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행복한 책읽기 - 김현의 80년대 중반의 독서비평집을 읽고 있다. 머리맡에 두고 새벽 이른 잠이 깨거나 잠이 오지 않을 때 아껴보고 있다. 1986년이 지나고 1987년 겨울에 머무르고 있다. 날카로움에 대한 감탄보다는 그 당시 낯부끄러움이 외려 밀려올라와 곤혹스러웠다. 안목과 시선이 부럽기도 했지만, 그 날카로움의 끝은 비평이 무엇인가 잘 드러내어준다. 몽매의 시절은 아니었을까. 아니면 젊음은 늘 부끄러워해야 한다고, 그래도 무언가를 하는 것이 대견하다고 할 것인가.....인물과 작품에 대한 또 다른 시선을 갖게 만드는 것 같다.

2. 고야 - 지난 주 다큐멘터리 <고야>편을 보았다. 예술 영화라고 하루에 한 편만 상영하였다. 물론 관객이 혼자인 것 같아 내심 독차지하는구나 싶었는데 상영 몇분 전에 몇 분이 더 관람했다. 마침 책들을 읽고 있기도 하고, 그 이력도 살피고 있는 참이어서 더 강렬하게 다가온 듯하다. 화면은 천천히 그리고 그 이력을 온전하게 전달해주었고, 시선은 더욱 깊이 들어갈 수 있어 고마웠다. 울컥거리는 것을 뒤에 있던 관람객이 눈치챌 것 같아 불안하기도 하였다.

3. 감정 - 강준만의 책을 사두고 짬짬이 보고 있다. 이성이 아니라 감성, 그에 대한 사유의 진척인 셈이다. 이에 공감한 저작을 미처 눈치채지 못했는데, 연구논문의 결과물들을 보기 쉽게 옮겨놓고 있다. 조금 더 구체성이 있고 현실성이 있어 하나하나 챙겨보려 하고 있다. 언제, 어떻게 감정이 감성이 사람들을 옭죄는지,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지 조금 더 치밀하고 풍부한 사유가 필요하다. 실망시키지는 않을 듯 싶다.

4. 비장소 - [장소와 장소성상실]이라는 책을 통해 ‘비장소‘의 개념을 얻었지만, 다시 심층 강도를 더하고 싶기도 하다. 술을 좋은 술과 나쁜 술로 구별하지 않고 좋은 술과 더 좋은 술로 구분하는 짓, 장소 또한 좋은 장소와 나쁜 장소를 나누는 것이 은연 중에 좋은 것만 헤아리게 한다는 점. 이것이 간과하고 있는 것이 온전히 전체를 읽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방법의 착각인 셈이다. 좋은 장소와 더 좋은 장소로 사유하는 기초가 된다. 여백처럼 있는 비장소성이 오히려 우리의 안온함을 갖게하는 편안함의 힘이 있다는 것이다. 도시와 시골 역시 좋고 나쁨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도시화율이 90%가 넘은지 오래된 우리 현실에서 귀촌이라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일이다. 다 들여다볼 수 있다는 갑갑함은 그리 향수어린 것이 아니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건축의 경험]은 스피노자와 베르그송을 부분 부분 연상하게 한다. 기쁨과 슬픔의 요소로서 건축, 스칼라가 아니라 벡터로서 운동을 포함한 힘으로 다시 읽어보는 것은 새롭다. 건축만이 아니라 여러 분과학문도 다시 시선처리를 해보는 것도 좋을 듯싶다.

볕뉘.

0. 한 소설가의 증정본 [컬트 포르노 탐정 소설의 장르적 우울과 클리셰]는 이동 중 가지고 다닌다. 뭔가 들킬 것 같아, 그 다음 관계가 쉽지 않을 것 같아 아껴두면서 책장을 넘기지 않고 있다.

1. 어제 서울갈 일이 있어 과천관 현대미술관에서 균열전을 관람하였다. 이 역시 이성이 아니라 감성, 아니 ‘몸‘에 관한 다시보기였다. ‘층과 사이‘의 판화전도 색다른 안목을 더할 수 있어서 좋았다.

2. 읽어야할 시인들이 늘었다. 읽을 책들로 풍요로운 년말이다. 녀석들이 눈을 치켜뜨고 있어 걱정이긴 하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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