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걸지. 네일아트처럼 꾸미지. 쇼울처럼. 두르지. 입술에 살랑살랑 바르지. 가십이나 구전이야.

그래 누군가가 문학은 총을 빵ㅡ쏘는 일이라고 했다지. 영혼을 겨냥하여. 누군가는 칼을 쓰는 일이라고 말야.

이젠 물렸어.

아무 쓸모도 없어 무우도 제대로 썰지 못하더군. 무뎌서 군더더기 투성이지.

그걸 차라리 머리띠로 둘러. ‘우린 바보다‘라고 붉은 띠를 서로 바라보게 하는 서스펜스가 낫겠어.

영혼의 살점 하나 베지 못하는 걸 상이나 주고받는 게 우습지. 그걸 대단하다며 소유권 재산권을 들먹이는 우둔까지.

그래 끊었네.

이러지 말자.

차라리 돌아가셔. 빵 ㆍㆍㆍ . 영혼을 겨냥한 소설처럼.

무수한 영화좀비들을 향해 . 그들의 삶을 겨냥해.
돈냄새도 없이 삶을 베어 스치는지도 모르게. 두고두고 아픔만 남게. 쓱.

볕뉘. 보지 말 것을. 우르르 몰려다니는 영화는 이제 접어야겠어. 문학이 훨씬 감동적이네요. 최근엔ㆍ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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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든 타인과 모든 시간을 껴안는 것이다. 395

[ ] 그는 잘 알려진 대로 어디에서도 강연한 적도 강의한 적도 없고 공식 석상에 나타난 적도 없으며, 그의 호소 또는 목소리는 전적으로 글로 씌어진 작품에서 울려나오고 울려퍼진다. 이상하게도 그의 작품을 읽으면서 우리는 어떤 친구, 모르지만 가깝게, 더할 나위 없이 가깝게 다가오는 한 친구의 움직임을 감지하게 되는 것이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증거하고 있듯이, 그 친구와 함께하고 있다는 강한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아마 블랑쇼 자신이 반복해서 강조했던 ‘모르는 자에 대한 우정‘에서 비롯되는 것인지도 모른다...블랑쇼는 작품을 통해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하고자, 1인칭 ‘나‘를 보여주고자 하지 않았다. 그는 거리 아무 데나 흩어져 있는 이름 없는 자들, ‘그들‘로 하여금 말하게 했을 뿐이었다. ‘그들‘, ‘나‘라고 말할 수 없는 자들, 어떠한 1인칭의 권력도 행사하지 못하는 자들, 다만 헐벗음으로만 그 권력을 거부하고, 그 권력에 저항할 수 있었던 자들. 필요하다면 결국 자신의 사라짐.지워짐을 긍정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침묵의 제3자들, 3인칭의 인간들. 284-285

[ ] 블랑쇼에 대해 말하고 쓰기 어려운 이유는, 개념적으로 붙잡을 수 없는 것, 오히려 예술 작품에서 살아 숨쉬는 어떤 것, 시간에 따라 순간 명멸하는 그것이 그의 사유를 이끌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사유는 아마 이데올로기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사유일 것이며, 원칙적으로 가르치거나 전파할 수 없는 사유이고, 결코 무기로 사용할 수 없는 사유이다. 그것은 권력화될 수 없는 사유이다. 287

[ ] 블랑쇼는 사회 문화 정치이론으로서의 포스트모더니즘과 관계없다. 그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문화 바깥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보다 정확히 말해 그가 향해 나아가는 지점은 모든 문화가 그 영향력을 상실하게 되는 곳이다. 그 지점은 죽음, 병, 고독, 추방 등 한계 상황 가운데 ‘나‘의 자기 동일성이 의문에 부쳐지는 지점이다. 그 지점은 모든 문화의 바깥이며, 가치체계를 가능하게 하는 세계, 구성적 담론, 예술의 문화 사회적 의미, 나아가 인간의 모든 의식적 가치 부여가 무효가 되는 곳이다. 그 지점은 다만 인간의 유한성이 극적으로 드러나는 장소, 불가능성의 장소, 죽음의 장소이다. ‘바깥‘, 문화 세계의 바깥을 말하는 블랑쇼의 사유는 일종의 비극적 사유, 세계에서 추방된 자의 사유이다. 그것은 나아가 하나의 이론 또는 담론에 가두어 둘 수 없는 오이디푸스의 신음이다. 293

[ ] 블랑쇼는 밝힐 수 없는 공동체에서 바타유, 낭시와 함께 내재주의와 전체주의를 넘어서 있으며 전체의 고정된 계획을 갖고 있지 않은 공동체의 가능성을 찾는다. 공동체 없는 공동체의 가능성. 기구 조직 이념 바깥의, 동일성, 정체성 바깥의 공동체의 가능성. ˝어떤 공동체도 이루지 못한 자들의 공동체˝(바타유)의 가능성. 이러한 공동체에서 나와 타인의 관계, 나와 타인의 함께 있음은 개체의 확대로서의 전체의 실현이 아니며, 전체에 종속된 개체의 의식에 기초하지 않는다...나와 타인의 관계는 개체나 전체의 어떤 본질을 전제하지 않으며, 다만 관계 그 자체에 의해서만 발생하며 개체의 영역으로도 전체의 영역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우리‘의 존재를 드러낸다. 295/블랑쇼는 이 이루기 힘든 공동체, 동일성에 근거를 두고 있지 않고 동일자의 억압을 거부하는 공동체, 오히려 타자의 발견과 차이의 발견으로 역설적으로 지속되는 밝힐 수 없는 공동체에 대한 요구가 나와 타인의 관계에서 취소될 수 없다고 본다. 나아가 이 공동체 없는 공동체에 대한 요구가 미래의 모든 정치적 구도의 설정에서 고려될 필요가 있다고 본다....타자와의 관계의 무한성이, 타자와의 관계가, 가시적인 계획 목적 기구 이념 철학에 따라 한정될 수 없음을, 고정화 사물화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296-297

[ ] 보다 높은 차원에서의 반사회성, 즉 상호간에 이익을 실현시키기 위해 협력하고 투쟁하는 개인들을 묶어 놓는 경제 원리에 입각해 있는 사회에 대립하는 반사회성, 우리의 내밀한 영혼에 호소하면서 경제적 차원 너머에서 삶의 의의와 죽음의 의의를 연결해서 소통의 통합 원리를 가져다부는 반사회성입니다. 그것은 이 세계에, 경제 원리에 종속된 이 사회에 대립하는 반사회성이지만, 보다 높은 지평에서 소통과 통합의 공동 영역을 연다는 점에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공동체성입니다. 299

[ ] 블랑쇼의 은둔은 너무 진부하다고 여길 수 있지만, 정치적 현장에서든, 다른 곳에서든, 어떤 정치적 문제와 결부되었든 아니든, 말 또는 글로 언어를 제시하기 전에 자신과의 대화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304/그러나 자신과의 대화에서, 그것이 진정한 것이라면, 그 전제나 귀결점은 결코 자기의식의 확신이나 긍정이 아니고, 오히려 자기의식과 모든 의식을 ‘벗어나는‘ 타자에 대한 음악적 공명입니다. 가령 타자의 눈물을 듣는 것이고, ‘그‘의 침묵을 납득하는 것이며, ‘그‘의 절규에 대해 절규하는 것이고, 한마디로 타자의 몸짓에 응답하는 몸짓입니다. 자신과의 대화는 어쨌든 실존의 익명적 공간에, 즉 ‘나‘의 것도 ‘너‘의 것도 아닌 공동의 공간에 기입되는 것이고, 거기로 열리는 것입니다. 305

[ ] 그의 은둔...결국 그가 문학을 통해 그 침묵을, 문화가 배제된 진공이 아니라 문화의 여백 또는 빈 공간인 언어의 자연을 최대한도로 보존하기 위해서입니다. ( 그의 이론이 아니라 그가 그 자연을 보존하려는 투쟁이 그의 글쓰기에 설득력을 줍니다.) 그가 은거했던 이유는 작가로서 그가 가질 수 있었던 문화적 사회적 권력을 최대한도로 무화시키면서 적극적으로 그 언어의 자연 스스로가 말하도록 내버려 두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309

[ ] 기다림 망각(언어의 현전): 그녀의 ˝부동의 현전˝은 보이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진공의 무가 결코 아니며, 부정할 수 없게 그를 가로질러 가는, 오직 들을 수밖에 없는 ‘말parole‘로 나타난다. 따라서 그녀는 그들의 관계가 온전하게 남아 있도록 하기 위해 그를 무한한 기다림 속에 놔두고, 그에게 ˝저는 당신에게 말하라고 요구하지 않아요. 들으세요. 다만 들으세요.˝라고 요구할 수밖에 없다. 어떤 현전은 시선으로부터 끊임없이 벗어나 다만 들을 수밖에 없는, 사실은 보이지 않을 뿐더러 귀에 들리지도 않는 ‘말-음악‘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 망각은 백지를 회수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음악을 듣는 것이다. 325

[ ] 보이는 것과 말하여진 것 사이에, 봄과 말함 사이에, 본 것과 기호들 사이에 진공의 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직선 위에서 움직이는 시간이 아니라 시간의 응축과 현전이, 즉 음악이 있다. 그 사이의 분리를 가져오는 언어는 다만 기억 속에 굳어진 죽음만을 초래하지 않으며, 그 분리 가운데에서 그 분리를 전응의 영원이 되지 못하게 만드는 순간의 현전을 가동시킨다. ˝현전은 다만 분리 속에 있지 않다. 현전은 분리 한가운데에로 또 다시 도래하는 바로 그것이다.˝ 331

[ ]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의 침묵은 기다림의 망각에서 나타나듯 완전히 언어를 차단하고 맹목적이거나 기계적으로 입을 다문다는 것이 아니다. 나아가 흔히 말하듯 ‘비굴하게 입을 다문다‘는 것이 아니다. 말해야 하며, 나아가 말로 절규해야 한다. 그러나 말과 절규의 배면에서, 들리는 말과 들리는 절규가 아닌 침묵이 말해야 한다. 침묵은, 즉 인간의 침묵 또는 언어의 침묵은 백지 상태로 돌아가거나 백지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어들의 열림이자 언어를 추진하는 동력이며 언어의 진정성을 보증하는 음악이며, 도한 말하는 ‘나‘와 타자를, 언어에 함께 연루되어 있는 글 쓰는 자와 독자를 잇는 통로이다. 335/ 그는 말을 한다는 것과 글을 쓴다는 것이 어떤 시점에서 관계에 내맡겨질 수밖에 없는 ˝주사위 던지기˝(말라르메의 표현)가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궁극적으로 언어를 통해 ‘나‘를 주장할 수 없고 오히려 ‘내‘가 바깥으로 뒤집어지고 ‘나‘ 자신을 맡길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나아가 언어가 규정된 사회적 관계를 넘어서는 단수적 관계 자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는 공동의 어떤 자이다. 336

[ ] 한 어린아이: 헤겔에 의하면 인간은 ‘아픈 존재‘이다. 이는 인간이 내적으로 자기 자신과 분리되어 있는 동시에 외적으로도 주어져-있는-존재(자연)와 분리되어 있으며, 그러한 한에서만 인간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고독, 언어가 만들어낸 고독, 인간의, 인간만의 고독, 그렇기 때문에 바타유는 코제브가 헤겔의 죽음에 대한 사유를 성찰하면서 내놓았던 해석을 다시 해석하는 자리에서 ‘언제나 의식 배후에 있는, 죽음의 슬픔˝이라고 썼던 것이다. 354

[ ] 바깥이 주는 공포, 또는 카오스의 글쓰기의 표현대로 ˝카오스의 위협˝. 사회로부터의 배제나 병듦이나 사랑 우정의 상실이나 경제적 토대의 붕괴나 정치적 사회적 아노미 상태의 경험 또는 블랑쇼 자신이 부각시킨 글쓰기의 시련과 같은 ‘심각한‘ 계기가 개입되는 상황에서 각각의 계기가 강요하는 어떤 특정한 고통(몸의 고통, 배고픔의 고통, 심리적 고통)은 존재론적(실존적) 고통으로 덧난다. 말하자면 바깥의 자연 또는 바깥이라는 자연은 ‘나‘의 모든 언어를 와해시키고자 하고, 그에 따라 ‘나‘의 의식적 자아를 붕괴시키려고 하지만, ‘나‘는 자신의 자아를 붙들고자 하고 보존하고자, 즉 ‘나‘의 언어를 지키고자 하는 것이다...자연과 문화 의식 사이의 틈(구멍, 심연) 속에 끼어 있는 찢긴 존재..356/굽어보면서 성찰할 시간을 확보한다는 것, 즉 시간 사이의 차이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시간의 시간성의 전개, 따라서 죽음의 시간성의 전개, 죽음의 유예, 죽음을 통과해 나가는 의식적 삶의 전개, ˝동물은 죽어간다. 그러나 동물의 죽음은 의식의 생성이다.˝ 만약 언어가 없었다면, ‘나‘는 기억의 지배를 받지 않았을 것이고, 시간의 시간성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며, ‘나‘의 종말, ‘나‘의 결정적 죽음을 예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359

[ ] 입이 틀어막힌 그 어린아이가 이제 ‘나‘를 대신해 ‘말하기‘ 시작한다. 즉 침묵을 침묵으로 드러내기 시작한다. 침묵의 현전으로서의 말, 모든 말의 원천으로서의 침묵, 모든 말의 근거를 되묻는 말, 이번에는 ‘그‘가 ‘나‘의 입을 틀어막고 침묵을 강요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언재나 죽어 있었던, 이미 죽은 줄 알았던 그 어린 아이가 ‘내‘ 안에서 다시 울기 시작하는 것이다. 절규 또는 죽은 자연의 침묵, 죽은 자연이 또다시 빠져 들어가는 침묵, 침묵의 침묵, 침묵으로 또다시 열리는 침묵. 371

[ ] 이론적 전체성을 믿고 추구했던 사상가들의 경우에도, 언어의 부정성이 갖는 한계에 대해, 진보 게몽을 향해 무한히 나아가는 언어의 부정성이 진보 계몽과 무관한 인간 안의 ‘자연‘과 불화를 일으키는 지점에 대해 탐색해 보지 않았다는 데에 있다. 그들이, 이론의 구축과 담론의 변증법적 완성 완결에 대한 열정에, 관념들의 확실성을 믿고 실현시키려는 광기에 눈먼 언어들이 자신들 안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러한 언어들 자체로 인해 스스로 자신들 안에 어떻게 갇히게 되는지 되돌아보지 않았다는 데에 있다. 377/ 가령 ‘내‘가 눈앞에서 여기 지금 고리치면서 짖고 있는 새까만 작은 이 개를 ‘개‘라고 부르자마자 ‘나‘는 세상에서 유일한 이 개를 즉시 ‘일반적인 개‘로 ‘네발짐승‘ 또는 ‘동물‘로 즉시 변형시킨다. 바로 여기 지금 생생하게 나타나는 단수적인 존재자를 언제 어디서나 동일한 하나의 관념에 종속시키는 것이다. 그것이 ‘언어가 살해한다‘는 말이 의미하는 바이다. 379

[ ] 나르시스를 이미 언제나 죽어 있는 경이로운 어린아이라고 보면서 블랑쇼는 포장하고 왜곡시키는 모든 가상을 걷어 내고 바로 벌거벗은 타자, 우리 모두의 타자에게도 접근한다. ‘사랑‘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든, ‘우정‘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든, ‘효심‘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든, ‘형제애‘라 부를 수 있는 것이든 어떤 벌거벗은 관계에서, 죽은 그 어린아이가 죽은채로 ‘우리‘의 죽음 가운데, ‘나‘ 아닌 ‘그‘ 또는 ‘그 누구‘의 죽음 가운데, 즉 불가능한 죽음 가운데 되살아난다. 그 죽음을 통해 그 어린 아니는 자신의 맨 얼굴을 드러낸다. 카오스의 경험, 그 경험될 수 없는 경험, 바깥에서의 시련, 바깥이 가져다주는 시련. 387

[ ] 그 어린 아이는 관계 내에 공간적 현전도 의식적 현전도 아닌 시간 자체의 현전으로 현시된다. 다시 말해 과거와 미래의 응집과 산개가, 시간의 전개인 동시에 영원의 전재가 관계 내에서 현시됨으로 공간화되는 것이다. 그 시간적 응집과 산개가 관계 자체를 이루는 것이다. 시간의 공간화, 동시에 공간의 시간화, 왜냐하면 관계를 극단의 시간성이 주재하기 때문이다. 관계가, 단순히 어떤 자들이 한 공간을 공유하기 때문이 아니라 과거와 미래가 이어지기 때문에, 공동의 시간이 스스로 펼쳐지고 응결되기 때문에 열리는 것이다. 관계가 ‘나‘의 시간과 타인의 시간이 이어짐 이외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는 것이다. 394

[ ] 몸은 고정되어 보이거나 잃기는 어떤 것이 아니고, 우리 각자 안에 속해 있는 어떤 부분일 수 없고, 움직임 가운데 있으며, 다만 그렇기에 ‘우리‘와 결부된다. 몸, 분리되어 있는 우리로 하여금 서로가 서로를 향해 있게 만드는, 서로를 서로에게 가깝게 다가가게 만드는 공동의 움직임, 따라서 공동의 몸, 공동의 몸을 통한 소통, 우리는 모두 불행한 찢긴 존재들에 지나지 않지만, 바로 그렇게 때문에 서로에게로, 또한 타자에게로 향해 무한히 나아가는 자들인 것이다. 여전히, 언제나 몸은, 언어로 인해 찢긴 존재의 원초적 불행 가운데 생성하지만, 언어를 통과해 가면서 그 자신을 현시시키고 그 공동의 불행 또는 결핍을 모두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찢김의 빛, 찢김으로 드러나는 영광, 찢김으로 인해 열리는 공동의 영역, 몸은 태고로부터, 가장 늙은 기억이 된 수 없는 그 어린아이로부터 이어져 온 과거의 시간을 글쓰기와 독서가 약속하는 가장 먼 미래의 시간 (미래에 도래할 책‘)에 중첩시켜 놓음으로써 무한에 응답하고자 한다. 404


볕뉘

부록에는 블랑쇼의 다른 책들을 소개한 글을 모아두었다. 흥미롭다. 기어이 책을 손에 대게 만드는 듯싶다. 읽고 같이 나눌 이들이 있으면 더 좋겠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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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에서, 박준상, 그린비

[ ] 블랑쇼를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문장들을 이해하고 그 의미들을 파악한다는 행위가 아니라, 결국 그 너머에서 어떤 사건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이고, 어떤 얼굴과 대면한다는 것, 어떤 눈물과 핏자국을 본다는 것, 결국 어떤 발자국 소리와 절규를 듣는다는 것이다. 그 결과, 블랑쇼를 한 번이라도 주의 깊게 들여다본 독자라면 누구나 느꼈을 수 있겠지만, 그의 사유를 정식화한다는 것이 매우 어려워지게 된다. 무언가 일어났지만 우리는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하나의 그림이고, 보다 정확히 하나의 음악.... 12/어떤 예술은, 어떤 음악은 우리로 하여금 침묵과 마주하게 함으로써 우리를 사건 자체에 되돌려 놓는다. 어떤 예술과 음악은 사건의 ‘순수성‘을 보존한다. 블랑쇼의 글쓰기는 사건에 충실한 글쓰기, 보다 정확히 말해 사건으로서의 글쓰기이다. 즉 음악으로서의 글쓰기. 14

[ ] 침묵의 밑바닥에 있는 그 사건을 가치와 의미의 측면에서 언어로 능동적으로 자발적으로 규정하고 고정시키려는 시도는 , ‘나‘ 아닌 것과의 만남이라는 그 사건의 급진성을 퇴색시킬 뿐만 아니라 나아가 그 사건 자체를 왜곡시킨다.....하나의 철학이나 담론을 전부라고 절대적으로 믿고 언어적 대립과 투쟁에 모든 것을 거는 것은 맹목성과 전체주의의 발로이다..그 와중에서도 침묵은 요구되며, 또한 우리에게 어느 순간 침묵과 함께하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말로, 언어로 세상과 우주를 창조한 신이 아니기 때문이며, 오히려 언어로 인해 한계 지어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 우리는 침묵에 들어가야만 한다...블랑쇼의 글쓰기는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문학을 통해 그 침묵으로 넘어가는 길을 가리킨다. 그리고 그 침묵을 듣고 보고자, 그 침묵과 만나고자 하는 욕망이 블랑쇼의 작품을 읽고자 하는 궁극적 욕망이다. 하지만 블랑쇼의 글쓰기가 말하게 하는 침묵은 결코 평온한 침묵, 평화의 침묵이 아니라 언어의 전쟁을 거쳐 나온 침묵, 요동하는 침묵, 어떤 고통을 가져오는 침묵이다. 17-18

[ ] 그 바깥의 사유는 ‘나‘와 타자 사이의 관계란 어떠한 것인가? 그것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궁극적 전망을 보여주며, 모든 사회적-이념적 계기 너머에서, 그 이하에서 인간의 헐벗음을 보여주는 급진적 관점을 제시하게 되는가? 이러한 물음들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 이러한 물음에 대한 대답을 통해 이르러야 할 것이 바로 블랑쇼의 사유에서 ‘정치적인 것‘ 또는 정치윤리적인 것이다...그것은 공표된 정치 이전의, 그 이하 또는 그 너머의 ‘나‘와 타인 사이의 관계의 양태를, 다시 말해 타자와의 관계의 사건을, 공동체의 드러남을, 인간들 사이의 나눔의 움직임과 소통의 급진적 양태를 지정한다. 22-23

[ ] 그에게서 ‘작품‘ 자체, 언어 자체 또는 ‘글쓰기‘는 어떤 움직임, 체계적으로 분석될 수 있고 내용과 형식의 결합으로 여겨지는 작품으로부터 끊임없이 벗어나는 표류의 움직임이다. 그 움직임은 문자로 씌어진 책 내부에서 발견되고 분석될 수 잇는 애용과 형식의 결합을 넘어서, ‘책 바깥에서‘, 쓰는 자와 읽는 자의 소통을 통해, 다시 말해 쓰는 자와 읽는 자의 작품의 공동구성을 통해 전개된다. 26

[ ] 시예술에 취미를 가지고 모든 위대한 시작품들을 하나하나 이해하며 읽는 독자가 아니다. 그들은 유일무이한 존재들이다. 작품 앞에서, 작품 안에서 저자와 독자는 동등하다...그러한 시실은 저자 못지 않게 독자도 ‘유일무이‘ 하다는 것을 말한다. 왜냐하면 독자 역시 시를 다시 말하여진 것, 이미 말하여진 것, 이미 이해된 것으로가 아니라 매번 전혀 새로운 것으로 말하기 때문이다. 작품의 매개를 통해, 작품 앞에서 독자와 저자는 동등하다. 독자와 저자는 평등하다. 왜냐하면 독자는 작가 못지 않게 근본적이고 급진적으로 작품의 경험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작품의 경험은 사실 문학의 모든 것이다. 작품은 완성되기 위해 저자와 독자의 대화의 사건을, 양자가 비인칭적 익명적 내밀성 가운데 만나는 사건을 요구한다. 결국 블랑쇼가 저자와 독자의 평등을 말하면서 확인하는 것은 작품을 통한 소통의 궁극적 무근거성(무차별성, 무정부주의), 말하자면 문학에 있어서의, 문학적 소통에 있어서의 민주주의이다. 268

[ ] 목소리가 사물들에 대해 말하여진 것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언어, 간단히 세계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언어이기 때문이다. 반면 목소리는 삶 가운데에서의 하나의 사건에, ‘나‘와 타인의 관계의 사건, 제3의 유형의 관계가 이루어지는 사건에 개입되는 한(목소리는 문학 작품에서의 어떤 언어이기 이전에, 삶 가운데에서 나타나는 타자의 몸짓과 얼굴이다) 삶에 대해 타율적이다. 블랑쇼는 살므이 모든 정치적 윤리적 요구로부터 거리를 두고 문학의 본질을 문학 내에서만 찾는 순수 문학 또는 심미주의적 문학을 주장하지 않는다. 목소리가 주도하는 작품 역시 삶으로부터 떨어져 긍정될 수 없으며, 따라서 삶에 대해 자율적인 것이 아니다. ˝글을 쓴다는 것, 삶과의 이 관계, 상관없는 그것이 긍정되는 우회를 통한 삶과의 이 관계˝ 작품은 책 속에서 사라져 가면서 스스로를 긍정하지만, 또한 작품은 스스로를 긍정하면서 삶을 긍정하고, 제3의 유형의 관계에, 우정에 영광을 가져오면서 스스로 사라져 간다. 블랑쇼가 작품의 무위 또는 작품의 부재를 말한다면, 그 이유는 작품이 제3의 유형의 관계를 여는 소통 가운데 소멸해 가기 때문이며, 작품이 결국 삶에 대해 자율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 소통은 삶에서의 정치적 윤리적 요구인 ‘우정‘이라는 요구에 대한 응답으로 이루어진다. 270-271/예술의 자율성 또는 자율적 예술에 대한 취소될 수 없는 요청이 언제나 삶에 의존하고 있음을, 따라서 삶에 대해 타율적임을 지적한다....유희충동은 소재충동과 형식충동의 조화로운 중앙이다. 예술만이 인간을 유희충동으로 열리게 해 조화로운 미적 존재로 도야시킬 수 있다는 것, 즉 인간의 미적 교육의 필요성에 대한 이 주장은 예술이 삶으로부터 독립되어 있다는 것을 말하기는커녕 반대로 예술이 자유로운 동시에 도덕적인, 한마디로 자율적인 인간을 형성해야 한다는 삶의 요구에 부응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271

[ ] ‘그‘ , 즉 ‘나‘와 타인 모두의 타자는 양자의 관계에서 하나를, 하나의 항을 지정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 자체를, 만남 자체를 지정한다. 다시 말해 ‘그‘는 우리가 연루되어 있는 탈존 자체, 사건 자체로서 어느 특정 개인에게도 귀속되지 않기에 ‘그‘를 전유할 수 있는 고정된 주체는 없다. ‘그‘는 우리 자체이자 어느 누구도 아니다. ‘그‘는 ‘나‘도 아니고 ‘너‘도 타인도 아니고 명사로 지칭될 수 있는 어떤 제3자도 아니며, 어쨌든 함께-있음이라는 탈존, 타인을 향한 외존, 결국 하나의 동사적 사건이다. 문학(작품)과의 연관하에 생각해본다면, ‘그‘는 작품에서 모든 이미지들이 수렴되고 있는 이미지이자, 작품에서 궁극적으로 감지되는 언어적 현시인 목소리에서 드러나는 익명적 인간의 탈존이자 만남의 사건이다. 목소리는 독자에게 ‘그‘를 공유하기를, 즉 유한성의 익명적 탈존을 나누기를, 간단히 타자로의 참여를, 메텍시스를 요구한다. 273

[ ] 우리로 향해 있는 목소리, 즉 ‘그‘ 도는 ‘그 누구‘인가의 목소리는 침묵의 절규, 자아와 자신과의 관계를 기준으로 인간의 본질 위에 설정된 모든 휴머니즘을 거부하는 ‘인간의 절규‘일 것이다. ˝따라서 ‘휴머니즘‘이란 무엇인가? ‘휴머니즘‘을 정의의 로고스와 결부시키지 않고 정의해야만 한다. 무엇으로 ‘휴머니즘‘을 정의해야 하는가? ‘휴머니즘‘을 언어로부터 가장 멀리 벗어나게 하는 것으로, 다시 말해 절규로, 궁핍의 절규 또는 이의제기의 절규, 단순한 침묵도 아니고 단어들로 표현되지도 않는 절규로, 비천한 절규, 또는 엄밀히 말해 씌어진 절규로, 벽에 그려진 그래피티로 278

[ ] 언어가 더 이상 사물과 세계를 통제하지 못하고 인간의 힘의 한게만을 가리키고 있는, 그러한 시간과 그러한 장소에서조차 또 다른 언어는 타인을 향해 열려 있고, 타인과의 관계를 다시 연다. 그 또 다른 언어, 즉 타인과의 관계를 여는 언어, 사물들과 세계를 관리하고 통제하는 능동적 언어에 앞서는 언어, 능동적 언어의 한계에서조차 타인을 향해 있는 언어가 시이며, 언어의 조건으로서의 언어, 모든 언어의 밑바닥을 이루는 언어, 모든 언어의 구원으로서의 언어이다. 그 또 다른 언어는 목소리 또는 절규이다. 279

볕뉘

입문서로 처음과 끝. 그리고 여러 책소개 글들을 챙겨본다. 밝힐 수 없는 공동체로 접한 적이 있긴 한데 좀더 가까이 가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 외국저자의 소개서보다 박준상저자의 글이 끌렸다. 책 속의 책 몇 권을 주문했고, 저자의 책도 보관해둔다. 언듯 선입견으로는 루쉰과 흡사한 것 같아 놀랍기도 하다. 2003년에 운명을 달리하였다고 하니, 일관되게 자신의 삶과 작품을 동일선상에 놓고 변주해낸 것은 아닌가 싶다. 가까이 갈 일들로 설레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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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월‘

친해보려던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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