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이렇게 만나게 되어 마음매무새를 다시 한번 여밉니다.
그리고 네 곁에 살포시 나를 놓아둡니다.  다른 공간, 다른 일상들과 함께...

 

우리가 바라보는 세상은 어떤가요. 우리가 부딪쳐온 세상살이는 어떤가요. 
네 곁에 나를 둡니다. 너-나,
그 곁에서 너-나를 잠시 바라봅니다. 조금은 편안해진 공간, 조금은 다른 일상들... ...

 

점점 강퍅해지는 것은 아닌가요. 나누는 대화도 세상이 원하는 낱말만 뱉어내는 건 아닌가요.
너-나-너,
그 곁에 나란히 앉아봅니다... ...                 세상을 바라봅니다.

 

나-너-너,  그 사이 사이  따듯한 온기와 마음, 설레임이란 향기를 건네봅니다. 좀더 다른 제 빛과 얼이 담뿍담긴 말과 느낌들을 전해봅니다.

 

그래도 세상은 좀더 다른 말들이 통하는 시공간 속에,
너-나-너-나, 곁에 팔을 벌려 두손 마주잡아 봅니다.  어제와 다른 셀레임을 세상에 건네봅니다. 추위와 절망만이 감도는 기운에  따듯한 인기척을 보냅니다. 낯선 말과 날선 마음들 사이 그래도 따듯함 건네봅니다. 시선도 마주치지 않는 마음들에 툭툭!!  톡톡!!

 

사랑합니다. 님과 이렇게 조우할 수 있어 영광입니다. 차가운 바람처럼 스치고 지나가더라도 님은 님입니다.  어설픈 만남이라도 님의 마음을 돌리지 못해도 다시 한걸음 님과 가까워졌길 바라면서 님을 향합니다.

 

새싹이 돋습니다.
비가 옵니다.
꽃이 핍니다.
열매가 맺힙니다.

 

눈이 옵니다. 그리고 눈이 녹아 봄이 옵니다.

 

당신을 만나, 너를 만나,  또다른 나가 되고싶은 곳,  너-나를 만나 또 다른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싶은 곳, 너-나-너로  또 다른 시공간으로 번져나가고 싶은 곳... ... 지금 여기, 님의 온기 한점 남겨 주시면,  지금 여기는 당장 님의 빛깔을 머금을 겁니다.  또 다른 맛과멋, 향긋함으로 피어오를 듯 합니다.  당신의 삶, 홀로 가는 길에 말동무가 되어드리고 싶은 곳, 홀로 쌓이는 고민이란 갈증에 시원한 약수 한 사발 들이킬 수 있는 곳, 짙누르는 어깨, 험한 걸음...그래도 당신과 함께 비를 같이 맞아줄 수 있는 곳이고 싶습니다.

 

나만이 아니라 너-나로 인해 더 빛나고 숨쉬기 편안해지는 곳. 하나보다 나은 둘, 둘보다 다른 셋, 셋보다 간절한 하나. 둘보다 빛나는 셋, 넷... ...으로 만나고 모이고 만들곤 하는 곳이면 합니다.

 

그리웁고 그리고 싶고  그리워하는 이 모두 님입니다. 님을 여기 이곳에서 다시 뵙게 되어 어쩔 줄 모르겠습니다.

 

 

뱀발. 홈피 인트로 초안을 보낸다. 느끼하지만 좀더 느끼를 담아 묻어나게... 정말 그대에게 가고싶다. 님에게로 다가서고 싶다. 같은 뫔으로 세상의 그물망에서 출렁거리고 싶다. 솔직히!! 너무 세상은 거칠고 험하다. 당신을 만나고 싶고, 세상과 삶의 파고가 조금이라도 줄어들었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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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시민아카데미 신명식

 

사회는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생각과 이해, 그리고 삶의 방식을 가지고 살아가며 서로가 관계되어지는 공간이다. 따라서 사회라는 공간에서 이러한 다양성은 차이를 낳게 되고 이러한 차이에서 비롯되는 갈등의 긴장과 해소의 정도가 사회적 균열 또는 사회적 적대의 폭과 심도를 결정하게 된다.

 

정치는 이러한 사회적 균열 또는 적대를 비폭력적 방식으로 해소해가는 하나의 영역이며, 현대의 정치는 이를 제도를 통해서 실현하고 있고, 이러한 정치제도의 핵심은 정당과 선거, 그리고 법이다.

 

영역과 제도로서의 정치가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활동하는 양식은 언어를 통해서이다. 모든 정치적 이해와 주장, 비전은 언어를 통해서 주장되고, 언어를 통해서 경쟁하고, 언어를 통해서 정리되고, 새로운 언어를 통해서 새로운 정치로 이행한다. 흔히 정치가 말싸움이고 말의 잔치라고 이야기할 때, 이러한 표현은 일면 정치의 본질과 현상을 가장 정확하게 포착한 것이라 할 수도 있다. 따라서 정치의 질과 수준은 정치공간에서 사용되고 주장되는 말들, 즉 언어의 형식과 내용에 의해서 결정되어진다고 할 수 있다.

 

정치가 개개의 사람들과 집단 사이의 갈등, 사회적 균열 또는 적대를 해소해 가는 과정으로서의 영역이라면 정치적 언어는 이러한 갈등, 균열, 적대의 표출과 해소를 그 내용과 형식으로 해야 할 것이다.

 

즉 정치에 있어서의 언어는 사람들과 집단의 사회적 삶의 내용을 반영해야한다. 정치에 있어서의 언어는 삶의 고단함을 드러내 주고, 고단한 삶을 보다 고양된 삶으로 진전시킬 수 있는 의견을 중심으로 전개 되어야 한다.

 

삶의 실재와 가능성을 내용과 형식으로 하지 않는 언어는 정치적 언어가 아니다. 하물며 사실에 기초하지도 않고, 사실을 왜곡하는 거짓말을 중심으로 나뉘어지는 언어는 정치적 언어가 될 수도 되어서도 안된다.

 

거짓을 바탕으로 정치적 의견이 형성되고 나뉘어서 집단이 만들어지고, 그 행위가 사회화, 정치화 될 때, 정치적 동력의 순기능이 되어야 할 사회적 균열은 이데올로기적 균열로 변질된다. 이러한 갈등의 이데올로기적 전화는 대중들로 하여금 정치에 대한 냉소와 혐오증을 갖게하여 비정치 또는 반정치의 문화를 확산시키고 결국에는 민주주의의 위기를 초래할 것이다.

 

이데올로기의 본질이 타자의 부정과 대상화에 있다면 이러한 갈등의 이데올로기적 전화는 필연적으로 폭력을 초래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 폭력의 결과는 20세기 전후의 인류의 역사가 너무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최근 국정원사태에서 생각해 보아야할 지점이 바로 이것이다. 정치의 영역에 진입해서는 안될 언어들이 정치적 언어로 둔갑하여 대중의 정치의식에 혼란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것은 사법적 사실관계의 규명과 처벌의 문제이지 정치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이러한 혼란에서 벗어날 때 사회적 삶에서 정치의 의미와 중요성이 다시 획득되어지고 시민사회의 재정치화로서의 새정치가 가능할 것이다.

 

정치적 언어가 될 수 없는 말들을 아무런 자각 없이 정치적으로 인용하고 사용할 때, 만천하에 드러난 거짓말을 중심으로 정치적 의견을 나눈다고 착각할 때, 우리는 이미 정치적 인간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인간이 된다는 것을 숙고해야할 것이다.

 

‘수구꼴통’ 또는 ‘좌빨’ 이라는 말들을 아무런 생각 없이 나누고 사용할 때, 우리 모두는 이미 정치적 인간이 아닌 정치적 좀비가 되어있음을 처절히 자각하고 반성해야 할 것이다.

 

 

뱀발. 신명식대표가 중도시론에 올린 칼럼입니다. 사회적 삶과 언어, 정치와 관계를 잘 드러내줍니다. 정치적 냉소가 아니라 정치가 삶을 어떻게 위무하고, 어떻게 건드려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말입니다. 최근 국정원사태도 곱씹어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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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 따듯한 "가슴"

 

 

등의 맞은편에 가슴이 있습니다. 손등의 맞은편은 손바닥이라고 하지만 손가슴이라 부르는게 맞습니다. 발등의 맞은편은 발바닥이라고 하지만 발가슴이라 부르는게 맞겠습니다. 그래서 귓등의 맞은편은 귀가슴, 눈등의 맞은편을 눈가슴, 콧등의 맞은편을 코가슴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본다는 것은 세상의 의미 있는 것을 눈가슴으로 끌어안는 것입니다. 듣는다는 것은 세상의 수많은 소리 중에 가치 있는 소리를 끌어안는 것입니다. 또한, 걷는다는 것은 대지를 끌어안는 것입니다.

그 본질에 있어 낯선 것인 세계와 내가 소통하는 방법은 그처럼 ‘끌어안음’을 통해서만 실현됩니다. 그러나, 끌어안음은 한 사상가가 표현했듯이 ‘목숨을 건 비약’입니다. ...내게 목숨같이 중요하던 관성을 성찰을 통해 뒤집을 수 있을 때 비로소 낯선 세계와 만날 수 있습니다. 낯선 세계에 대한 사람의 포옹속에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아름다움은 낯선 세계와의 포옹을 통해 만들어지는 ‘결’입니다. 낯선 세계일뿐인 ‘물’은 나와의 포옹을 통해 ‘물결’이 됩니다. ‘바람’은 ‘바람결’이 됩니다. ‘숨’은 ‘숨결’이 됩니다.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존재로서의 예술가는 ‘결’을 만드는 존재입니다. 예술작품으로서의 ‘결’은 금강저의 투철함과 천의무봉한 선녀옷의 한없는 부드러움을 동시에 갖습니다. ‘결’은 알을 깨고 나오려는 새끼새의 부리질과 밖에서 알을 깨주려는 어미새의 부리질이 정확하게 일치하여 새끼새가 세상에 태어나는 ‘즐탁동시’의 절묘함이기도 합니다.

‘결’을 창조하는 예술가의 작업은 매체에 대한 숙련성만으로 달성되지 않습니다. 미야고프스키‘가 말하듯 ‘시어 하나가 창조되는 것은 수십톤의 흙을 걸러 1g의 라듐을 만드는’과정이며, ‘노신‘이 말하듯 ‘소가 취하는 것은 거친 풀이나 세상에 내 놓는 것은 젖’인 것처럼 감상자가 눈물을 흘리기 위해 창작자는 피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결’은 창조되지 않습니다.

저의 창작관은 ‘90%의 학문과 9%의 실천과 1%의 영감’으로 사진은 창작 된다는 것입니다.

사진가는 혹은 예술가는 시대의 본질을 관통하는 주제를 끌어안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당대에 이룩된 학문적 성취를 뛰어넘는 독자적인 학적세계와 시대의 본질에 대한 견해를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학문일뿐 아직 예술일 수 없습니다. 자신의 견해가 실천을 통해 확인되고 검증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운동일 순 있어도 아직 예술일 순 없습니다.

공자님은 논어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 아는 것이 학문이라면 또 좋아하는 것이 가치를 실현하기위한 실천이라면 즐기는 것은 이론과 실천의 통일이며 체화입니다. 즐거움은 이론과 실천을 통해 이르고자하는 궁극이며 ‘결’의 속성이기도 합니다. 즐거움의 단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예술이 됩니다. 예술가가 학자의 모습으로, 운동가의 모습으로 비출 수 있는 것은 현실발전의 법칙과 예술발전의 법칙이 결코 분리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래줄임, 이시우 옥중편지 07.05.01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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