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각

 

 

 

자신감은 언제 들어왔나
자신감은 왜 드나든건가
자신감은 무엇으로 가나

 

 

보이는 쪽으로만
가는 쪽으로만 가다

 

 

그만
시작한 곶을 잊었다

 

그만
시작할 꽃을 잃었다

 

그만
시작한 곳도 눈감다

 

 

난무亂霧

 

 

활자에 묻어있는 감정들이 핀다
감정의 꽃들이 여기저기 핀다
꽃은 유혹한다
'봐주세요. 제발
제발 봐주세요.'

 

 

활자에 묻어있는 감정들은 본다
감정의 거울꽃을 본다
거울은 보여준다
'예뻐 예뻐 예뻐'
'예쁘다고 예뻐'

 

 

때와 장소도 기다리지 않는 곳
언제, 어떻게, 왜
기대하는 동안이
무너져 사라져버린 터

 

 

마음으로 그려질 수 없는 곳
감정의 깃발만 시도때도 없이
팔랑거리는 곳,
보려하지 않으려해도
볼 수 밖에 없어 봐야하는 곳

 

 

감정기계가 토해내는 일상들
재활용이 될 수 없는 조화다
버린 꽃이 너무 많다
어찌할 수 없는 감정들의 폐처리장

 

 

말을하되 말하지 않는다
전하되 아무것도 전하지 못한다
자욱한 안개 속에 보이는 것이 없다
자욱한 안개 안은 잡히는 것이 없다

 

 

낙엽(가을)

 

 

너로
다가서는 인식표인 줄 알았다
그런데
범칙금 딱지같다
불쑥
날라와 기억을 밟고 간다

 

이렇게

한켠으로
미뤄둬 쌓인 마음들에
마른 바람이
불을 붙였다

 

 

'미뤄둔 것은 언젠가 사랑을 한다'에
밑줄을 긋는다

 

 

님에 데인다
화상이다

 

 

중심의 근력

 

 

흔들린 적이 없다고 한다
흔들려 본 적은 있으나
흔들리고 싶지 않다 한다

 

 

기댄 적이 없다고 한다
기대본 적이 있으나
기대고 싶지 않다 한다

 

 

걷고걸어 힘든 적 없다고
힘들 수 없다며 걷고걸어

 

 

람에 몸을 맡겨 흔들 흔들
기우뚱기우뚱  사이시옷으로
마음을 뉘일 것을
뉘인맘을
또 기우뚱기우뚱거릴 것을

 

 

취한 이들이 왜 비틀거리는지
성한 이들의 마음이 왜 비틀거리는지
비틀거리는 것엔
중심보다 더 단단한 자장이 있다

 

 

기대야만 생기는 힘들
기대야만 생기는 마음들
기대야만 생기는 모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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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본인이 제너럴리스트라고 말한다. 저술가로서 그의 입지는 20-30년 뒤 다시 출간되는 서문들에 자신감으로 녹아있다. "다시 살펴보았는데 별반 고칠 것이 없다. 그래서 그대로 출간하거나 살짝 다른 곳에 쓴 글을 넣었다."라고 한다. 자신감이 좋다. 강연 속에 녹아있고, 책들 사이 디테일로 번져있다. 가을 어느 날 불쑥 들어온 그의 글들이 마음을 사로잡는다. "Generalist!!" 리차드 세넷에서 이어지는 읽기다. 공명이기도 하다. 사실 설렌다.

 

 

 

 

 

 

 

 

 

 

2.

 

아직  본격적인 독서를 시작하지 않았다.  송기정교수의 강의와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 안의 기억을 반추하며 시대를 읽고 있다. 같은 삶의 경험과 패배, 그 아픔들로 이어진 삶의 근육들이 녹아있는 그의 소설에는 약 2500명의 인물이 등장한다고 한다. 인간희극이라는 기획으로 그의 작품 바탕은 풍속연구, 철학연구, 분석연구으로 나눠져있다.  주인공은 작품 여기저기에서 삶을 살고 이어가고 있다한다. 말년 연인이자 마음의 은신처였던 남편과 사별한 한스부인과 결혼을 하지만 몇 계절을 넘기지 못하고 숨을 거두게 된다.  낭독해주는 대목들이 너무 끌려 궁금하다. 그 때 세상은 5년, 10년, 15년 단위로 바뀌고 급변에 급변을 거듭했는데 이 세상은 그래도 참 고요하다 싶다. 

 

 

 

 

 

 

 

 

3.

 

보고싶지 않다. 재앙이란 단어만 들어도 몸서리쳐지는 지금이다. 검색되어 나오는 관련 책들. 눈길을 거두고 싶다. 기술을 손아귀에 넣지 못할 때, 마치 불을 제대로 다루면 따듯함과 안락을 주지만 화마로 번질 수밖에 없음은 비극이다.  칼 폴라니가 자본이 사회 속의 인간과 자본에 발라져 나온 것처럼 기술은 인간과 예술에서 따로 떨어져 나왔다. 비극은 사람만이 멈출 수 있다. 멈추거나 중단하고 사람의 손길로 조련되어야 한다. 피해는 고스란히 인간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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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시도록 발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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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22 18: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10-23 08: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10-23 16: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볕뉘.

 

1.  '시스템사고' - '소크라테스는 죽었다.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사람은 죽는다.' 사람은 죽는다는 것은 정상이다.  '정상사고'라는 표현이 다소 의아하겠지만 시스템은 사고를 일으킨다. 안타깝게도 원인은 한가지가 아니다. 원인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복합적이라고 하는데 누구든지 동의할 수 있다.  저자는 기술의 발달이 위험을 감소시키는 것보다 증가시키는 속도가 빠르다고 하는데, 우리는 그것에 대부분 동의한다. 기술을 구분할 수 있을까? '민주적인 기술'과 '권위적인 기술'을 말이다. 만약 구분할 수 있다고 하면 이야기를 좀더 진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최첨단 기술 한가운데서 살고 있다. 그리고 그 최첨단기술을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측면이 있다는데 동의한다. 반면 최첨단기술이 이 지구상에 사는 사람들의 굶주림과 사람답게 살게하지 않는다는데도 동의한다. 

 

2. 기술은 가치중립적인가? 정말 그러한가?

 

3. 세월호 참사를 보면서도 그러한가?  또 다른 기술이 이 모든 위험을 제거할 수 있으리라고 여기는가? 그렇다면 조금 전에 '민주적인 기술'이 있다고 동의는 왜 하셨는가?

 

4. 관제장치, 항법장치, 조선기술은 모두 최첨단이다. 하지만 안전하고 국민을 행복하게 하는 기술의 근력은 어디에도 없었다는 것을 보지 않았는가? 따로 따로 최첨단인 기술은 굶주림을 해결하지도, 국경을 달리하는 저기의 처참을 눈여겨보지도 않는다.  아무래도 효율성과 생산성은 인간성과 별개인 것이 명확하다.  기술은 생산성과 효율성을 위해 맹목적으로 달렸을 뿐이다. 기술과 기술의 연결은  이윤을 낳고, 권력을 키우는데는 쏜살처럼 빠르다. 하지만 가난한 이들을 살리고, 사생활을 보호하고, 장애인과 노인과 사회적 약자를 위해 별반 기술을 연결시키지도 않고 기술을 개발하지도 않는다.  인간을 위한 인간과 함께하는 기술이 없다는 사실을 보아야 한다.

 

5. 기술은 인간다울 수 있을까? 인간적인 기술이란 무엇일까? 기술과 기술사이 위험의 매듭을 줄이거나 안전의 고리로 연결할 수 있는 희망은 있는 것일까?  위험을 줄일 수 있는 능력보다 위험이 더 가속화되는 현실은 사고를 목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손바닥안에 놓고 보고 감지할 수 있을까? 외면에 외면을 거듭할 권력과 자본의 등돌림을 돌려세울 수 있을까? 어쩌면 그 피해는 싸둔 오염원과 그 근처에 사는 돈없고 빽없는 이들에게 닥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6. 과학과 기술의 검은 그림자를 살피려하지 않는다. 여전히 사고를 목도한 뒤에도... ... 파국에는 빈자와 부자의 차이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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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과 문명의 분석을 형성한 유기적 '신기술'과 자본주의적 탐욕 사이의 대립관계 대신, 이제 멈퍼드는 문명의 새벽에서부터 시작된, 민주주의적 기술과 권위주의적 기술 사이의 역사적 갈등을 추적했다. 멈퍼드에 의하면 민주주의적 기술은 신석기 농업, 여성 노동, 장식된 꽃병과 창고의 창조에서 그 뿌리를 갖는 것으로, 산업주의 시대에도 노역을 제거하고 개인의 예술적 능력을 고양시킨 수공업과 탈집중화 기술이라고 하는 지하의 전통으로 존속해 왔다.  권위주의적 '거대 도시'가 피라미드를 세운 노예라고 하는 인간 '기계'와 고대 이집트 및 메소포타미아의 지배자들을 향한 무덤들에 의해 성장했다고 하는 주장이다...전체적 통제를 위한 거대 기구의 연구는 지배자들을 경쟁의 악순환으로 몰아넣고 시민들을 수동적인 기계인간으로 축소시키기 위한 시도를 하게 한다는 것이다. 29


우리의 삶 전체가 예술가들의 작품에 깃든 특징을 갖고자 하면 기술 세계 자체가 변해야 합니다. 구제의 길은 기계에 인간성을 실용적으로 적응시키는 데 있지 않고, 질서와 조직을 찾는 인간적 요구의 산물인 기계 자체를 인간성에 재적응시키는 데 있습니다. 인간적 패턴, 인간적 척도, 인간적 속도, 무엇보다도 인간적 목표가 기술적 활동과 과정을 변형시켜야 합니다. 기술이 인간의 발전에 위협이 되면 이를 억제하고, 심지어 기술을 인간의 발전이라는 경로 속으로 향하도록 하는 적절한 정치적 수단과 사회적 제도가 창안되지 않는 한, 기술의 사용 자체를 자시 중단해야 합니다.  51


인간은 예술 속에서 자기 삶의 본질적 경험을 영구화하고 부활시키며 타인과 나눌 수 있게 하는 특별한 수단을 발전시켰습니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인간이 기거나 걷기 시작하기 전에 항상 아동은 뜻을 알 수 있는 제스처를 발전시키고,  옹알이를 시작하며, 알아들을 수 있는 단어-소리를 사용하기 시작하는다는 것은 아마도 중요한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의사소통이라는 기능은 작업 기능에 선행하며, 인간 사회의 발전에 엄청나게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54


예술의 발전에는 3단계가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1단계는 자폐적이고 유아기적인 자기 동일시의 단계입니다. 2단계는 사회적이고 청소년기적인 단계로서 단순히 주목받고자 하는 것만이 아니라 인정받을 가치가 있는 무엇을 창조하려는 노력을 통해 자기 과시가 상호 소통으로 나아가는 단계입니다. 마지막으로 3단계는 개성적이고 성숙된 단계로, 여기서 예술은 개인이나 공동체의 직접적 요구를 초월하여 삶의 새로운 형식을 낳을 수 있게 됩니다. 즉 예술 작품 자체가 하나의 독립적인 힘이 되는 시기입니다. 62


저는 정서나 욕망의 억제나 대상에 대한 존중을 참된 객관성과 같은 것으로 보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참된 객관성이란 경험의 모든 측면을 포함해야 하고, 따라서 가장 중요한 측면인 주체 자체를 제외해서는 안 된다는 간단한 이유 때문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객관적일 때, 우리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뿐 아니라, 또한 반대로 사물로 우리를 있는 그대로 보고 있습니다. 즉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는지, 우리의 목적과 가치가 무엇인지도 결국 같은 이야기가 됩니다. 따라서 기술이 전인격 속에 흡수된다 하더라도, 기술의 어떤 질서와 규칙성과 중립성이 통합된 인격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더라도, 그것들은 더 의미 있는 전체의 일부에 불과한 것입니다. 93


우리는 세계를 2개의 계급으로 급속히 나누고 있습니다. 그 하나는 복제 과정으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소수이고, 다른 하나는 삶 전체를 이러한 복제 과정의 수동적 감상자나 자발적 희생자로 낭비하는 다수입니다. ...(과거에는 그림이 희소한 종류의 상징이었고, 주의 깊은 집중을 요구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이제는 실제의 경험이 희소하게 됐고 그림은 어디에나 있게 됐습니다.) 135

 

우리는 이 세계를, 대체로 시각적 상징물의 대량 생산을 통해 모든 사람이 간접적이고 파생적인 삶을 사는 간접적 세계, 유령의 세계로 바꾸었습니다. 그리스인들은 실제 존재의 이 창백한 환경을 하데스라고 불렀습니다. 이러한 그림자 왕국이 우리의 기계적이고 황금만능 문화의 궁극적 목적지여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또 다른 문제가 있습니다. 이러한 시각적 상징물의 증대는 예술자체의 충격을 감소시키는 영향을 미쳐 왔습니다. 이처럼 이미지로 가득 찬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우리는 상징을 저평가하고 순수하게 감각적인 측면을 제외한 상징의 모든 측면을 거부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이 반복 과정이 지극히 자동적으로 이러한 결과를 낳지 않는다고 하면, 그러한 자극의 반복 자체는 우리에게 자체 방어를 위해 그 의미를 제거할 필요를 만들 것입니다. 136

 

우리가 마음을 닫아야 하기 때문에 우리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게 되는 것은 적나라한 선정주의일 뿐입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현대의 예술가가 방어적으로 점차 할 말을 잃어가는 이유 중 하나일 것입니다. 선정주의가 의미보다 더 중요하게 보이도록 하기 위해, 예술가는 거대 광고업자의 주의를 끌기 위해 사용되는 묘기와 유사한 과장과 왜곡이라고하는 과정을 지나도록 강요당합니다. 따라서 '더욱 빨리, 더욱더 빨리'라는 수량화 원리는 '더욱 시끄럽게, 더욱더 시끄럽게'라는 선정주의를 유도하게 되고, 이어서 예술가가 사용하는 상징의 의미에도 영향을 미쳐 '더욱 공허하게, 더욱더 공허하게'로 나아갑니다 . 이는 대량 생산과 그것과 경쟁하는 예술가에게 요구되는 무서운 대가입니다. - 우리는 복제와 대량 생산을 위한 메커니즘의 존재 자체가 그 완벽한 능력을 발휘할 의무를 수반할 것이라고 무턱대고 가정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런 필연성은 전혀 없습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알게 된다면, 여러분은 자유인입니다. 137-138


선배들은 "좋은 것도 너무 많이 가지면 지나칠 수 있다"라는 말로 표현했는데, 젊었을 때는 어쩐지 잘난 체하는 소리로 들렸습니다. 그러나 그 잠언의 배후에는 인류의 오랜 경험이 들어 있습니다. 사실 강렬한 경험일수록 그만큼 가치가 있고, 희소할수록 그 지속은 더욱더 짧습니다. 우리는 이 말을 "너무나 잦은 축복은 저주가 된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기계의 선물인 규칙성과 반복성은 신체의 반사 조직에 해당하는 삶의 그런 측면에 한정돼야 합니다. 즉 그것들은 엄밀하게 종속적인 방법 외에는 더욱더 높은 기능에, 감정과 상상력에, 미적 감각과 합리적 통찰에 기여할 수 없는 무엇인가를 갖는 과정이 아닙니다. 142


진기성, 모험성, 다양성, 자발성, 강렬성, 이 모든 것들은 예술 작품에 너무나도 필수적 요소들입니다. 위대한 예술 작품은 볼 때마다 새로움이 주는 충격과 환의의 감정을 느끼게 합니다. 그러한 작품은 그 의미가 무궁무진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단서가 있습니다. 즉 너무 자주 보아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경험의 희소성이야말로 환희를 위한 필수적 준비입니다. 리듬과 간격이 없다면 오로지  포만과 권태가 있을 뿐입니다. 143


울창한 숲이나 높은 산꼭대기같은 자연 속에서 맛보는 강렬한 고독의 기쁨입니다. 그러한 특별한 경험의 적지 않은 부분은, 어느 순간에든 거기에 있었던 사람이 매우 적다는 사실에서 비롯됩니다. 이는 경험에다 심미적 의미와 정서적 자극의 마지막 강점을 더하는 것입니다. 만일 산꼭대기까지 3차선 고속 도로를 내고 5천 명을 데려다 놓고서 고독을 즐기라고 한다면, 그 경험의 본질 자체는 없어집니다. 이는 다른 무엇에 의해 대체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자연의 감각도 없고, 우주적 고독감도 없이, 도시 공원 대신 산꼭대기에서 만난 5천 명의 집단적 성격과 평범한 사교로 대체됩니다. 147


만일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한 방울을 주기 위해 포도주에 물을 무한정으로 타서 나누어주고서 그것으로 모든 사람이 착실하게 술잔을 비웠다는 환상을 갖는다면 그러한 복제 과정은 누구에게도 아무런 봉사를 하지 못한 것입니다.... 147

 

거대한 조립 라인의 생산 단위라는 수단에 의해 증대된 기계화, 집중화, 몰개성화라는 과정을 추진하는 사람들에게 일정한 만족과 위안을 주었습니다. 권력, 명성, 이윤에 대한 관심 속에서 삶을 물량화한 사람들은 여기서 아무런 저할 없는 명백한 길을 뒤따르도록 허가를 받은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자기만족적 타성이 창조석을 대신할 수 있게 됐습니다. 불행히도 이러한 타성의 결과, 삶 자체는 바로 그 확대 속에서 저지되고 억제됐습니다. 삶의 의미는 더욱더 공허해졌고 심지어 그 기계적 효율성은 더욱더 불필요하고 부적절한 것이 됐습니다 181

 

헨리 오즈번 테일러 - "1600년 이래 진행 중인 속도로 본다면 사상의 붕괴에는 1세기나 반세기도 걸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 경우 이론이나 선험적 원리로서의 법은 사라지고 권력이 그 자리를 대신할 것입니다. 도덕은 경찰로 바뀔 것입니다. 폭발은 우주의 폭력에까지 이를 것입니다. 해체가 통합을 압도할 것입니다."  182


불행히도 우리 시대는 아직 회화 부분에서 많은 브뤼헐과 고야를 낳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의 건강한 예술이란,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모를 정도로 어리석거나 자기만족적인 사람들의 평범한 작품이나, 전통적인 힌두교나 기독교의 은자들처럼 거의 자폐적인 정신적 은둔자, 즉 자신을 때려눕히거나 밀어낼지 모르는 현대생활의 강력하고 급격한 탁류를 피해 전통적 삶이라는 조용한 샘에서 평온하게 물놀이를 하는 예술가들의 작품뿐입니다. 그건 예술가들이 그러한 은둔에 의해 순수성이나 강렬성을 얻는 것은 의심할 바 없지만, 같은 이유로 인해 표현력과 호소력을 어는 정도 상실하고 있습니다. 185


오늘의 삶이라는 위대한 드라마를 위한 가장 호소력 있는 표현의 근원은, 분열과 해체를 극복하는 노력, 삶의 주도권을 회복하는 노력입니다. 은둔이 아니라 참여에 의해, 도피가 아니라 삶을 위협하는 힘을 정복함에 의해서 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인간의 정신을 위한 주도권의 회복에 실패한 것, 내면의 평정을 회복하고 우리의 숨은 욕망을 확인하며 침몰된 희망에 활기를 불어넣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상징들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우리의 무능력, 절망의 수렁에서 우리를 끌어낼 수 없는 우리의 무능력은 모두, 예술에만 특유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유사한 방식으로 거의 대부분의 다른 활동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이를 보상하려는 필사적인 노력으로 한 사람의 독재자에게 개성이라고 하는 속성을 부여합니다. 구세주 황제의 현대판에게 말입니다. 그래서 지도자만이 참된 인간이 됩니다. 지도자만이 결정을 내리는 데 자유롭습니다. 187-188


제가 말하는 변화는 다름 아닌 유기체와 인격 전체를 향한 관심의 변화입니다. 즉 가치의 전환입니다. 하나의 새로운 철학적 틀입니다 새로운 생활습관입니다....우리가 하나의 철학을 수립하기 전까지는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 철학이란 우리가 자연의 해석자이자 변형자로서,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삶 - 있는 그대로의 자연이나 본래의 생물학적인 자아를 초월하는 삶 - 의 창조자로서, 기계를 밀어내고 인간을 우주의 바로 중심으로 복귀시켜 이 사회를 재조정할 수 있는 철학입니다. 인간은 지금 여기에 있는 피조물일뿐 아니라 무한과 영혼의 거울이기도 합니다....인간이 창조를 중단할 때 삶도 중단됩니다. 193-198

 

볕뉘.  그리스의 테크네란 말은 기술과 예술 모두를 아우르는 말이었다 한다. 기술이 삶을 압도하는 지금, 삶과 기술, 예술의 격벽을 허문다. 그 그릇안의 온도는 36.5도 인간의 따듯함이다. 씨앗이다. 세상이 바뀌는 삶의 시작이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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