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바라기 노리코
[ 1 ] 네 감수성 정도는 - 파삭파삭 말라가는 마음을/남 탓하지 마라/스스로 물주기를 게을리해놓고//서먹해진 사이를/친구 탓하지 마라/유연한 마음을 잃은 것은 누구인가//짜증 나는 것을/가족 탓하지 마라/모두 내 잘못//초심을 잃어가는 것을/세월 탓하지 마라/애초부터 미약한 뜻에 지나지 않았다//안 좋은 것 전부를/시대 탓하지 마라/희미하게 빛나는 존엄의 포기// 네 감수성 정도는/ 스스로 지켜라/바보야//
[ 2 ] 벚꽃 - 올해도 살아서/벚꽃을 보고 있습니다/사람은 평생에/몇 번 벚꽃을 볼까요//기억한 게 열 살 무렵부터라면/아무리 많이 잡아도 일흔 번 정도/서른 번 마흔 번 보는 사람도 많겠지/너무 적네//더 많이 보는 기분이 드는 건/선조의 시각도/섞이고 포개져 자옥해지기 때문이겠지요//곱다고도 수상하다고도 이상하다고도/할 수 있는 꽃의 색/흩날리는 벚나무 아래를 한적히 걸으면/한순간/명승처럼 깨닫게 됩니다/죽음이야말로 정상 상태/생은 사랑스러운 신기루라고//
[ 3 ] 내가 가장 예뻤을 때 - 내가 가장 예뻤을 때/거리는 꽈르릉하고 무너지고/생각도 못한 곳에서/파란 하늘 같은 것이 보이곤 했다//내가 가장 예뻤을 때/주위의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공장에서 바다에서 이름도 없는 섬에서/나는 멋 부릴 기회를 잃어버렸다//내가 가장 예뻤을 때/아무도 내게 다정한 선물을 주지 않았다/남자들은 거수경례밖에 몰랐고/순수한 눈짓만을 남기고 다들 떠나버렸다//내가 가장 예뻤을 때/내 머리는 텅텅 비었고/내 마음은 무디어졌으며/손발만이 밤색으로 빛났다//내가 가장 예뻤을 때/내 나라는 전쟁에서 졌다/이런 엉터리 없는 일이 있느냐고/블라우스의 소매를 걷어 올리고 비굴한 거리를 쏘다녔다//내가 가장 예뻤을 때/라디오에서는 재즈가 넘쳤다/담배연기를 처음 마셨을 때처럼 어질어질하면서/나는 이국의 달콤한 음악을 마구 즐겼다//내가 가장 예뻤을 때/나는 아주 불행했다/나는 무척 덤벙거렸고/나는 너무도 쓸쓸했다//그래서 결심했다 될수록 오래 살기로/나이 들어서 굉장히 아름다운 그림을 그린/프랑스의 루오 할아버지처럼/그렇게...
[ 4 ] 지천명 - 어떤 사람이 와서/이 꾸러미의 끈 어떻게/푸느냐고 묻는다//어떤 사람이 와서/뒤엉킨 실 묶음/어떻게 좀 해달라고 한다//가위로 자르라고 조언하지만/싫다고 한다/할 수 없이 돕는다 꼼지락 꼼지락//살아있는 인연으로/이런 것이 살아있다는/그런 것인가 그렇지만 별로//휩쓸리고/휘둘려/지치고 지쳐//어느 날 갑자기 깨닫는다/어쩌면 아마/수많은 친절한 손이 도와주는 것이다//혼자서 처리해 왔다고 생각하는/나의 여러 연결점에서도/여태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티 내지 않고//
[ 5 ] 뒤처짐 - 뒤처짐/화과자 이름으로 붙이고 싶은 상냥함/뒤처짐/지금은 자조나 덜 떨어졌다는 의미/뒤처지지 않기 위한/바보 같고 슬픈 수행/뒤처진 것에/매력과 분위기가 있는 것인데/뒤처진 열매/한가득 포용할 수 있는 것이 풍족한 대지/그렇다면 네가 뒤처져라/네 여자로서는 이미 뒤처졌지요/뒤처지지 않고 앞서서/우걱우걱 먹히지 않겠다/뒤처짐/결과가 아니라/뒤처짐/화려한 의지로 존재하라//
[ 6 ] 기대지 말고 - 더 이상/야합하는 사상에는 기대고 싶지 않다/더 이상/야합하는 종교에는 기대고 싶지 않다/더 이상/야합하는 학문에는 기대고 싶지 않다/더 이상/어떠한 권위에도 기대고 싶지 않다/오래 살면서마음 속 깊이 배운 건 이 정도/내 눈 귀/내 두다리만 선들/무슨 불편이 있으랴/기댄다고 한다면/그저/의자 등받이뿐
볕뉘
0. 동네 미술관에 갔다가 한 작품에서 우연히 이탁오를 다시 만났고, 그 곁에 이바라기 노리코의 시가 함께 있었다. 궁금증을 참을 길이 없어 구하니 제법 시간이 걸린 뒤에 도착하였다.
1. [6]의 기대지 말고라는 시는 이 책에는 없다. 소녀감성을 자극하려는 듯 사진과 발췌한 시들만이 이렇게 담겨있다. 기대지 말고라는 원서를 곧 구입하게 될 듯싶다.
2. 감수성/벚꽃/뒤처짐. 버티다가 총회 뒤풀이를 다녀왔다. 인사는 해야할 것 같은, 어쩌면 지천명을 지나 그 관계의 끈이 도드라져서 일수도 있을 것이다. 어쩔 수 없이 그 틀로 사고하고 사유하고 삶을 꾸려나갈 수밖에 없다는 걸 몸이 먼저 밀고가는 듯이 가서 사람들을 만났다. 진눈깨비는 오고, 비는 내리고... ....
3. 그리고 밤늦게 헤어지면서 참 욕심의 밑절미나 미련같은 것이 남아있구나 하는 한숨도 나왔다. 모임의 관성이라든가, 고민의 이력이나 생각의 이력이 보이지 않음을 얕은 취기가 생각을 밀어부치는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통증은 다음 날 책선배의 만남과 낮술에 조금 달래졌다.
4. 이바라기 노리코의 삶을 알지 못한다. 윤동주의 시를 일본 교과서에 3편이나 실리게 한 장본인이라고 한다. 그리고 죽음이후마저도 깨끗한 무엇이 들어있는 것 같다.
5. 동백꽃이 무척 보고싶다. - [2] 벚꽃은 사실 무척 쓰고 싶던 문구였다. 쓰면 선을 넘는 것은 아닌지 싶기도 하였는데, 이리 마음을 미리 펴놓은 것을 알고 놀랍고 기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