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여울 > 논 한마지기, 고등어 한손 그리고 난초 한촉(酌)

그래도 나아졌다는 희망. 제주어. 지역어 관련 책들도 연구자들도 많다는 사실. 더 멀리보지 못해 아쉬운 그때였군요. 더 세심히 알아가고 겪어가는 것들이 필요하다죠^^ 봄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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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여울 > 060425 사회건망증

더 나아진 것인가요 더 심해진 것인가요. 가늠은 슆지 않지만 되풀이 되고 있는 건 사실인 듯요. 좀 더 다른 삶을 살고 있나요. 너는 너로 살아가고 있는지. 스스로 되물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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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궤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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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 6. 정치 무대 - 포퓰리즘의 부상: 포퓰리즘적 국면이란 포퓰리즘이 뻗어 갈 수 있는 상황으로, 특정한 사회 분열이 시작되는 역사적 국면을 말한다. 정치, 경제, 문화의 균형이 흔들릴 때, 사람들의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통합이 더 이상 굳건하지 않을 때 생겨나는 국면이다. 이때 전 국민은 ˝사회적 홈리스˝ 신세가 된다. 186/감정들은 고정된 정치적 의미를 갖고 있지 않다. 진보적인 감정도, 퇴행적인 감정도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순전히 민주주의적인 감정도 전체주의적인 감정도 없다.....불의에 대한 분노는 좋다고 할 수 있더라도, 외국인을 향한 야만적인 분노는 부정적인 격저이다. 활동하게 하고 연결해 주며 참여하게 하는 긍정적인 감정도 없고, 늘 선동하거나 반대로 늘 움추러들게 만드는 명백히 부정적인 감정도 없다. 감정은 본래 정치적 실체가 아니다. 그러므로 감정은 처음부터 정치적인 것에서 어떤 의미를 함축하고 있지 않았다. 감정은 어느 방향에서도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감정은 원료이자 위험이다. 189/슬로터다이크가 분노은행이란 개념을 제시해서 분노라는 원료가 사회 변화를 위한 핵심 원료이자 동력임을 표현했고, 그 분노를 좌파정당에게 맡겼지만, 그 예금을 탕진했다고 한다....좌파 정당만이 감정의 저장고가 아니라, 모든 정당이 감정 은행이다. 그리고 그곳에 분노와 격노만 저장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공포, 희망, 아픔까지 더 많은 감정들이 저장된다. 감정은 채굴을 기다리는 지하자원처럼 그냥 거기 있는 것이 아니다. 감정은 또한 생산되고 재생산되며 갱신되거나 약화된다. 그러므로 감정의 집하와 유통만이 아니라 감정의 생산도 있다. 하나의 온전한 감정 경제계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감정 경제는 위기에 처했다. 감정을 관리하는 모든 은행들이 예금을 탕진한 것처럼 보인다. 190-191/

사회적 갈등은 단순하지 않고 과잉으로 규정되는데, 왜냐하면 이 갈등들은 나눌 수 있는 것과 나눌 수 없는 것, 이성과 감정, 합리와 비합리로 명확하게 나눌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상황을 민주주의 정치는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 결국 나눌 수 없는 갈등은 나눌 수 있는 갈등으로 완전히 번역되지 않는다. 정치적 평화는 개입을 감소시킬 수 있다. ˝그러나 개입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다.˝ 언제나 나눌 수 없는 나머지가 남아 있게 되고, 이 나머지는 끝나지 않을 정치 논쟁을 반복해서 요구한다. 그러므로 민주주의 정치는 나눌 수 있는 갈등으로 번역되는, 즉 나눌 수 있는 문제의 해답일 뿐 아니라 또한 특별히 다른 것이 있다. 그것은 감정이 걸려 있는 확신, 가치, 정체성, 문화와의 관계 맺기이며, 이 해결할 수 없는 나머지와 관계 맺기다. 198

/2차 세계대전이후 복지국가는 사람들에게 돈만이 아니라 사회적 권리가 있는 시민으로서의 정체성도 제공했다. 얼마나 대단한 권한과 권리 부여인가 가장 약한 사람들도 사회적 안전에 대한 권리를 갖게 되었다. 사회적 안전은 그들의 권리였다. 경제적 통합이 이렇게 상징적 통합이 되었다. 정체성을 제공하는 대단히 거대한 과정을 통해 사람들은 권리를 보증받게 되었고, 이 권리를 통해 존엄성을 갖게 되었다. 199포퓰리즘은 정확히 나눌 수 없는 것에 집중한다. 잃어버린 나눌 수 없는 것, 오늘날 정치적인 것의 중심에 자리 잡은 바로 그 나눌 수 없는 것, 곧 정체성에 집중하는 것이다. 포퓰리즘 전략은 왜 효과가 있을까? 우리가 정체성들이 더 이상 옛 안전 체계를 통해 보장받지 못하는 포퓰리즘적 국면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202/포퓰리즘이 욕망을 실제로 충족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굴욕이 정당화되는 것도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우익 포퓰리즘이 바로 여기에 들어와서 감정에 상처받은 자들의 변호인을 자처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위로는 엘리트에 대한 공격적인 분노와 아래로는 공격적인 인종 차별을 부추기는 변호인이다. 204

/찰스 테일러가 말했듯이 3세대 개인주의 시대에 우리는 어떤 감정을, ‘충만의 경험‘을 추구하고 있다. 이 상황에 맞는 예외적인 인물은 우리에게 충만의 순간을 살 수 있다고 말해주는 인물이다. 우리를 위해 그렇게 살 수 있다고 말해 준다. 이 전형적인 유형이 바로 팝스타다. 정치인 중에도 이런 스타가 있다. 그러한 지위를 자기 소유로 만들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 스타들은 바로 우리의 대리인이다. 팝스타는 우리를 대리하여 우리를 위해 산다. 우리를 대리하여 우리를 위해 우리가 살지 못하는 삶을 산다. 팝스타는 우리를 대리하여 우리를 위해 즐긴다. 어쨌든 팝스타는 우리가 모든 것을 승인해 준 자다. 208/ 정치에서 심오한 능력자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정치 경험도, 정치 기획도 필요 없다. 단지 음란한 나르시시즘이 필요할 뿐이다. 공적 공간에서 실현되는 나르시시즘, 트럼프는 자신의 청중을 대리하여 즐긴다. 그들이 실행할 수 없는 것, 그들이 실행하면 안 되는 것을 대리하며 즐긴다. 트럼프는 ‘그들을 위해‘ 어떤 부끄러움도 없이 자기애에 빠진 권능이라는 환상을 향유한다. 208/트럼프에 대한 환호는 단순한 권위에 대한 환호라기보다는 기생하며 즐기는 향유다. 트럼프가 공공의 영역에서 시끄러운 소리를 낼 때, 사람들은 그의 향유를 향유한다. 209

/포퓰리즘은 이 상처받은 이들의 관심 어린 호소에, 나뉠 수 없는 굴욕 같은 감정에 무대를 제공한다. 나뉠 수 없는 것들이 이상한 방식으로 표현되는 무대를 제공해 준다...이 무대를 우리는 감정공간이라고 명명할 수 있다. 210/포퓰리즘 우파는 감정 공간들을 상처, 두려움, 거부감에 맡겨 두고, 이 부정적 열정들이 사회에 존재하게 된다. 그러나 바로 우익 포퓰리즘이 이 열정들, 특히 일상에 존재하는 인종주의와 결합시켜서 이를 가장 먼저 정치적인 것으로 생산한다. 왜냐하면 포퓰리즘은 ˝거부감과 정서에 안정된 논의 틀과 사회적 정당성˝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211/가상의 위협에 대항하며 포퓰리즘이 가져오는 것은 파시즘의 경우와는 다르다. 초월적 요소가 없기 때문이다. 영광스러운 미래에 대한 약속도 없다. 포퓰리즘의 모든 것은 오직 지금 여기에서만 작동한다. 이렇듯 타자를 적으로 규정함으로써 본질적인 포퓰리즘적 상황, 즉 사회적, 정치적 예외 상황을 정당화하고 지속성을 유지한다. 이 상황에서 내면성을 넘어서지 않는 새로운 권위주의 권력이 번성하여, 지금 여기에서 사회를 지속적으로 동원한다. 219

/다원화는 형태와 영향권을 주조할 뿐 아니라 다원화가 거부되는 곳에서도 존재한다. 다원화는 다원화의 저항형태도 주조하여, 저항 형태들에도 다원화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렇게 포퓰리즘은 다원화에 반대하는 특별한 방어 형식이 된다. 다원화된 주체들, 감소된 자아들을 통한, 그리고 그들을 위한 방어 형식이다. 222/민주주의 정치는 실질적인 문제 해결에 더해 감정적 합의도 생산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감정을 다루는 정치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 방식은 긍정적이어야 한다 또한 정체성을 제공하는 정치가 필요하다. 정체성 제공이 단순히 절대자를 규정하는 반대편이 아니다. 포퓰리즘 수업의 결론은 정치가 정체성을 제공한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어떤 정체성을 제공하느냐인 것이다. 225

공유공간 만남광장; 외면적 안전은 더 이상 시대와 맞지 않다. 주의는 개인의 행동 안에 도달해야 한다. 이를 위해 교통 참여자들의 개혁이 필요하다. 참여자들은 배려와 주의의 원칙 그리고 함께라는 원칙을 내면화해야 한다...변화는 탈규제화를 통해 이루어진다. 배려심을 가지라는 호소로는 변하지 않는다. 탈규제는 주체의 불안감이 의도적이고 목적의식적으로 만든 생산물이다. 공간 기획자들은 모든 것이 열려 있다고 말한다. 공간의 형성을 통해, 예를 들어 분명하게 편입된 도로 공간을 누락시키면서 개인에게 완전히 의도된 불안감을 생성시킨다. 왜냐하면 이 불안감이 변화된 행동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개인들의 불안함이 보다 안전한 전체 상황을 만든다. 이것이 도로교통법의 역설적 효과다. 230


7.

[ ] 7. 정치적 올바름의 무대- 좌파와 우파의 정체성 정치: 너는 어느 편인가라는 질문은 더 이상 없다. 새로운 질문은 더 나아간다. 너는 누구냐?.....오늘날 우리는 아주 위급한 상황에서 살아간다. 지금은 따라서 사회적 분열 상황을 정확히 규정해야 할 정치적 요구의 시간이다. 냉전과는 달리 지금의 전선은 분명하지도 선명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전선은 단순히 우리 사회의 가장자리에 있지 않다. 전선은 우리 사회를 관통하여 놓여 있다. 더욱이 현재의 전선은 우리 사회를 관통하여 놓여 있다. 더욱이 현재의 전선은 분명하거나 선명하지 않고 또한 극단적으로 복잡하기 때문에, 바로 그래서 상황을 정확히 규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240/어떤 피해자의 개념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는지에 따라 사회를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사회가 어떤 동사와 연결되는지에 따라 분류될 수 있다. 바치다, 인정하다, 그리고 있다. 예컨대 ‘희생양으로 바치다‘라는 표현으로 신이나 조국을 위한 자기희생...전쟁이후 긍정적으로 점유된 피해자 개념이 등장했다. 내가 피해자다라는 발언을 하는 주체의 주체성 회복..페미니즘에서부터 반인종주의까지, 해방으로 가는 왕도라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이 둘이 아니라 그냥 단순히 피해자가 있다. 이런 동사 결합은 결코 긍정적 함의를 허락하지 않는다. 이 욕이 특별한 정체성적 특징과 연결되지 않는다는 점이다...이때 피해자는 실존적, 순수한 자신의 존재를 통해 피해자가 된다. 이런 피해자는 인권을 가진 포괄적인 인간-존재의 지위를 얻지 못한다...사회에 이런 피해자 자리가 있다는 것을 이 청소년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확신한다. 더 나아가 이 청소년들에게 피해자의 자리는 개인에게 그냥 배정될 수 있음이 확실해 보인다. 252-254

/사회문제는 순전히 물질적인 것이 아니다. 예전에는 사회 문제의 제기가 숫자를 말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았다. 사회 문제는 처음에 오히려 정체성 제공과 연결되었다. 계급 문제 또한 정체성 문제였다. 단순히 사회 복지의 혜택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한 권리를 갖는 것이 중요했다. 사회 국가와 분배는 처음에는 사람들을 자선의 수혜자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권리와 자부심이 있고, 사회적 인정을 받는 시민을 만드는 일을 의미했다. 예전에 좌파 정치와 사회 민주주의 정치는 한 사회 안에서 물질적 그리고 상징적 통합을 의미했다. 그러나 나중에 이 가르침은 망각되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그 후로 사회 민주주의는 온전히 나눌 수 있는 것에만 집중했다...좌파가 잊은 것은 물질적인 차원이 가져온 그 정체성이다. 왜냐하면 바로 이것을 포퓰리즘이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274-275 프로레타리아가 사라지고 백인 프랑스인으로, 백인 독일인으로, 백인 오스트리아인으로, 백인 남성으로 다시 돌아가는 전이 과정이다. 아직 백인 남성들의 굴욕 경험의 끝에 도달하지 않았다. 교육, 노동 그리고 엘리트 이외에도 백인 남성들은 반대편에서 또 다른 본질적 의미 상실을 경험한다. 권력자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피해자를 통해서도 그들은 굴욕감을 맛보는 것이다. 281

/다원화된 사회의 만남 구역에는 분명한 정체성을 지닌 헌법 애국주의자들이 아니라 제한된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돌아다닌다. 이들은 추상적인 시투아앵이 아니다. 시투아앵이 되기에 이들의 차이는 너무 구체적이다. 이들은 스마트폰을 손에 쥔, 본질적으로 고립된 단자들도 아니다. 이들은 만남을 통해 서로 변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만남 구역에서 사람들은 스스로를 ‘하나의 감소가 추가되는 존재‘로 경험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감소의 추가는 자기 정체성이 타인의 정체성에 의해 제한된다는 뜻이다. ‘긍정적인 함께가 아닌 오히려 부정적인 함께에 본질이 있는 새로운 방식의 전체‘로 사회를 완전히 새롭게 생각해야 한다. 이 결합은 특수주의들이 서로서로 상대화 하는 곳에 존재한다. 다원화된 주체들의 결합은 그들이 서로서로 경험하는 빠짐 혹은 공제 속에 존재한다. 290


볕뉘.

감정 공간은 늘 생겨나며 그 감정과 유사한 삶의 데이터를 모으고 그리 쏠린다. 감정 경제 역시 변증법의 사유 맥락에서 출구를 찾아 간다. 그 흐름들이 향하는 곳들에 예민해져야 하며 구별되지 않는 갈등을 미리 해결하는 것이 정치이기도 하다. 그 길목에 서성이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불안을 체험해서 서로 다른 나를 경험하게 만드는 일이다. 서로 다른 나가 되게 하는 일이다. 차별에 명민해지는 것, 차이는 낳는 불합리가 아니라 차이나 낳는 감정들에 밝아지는 것 닫힌 나가 아니라 하나 빠진 나로 관계맺기를 하거나 또 다른 사건들이 생겨야 감정도 이야기도 그 사이에 오밀조밀....또 다른 길을 걸어갈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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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 1. 과거- 동질 사회라는 환상: 한 사회의 동질화는 단순히 단일화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차이가 부차화된다는 데 가깝다. 더는 차이가 없다고 해서 사회가 동질화되는 것이 아니다. 차이가 우선순위에서 밀려날 때, 공통된 것 앞에서 차이가 부차화될 때 사회는 동질화한다. 민족 유형이 제공하는 이 공통된 것은 유사성의 원칙에 기초한다. 공통된 형상 속에서 민족의 모든 구성원은 서로를 알아볼 수 있다. ‘상상된 공동체‘는 이러한 유사성의 사회다. 24

[ ] 극장, 학교, 법원, 교회, 정당, 박물관 등이 모두 같은 기초를 갖는다. 마르크스의 표현을 빌려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그것은 다른 모든 색깔을 왜곡하는 전체 조명이며, 아주 특별한 마취제다˝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다. 그 모든 것이 같은 박자일 뿐 아니라 같은 소리로 조율되었다. 같은 소리로 조율된 이러한 일치, 자기 집을 다른 단어로 표현하면 환경이다. 환경이란 주위환경이다. 하나의 전체를,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는 환경. 민족의 경우 이 하나의 환경이 전국을 에워싼다. 26

2.

[ ] 2. 지금-다원화가 모든 것을 바꾼다.: 변화는 두 가지 차원에서 일어난다. 첫째는 소속의 변화이다. 즉 우리가 사회에 속하는 방식이 변한다. 둘째는 우리 자신의 정체성의 변화이다. 다원화는 타인과의 관계를 바꾸고 우리 자신과의 관계, 즉 우리가 자기 자신과 관계 맺는 방식도 변화시킨다. 37/ 당연함의 상실은 말하자면 ‘정상성‘의 상실이기도 하다. 이 말은 ‘정상‘이 무엇인지에 대해 더 이상 제시하거나 묘사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정상성‘을 정의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거대한 사회 권력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이렇게 말해야 한다. 정상성, 당연함은 단지 그 정상성의 형태가 통용되는 집단에 소속된 이들만을 위한 가치다. 다른 이들에게 정상성은 정상이 아니다. 정상성은 배제의 역학이자 제외의 역학이다. 우리는 환상을 가져서는 안 된다. 다양성은 기분 좋은 공존이 아니다. 42/가치논의는 언제나 기본 가치의 수용에 대한 논쟁으로 전환된다. 이민자들, 새로 온 자들은 우리의 기본 가치를 수용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완전히 잘못될 것이다. 민주주의는 기본 가치들로 허용의 범위를 정한다. 그러나 가치 논의에서는 새롭게 규정될 수 있는 가치 자체에 대해서는 토론하지 않는다. 기본 가치는 논의될 수 없고 질문할 수도 없는, 고정되고 확정된 데다가 본질화된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래서 가치에 대한 호소는 민주주의적 과정이 전혀 아니며, 대신 가치에 대한 복종이 주제가 된다. 43/동질 사회가 우리의 완전한 소속을 약속했다면, 그러니까 우리를 온전하게 만들어 주고 우리에게 완전한 정체성을 제공하기로 약속했다면 지금은 그 반대로 말할 수밖에 없다. 이질 사회, 다원화 사회, 다양성의 사회는 사람들이 이 사회에 더는 온전하게, 직접, 당연히 소속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질 사회는 또한 우리가 더 이상 같은 종류의 자아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예전처럼 같은 종류의 우리로 구성되지 않는다. 우리는 이제 온전하지 않다. 45/개인주의의 역사에서 1960년대는 전환점으로 부를 수 있는데 이 지점에서 2세대 개인주의가 시작된다. 2세대 개인주의는 기존 삶의 양식과 표현을 거부했으며, 자기만의 새로운 길을 택했다. 찰스 테일러에 따르면 이 여정은 ˝자기 진실적인 생활 형태와 표현 형태˝의 추구이다. 그래서 테일러는 2세대 개인주의 시대를 ˝자기 진실성의 시대˝라고 명명했다. 마이클 월저의 표현처럼 삶은 ˝개인의 프로젝트˝가 되었다. 이는 새로이 구별되는 개인주의일 뿐 아니라 1세대 개인주의와 완전히 반대다. 2세대 개인주의는 거대 체제의 침식과 정치적, 종교적, 계급 규정적 생활 세계의 종말을 알렸기 때문이다. 월저는 이 상황에 대해 결합 대신 프로그램상의 자유, ˝독립된 존재들의 무리˝가 출현했다고 말했다. 48/ 2세대 개인주의의 정치 즉 정체성의 정치는 원래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민족의 형상 안에 여성을 등록시키는 일 또는 동성애자를 등록시키는 일이 중요한 과제였다. 말하자면 다른 정체성을 온전한 정체성의 규범 안에 수용시키는 일이 중요했다. 이것은 정상성, 즉 무엇을 정상으로 여길지를 정하는 일에 관한 문제였다. 반면 다원화는 이와 크게 다르다. 다원화는 정치 운동이 아니라 목적없는 변화가 낳는 효과다. 다원화는 민족의 형상을 재규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민족 형상의 침식을 촉진한다. 55/누구도 국민을 체현할 수 없다. 누구도 체현된 형태로 국민을 대의할 수 없다. 클로드 르포르의 주장에 따르면 민주주의 사회에는 여전히 중심이 있지만(왜냐하면 권력의 장소라는 말이 다름 아닌 중심이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 중심은 텅비어 있다. 즉 민주주의의 중심은 비어 있는 자리다..오늘날 다원화와 함께 민주주의는 그 형상을 잃어버렸다. 이제 민주주의는 벌거벗었다. 56-57/ 3세대 개인주의(다원화 개인주의)는 개인의 분열, 우연성의 경험, 불확실의 경험, 원칙적인 개방성 등을 의미한다. 달리 말하면 3세대 개인주의는 우연이라는 요소가 심장으로 진입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연성에 대항하는 데서 생명을 얻는 정체성의 심장에 바로 이 우연성이 들어왔다. 58/ 더 이상 타자에게 정상의 기준을 제시할 수 없다. 나아가 우리는 스스로에게도 정상을 제시하지 못한다. 이 말은 우리가 더 이상 의문의 여지가 없고, 온전하며, 당연한 존재가 아님을 뜻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매일매일 우리가 완전히 다르게 살 수 있고,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한편 이러한 경험은 지금까지는 소수자의 전형적인 경험이었다. 소수자는 온전하고 완전한 정체성으로 살아갈 수 없었다. 소수자는 어떻게 주류 사회에 대응하여 균형을 잡을 수 있을지를 언제나 자문해야 했다...심리 정치적으로 볼 때 오늘날은 주류 사회도 소수자 사회처럼 기능한다. 오늘날에는 우리 모두 다양성과 다원성 곁에 서야 한다. 다양성은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우리 내면으로, 우리 자신의 전체 정체성에 진입했다...개인들에게 다원화가 미치는 의미를 번역한다면, 감소된 정체성이다! 오늘날 우리는 더 작은 자아다. 왜냐하면 우리는 작아졌고, 우리는 더 이상 당연한 우리가 아니며, 의문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완전하지 않은 자아이며, 오늘날 우리 자신의 개인적인 정체성은 언제나 우리와 완전히 다른 정체성에 연결된다. 60-61/지구도시...오늘날 시골 공간 자체가 도시화되었다. 도일적 생활 양식의 전형인 마을도 다원화되고 있다.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의 어느 외진 마을에 가도 터키식 길거리 케밥집이 있다. 어느 고향 마을에서나 ‘이곳 출신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그러니까 시골의 도시화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뜻이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날 도시는 거의 모든 시골을 장악했다. 다른 한편으로 도시로 들어온 시골 문화도 아무리 거대한 봉쇄막을 친들 변화와 변환을 피하지 못한다. 64-65

[ ] 우리는 어떻게 이런 다원화된 개인으로 함께 살 수 있을까? 왜냐하면 이 다원성에서 근본적인 새로움은 단지 우리 사회가 도덕적, 종교적으로 다양해졌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근본적인 새로움은 이제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세계관이 없다는 데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공통된 세계관도 없이, 공유하는 확신도 없이 다원화된 개인들인 우리가 함께 살 수 있을까? 70/ 사회가 제공할 수 있는 것은 ‘중립성‘뿐이다. 중립성은 구역, 공간, 공적 공간으로 구체화된다. 다양한 문화, 종교, 정체성이 한 사회를 ‘공유‘해야 하는 상황에서 서로 만나면 중립적인 공공 영역이 시급하게 필요하다. 사람들이 다양하고 다원화된 상태로 동등할 수 있는 영역, 중립적인 만남의 장소로서 공공 영역과 공적공간이 필요하다. 이 만남구역 bebegnungszone. 20킬로미터로 다닐 수 있으며 보행자의 안전을 우선하는 교통 구역. 이 만남의 장은 다름이 동등할 수 있는 다름의 공간이다..추상적인 영역에서만 실현된 다름이 동등하게 만날 수 있는, 추상적이지 않은 만남의 장이 필요하다. 70-71


3.

[ ] 3. 종교무대 - 다원화된 신앙인: 오늘날 우리는 신앙을 선택한다. 하나 또는 여러 개의 신앙을 개수와 상관없이 선택하는데, 핵심은 선택이다. 이 점이 과거 종교에 대한 이해와 완전히 다른 점이다. 선택은 세속적이기 때문이다. 세속 사회는 오늘날 종교 세계 옆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세속적인 것은 종교의 심장으로도 진입했다. 전승 안에서 배치되는 대신 자기 전통 혹은 외부 전통을 스스로 습득한다. 어떤 자리에 배치되는 대신 자기 힘으로 어떤 자리를 차지한다. 스스로 선택된 전통은(이 무슨 모순인가!) 과거 종교성과는 반대되는 효과를 낳는다. 세대라는 사슬에 배치되어 탈주체화되는 대신, 선택한 자아가 강화된다. 87

4.

[ ] 4. 문화무대-근본주의의 저항: 제 3의 개인주의가 가지는 특징은 보기보다 덜 추상적이다. 축제, 식생활, 의복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화와 종교의 병존은 자기 확신이나 정체성, 신앙 등 모른 것을 여럿 중 하나로 경험하게 한다. 그러므로 다원화는 경험이 먼저다. 자신의 정체성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경험이 다원화의 시작인 것이다. 이는 오늘날 자기 자신에게 결정이 필요하다는 경험이며, 자신의 삶과 세계 접근 방식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는 경험이다. 이 경험은 각자 정체성의 심장에 우연성이, 다시 말하면 개방과 불확실성이 침입함을 뜻한다. 이 심대한 경험은 오늘날 누구도 피할 수 없으며 모두에게 도달한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그러나 근본적으로 우리의 당연함을 변화시킨다. 106/오늘날 우리 모두는 다원화된 개인이다. 그러니까 자신의 정체성을 제한받는 개인이다. 그리고 바로 이 경험 안에서 새로운 무언가가 효력을 발휘한다. ‘다원화의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무언가가 작동한다. 106/다원화된 개인주의 시대에서 문화는 결코 훼손되지 않고 온전한 문화 재화들과 완전한 상징의 집합이 아니다. 문화는 오히려 불안정해진 상징과의 관계를 획득하려는 시도다. 다원화된 개인은 소수의 엘리트와는 달리, 전 지구 안에서 획득 가능한 완전한 상징들의 단순한 주인이 아니다. 다원화된 주체는 기껏해야 불완전한 상징과의 관계 속에서 불안정한 자율성과 권한을 얻을 수 있을 뿐이다. 135/소수자의 집단뿐 아니라 주류 집단에서도 발견된다. 소수자 집단의 전략은 봉쇄이며, 누구도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 주류 사회에서는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는 전략이 된다. 배제를 통해서만 생산될 수 있는 폐쇄된 정체성은 발전, 갈등, 문제에 언제나 같은 반응을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과도한 감정, 공격성, 그리고 자주 언급되는 공포가 반응의 지표들이다. 이런 반응들이 이성적인지 비이성적인지는 상관이 없다.139/정치 전선은 오늘날 포괄적인 ‘우리‘를 원하는 이들과 배타적인 ‘우리‘를 원하는 이들 사이에 놓여 있다. 이민으로 변화된 이민 이후 사회를 받아들이는 사람과 이민 이후의 현실을 수용하지 못하는 사람을 가로지른다.144


5.


[ ] 5. 정치무대 - 팬으로서의 참여: 미래를 향한 특정 요구들이 아니라 저항의 순간 자체가 중심이 된다. 사람들은 월가 점거 운동과 타르리르 광장에서 열리는 토론회, 위원회, 준비 모임, 총회, 청소, 응급 구호 등의 활동을 하면서 환호하고 웃었다. 정치적 에너지를 다른 배수구 없이 분출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적 순간, 실제 민주주의적 사건의 부활을 보기 때문에 환호한다. 정치적 에너지의 탁월한 원천인 분노는 규정된 길을 거부하고 자신들의 저항을 구성하는 방법으로 어찌 되었든 이곳에서 새로운 길을 뚫었다. ...민주주의는 ˝만족의 기계˝가 아니라‘ ˝불만족과 관계 맺기˝다. 153/만약 성공한다면 새 경험은 개인에게 참여한다는 느낌만 주는 게 아니라 또한 전형적인 경험이 된다. 다른 사람들도 이 경험에서 자신을 재인식할 수 있다. 이렇게 느낌의 실재는 효력을 발휘한다. 저항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을 지배하는 권력에 반대하면서 오직 자신들의 감정, 분노, 불평, 실망만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바로 이것이 풍부한 가치가 있고 민주주의 중심 원료다. 왜냐하면 감정은 3 세대 개인주의에서 특별한 기능을 하고, 대단히 중요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감정은 점점 더 기존의 배출구로부터 풀려나서 다원화된 주체들의 매개체가 되었다. 감정 안에서 사람들은 실제로 개별적인 개인이 된다. 157/원래 쾌락주의는 욕망에 적대적인 도덕을 향한 저항의 징표이자 해방의 울림으로 여겼다. 하지만 오래전의 쾌락주의는 그 반대편에 자리 잡았다. 실현과 성공을 통해 쾌락주의는 저향의 정신에서 빠져나와 참여와 소비의 도구이자 자본주의의 작동 원리가 되었다. 자본주이는 기능하는 노동력뿐아니라 즐기는 소비자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자본 축적에 대한 저항으로 생각되었던, 1967년에 나온 조르주 바타유의 개념인 ‘소비의 경제‘는 시장의 거대한 파티로 변환되었다. 168/민족은 언제나 현재를 과거와 연결 짓는 ˝기억의 공장˝이었다. 민족에서 이런 기능을 수행했던 거대 국민정당들은 그 이름에 이미 충동과 행복 지연을 내세우고는, 미래의 본질적인 지표를 세워 두었다. 그러나 정치적 쾌락주의는 완전히 현재에 정주했고, 지금 여기에서 성취하려고 한다. 이런 쾌락주의 정치는 현재 사회 질서가 변화 불가능하며 대안은 없다는 생각에서 생겨날 수도 있고, 마찬가지로 바로 지금 여기에서 정치적 교체를 이루려는 생각에서 나올 수도 있다. 정치적 대안 또한 더 이상 미래의 좌표가 될 수 없다. 요약하면 정치적 쾌락주의는 변화없이, 수직적인 계층 없이, 충동의 지연됨 없이 개인으로서 완전히 참여할 때 실현된다. 171/옛 계급 사회는 안정되고 분리된 구획을 갖고 있던 개인들에게 포괄적인 표현의 다양한 장을 제공했다. 조직, 적절한 정치적 대리, 언어, 심지어 노래까지 제공했다. 그것은 그 사회에 결합되기 위한 전체 의미 체계였다. 그러나 ˝온전한 개인 실존˝을 향해 노력하는 다원화된 개인의 시대에는 과거와는 달리 이런 통합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3세대 개인주의 시대에는 근본적으로 개인을 적절하게 대의하는 수단이 없다. 집단을 통한 대의는 오늘날 시민들의 정치적 욕구와 맞지 않는다. 사회 문제가 더 이상 없어서가 아니라, 그보다는 오늘날 사람들을 정치적으로 움직이고 건드리며 자극하는 것은 다른 무언가, 즉 완전 참여를 향한 열망이기 때문이다. 175-176/마크롱 - 이 형식과 모형이 바로 오늘날 시민들의 정치 욕구 및 욕망과 잘 맞았기 때문이다. 즉 참여에 대한 욕망이며, 인정을 향한 기대다.....단지 감소된 자아의 욕구에 접근하는 일이며, 이를 채우는 일이다. 이것은 옛날의 해방을 의미하지 않으며, 대신 새로운 의미의 인정을 뜻한다. 그리고 인정 이후 따라 나올 정치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ㅣ 않는다. 그러나 이 소망, 개인으로서 인정받고 자신의 특별함 안에서 개인으로서 인지도고 싶은 이 소망은 오늘날 삶의 형식과도 잘 맞는다. 우리 모두는 오늘날 개인으로서의 삶에 능통해야 한다. 그렇게 우리는 정치적인 것에서도 개인으로서 인정받기를 원환다. 177/ 여기에서 개인은 옛 자유주의의 개인, 즉 사인으로서의 개인이 아니다. 또한 옛 공화주의의 개인, 즉 동등한 존재로서의 시민도 아니다. 오히려 이 주체는 새로운 공적 존재로서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개인이다. ‘공적인 것‘으로서 개인의 등장이다. 이것이 다원화된 사회를 위한 정치 공식이다. 개인주의는 여기에서 공동을 위한 새로운 기초가 된다. 그리고 그렇게 다 함께, 조화를 이루며, 이 다양한 개인들은 계속 앙 마르슈(마크롱이 창당한 이름으로 전진이란 의미다) 중이다. 179

볕뉘.

무척 충격적이면서도 질서 정연한 책이다. 다 읽은 뒤 생각해보니 라디오 방송을 했고, 인터뷰와 긴 과정을 거쳐내고 난 뒤 만들어서 일 것이다. 다 옮겨적고 싶었는데 무리인 듯싶다. 다음에 다시 한번 남겨야겠다. 철학도서상, 미래의 책 10선에도 꼽혔다고 책갈피에 나와있다. 손색이 없을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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