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5 ] 자기만족으로서의 자아라는 개념은 부르주아 정신과 부르주아 철학의 본질적인 표현 가운데 하나다. 프티 부르주아의 자기만족과 같이, 자아라는 개념은, 불안하면서도 진취적인 자본주의가 지닌 뻔뻔 스러운 꿈에 자양분을 공급해 준다. 이 개념은 인간을 자기 자신과 화해시키기보다는, 알려지지 않은 시간과 사물로부터 자기 자신을 보호하는 일을 지향하는 자본주의의 노력, 결정권과 발견에 대한 숭배를 주재한다. 부르주아는 내적인 분열과 자기 신념의 결여에 대한 수치심을 표현하지 않는다. 단지 현실과 미래를 염려할 뿐이다. 왜냐하면 분열과 결여는 바로 부르주아가 소유한 현재의 확정된 균형 관계를 끊어 버리도록 위협하기 때문이다. 6

[ ] 존재에 대한 긍정이 지닌 잔인성은 절대적인 만족이며 그 밖의 다른 어떤 것을 지시하지 않는다. 7
[ ] 동일성은 사람들이 그 절대적이고 결정적인 성격을 의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존재 사실의 충만함의 표현이다. 8
[ ] 서양철학의 평화와 안전성에 대한 이상은 존재의 충만함을 전제했다. 인간의 조건이 지닌 불충분성은 심지어 ‘유한한 존재‘라는 의미를 직시한 것 외에, 단 한 번도 다른 어떤 존재의 한계와 같은 것으로 이해되지 않았다. 9
[ ] 탈출이라는 표현 자체만으로 현대적 삶의 모든 상황에 대한 목록 전체를 도출하기는 쉽지 않다. 그 목록은 삶의 여백 속에 아무것도 남겨두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자각할 힘조차도 지니지 못한 세대 속에서 만들어진다. 10

[3 ] 생명의 약동이라는 창조의 철학은, 고전적인 존재의 엄격성에서는 탈출하는 반면 존재의 마력에서는 벗어나지 못한다. 왜냐하면 창조의 철학은 실재 저편에서 새로움을 창조하는 활동만을 식별하기 때문이다. 13

[4 ] 근본적으로 생성은 존재의 반대가 아니다. 미래를 향하는 경향, ‘자기의 앞으로‘ 향하는 경향은 약동 속에 포함되어 있고, 하나의 과정에 운명을 바치는 존재를 표기한다. 약동은 창조적이지만 저항할 수 없는 것이다. 운명의 성취는 존재의 흔적이다. 모든 운명이 전부 존재의 흔적은 아니지만, 운명의 성취는 치명적이다. 우리는 갈림길에 있지만, 운명을 선택해야만 한다. 우리는 시작한다. 생명의 약동 속에서 우리는 낯선 것을 향하게 되지만, 우리는 어떤 부분에 불과하다. 반면에 우리는 탈출 속에서 벗어남에 관한 감화를 받게 된다. 이것은 혁신이나 창조와는 동화될 수 없는, 그 순수성 안에서 포착되어야만 하는 출구라는 범주다.이 독특한 주제는 존재로부터의 벗어남을 우리에게 제안한다. 14

[ ] 탈출은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날 것을, 다시 말해 가장 근원적이면서도 용서할 수 없는 결박상태, 자아가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의 결박상태를 깨트릴 것을 요구한다.....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나길 원하는 자아는 제한된 존재로서의 자기 자신을 벗어나지 못한다. 15

[ ] 반대로 탈출은, 자기와의 평화라는 주장에 문제를 제기한다. 왜냐하면 탈출은 자기에 대한 자아의 결박상태를 깨트리는 것을 동경하기 때문이다....탈출에 있어서 자아는, 자아가 존재하지 않거나 자아가 존재하거나 자아가 됨이라는 사실 자체에 기인해서 그 스스로 자기로부터 벗어난다. 16 이상 1장


2.

[ ] 우리가 탈출에 대한 분석이 완결될 때까지는 기원과 죽음의 문제가 적절하게 정립되지 않는다고 간주하는 이유다.....탈출은 우리에게 죽음으로의 도주나 시간 바깥의 출구로 나타나지는 않을 것이다. 이상 2장

3.

[ ] 욕구는 오직 고통이 될 때 강압적인 것이 된다. 또한 욕구를 특징짓는 특정한 고통의 양상, 그것은 불안감이다. 불안감은 순수하게 수동적인 상태, 자기 자신에게 의존하는 그런 상태가 아니다. 불펴하다는 사실은 본질적으로 역동적이다. 이는 그저 그대로 있음에 대한 거부, 참을 수 없는 상황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노력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이것의 특별한 성격을 이루고 있는 것은, 이 나가는 순간을 계획하는 목적, 하나의 적극적 특징으로 부각되어야 하는 목표점에 관한 무규정성이다. 그것은 우리가 가는 곳이 어디인지 알지 못한 채 벗어나려는 시도이며, 또한 이러한 무지가 이러한 시도의 본질 자체를 규정짓는다. 23
[ ] 욕구에 관한 근본적인 편견들이 이를 통해 설명되건, 욕구 충족이 곧 불안감의 동요에 대한 응답이건 간에 모든 문제는 앎으로 나타난다. 24
[ ] 우리는 다양한 불안감의 현상 속에서 다음과 같은 한 가지 다른 최상의 요구에 주목한다. 충족이 치워 버리는 데 성공하지 못하는 짐, 고도 우리 존재의 심연 속에 있는 죽음이라는 일종의 짐이 바로 그것이다......금식이라는 고행은 신에게 흡족한 것일 뿐만 아니라 우리 존재의 근본 사건이라는 상황에 우리를 더욱 밀착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그 근본 사건이란 바로 탈출에 대한 욕구다. 25 이상 3장

4.

[ ] 우리 존재의 실신으로, 졸도로 존재하는 자기의 진폭의 확장 속에 전적으로 존재한다. 이제 막 시작된 쾌락의 극단에서 더 이상 저항하지 못하고, 미친 듯이 정신을 잃고 추락하는, 우리 존재의, 보다 더 깊은 심연, 깊은 수렁과 같은 것이 열린다. 28
[ ] 우리는 쾌락 속에서 한 가지 폭, 자기 자신의 상실, 자신으로부터 벗어남, 황홀경을 확인한다. 탈출의 약속을 묘사해 주는 수많은 특성들은 쾌락의 본질 속에 포함된다. 29
[ ] 쾌락은 과정, 곧 존재를 벗어나는 과정이다. 쾌락의 정서적 본성 이러한 벗어남의 표현 내지는 기호일 뿐만 아니라 벗어남 그 자체다. 쾌락은 촉발성이다. 왜냐하면 바로 쾌락이 존재의 형태를 채택하지 않고 이 형태를 깨트리고자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기만적 탈출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실패한 탈출이기 때문이다. 30
[ ] 쾌락은 욕구의 요구들에 순응하지만 욕구의 요구들과 등치될 수는 없다. 또한, 반드시 승리했어야 하는 이 기만의 순간에, 그 실패의 의미가 수치심을 통해서 부각된다. 31 이상 4장

5.

[ 1] 수치심은 우리가 겪는 고통을 확인하면서 우리 자신을 그 위신이 땅에 떨어진 존재로 형상화하는 표상이다...수치심이 우리의 유한함에 있다기보다는 우리의 자아라는 존재에 보다 밀착되어 있다는 점을 드러내고 있다.....수치심은 우리 자신에 대한 책임을 요구하기 위해 강제성을 부과하는 우리 존재의 연대책임에 그 토대를 두고 있다.....수치심은 우리의 벌거벗음을 망각하는 데 이르지 못할 때마다 나타난다. 수치심은 우리가 숨기고 싶어 하지만 묻어 버릴 수는 업는 모든 것과 관계한다.....가난은 악이 아니다. 하지만 가난은 걸인의 누더기 옷과 같이 수치스러운 것이다. 32, 33 수치스런 벌거벗음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타자로부터 감추고 싶어 한다는 것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감추고 싶은 것이 있다는 것이다. 수치심의 이러한 양상은 자주 무시된다. 우리는 수치심 속에서 그 사회적 양상을 본다. 34 우리의 수치스런 내밀함, 다시 말해 수치스러운 우리 자신에 대한 우리의 현전이다. 그것은 우리의 무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현존의 전체성을 드러낸다. 벌거벗음은 그 현존을 변호하고자 하는 욕구다. 결국 수치심은 스스로 변명을 모색하는 현존이다. 수치심이 발견하는 것은 스스로를 드러내는 존재다. 36 이상 5장

6.

[ ] 구역질, 구토: 우리는 ‘속이 너무 울렁거린다‘ 39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존재 불가능성인 구역질 속에서, 동시에 우리는 우리를 우리 자신에게로 고정하게 되며, 숨 막히는 협소한 순환 속에 가두게 된다. 우리는 그저 거기에 있으며, 있는 것 이상의 아무것도 행하지 못하다.......즉 순수한 존재에 대한 경험 자체다. 40
[2 ] 구역질이 고독 속에서 경험될 때, 그것의 해로운 특징은, 자기 자신을 말살하는 것과 거리가 먼 그 구역질의 근원성 속에서 나타난다. ‘중병을 앓고‘ 있으며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구토를 하는 외로운 병자는 여전히 자기 자신이 ‘걸림돌이 된다‘. 특정한 차원에서는, 심지어 타인의 현전을 소망한다. 왜냐하면 타인의 현전은 ‘질병‘의 구역질이라는 걸림돌을 질병의 수준으로 내려가게 해 주고, 사회적으로 우리가 다룰 수 있는 정상 상태라는 사시로 만들어 주기 때문에, 이와 관련해서 우리는 결과적으로 객관적 태도를 취할 수 있다. 위에서 논의된 자기 자신과 마주하게 되는 자기의 수치라는 현상은 구역질과 같은 것이다. 42
[ ] 우리는 구역질이 존재의 현전을 그러한 현전으로 구성하는 그 모든 무능함 속에서 드러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그 모든 벌거벗음 속에서의 순수 존재의 무능함이다. 결국, 이를 통해서, 구역질은 ‘예외적인‘ 의식의 사실로도 나타난다. 43 이상 6장

7.

[ ] 욕구는 한정된 존재의 완전한 성취와 만족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지 모사며, 단지 해방과 탈출로 인도해 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욕구를 가지지 않는 무한한 존재에 관한 가정은 형용모순이다. 이와 같은 존재의 현전, 존재의 순수한 현존이 드러나는 경험은, 존재의 무능함의 경험이며, 모든 욕구의 원천이다. 45
[ ] 존재하기 시작한다는 사실은 불가피성의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런 불가피성이란 이미 존재를 전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존재로의 진입은 의지와 대립하지 않는다. 46 존재는 그 자체만으로 충분한가? 존재의 기원에 관한 문제는 무에서 유래하는 문제가 아니라 충족 혹은 불충족의 문제다. 이 문제는 존재 정립의 역설을 통해서 진술된다. 더 나아가 존재의 역설은 시간에 관하여 우리 스스로가 자유로워지고 우리 자신이 영원성을 부여할 때 완전하게 되는 것으로 남게 된다. 48,49 이상 7장

8.

[6 ] 존재론은 오직 존재하거나 존재하는 것으로 가정되는 것만을 생각하고 느낄 수 있다는 편견에서 비롯된, 초보적이면서도 단순한 편견의 감옥에 갇혀 있게된다. 비모순의 원리보다 더 오만한 원리는, 무 자체인데, 사유가 무를 마주하게 되는 차원에서, 이것은 존재의 덮개를 두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파르메니데스에 대항해서 어떤 제한도 없이 비존재가 있음을 진술해야만 한다. 50

[7 ] 더 나아가 관조적 사유와 이론은 존재의 흔적을 운반하는 자의 행동 토대가 된다. 이론은 본질적으로 존재자에 굴복하고, 이론이 존재에서 출발하지 않을 때조차도 존재를 기대한다. 이러한 기정사실 앞에 무력함이 있다. 인식은 정확히 모든 것이 완성되었을 때 실행되는 것으로 남아 있게 된다. 51

[8 ] 관념론의 잘못된 길로 들어서지 않고서 관념론의 적법한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우리에게 열려 있는 유일한 길은, 우리가 두려움을 떨쳐버리고서 존재의 무거운 짐과 보편성을 측량하는 데서 나올 수 있다. 이 길은 존재의 성취 속에서 그 자체로 존재를 깨트리는 사건의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는 우리의 모든 행위와 사유가 안고 있는 어리석음을 우리 스스로 인식하게 만드는 길이다. 그러한 실천과 사유, 탈출의 근원성이 우리에게서 은폐되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공통감각과 격언이 가장 자명하다고 여기는 관념을 전복하는 위험한 시도를 무릅쓰는 가운데, 새로운 길을 통해서 존재를 벗어나는 일에 관한 문제다. 53,54

볕뉘.

0. [레비나스 철학의 맥락들]의 버틀러편(정치윤리학)을 읽고, 잠을 청하기 전 읽다. 도입부가 강력해서 내친 김에 보아삼켰다. 레비나스 사상은 전기,중기,후기로 나뉘는데 이 책은 전기 이전에 쓰인 것이다. 1981에야 이 글을 출판해도 좋다는 허락을 한 글이다.

1.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나기를 원하는 자아는 제한된 존재를 벗어나지 못한다‘: 발버둥은 어디에 걸쳐있을까 싶다. 결국 못벗어난다고 하니 말이다. 죽음을 전제로 사유하는 존재론은 자아에 갇혀 버릴 수밖에 없다. 너란 없다. 탄생에서 출발하는 존재론. 아렌트로부터 베르그송의 생명의 도약에 대해서도 말미 토를 단다. 존재의 엄격성에서는 탈출하나, 새로움을 창조하는 활동만 식별하기에 존재의 마력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고 못을 박는다.(1.3)

2. 그는 쾌락이 존재로부터 탈출한다고 말한다.하지만 벗어남 그 자체이기에 존재의 형태를 취하지 않는다고 역시 마무리한다. 그는 수치심을 꺼내든다. 그리고 구역질, 구토하는 존재를 살피하고 말한다. 존재의 영점, 영도는 여기에 있다고 말이다. 충만함이 아니라 짐과 무게를 느낄 때만 존재가 드러나는 것이라고 말한다. (5.1, 6.2)

3. 무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충족과 불충족의 선상에서 존재는 시작하는 것이라고 되묻는다. 존재론과 관념론, 관조적 사유의 어리석음에 대해서도 말을 아끼지 않는다.(8.6 8.7 8.8)

0.1 다른 사유가 들어오면, 기존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생각말들이 덜컥덜컥 들뜬다. 밀리고 밀려 말을 바꾸어야 되는지도 모른다. 반음 뒤틀어지거나, 또 다른 말때문에 전부 말의 위치를 바꾸어야 되는지도 모르겠다. 덜컥거린다. 지난 말들을 부여잡는다. 그래도 울렁거린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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