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는 피부

[ ] 피부는 단순한 자루도 중추를 섬기는 말단도 아니다. 피부와 뇌는 계층적인 관계가 아닌 기하학적 관계로 이해할 수 있다. 피부는 종속적이지 않다. 피부를 뇌의 확장으로서, 뇌를 개켜놓은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본질은 피부에 있다. 따라서 촉각문화가 중요시되는 것은 현실의 존재가 아닌 현실의 생성에서다. 24

[ ] 보스니아 비극: 비전투원의 대량학살도 처음부터 설정된 목적이다. 이 전쟁의 특징인 교회나 학교, 도서관의 조직적인 파괴는 모두 공생의 기억을 말살하기 위한 것에 다름 아니다....공생을 부정한 곳에서 증식의 이미지는 과장된다. 모든 파시즘의 알이 부화하는 조건이다. 63

[ ] 피복생활에 익숙해 있는 우리의 피부가 본래의 촉각을 충분히 견지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불용기관의 능력은 일반적으로 후퇴한다. 살아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옷을 입고 지내는 우리 피부의 감도가 얼마만큼 둔화되어 있을지 적잖이 걱정된다. 149

[ ] 묘사되어 있는 것이 눈에 보이는 것뿐만은 아닐 것이다. 더할 나위 없이 자유스런 선의 리듬은 그들의 다성음악과 관계가 있음에 틀림없다. 그 발성법과 호흡법, 그것을 살려내는 신체의 움직임이 선이 되고 면이 된다. 숲의 정령에게 바치는 노래의 파동을 그려 넣는다. 그것은 그들의 생활이 그렇듯이 고도로 세련된 감각의 기보법이자 진정으로 자유스런 피부감각을 낳을 수 있는 가장 섬세한 세계의 약도다. 이러한 세계에 산다면 어떤 느낌이 들까. 거미줄의 작은 떨림을 느끼듯 정글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닐까. 그 감각에는 우리가 여섯 번째에 두고 가버린 감각의 종잡을 수 없음이나 애매함은 없을 터이다. 왜냐하면 생존이 어려운 정글에서 생과 사를 나누는 것은 그 감각이기 때문이다. 163

[ ] 부정할 수 없이 촉감은 타자와의 관계를 전제하는 감각이다. 결국 미적 인식은 타자의 통증에 대한 반응으로부터 출발하며 그 반응은 곧 책임이라는 레비나스의 성찰 또한 몸이 드러내는 감정, 즉 얼굴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282

볕뉘.

0. 손을 그리고 싶다. 그런다고 손을 잘 그릴 수는 없다. 손으로 손을 그려야만 손의 뇌는 두터워진다. 손이 기억할 때까지 그려내야만 하는 것이다. 손은 몸이다. 그래서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1. 현대미술관의 균열이란 주제의 전시가 떠올랐다. 몸에 대한 소장작품들이 제법 되었고 강렬한 작품들도 많았다. 마지막 민정기화가의 풍경이 아니라서 더욱 더 놀라기도 하였다.

2. 촉각문화에서 중요한 것은 현실의 존재가 아니라 현실의 생성이라고 한다. 미술관의 전시 키워드 가운데 하나가 아방가르드였다. 재현이 아니라 재발견을 응시한 것이었는데, 그 사이 어중간한 지점에서 전시가 위축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3. 느낌을 만드려는 이들이 적다. 소비의 관성이 이리도 지리멸렬을 조장하는가 보다. 그래도 손의 힘과 뭔가 만드려는 꼼지락의 기운은 자주 느껴진다. 몸과 머리의 총량은 일정한 것은 아닐까? 그 몸과 마음이 가는 곳을 의식과 비의식이 머무는 자리라고 해보자. 어느 한 곳이 과잉이라면 우리는 시간의 지쳐버리고 악몽에 시달린다. 보는 것에 익숙해버린 우리라면 하는 것에 친해질 수밖에 없는 것도 우리일 것이다. 우리는 꼼지락대며 하는 것에 대한 갈망이 노출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유행의 순환이 아닌 삶의 자장으로 다르게 번지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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