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성의 미학

1.

[1 ] 경계는 서로 분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되는 문지방이 된다...오히려 이것은 융통성 없는 대립의 극복에 관한 것이고, 역동적인 차이로 이끄는 것이다. 이분법적 개념쌍을 와해시키고, ‘이것 아니면 저것‘ 대신에 ‘이것분 아니라 저것도‘라는 논리를 따르는 수행성의 미학 프로젝트에 대해서는 18세기에 주어진 경계를, 넘나들 수 있는 문지방으로 만들고자 하는 세계의 재마법화에 대한 시도로 간주할 수 있다. 450

[ 2 ] 경계가 법과 연관된다면, 문지방은 마력과 연관된다. 경계가 다른 것을 배척하는 분계선으로 여겨진다면, 문지방은 모든 가능한 것이 발생하는 사이 공간으로 생각된다. 경게가 분리 작업을 진행하는 반면 문지방은 가능성, 권력, 그리고 변신의 장소를 드러낸다.....공연에서 창출되는 자동 형성적 피드백 고리는 무대와 객석, 행위자와 관객, 개인과 공동체, 예술과 삶 사이에 놓인 경계를 문지방으로 변화시킨다. 452

[ 3 ] 예술가들은 스스로를 변환 과정에 존재하며, 경계선을 넘는 존재로 인식했다....이분법적 개념에 의존해 세계를 기술하고 지배하는 계몽의 한계를 드러냄으로써, 또한 인간을 체화된 정신으로 나타나게 함으로써 수행성의 미학 그 자체가 ‘새로운 계몽‘임을 입증했다...수행성의 미학은 모든 인간이 자기 자신 및 세계와 새로운 관계를 맺을 것을, ‘이것 아니면 저것‘이 아니라 ‘이것뿐 아니라 저것도‘에 의해 결정되는 새로운 관계를 맺을 것을 장려한다. 456

[ ] 예술과 삶: 일반적으로 공연이 예술이라는 제도 하에서 일어나면 예술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반면 공연이 정치나 스포츠, 법, 종교 등의 영역에서 일어나면 비예술적인 것으로 간주된다....예술적 공연이냐 비예술적 공연이냐를 결정하는 것은 오히려 제도적 틀이다. 445 공연은 삶 자체일 뿐 아니라, 삶의 모델로 볼 수 있다. 공연이 삶 자체라는 말은 공연이 참여자, 곧 행위자와 관객이 자신의 삶의 시간을 실제로 같이 보내고, 그들에게 새로운 것을 창출할 기회를 준다는 의미다. 453

2.

[ ] 연극의 근본적 의미는 연극이 사회적 놀이였다는 데 있다. 연극은 모든 이를 위한 모든 이의 놀이다. 그것은 무대 위의 참여자와 관객 모두 참여자인 놀이다. 관객은 놀의 한 구성 요소로 참여한다....연극에는 항상 사회적 집단이 존재한다..62..행위자와 관객의 신체적 공동 현존이란 오히려 공동 주체의 관계다. 63 헤르만의 공연 개념은 작품 개념이 포함하지 않는다. 공연의 예술성 - 즉 미학성- 은 작품에 근거해서 생성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수행되는 사건에 근거한다. .공연에서는 일회적이고 반복될 수 없는, 대부분 부분적으로 영향을 끼치거나 조정 가능한 상황이 일어나기 때문이다....관객이 ˝배우의 연기를 다시 한 번 희미하게나마 모사해봄으로써, 표정을 지각할 뿐 아니라 몸의 느낌을 수용함으로써, 같은 동작을 하고 싶고 같은 목소리를 내고 싶은 비밀스런 욕구 속에서˝ ‘창조적‘ 행위성을 창출한다고 보았다. 71 공연을 재현 혹은 그 이전의 것이나 주어진 것의 표현으로 규정하지 않고, 순수한 구성 능력으로 파악한다는 점에서 헤르만의 공연 개념은 수행적이라는 개념과 맞아떨어진다. 73

3.

[ 1 ] 버틀러는 젠더는 태어날 때부터 존재론적으로나 생물학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특정한 문화적 구성 행위를 통해 이루어진 결과라고 설명했다...젠더란 인습화된 행위의 반복을 통해 만들어진 제도적 정체성이다...이러한 행위를 버틀러는 ‘수행적‘이라고 명명하고, ˝수행성은 그 자체로 극적인 것과 비지시적인 것이라는 이중의 의미를 지닌다고 했다.˝...수행적인 육체의 행위는 정체성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체성 그 자체의 의미를 만들어 낸다....육체란 단순한 물질이 아니라 여러 가능성이 부단하고 지속적으로 물질화된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몸이 아니라, 짧게 이야기하면,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몸이다....버틀러에게 ‘수행‘의 의미는 오스틴이 말한 ‘현실 구성적‘이며 ‘자기 지시적‘인 것과 결국 같은 것이다....메를로 퐁티는 육체를 특정한 문화와 역사에 존재하는 모든 가능성이 적극적으로 드러나는 상징화의 과정이라고 보았다. 이와 반대로 버틀러는 정체성의 수행적 생산 과정을 체현과정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체현 과정이란 ˝행동 양식이며, 역사적 상황을 극적으로 재생산하는 방법˝이라고 규정한다. 49,50, 51

[2 ] 수행적이란 단어의 의미는 행위하다에서 비롯되었다. 즉 ‘행위를 ‘이행‘하다‘라는 뜻이다...이 발견이란 언어가 사실관계를 묘사하거나 한 가지 사실을 주장할 뿐 아니라 행위를 이행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언어는 참과 거짓을 표현할 뿐 아니라 수행적 기능도 한다....발화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을 발휘하며 변환을 불러일으킨다. 물론 수행적 성공을 위해서는 언어적 조건뿐 아니라 무엇보다 제도적, 사회적 조건이 충족되어야 하지만 말이다. 44,45

[ 3] 문학 낭독에서 가장 특별한 점은 바로 읽기와 듣기의 차이가 명확하게 드러난다는 데 있다. 일리아스의 1만 8천줄을 교대해가면서 22시간 동안 쉬지 않고 낭독했다. 낭독자가 계속 교체되었기 때문에 저마다의 목소리가 개성을 드러냈고, 그들이 무엇을 이야기하든 청중에게 매우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나아가 이 공연에는 시간이라는 요소가 매우 중요했다. 22시간이라는 오랜 시간은 참여자들의 지각 상태를 바꾸었을 뿐 아니라, 무엇봐 이러한 지각의 변화를 의식하게 했다. 시간이 흐른다는 사실을 지각의 조건으로, 무엇보다 변화의 조건으로 의식하게 된 것이다. 34,35

볕뉘

0. 우리는 말이 필요하다. 권력의 기울기에 바투 올라야 하는 자는 권력을 가진자의 말을 빌려쓰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말을 만들어 써야 한다. 언어는 행위를 이행한다.(3.2) 언어는 수행적 기능을 갖는다고 하면 우리 말의 대기가 이분법의 개념쌍을 가진 언어로 가득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1.1) 그래서 힘이 없는 자는 힘있는 자의 이런 말을 쓰다가 결국 스텝이 꼬이고, 자기 말조차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1. 김수영의 애정지둔을 낭독하는 모임에 참가한 적이 있다. 한 편의 시를 열한두분이 자신의 음색과 속도롤 읽어내는 것은 묘한 느낌을 불러 일으키고, 시에 대한 새로운 느낌을 가지기에 충분했다. (3.3) 무려 22시간을 낭독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낭독을 하게 되면 언어가 품고 있는 박자를 생각하게 한다. 때로는 거슬러 올라가며, 때로는 호와 흡을 반복하며...사람마다 그 시를 품은 느낌이 고스란히 전해오기도 한다. 낭독은 언어가 자신과 글 속에 갇혀 있다가 친구를 만나게 되는 과정이다. 말로 변화하며, 그 말은 서로 마음을 흔들기도 한다. 그래서 말로 쓴 글은 언어에 갇힌 글과 미묘하면서도 무척 다르기도 하다.

2. 우리가 이분법의 말에 갇혀있다고 해보자. 선악, 좋다나쁘다로 무의식중에 구별하는 습관들. 이분법의 개념쌍....좋다나쁘다에서 나쁘다만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나쁘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습관들이라고 해보자. 그렇게 남은 말들을 대부분 권력의 자장을 갖고 있는 것일 것이고, 약자를 제대로 표현하는 말들은 없거나 죽어버렸을 것이다. 이것 아니면 저것에서 ˝이것 뿐만 아니라 저것도˝라고 가정을 해본다면 조금씩 갖고 있지 못한 것을 의식하거나, 배경에 무엇이 있는지 의식하게 된다. 싫어를 찬찬히 들여다본다. 좋은 장소, 나쁜 장소가 있는 것이 아니라 좋은 장소, 더 좋은 장소로 파악하기 시작하는 것은 아닐까? 좋은 것, 싫은 것이 아니라 배경에 있는 것과 내가 좋아하는 것이 같이 마음 속에 들어오도록 해보는 것이다. (1.4)

3. 새로운 말을 찾아내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지금의 말은 나의 상황, 주변을 둘러싼 것을 정확하게 표현하지 못한다. 행정 용어나 남자의 말들로 둘러싸여 있기게 새로운 숙어를 발견해내기까지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적확한 말을 찾는 것은 사회적 약자일수록 더 생생해야 한다. 내 존재를 온전하게 나타내는 말을 없다라고 가정해보자. 어쩌면 이것은 나의 존재를 바꾸어내는 것과도 관련이 있다. 새로운 말이 가슴을 져미고 들어와서 익숙해지고, 그 표현을 나누어 가질 때 우리는 이미 전과 달라져 있는지도 모른다. 가지지 못하고, 힘에 밀려 경계에 있는 처지의 말을 명확히 듣도록, 들릴 수 있도록 귀 기울여야 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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