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에서, 박준상, 그린비

[ ] 블랑쇼를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문장들을 이해하고 그 의미들을 파악한다는 행위가 아니라, 결국 그 너머에서 어떤 사건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이고, 어떤 얼굴과 대면한다는 것, 어떤 눈물과 핏자국을 본다는 것, 결국 어떤 발자국 소리와 절규를 듣는다는 것이다. 그 결과, 블랑쇼를 한 번이라도 주의 깊게 들여다본 독자라면 누구나 느꼈을 수 있겠지만, 그의 사유를 정식화한다는 것이 매우 어려워지게 된다. 무언가 일어났지만 우리는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하나의 그림이고, 보다 정확히 하나의 음악.... 12/어떤 예술은, 어떤 음악은 우리로 하여금 침묵과 마주하게 함으로써 우리를 사건 자체에 되돌려 놓는다. 어떤 예술과 음악은 사건의 ‘순수성‘을 보존한다. 블랑쇼의 글쓰기는 사건에 충실한 글쓰기, 보다 정확히 말해 사건으로서의 글쓰기이다. 즉 음악으로서의 글쓰기. 14

[ ] 침묵의 밑바닥에 있는 그 사건을 가치와 의미의 측면에서 언어로 능동적으로 자발적으로 규정하고 고정시키려는 시도는 , ‘나‘ 아닌 것과의 만남이라는 그 사건의 급진성을 퇴색시킬 뿐만 아니라 나아가 그 사건 자체를 왜곡시킨다.....하나의 철학이나 담론을 전부라고 절대적으로 믿고 언어적 대립과 투쟁에 모든 것을 거는 것은 맹목성과 전체주의의 발로이다..그 와중에서도 침묵은 요구되며, 또한 우리에게 어느 순간 침묵과 함께하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말로, 언어로 세상과 우주를 창조한 신이 아니기 때문이며, 오히려 언어로 인해 한계 지어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 우리는 침묵에 들어가야만 한다...블랑쇼의 글쓰기는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문학을 통해 그 침묵으로 넘어가는 길을 가리킨다. 그리고 그 침묵을 듣고 보고자, 그 침묵과 만나고자 하는 욕망이 블랑쇼의 작품을 읽고자 하는 궁극적 욕망이다. 하지만 블랑쇼의 글쓰기가 말하게 하는 침묵은 결코 평온한 침묵, 평화의 침묵이 아니라 언어의 전쟁을 거쳐 나온 침묵, 요동하는 침묵, 어떤 고통을 가져오는 침묵이다. 17-18

[ ] 그 바깥의 사유는 ‘나‘와 타자 사이의 관계란 어떠한 것인가? 그것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궁극적 전망을 보여주며, 모든 사회적-이념적 계기 너머에서, 그 이하에서 인간의 헐벗음을 보여주는 급진적 관점을 제시하게 되는가? 이러한 물음들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 이러한 물음에 대한 대답을 통해 이르러야 할 것이 바로 블랑쇼의 사유에서 ‘정치적인 것‘ 또는 정치윤리적인 것이다...그것은 공표된 정치 이전의, 그 이하 또는 그 너머의 ‘나‘와 타인 사이의 관계의 양태를, 다시 말해 타자와의 관계의 사건을, 공동체의 드러남을, 인간들 사이의 나눔의 움직임과 소통의 급진적 양태를 지정한다. 22-23

[ ] 그에게서 ‘작품‘ 자체, 언어 자체 또는 ‘글쓰기‘는 어떤 움직임, 체계적으로 분석될 수 있고 내용과 형식의 결합으로 여겨지는 작품으로부터 끊임없이 벗어나는 표류의 움직임이다. 그 움직임은 문자로 씌어진 책 내부에서 발견되고 분석될 수 잇는 애용과 형식의 결합을 넘어서, ‘책 바깥에서‘, 쓰는 자와 읽는 자의 소통을 통해, 다시 말해 쓰는 자와 읽는 자의 작품의 공동구성을 통해 전개된다. 26

[ ] 시예술에 취미를 가지고 모든 위대한 시작품들을 하나하나 이해하며 읽는 독자가 아니다. 그들은 유일무이한 존재들이다. 작품 앞에서, 작품 안에서 저자와 독자는 동등하다...그러한 시실은 저자 못지 않게 독자도 ‘유일무이‘ 하다는 것을 말한다. 왜냐하면 독자 역시 시를 다시 말하여진 것, 이미 말하여진 것, 이미 이해된 것으로가 아니라 매번 전혀 새로운 것으로 말하기 때문이다. 작품의 매개를 통해, 작품 앞에서 독자와 저자는 동등하다. 독자와 저자는 평등하다. 왜냐하면 독자는 작가 못지 않게 근본적이고 급진적으로 작품의 경험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작품의 경험은 사실 문학의 모든 것이다. 작품은 완성되기 위해 저자와 독자의 대화의 사건을, 양자가 비인칭적 익명적 내밀성 가운데 만나는 사건을 요구한다. 결국 블랑쇼가 저자와 독자의 평등을 말하면서 확인하는 것은 작품을 통한 소통의 궁극적 무근거성(무차별성, 무정부주의), 말하자면 문학에 있어서의, 문학적 소통에 있어서의 민주주의이다. 268

[ ] 목소리가 사물들에 대해 말하여진 것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언어, 간단히 세계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언어이기 때문이다. 반면 목소리는 삶 가운데에서의 하나의 사건에, ‘나‘와 타인의 관계의 사건, 제3의 유형의 관계가 이루어지는 사건에 개입되는 한(목소리는 문학 작품에서의 어떤 언어이기 이전에, 삶 가운데에서 나타나는 타자의 몸짓과 얼굴이다) 삶에 대해 타율적이다. 블랑쇼는 살므이 모든 정치적 윤리적 요구로부터 거리를 두고 문학의 본질을 문학 내에서만 찾는 순수 문학 또는 심미주의적 문학을 주장하지 않는다. 목소리가 주도하는 작품 역시 삶으로부터 떨어져 긍정될 수 없으며, 따라서 삶에 대해 자율적인 것이 아니다. ˝글을 쓴다는 것, 삶과의 이 관계, 상관없는 그것이 긍정되는 우회를 통한 삶과의 이 관계˝ 작품은 책 속에서 사라져 가면서 스스로를 긍정하지만, 또한 작품은 스스로를 긍정하면서 삶을 긍정하고, 제3의 유형의 관계에, 우정에 영광을 가져오면서 스스로 사라져 간다. 블랑쇼가 작품의 무위 또는 작품의 부재를 말한다면, 그 이유는 작품이 제3의 유형의 관계를 여는 소통 가운데 소멸해 가기 때문이며, 작품이 결국 삶에 대해 자율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 소통은 삶에서의 정치적 윤리적 요구인 ‘우정‘이라는 요구에 대한 응답으로 이루어진다. 270-271/예술의 자율성 또는 자율적 예술에 대한 취소될 수 없는 요청이 언제나 삶에 의존하고 있음을, 따라서 삶에 대해 타율적임을 지적한다....유희충동은 소재충동과 형식충동의 조화로운 중앙이다. 예술만이 인간을 유희충동으로 열리게 해 조화로운 미적 존재로 도야시킬 수 있다는 것, 즉 인간의 미적 교육의 필요성에 대한 이 주장은 예술이 삶으로부터 독립되어 있다는 것을 말하기는커녕 반대로 예술이 자유로운 동시에 도덕적인, 한마디로 자율적인 인간을 형성해야 한다는 삶의 요구에 부응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271

[ ] ‘그‘ , 즉 ‘나‘와 타인 모두의 타자는 양자의 관계에서 하나를, 하나의 항을 지정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 자체를, 만남 자체를 지정한다. 다시 말해 ‘그‘는 우리가 연루되어 있는 탈존 자체, 사건 자체로서 어느 특정 개인에게도 귀속되지 않기에 ‘그‘를 전유할 수 있는 고정된 주체는 없다. ‘그‘는 우리 자체이자 어느 누구도 아니다. ‘그‘는 ‘나‘도 아니고 ‘너‘도 타인도 아니고 명사로 지칭될 수 있는 어떤 제3자도 아니며, 어쨌든 함께-있음이라는 탈존, 타인을 향한 외존, 결국 하나의 동사적 사건이다. 문학(작품)과의 연관하에 생각해본다면, ‘그‘는 작품에서 모든 이미지들이 수렴되고 있는 이미지이자, 작품에서 궁극적으로 감지되는 언어적 현시인 목소리에서 드러나는 익명적 인간의 탈존이자 만남의 사건이다. 목소리는 독자에게 ‘그‘를 공유하기를, 즉 유한성의 익명적 탈존을 나누기를, 간단히 타자로의 참여를, 메텍시스를 요구한다. 273

[ ] 우리로 향해 있는 목소리, 즉 ‘그‘ 도는 ‘그 누구‘인가의 목소리는 침묵의 절규, 자아와 자신과의 관계를 기준으로 인간의 본질 위에 설정된 모든 휴머니즘을 거부하는 ‘인간의 절규‘일 것이다. ˝따라서 ‘휴머니즘‘이란 무엇인가? ‘휴머니즘‘을 정의의 로고스와 결부시키지 않고 정의해야만 한다. 무엇으로 ‘휴머니즘‘을 정의해야 하는가? ‘휴머니즘‘을 언어로부터 가장 멀리 벗어나게 하는 것으로, 다시 말해 절규로, 궁핍의 절규 또는 이의제기의 절규, 단순한 침묵도 아니고 단어들로 표현되지도 않는 절규로, 비천한 절규, 또는 엄밀히 말해 씌어진 절규로, 벽에 그려진 그래피티로 278

[ ] 언어가 더 이상 사물과 세계를 통제하지 못하고 인간의 힘의 한게만을 가리키고 있는, 그러한 시간과 그러한 장소에서조차 또 다른 언어는 타인을 향해 열려 있고, 타인과의 관계를 다시 연다. 그 또 다른 언어, 즉 타인과의 관계를 여는 언어, 사물들과 세계를 관리하고 통제하는 능동적 언어에 앞서는 언어, 능동적 언어의 한계에서조차 타인을 향해 있는 언어가 시이며, 언어의 조건으로서의 언어, 모든 언어의 밑바닥을 이루는 언어, 모든 언어의 구원으로서의 언어이다. 그 또 다른 언어는 목소리 또는 절규이다. 279

볕뉘

입문서로 처음과 끝. 그리고 여러 책소개 글들을 챙겨본다. 밝힐 수 없는 공동체로 접한 적이 있긴 한데 좀더 가까이 가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 외국저자의 소개서보다 박준상저자의 글이 끌렸다. 책 속의 책 몇 권을 주문했고, 저자의 책도 보관해둔다. 언듯 선입견으로는 루쉰과 흡사한 것 같아 놀랍기도 하다. 2003년에 운명을 달리하였다고 하니, 일관되게 자신의 삶과 작품을 동일선상에 놓고 변주해낸 것은 아닌가 싶다. 가까이 갈 일들로 설레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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