엔 장작을 피울 거라고.

 

구불구불한 강을 따라 구불구불한 길이 나 있는 이

곳에서, 구불구불한 길에 사는 구불구불한 사람들과

하루 종일 산책을 했다고 말해줄게, 큰 나무 그늘 아

래 작은 나무, 가느다란 나무다리 아래 가느다란 나

무 교각들이 간신히 쉬고 있다고,

 

멀리서 한 사람이 반찬을 담은 쟁반을 들고 살금살

금 걸어오고 있다고 말해줄게, 물고기는 바삭바삭하

다고, 근사한 냄새가 난다고, 풍겨 온다고, 출렁인다

, 통증처럼 배가 고프다고, 준비가 다 됐다고, 지금

이라고, 말해줄게

 

이불의 불면증

 

너는 마치

이불을 재워주기 위해 잠이 드는 사람 같아

 

네 품에 안겨서

초록색 이불이 조금씩 몸을 뒤척이네

 

품었던 것의

품고 있던 독을 고스란히

자기 육체로 옮겨오는 사람처럼

먼 곳을 생각하는 자의 표정을 짓지

 

독충처럼

꼬리 끝이나 대가리를 곧추세우는 대신

언제고 입꼬리를 올리지

 

이불을 재우는 사람처럼

너의 잠은 동그랗네

크고 작은 동그라미들이 비눗방울처럼

네 언저리에 둥둥 떠오르네

 

너는 모로 누워

부탁해요, 제발

기도하는 사람처럼 두 손을 모으고

곤히 잠들어 있네

 

이것은 꿈이 아니지

말하지 않을 땐 마지막 남은 너의 고백 같아서

부탁으로 나는 그걸 알아듣지

 

이불은 에메랄드 사원의 와불처럼 누워

네 살결을 만지고 있네

네 살결이 먼저 선잠에서 깨어나고 있네

 

걸리버

 

창문 모서리에

은빛 서리가 끼는 아침과

목련이 녹아 흐르는 따사로운 오후

사이를

 

도무지 묶이지 않는

너무 먼 차이를

 

맨 처음

일교차라 이름 붙인 사람을

사랑한다

 

빈 빨랫줄에

대롱대롱 매달린 빗방울의 마음으로

 

+

커피를 따는 케냐 아가씨의 검은 손과

모닝커피를 내리는 나의 검은 그림자

사이를

 

다다를 수 없는 너무 먼 대륙을 건넜던

아랍 상인의 검은 슬리퍼를

사랑한다

 

세계지도를 맨 처음 들여다보는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

 

살아 있으라, 누구든 살아 있으라

적어놓은 채로 죽은 어떤 시인의 문장과

오래 살아 이런 꼴을 겪는다는 늙은 아버지의 푸념

사이를

 

달리기 선수처럼

아침저녁으로 왕복하는 한 사람을

사랑한다

 

내가 부친 편지가 돌아와

내 손에서 다시 읽히는

마음으로

 

+

 

출구 없는 삶에

문을 그려 넣는 마음이었을

도처의 소리 소문 없는 죽음들을

 

사랑한다

 

계절을 잃어버린 계절에 피는

느닷없는 꽃망울을 바라보는 마음으로

 

여행자

 

아무도 살지 않던 땅으로 간 사람이 있었다

살 수 없는 장소에서도 살 수 있게 된 사람이 있었다

집을 짓고 창을 내고 비둘기를 키우던 사람이 있었다

 

그 창문으로 나는 지금 바깥을 내다본다

이토록 난해한 지형을 가장 쉽게 이해한 사람이

가장 오래 서 있었을 자리에 서서

 

우주 어딘가

사람이 살 수 없는 별에서 시를 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가축을 도살하고 고기를 굽는 생활처럼 태연하게

 

잘 지냅니까, 고맙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할 줄 아는 말이 거의 없는 낯선 땅에서

내가 느낄 수 있는 건 잠깐의 반가움과

오랜 두려움뿐이다

 

두려움에 집중하다 보면

지배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지배하고 싶었던 사람이

실은 자신의 피폐를 통역하려 했다는 것을

파리처럼 기웃거리는 낙관을 내쫓으면서

나는 알게 된다

 

아파요, 살고 싶어요, 감기약이 필요해요.

살고 싶어서 더러워진 사람이 나는 되기로 한다

 

더러워진 채로 잠드는 발과

더려워진 채로 악수를 하는 손만을

돌보는 사람이 되기로 한다

 

그럼에도 불구했던 사람이

불구가 되어간 곳을 유적지라 부른다

커다란 석상에 표정을 새기던 노예들은

무언가를 알아도 안다고 말하진 않았다

 

그 누구도

조롱하지 않는 사람으로 지내기로 한다

위험해, 조심해, 괜찮아,

하루에 한가지씩만 다독이는 사람이 되기로 한다

아무도 살아남지 않은 땅에서 사는 사람이 있다

살 수 없는 장소에서도 살 수 있게 된 사람이 있다

집을 짓고 창을 내고 청포도를 키우는 사람이 있다

 

 

볕뉘. 시집을 읽고나니, 비행기표가 숨어있다. 0207, 1955기 이름, 탑승구, 탑승위치에 동그라미가 쳐져 있다. 시집을 아껴두다 이제사 이렇게 동그라미를 쳐둔다.  지난 해 흐릿한 기억이 선명하게 이륙한다. 찬연한 슬픔을 가득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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