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몸에 익을 때까지 이름을 보지도 짓지도 않는다. 구석구석을 들여다보고 마음에 자리잡을 때까지 기다려둔다. 지리산 실상사에 다녀오다. 마음에 문턱이 높아져 늘 멈칫멈칫 거린다. 느낌의 촉수가 쉬이 감지하지 못한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목조탑, 기둥의 흔적들. 거기에 앉아 나누는 이야기를 듣는다. 먼지 하나에도 우주가 깃든다. 생과 사는 없다. 담담하다는 것, 그 차이가 없다는 것을 몸소 느끼는 불교인은 크게 두렵지도 당황하지도 않는다 한다. 삶과 죽음. 죽음을 늘 염두에 둔다는 것은 불행을 자초하는 것 같지만, 그 상황을 몸으로 낚아채는 순간 근력이 생긴다. 용기는 포기의 바닥에서 불쑥 의도를 벗어나 솟아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죽음을 늘 염두에 둔다는 것은 삶의 이면이 또 다른 방향에서 자라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피해만 가려는 오만이 섞여 삶도 죽음도 욕되게 하는 것은 아닌가.
2.
인드라망 대학의 사무국장과 담소를 나눈다. 삶의 이력을 묻다. 묻는 이에게 말한다. 바보, 등신이죠. 조직 생리에도 맞지 않더군요. 도덕교사였습니다. 보험도 깨고 월 생활비가 얼마나 드는지 따져보곤 했죠. 이것저것 포기하는 순간 이상하게도 용기도 또 다른 것이 보이더군요. 귀농이 아니라 귀촌입니다. 헝가리인 에스페란토어 교육에 대해 나눈다. 그 지역말의 어순에 따라 말을 배우게 되는 특성이 있다. 이런 특징이 만국공용어로 장점을 갖게 한다. 하지만 세밀한 감정, 감성, 지역색들은 담지 못하는 단점이 있기도 하다고 되묻는다. 도제 학습과 실상사와 네트워크가 생각보다 생동감 있는 듯하다.

3.
'생명평화' '인드라망'에 대해 듣기는 하였지만 관심이 있는 편이 아니다. 도법스님의 실천과 노력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만큼 실천불교의 호흡과 맥락에 대해서도 그러하다. 보물이 지천인 실상사의 규모에 목조탑의 기둥만 남은 자리를 보고 아연해진다. 경계가 어디일까? 연구는 얼마나 진척이 있는 것일까? 호기심보다는 동선들과 움직임들이 궁금해졌다. 성심원, 지리산학, 지리산프로젝트, 모이고 교류하는 예술가와 문학가들, 그리고 열정이 보이는 마을사람들. 혹시 말들 사이 과도한 추상성이 걸리기도 한다. 사람들 사이는 어떠할까? 프로젝트 사이는 어떠할까? 그럴 듯하게 소비해내고 핑계삼는 것이라는 한쪽과 그 결합이 폭발적이어서 실상사와 관련된 네트워크의 밀도가 높아 만나면 만날수록 감염되는 강도를 한편에 두어본다. 어디에 걸려있는 것일까? 회의와 의심이 있다면 아마 그어놓은 경계와 그 사이에 있는 것이 맞을테고, 무엇을 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동안의 연대가 결실을 맺으리라는 막연한 기대와 인연에서 시작하고 있다면 틀림없이 그 밖에 있는 것이 맞을 것 같다.
4.
오고가는 길, 차안, 슈퍼 앞 벤치에서 막걸리로 맥주로 때론 비를 핑계삼아 이야기를 나눈다. 오고가는 길 무슨 이야기일지는 모르지만 아마 벗들과 밀도도 농도도 전후가 달라질 것이라는 감을 갖고 운전하고 묻는다. 선문답이나 화두가 나름대로 가볍게 소비하지 않고 숙성하고 여물게 만드는 방법 가운데 한가지라는 생각도 들었다.
5.
시간이 지나 이과 가운데 공대를 나온 나와 문과인 친구들과 차이점을 이렇게 생각해본다. 늘 답은 한가지이며 복수이면 안된다는 점, 두번째는 사실만을 취하려 애쓴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늘 복수의 답을 열어두며, 사실보다 스토리를 취하는 문과친구들과 다르다. 스토리와 전후좌우의 맥락에 익숙한 이들과 자신이 필요한 사실만 취해 여러 정보와 맥락에 무관심한 편식이 가져오는 후과를 달게 받고 있다는 느낌도 든다. 그리스 로마, 중세, 르네상스의 지명과 삶에는 익숙하지만 마한,진한,변한, 신라, 고려와 조선의 생활과 삶에는 문외한인 사대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우려도 함께 올라왔다.
6.
합리적 이성, 합리적인 개인, 발라낸 나에 빚어낸 서구와 우리는 다르다. 러셀이 말한 쾌락, 충동이 행동을 끌어낸다는 반성과 자각, 삶은 최근 진화학자와 신경과학자, 뇌과학자, 행동경제학자들이 밝혀내는 과학적인 사실과 흡사하다. 바른마음의 저자가 책에서 밝히는 진보가 달랑 1페어의 카드만 들고 있다면 보수는 스트레이트나 족보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는 현실에서 설명은 우울하다. 우울하기 짝이 없지만 경상도와 전라도로 나뉘는 현실을 더 우울해야 한다. 그런 감각조차없는 정치인들이 뒤범벅인 사실은 절망적이다. 세모녀 자살사건과 세월호가 여전히 진행형이어도 당리당략에만 사로잡혀 있는 정치인들로, 그들의 게임인냥 몰고가는 매체로 인해 정치는 덧셈이 아니라 끊임없는 뺄셈이 되고 있는 것 같다. 국민이 상주인데, 상중인데, 유가족은 모든 일을 팽개치고 현실을 부여잡기 위해 각혈을 하고 있다. 가해자는 가해자인줄조차 모르쇠로 일관하고 힘있는 야당은 전원 단식을 하든 국회농성을 하든 극단적인 정치행위조차 감안하지 않고 그저 7.30선거 바둑돌만 두려한다. 생업을 팽개치고, 정치력이 부족할 수밖에 없는 이들은 십자가를 매고 행진을 하고 땅끝에서 거리행진을 이 무더위에 얼굴을 검붉게 그을려가면 뫔을 끌고 고난의 걸음을 하고 있다.
7.
관료와 국가기구와 행정기구, 정치인은 정치를 하려하지 않고 그 제도의 밖에 있는 이들만 안절부절하지 못해 정치행위를 하고 있다. 제도권은 상중인 국민의 바램과 마음을 헤아리려고 조차 하지 않는다. 어떻게든 넘겨보려는 마음만 눈치채게해 실망의 실망을 거듭하게 한다. 피해자가 더 아파하는 이들이 늘 역사를 보듬어 안았다는 사실이 슬프다. 여전히 피해자들이 움직여야 역사의 한고개를 넘을 수 있다는 사실이 아연하다.
8.
오늘도 폐지를 주우려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돈 몇백원때문에 싸울 것이다. 그리고 어느 골방에서 병든 몸에 더위에 아무도 맞아주지 않은 죽음에 가닿고 있을 것이다. 어떤 예술가도 생계와 굶주림에 처절하게 몸부림치고 있을 것이고, 이주노동자를 월급까지 떼이고 산재에 치료조차 받지 못해 서성거리고 있을지 모르는 오후이다. 정치에 이런 삶보다 중요한 것이 있을까? 지금 당장의 정치라는 눈은 미래를 이야기하지 말아야 한다. 일단 구해놓고, 산 사람을 살려놓고 가야하는 것이 우리가 받은 교훈아닌가? 세모녀와 세월호, 여전히 진행중인 불감들을 통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