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세대가 정보나 논리를 가지고 설명을 시도했다면, 수행적 세대는일관된 생각을 정리, 구성해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개방된글쓰기의 과정 자체를 재연reenact하려 한다. 

 지금의 청년세대가 생존을 위해 무척 보수적인 성향을 지니게 된 것은 이러한 시대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정치적 올바름‘PC, Political Correctness을 말하면서 공정함을 강조하지만, 그 공정함이라는 것이 수능대학수학능력시험처럼 수치화된 공정함이고, 이것이 서열화된 공정함‘이라는 모순을 만든다. 

젊은비평가층은자신이어떠한 방식으로 자리매김되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들은 수행성을 위해, 그리고 ‘박제화 되지 않기 위해 자신을 브랜딩branding하는 것을 피했다. 하지만 모순되게도 브랜딩을 피하는 행위 자체를 오히려 그들의 브랜딩으로 삼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경험했다.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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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 발생하는 원천은 자극이나 심지어 영감보다 더 강렬한 어떤 것이라고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술은 차라리 도발에 가까운 어떤 것에서 불붙는지도 모른다고, 단지 삶에 의존하는 데서 그치지않고 경우에 따라서는 삶에 의해 강제되는지도 모른다. 27쪽

보통 저는 예술의 형식에 대한 논의를 꺼내지 않습니다. 내용에 대한 논의도 마찬가지예요. 저에게 둘은 불가분합니다. 형식이란 형상화입니다. 즉 내용을물질적인 실체로 바꾸는 것, 내용을 다른 이에게 다가갈 수 있게 만드는 것, 내용에 영속성을 부여하는 것,
그리하여 내용을 인류에게 남기는 것입니다. 형식은자연의 우연한 만남만큼이나 다채롭습니다. 예술에서형식은 아이디어 자체만큼이나 다양해요. 1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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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ero‘ 展

프랑스 노년의 사상가는 68년 5월을 복기하며 여전히 우리는 같은 문제를 풀고 있는 ‘동시대인‘이라한다*. 수학자들이 이제서야 페르마의 정리를 풀어낸 것처럼.

어쩌면 그 문제를 풀려면 ‘0‘ 이 필요해. 수학사에서 0 이 필요했듯이. 정치는 그리 삼백년을 훌쩍 뒤지고 있다.고

자식이 부모 심경이 되어보지 않으면 그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듯, 삶을 두어볼 엄두라면 이해가 가까이 올까 봐. 사선에서 영점을 잡는 기분이랄까. 아마 그 노학자는 여전히.

어김없이 전시는 피지만 얘기는 자라지 못한다. 바닷가에서 시발된 전시는 제로 스티커만 아이들에게 찾으라 하겠지. 서울에서 뒤샹이 그리 처리된 것처럼 말이다.

*《반역이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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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연산‘


최복룡전,중앙아트홀,11.03까지


볕뉘. 오랜만의 휴식. 그림을 보고서야 풀렸다. 시립미술관도 들러 작품샤워를 간만에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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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 ] 깨달음과 즐거움 간의 모순을 해결하지 않고 둘 모두를 그대로 드러내는 힘은 말년의 양식의 특징이다. 반대 방향으로 팽팽하게 맞서는 두 힘을 긴장 속에 묶어둘 수 있는 것은, 오만한 태도를 버리고 오류 가능성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노년과 망명으로 인해 신중한 확신을 얻은 예술가가 가진 성숙한 주체성이다. 195

[ ] 그리고 그 땅이 설령 초라하다 할지라도 이타카는 자네를 속이지 않을 것이니, 많은 경험을 쌓아 현자가 되도록 하게. 그때가 되면 이타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게 될 것이네. 193 이상 7. 그 밖의 말년의 양식들에서

 



6.

[ ] 굴드의 연주는 워낙 독특해서 청자의 환심을 사거나 고독한 황홀경과 일상의 혼잡함사이의 거리를 좁히려는 시도를 전혀 하지 않는다. 대신 그의 연주가 의식적으로 노리는 것은 합리적이면서 동시에 즐거운 예술, 연주를 통해 작품이 여전히 작곡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예술을 대표하는 비평적 모델이 되려는 것이다. 175

[ ] 굴드가 몇 차례 중요한 기회를 통해, 자신이 연주라려고 선택한 바흐의 작품엔 뭔가를 생성해내는 뿌리 같은 면이 있다고 언급한 사실이다... ...굴드 본인은 생전의 청중과 사후의 청중은 물론 그를 개인적으로 알았던 사람에게도 대단히 고립된 인물, 독신에 우울증에 괴상한 습관이 있고 제멋대로이고 지적이고 낯선 인물로 여겨졌다. 어떤 의미로 보든 굴드는 어떤 공동체에도 속하지 않았고, 영향을 받은 음악가나 사상가도 없다. 그에 대한 모든 것이 관습적인 영토에서 벗어나 연주를 통해 자신의 거주지를 스스로 만들어가는 초연한 남자의 이미지를 드러낸다. 굴드가 바흐 음악을 풍성한 열매를 맺는 창조성의 보고로 여겼으면서 정작 자신은 자손도 없이 고립된 생활을 했던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174

[ ] 바흐의 음악이 기적적이라는 생각은 뒤로 물리고, 그 대신 바흐가 어떤 규칙은 지켜야 할 것으로 어떤 규칙은 무시해도 좋은 것으로 간주하고, 어떤 한계는 신성하게 받아들이지만 어떤 한계는 구속적이라며 버리고 어떤 기법은 생산적으로 보지만 어떤 기법은 쓸모없다고 무시하고, 어떤 아이디어는 존중하지만 어떤 아이디어는 낡은 것으로 치부하는 경향을 추적해보는 것이 더 생산적이면서 바흐의 자발적인 창안을 가정하는 미적모델로 존중하는 태도일 것이다. 171

[ ] 바흐 연주는 드러냄인 동시에 들어올림이 된다. 바흐에 있어 특정한 종류의 창안을 연주자가 포착하여 현대적 관점으로 재구성하는 것이다. 굴드가 이런 식으로 연주할 수 있었던 것은 놀라운 선견지명과 본능을 발휘하여 명인기적이면서 한편 담론적인 의미에서 지적이기도 한 다성음악 작법에 드러난 바흐의 창조성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169

[ ] 굴드는 활동 초창기부터 바흐의 건반악기 곡들이 한 가지 악기만을 위해 작곡된 것이 아니라 오르간, 하프시코드, 피아노 등 여러 악기로 연주하게끔 작곡되었거나, 푸가의 기법처럼 어떤 악기를 위해서도 작곡된 곡이 아님을 강조했다. 따라서 바흐는 관례나 관습, 혹은 시대정신이 요구하는 정치적 올바름과 분리된 채로 연주해도 무방하며, 굴드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런 것들을 무시해왔다. 둘째 당대의 바흐는 옛 교회 형식과 엄격한 대위법 규칙으로 회귀하려는 시대착오적인 작곡가이자 연주자였으면서, 동시에 고난도 작곡 기법과 과감한 반음계를 종종 구사했던 대담한 현대적 작곡가이기도 했다. ...굴드의 연주는 낭만주의 이전의 바흐로 돌아갔으며, 음악사운드를 소비의 대상이 아닌 엄밀한 분석의 대상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온전히 현대적이다. 167

[ ] 굴드는 젊은 졸업생들에게 음악이란 ˝체계적인 사고를 순전히 인공적으로 구성한 산물˝임을 깨달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여기서 인공적이라는 말은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긍정적인 의미로 ˝이면과 관련된 것˝을 나타낸다. ˝부분들로 나뉘 수 있는 일용품˝이 전혀 아니라 ˝부정을 통해 잘려나간 것, 부정의 공백에 맞설 수 있는 아주 작은 담보물˝이다. 그는 계속해서 우리가 정중해야 한다고, 다시 말해 부정이 체계와 비교할 때 얼마나 인상적인지 적절히 설명해야 하며, 이런 점을 명심할 때에만 졸업생들이 ˝창조적인 생각의 출처인 창안력을 계속적으로 공급받아˝ 두각을 나타낼 수 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창안은 체계 내에 확고하게 자리 잡고서 체계 바깥에 있는 부정에 조심스럽게 몸을 담그는 것이기 때문이다.˝ 165

[ ] 굴드가 1964년 경력의 정점에서 연주회 무대를 포기한 것은, 그가 여러 차례 밝혔듯이 아도르노가 그토록 거부했던 인공성과 왜곡을 피하기 위한 나름의 방법이었다. 굴드의 연주 스타일이 최상의 상황일 때면 아도르노가 토스카니니를 공박하며 말했던 원자화되고 앙상한 음악성과 정반대의 효과를 나타낸다....굴드는 콘서트 무대에서는 어쩔 수 없는 왜곡이 일어난다면 이를 피했다. 무대에서는 5층 발코니에 앉은 청중의 주목도 끌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무대를 완전히 떠났다. 164 이상 6. 지식인 비르투오소 에서

5.

[ ] 베토벤, 아도르노, 슈트라우스, 람페두사, 비스콘디는 - 이런 점에서는 글렌 굴드와 장 주네도 마찬가지다 - 음악 비지니스, 출판, 영화, 저널리즘이라는, 20세기 서구 문화를 확산시킨 거대한 규약들의 힘을 업신여기고 이용한다. 그들은 자의식이 무척 강하고 전문기술 또한 뛰어나지만, 그들의 작품에서 수줍어하는 기색은 찾아보기 어렵다. 비록 나이는 먹었지만 으레 수반되기 마련인 평온함이나 성숙함은 필요 없다는 듯이, 사랑스럽게 굴거나 환심을 사려는 생각은 없다는 듯이 군다. 그러나 이들 누구도 필멸을 부인하거나 회피하지 않는다. 오히려 죽음의 주제로 계속 돌아옴으로써 관습적인 언어와 미적인 것을 훼손하고 그 한계를 묘하게 넓힌다. 154

[ ] 아도르노는 베토벤이 칸트처럼 주관의 관점에서 궁극적인 존재론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는 대담한 주장을 한다. 즉, 그 작품은 사실상 ˝누군가가 속임수 없이 절대자에 대해 무엇을 어떻게 노래할 수 있는가˝하는 질문을 던진다는 것이다. 이어 아도르노는 장엄미사의 양식적 특징과 의고주의를 풍부한 상상력을 가동하여 분석한다. 음악의 움직임은 ˝표현되지 않은, 규정되지 않은 무언가를 향해˝ 뒷걸으미고, 그렇게해서 나온 딱딱한 양식과 애매함은 작품에 뭔가 마무리되지 않은 듯한 신비한 특징을 부여한다. 주관과 객관의 완연한 조화를 상실한 - 여기서 아도르노는 화해 불가능한, 영원히 풀리지 않는 내적 대립이 말년의 베토벤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특징임을 재차 확인한다. 이는 사실상 ˝배제의 작품, 영원한 포기의....작품이다.˝ 129 이상 5. 사라지지 않는 구질서의 매력에서

4.

[ ] 주네를 읽는다는 것은 결국 반항과 열정, 죽음과 재생이 서로 긴밀하게 얽힌 곳으로 끊임없이 돌아가는, 전혀 길들여지지 않은 그의 독특한 감수성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118

[ ] 주네는 늘 언어를 정체성과 진술을 나타내는 것에서 위반적이고 파괴적이며 심지어는 의도적으로 사악하기까지 한 배반의 양태로 변형시키고자 한다. ˝우리가 이런 ‘변형‘에서 ‘배반‘해야 할 명백한 필요성을 본다면, 이제 우리는 바람직한 것, 어쩌면 성애의 흥분에 필적할 만한 것을 배반하고 싶어질 것이다. 배반의 황홀함을 아직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황홀감에 대해 전혀 모른다고 해도 무방하다. ...주네의 글쓰기 목표는 맹렬한 반율법주의 성향을 지키는 것이다. 118

[ ] 정체성은 우리가 사회적 역사적 정치적 혹은 영적 존재로서 살아가면서 스스로에게 부과하는 어떤 것이다. 문화의 논리와 가족의 논리가 여기에 더해져서 정체성의 위력을 증대시킨다. 주네처럼 비행을 저지르고 격리되고, 또 권위를 위반하는 재능이 있고 이를 즐기는 사람은 그로 인해 자신에게 부과된 정체성의 희생자이므로, 그에게 정체성은 결연하게 반대해야 할 그 무엇이다....따라서 주네는 정체성을 넘나드는 여행자, 혁명적이고 끊임없이 자신과 무관한 대의명분에 기껑 몸 바치려고 밖으로 떠나는 관광객이다. 120

[ ] 주네는 정체성에 대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적대적인 인물이다. 그의 모든 노력은 엄정하면서도 우아하며, 가장 정연한 프랑스어 문체라고 했던 양식으로 표현된다. 그의 글에서는 단정치 못하거나 산만한 구석을 전혀 느낄 수 없다. 주네의 유목적 에너지는 정확하고 우아한 언어 속에 들어앉아 있다. 낭만적인 희망도 없고 흔히들 내비치는 불안도 없이 궤적을 그리며 돌 뿐이다. 그는 언젠가 이렇게 말했다. ˝천재는 절망을 통해 단련되는 것이다.˝ 121

[ ] 주네는 자신과 그의 인물들을 데려가려고 기다리고 있는 죽음이 작품 속의 ‘폭발적으로 타오르는‘ 격동의 소란에 개입하여 저지하거나 심각하게 훼손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이런 격동의 소란이야말로 작품의 핵심이자 신비스러운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영락없는 종교적 확신이 막판에 그토록 중요하게 부각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주네에게 악마든 신이든 절대자는 인간의 정체성이나 인격화된 신으로는 인식될 수 없고, 오직 모든 것이 말해지고 행해진 뒤에도 가라앉지 않는 것, 포섭되거나 길들여지지 않는 것으로만 인식된다. 126 이상 4. 장 주네에 대하여

 

 

 

 

 

 

 

 

 

볕뉘. 

 

1. 전시 뒤, 행사가 있어 재독을 하다보니 놓치고 있는 것이 많았다. 6년전 가을이었기도 하였고, 그가 말하는 바를 세밀히 뜯어보지도 않은 연유기도 했다. 

 

2. 장 주네를 읽는 것도(사이드가 말하는 책들은 번역이 다 되지 않은 것 같다) 그가 작품을 끝까지 밀어부치며 토해내는 것과 달리 삶은 차분하면서도 냉정하고, 그 경계를 명확히 갖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 작품은 다시 읽혀야 하는 것이다.

 

3. 뒷 장에서 말하는 인물들은 더 많기도 하며 더 중요하기도 하다. 카바피스의 시는 장소와 장소상실, 비장소성이라는 말들을 공부하며 체감하기도 한 사실들이 그대로 드러나 있어 놀랍기도 했다.

 

4. 굴드 역시 고독이라는 주제로 공부를 하면서 느낀 부분이기도 한데, 흔히들 남는 시간들을 주체하지 못하는 우리들이 꼭 넘어가야 할 지점이기도 하다. 한 시인이 말하지만 고독이라는 신발을 신으면 어디든지 갈 수 있다고 말하지만, 어느 누구도 스스로 주어진 시간을 참아내는 것도 배우려하지 않은 듯하다.

 

5. 토크 행사 텍스트 읽기가 있어 재독을 하게 되었는데, 여러모로 이 가을녘에 읽기엔 알맞은 것 같다. 인문, 삶의 무늬에 관심이 깊어진다면 서슴없이 책과 책 속의 책들을 읽어낸다면 분명 스스로를 뛰어넘을 방도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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