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990년대 초반 이후 신도시의 아파트에 안착한 30대 여성들 상당수는 어려서부터 남녀평등의 이념을 교육받아온 터라 결혼 전까지만 해도 가부장제의 습속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다. 하지만 결혼 후 상황은 바뀐다. ‘남편의 경제적 역할‘과 ‘아내의 정서적 역할‘이라는 핵가족의 기능적 분업화에 적응해야만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46

[ ] 외환위기 이후의 아파트: 1970년대 이후 10년주기로 첫 번째 세대는 근로소득을 능가하는 자본 이득의 중요성에 눈을 떴고, 두 번째 세대는 전세 제도를 지렛대 삼아 아파트 한 채를 더 보유하는 방법을 터득했으며, 세 번째 세대는 수도권 일대의 지도를 들여다보면서 자신들에게는 앞 세대와 같은 자산의 증식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조바심에 시달렸다....흥미로운 것은 이 중산층 아버지들 중 어느 누구도 아파트가 고도성장을 통해 축적된 사회적 부를 시세 차익아라는 형태로 그 소유자들에게 배분하는 사회 시스템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그래서 그들은 이 시스템의 근간인 분양가 상한제와 주택청약 제도의 설계 의도에 대해 굳이 알려 들지 않았으며, 연간 10퍼센트를 넘나들던 특정 시기의 경제 성장률이 사실상 복지 제도를 대신했던 이 시스템의 에너지원이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무관심했다. 52

[ ] 청년기의 정치적 경험에 방점을 찍는 세대론이란, 10년 주기로 펼쳐진 ‘정치적 격변, 경제적 호황, 대규모 아파트 건설‘이라는 일련의 사건을 거치면서 성공적으로 중산층에 진입한 집단 중 일부가 자신의 정치적 발언권을 특권화하며 그 진정성을 인정받기 위해 만들어낸 자기 정체성의 판타지였던 것은 아닐까? 58 ˝아파트와 전자 칩, 자동차를 제외한 모든 것˝이 의미를 잃어버린 그 세계에서 청춘의 자아는 ˝지나치게 얄팍˝해 ˝셀로판지 같지만 셀로판지가 아닌˝ ˝셀로판지가 되기엔 너무 두껍고 또 인간이 되기엔 너무 얇은 뭔가˝로 존재하며 아무런 희망도 없이 게임의 규칙을 묵묵히 견뎌내야 했던 것이다. 59 나는 인간인 동시에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곡선의 평면이다. 화려한 풍경 속에 창백한 백지로 남는, 고선으로 이루어진 어떤 하얀 평면...닳고 닳아 아무것도 남지 않은 셀로판지와 아무것도 그릴 게 없어 휑하게 남겨진 백지라는 은유의 유사성. 김승옥과 달리 김사과 주인공은 가족의 로망스 자체가 시효가 끝난 시점에서 ‘납작한 반투명 주체‘라고 할 수 있다. 60

[ ] 제3막은 그 무대에서 ‘정치‘가 ‘저성장‘시대에 걸맞게 새로운 게임의 규칙을 고안해내지 못하고 중산층이 욕망의 구조조정을 단행하지 않는다면, 그리하여 아파트가 여전히 주인 행세를 계속한다면 세상은 악화일로를 걷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65

[ ] 실제로 저금리를 앞세운 은행의 영업 방침, 금융 자본의 지원 사격을 받는 건설사의 사업 전략, 그리고 경제적 불확실성에 노출된 중산층의 재테크 전략, 이 삼각관계의 역동적인 흐름 안에 바로 ˝그녀의 프리미엄˝ 광고전략이 자리잡고 있었다. 93

[ ] 참여정부 집권 직전 시중의 유동 자금은 이미 400조 원 규모였던 데다가, 집권 이후 가계대출로 시중에 풀린 돈만 200조 원이었고, 국토균형발전정책으로 인해 시중에 풀린 토지보상비의 규모도 2003년부터 2006년가지 70조 원을 넘어선 상황이었다. 97

[ ] 그는 자신의 마음속에서 정치 개혁의 열망이 자본 소득의 욕망에 패배했음을 순순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확실히 두 번째 자각이었다. 대통령 덕분에 2002년에는 ‘중산층 소비자‘에서 ‘참여하는 시민‘으로 깨어났고, 집권 후반기에는 또다시 ‘참여하는 시민‘에서 ‘자산 투자자‘로 깨어났다. 103

[ ] 1977년부터 자리 잡은 분양가 상한제는 선분양제와 짝을 이루고 있었다. 이 두 제도 덕분에 정부는 주택 공급시장의 통제력을 거머쥘 수 있었고, 공급자는 상품을 만들기도 전에 금융비용을 들이지 않고 구매자로부터 자금을 조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구매자는 시세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으로 아파트를 구입할 수 있었다. 109 1997년 외환 위기 이후 부도 위기에 처한 건설업계의 요구로 분양가 상한제가 폐기되었지만...선분양제는 고스란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덕분에 아파트는 이전보다 더 기묘한 상품이 되었다. 이전까지는 정부가 공급자와 소비자의 관계를 조율하는 박리다매의 공동구매 상품이었던 반면, 이제는 공급자가 직접 나서서 주도하는 시세와 동일한 가격의 선 입금 예약 상품으로 둔갑했던 것이다. 110 한국만의 독특한 민간 임대 제도인 전세제도는 호황기에는 부동산 시장의 최전방 공격수인 다주택 보유자에게 유동성을 공급하는 ‘미드 필더‘로 대활약을 펼쳤다. 일종의 ‘사금융‘이나 다름없던 이 제도는 불황이 닥치자 재빨리 후방으로 되돌아가 ‘최종 수비수‘로 전환한 뒤 가격 하락세를 온몸으로 막아내고 있다. 그러니 이런 표현도 가능하지 않을까? 아파트 시장의 진정한 ‘리베로‘라고 말이다. 112...그들의 유일한 자산인 아파트 한 채가 담보물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기 전까지는 희망을 버리려고 하지 않으리라.......아파트 하락세와 자영업자의 위기...자녀 세대는 부모님이 사는 아파트 한 채는 그래도 물려받을 수 있으리나는 기대가 빚더미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113 1960년대 후반부터 외환 위기가 발생한 1990년대 후반까지 약 30년의 시간대가 오히려 비정상적인 시기였던 것이 아닐까? 115

[ ] 정치학자 전인권은 ˝한 아이가 다른 형태의 아버지, 여러 명의 아버지를 체험한다는 것은 그만큼 세계로 나가는 여러 개의 창문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하며, ˝세상을 보는 눈도 여러 개 가지게 되니 그만큼 유연해질 수밖에 없다˝고 말한 바 있다. 주지하다시피 농경사회에서 성장한 변방의 청년들 대부분은 여러 개의 창문을 갖지 못했다. 그들에게 ˝세상으로 나가는 창문은 아버지 하나뿐이었다.˝ 141

[ ] 2000년대 초반부터 건설 산업은 강남의 재건축과 강북의 뉴타운 개발을 거치면서 점차 금융 산업과 밀월관계를 맺었다. 이전의 고도성장기에는 정부, 건설업, 중산층이 삼각편대를 구성해 수도권의 창공을 마음껏 활강했던 반면, 이제는 금융업, 건설업, 중산층이 삼위일체의 신성동맹 체제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167

[ ] 마린시티는 분양가 상한제 폐지와 함께 용인에서 시작된 포스트-강남의 흐름이 2000년대 초반에 주상복합 아파트와 재건축 아파트를 거점으로 삼아 강남으로 입성했다가 다음 행선지를 저울질하기 위해 잠시 송도의 모델하우스를 둘러본 뒤 결국에는 경부선 고속철을 타고 내려와 해운대에 똬리를 튼 것 같은 모양새였다. 170

[ ] 이전의 10년이라는 시간차는 이제 5년 정도로 좁혀졌고, 그 시간차의 발현 양태도 지방 중상류층이 한발 늦게 수도권 부동산에 투자하는 식이 아니라 지방의 부동산 시장이 수도권의 꺼져가는 불씨를 이어받아 군불로 되살리는 식으로 바뀌었다. 174 역세권을 기본으로 하되, 자량보다는 보행자의 이동이 자유로운 곳, 기존의 상권이 등락 없이 어느 정도 유지되는 곳, 토박이들의 텃세가 심하지 않는 곳, 개발 호재 없이도 상권의 확장이 가능해 보이는 곳 등등. 176 1970년 1971년에 백만명 넘게 태어난 2차 베이비붐의 정점을 찍었던 이들은 저성장과 저금리 사이에 낀 채로 비정규직 노동의 증가와 아파트 가격의 폭등이라는 무거운 짐을 짊어질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부모의 도움 없이는 중산층 진입이 요원한 일이었다. 따라서 이들이 아이를 하나만 낳거나 아예 부모가 되지 않기로 마음먹은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매우 합리적인 선택처럼 보였다. 186 인구 감소의 쓰나미가 닥치는 시점은 이들이 50대에 진입하는 시점 2021년은 아닐까?..그 행선지는 2022년 대통령 선거를 향해 돌진할 것이다... 이 때는 50대가 845만 명, 60대 이상이 1,298만 명이 된다. 결국 대선의 승패는 50대 이상의 유권자에 의해 판가름 날 공산이 매우 높다. 187

[ ] ˝팔자가 갈라지는 대목까지는 운수 놀음이지만 갈라진 다음부터는 현실 놀음˝이라는 점이다. 193

[ ] 나는 사회를 사회로 이해할 수 있는 인식의 기회를 얻지 못했으며, ‘사회‘를 ‘사회‘답게 만드는 집단적 경험조차 제대로 공유해본 적이 없다고 할 수 있다. 194

[ ] 신세대: 로봇 프라모델의 조립 과정을 통해 대상과 밀착된 관계를 맺고 거기에 기대어 자아의 확장과 심미안의 향상을 꾀할 수 있었다...그것은 독특한 이중구속의 구렁텅이로 그 소유자를 밀어넣고 자아의 변형을 강제하기도 했다. 207이런 태도는 결국 ‘단일한 자아‘에 대한 포기로 이어지기도 했다. 그러니까 도덕적 판단과 미적 판단의 주체가 반드시 동일한 ‘나‘일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각각의 차원에 최적화된 형태로 사안에 따라 대응할 수 있도록 자아를 쪼갰던 것이다. 208 일본 에니메이션은 이 세대의 소년들에게 프로트타입 형태의 문화적 인터페이스를 인스톨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었다고 할 수 있다. 212 신세대 일부는 처음에는 ‘자아의 분열‘로, 그 다음에는 ‘메타 자아의 구성‘으로 두 번에 걸친 이중구속의 상황을 돌파한 소년들이었다. 당연히 이런 경험을 해본 영민한 소년일수록 자기만의 패턴을 체계화하는 데 익숙했고, 자기만의 쾌락을 추출하는 데도 능수능란했다. 213 프라모델이 그들의 자아를 쪼갰다면, 워크맨은 그들의 감각을 쪼갰다. 워크맨은 감각의 재조직화를 통해 당시 청소년이었던 신세대의 문화적 인터페이스를 업그레이드한 것이다. 215 헤비메탈 자체가 이 시기의 중고등학생들이 간단한 패턴 알고리즘을 프로그래밍해볼 수 있는 데이터베이스의 실험실이었던 셈이다 217 될 수 있으면 남들이 듣지 않는 희귀한 음악을 찾아들으려고 한다. 219 연습생 트레이닝 시스템을 눈여겨볼 만했다. 그것은 일종의 실험실처럼 보였다. 그러니까 ‘청춘‘을 말소한 뒤 소년기와 성년기를 바로 이어 붙여 새로운 타입의 인간형을 양산하려는 시도가 거듭되는 실험실 말이다...그들은 제각각의 데이터베이스와 패턴 알고리즘을 바탕으로 체계적으로 아돌의 생산 시스템을 운영, 관리하고 있었다는 것. 240 내가 상상한 이 세계가 청춘의 테마파크라고 생각했다. 장기 경기 침체의 덫에 걸린 신세대가 호황의 기억을 소환해 복고와 추억, 자기 위안을 상품 형식으로 소비할 수 있는 테마파크 말이다. 막장극과 버라이어티 쇼와 오디션 프로그램이 판치는 텔레비전 화면의 가상계에 손바닥만 한 빈자리라도 있다면 별 어려움 없이 터전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243

[ ] 집으로 향하던 ‘사다리‘가 사라진 이후 큐브는 기존의 거주용 방과 집의 기능을 외부화한 방, 즉 주거 공간과 상업 공간이 이원화된 방향으로 계속 증식했다.....284.. 서울의 입장에서 보자면 임대료는 주기적으로 맞아야 하는 호르몬 주사제나 다름없었다. 만약 다른 지방 도시였다면 큐브 일부는 빠르게 슬럼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하지만 유독 대학교가 많은 서울에서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 대학생이나 취업 준비생 같은 산업예비군들이 큐브에 거주하면서 도시의 노화 속도를 늦추고 있는 것이다. 시간의 격랑에 맞서는 인간 방파제라고 할까? 285

볕뉘

0. 이 책을 읽다가 [빚으로 지은 집]이라는 2008년 리먼사태이후의 미국상황을 추적한 책이 떠올랐다. 있는 사람, 부자동네가 아니라 변두리의 삶과 관계가 급속히 망가지는 모습이 기억난다. 말미 가계부채 탕감이란 정책이 오히려 유효하고, 경착륙이 아니라 연착륙이 가능하다 말이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인상깊게 보았는데 이렇게 다시 만났다.

1. 이 책 역시 시도가 엿보인다. 소설의 인용과 소설 작법을 활용하였고, 귀에 쏙쏙 박히기도 한다. 다소 산만한 감은 없지 않지만....

2. 진보란 무엇일까란 생각도 해보았다. 삶을 걸지 않는 이상, 삶이라는 기간의 진보를 한묶음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 쌓인 보수와 핑계의 무덤에서 한발도 나아가지 못할 것 같다는 무거운 마음이 들게 했다.

3. 경제란 살림살이를 전면에 세우면서 정치관계를 파헤쳐야 한다. 그런면에서 박해천교수의 진화된 탐색은 눈여겨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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