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듀 레비나스 / 타인의 얼굴

1.

[ ] 아듀 - 신에게 맡긴다 233 데리다는 ˝아듀˝가 한정된 우리의 삶과 생각을 그 테두리를 넘어서는 무한으로, 잉여의 의미로 데려가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235

[ ] 레비나스의 타자 개념은 동일자와 대비되는 것이다. 그래서 레비나스의 타자는 곧 무한과 연결된다. 요컨대, 레비나스에게 무한은 우리가 지배할 수 있는 테두리 너머를, 우리의 지배에 대한 부정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타자는 우리의 지배 범위를 넘어서는 자이고, 그런 의미에서 무한한 자인 것이다. 236

[ 3 ] 레비나스는 죽음 자체나 죽음 저편을 주체적으로 탐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종류의 문제를 기각한다. 죽음 다음의 사태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일이고, 따라서 관심을 가져봐야 소용이 없다......레비나스의 출발점은 삶의 향유이고 반응이다. 삶이란 반응하고 응답하는 것이다. 그 삶 속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타자의 죽음이고 거기서 오는 의미이다.....응답-없음이란 타자의 죽음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습이다. 타자는 이런 무-응답의 상태를 피하기 위해 우리에게 호소한다. 우리는 그런 타자에게 응답해야 하는데, 이것이 우리의 책임이다. 238 죽음의 위협에 어쩔 수 없이 노출되어 있는 타자에게 내가 응답해야 함을, 내가 응답하지 않을 수 없음을 강하게 일깨우는 표현 239

[ ] 데리다가 초점으로 삼는 주제들을 보면 분명히 약자나 핍박받는 자들과 관련된 문제들을 다룬다. 그런 점에서 보면 반권력적이고 반지배적인 해체적 보편성을 내세운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레비나스는 이보다 더하다고 할 수 잇다. 지배 너머의 지평을, 정치 너머의 윤리를 앞세우니까요. 여기에 비해 데리다는 정치의 차원을 중요하게 다룬다. 레비나스 철학에서 정치는 윤리를 통해 극복해야 할 영역으로 취급된다. 또는 정의 문제와 관련해 부수적으로 다루어질 뿐이다. 242

[ 4 ] 제삼자의 출현은 양자관계가 아닌 삼자관계가, 따라서 비교와 계산의 관계가 성립함을 나타낸다. 그러니까 이것은 정치의 성립을 뜻한다....사실 삼자성이란 이렇게 대면관계가 보편적으로 확보될 수 있는 가능성을 뜻한다. 244 이상 아듀 레비나스

2.

[ ] 5장 책임과 대속적 주체: 존재와 다르게 또는 존재 사건 저편에: 현재 우리가 처한 삶의 상황에서 ˝내가 누구에게, 무엇에 책임이 있으며 어떤 상호 작용의 공동체 안에서 내가 내 자신인가?를 고려하는 것을 과제로 삼는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처한 상황과 대상, 일, 공동체, 도덕적 주체가 중요하다. 165 나의 책임과 존재 모험: 세계에 대한 의존성을 통해 나는 비로소 나의 독립성, 나의 자유를 확보한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나는 오직 내 안에서 나를 실현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169

[ ] 존재 유지 노력과 타인과의 관계: 히틀러와 독일 국가사회주의의 만행은 예외적인 사건이 아니라 타인을 제거하고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고자 노력하는 존재 경향의 확대에 지나지 않는다고 레비나스는 본다. 170 전쟁은 존재 속에 지속하고자 하는 경향의 연장이라고 보고 있다. 171 계약에 의한 평화는 타인에 대한 존경이나 도덕법칙에 대한 순종에 근거하기보다 상대방에 대한 공포에 근거하고 있다. ...개인간의 평화이든 정치적 질서에 의한 평화이든 평화를 이성적인 계산에 의해 가능한 것으로 보는 입장을 레비나스는 전형적인 서구적 평화의 핵심으로 생각한다....다양한 것, 많은 것들을 그보다 상위 단계에 있는 일 또는 일자에 환원할 때 평화가 확보될 수 있다는 것이 그리스 사상이 평화문제에 접근하는 기본 모형이었다. 173 레비나스는 자기 중심적인 사회 모형에 근거한 정치는 ‘윤리가 결여된 정치‘라고 단언한다....자아 중심적 사회 모형은 ‘사회 주변부 사람들‘과 ‘힘없는 사람들‘에게 일정한 자리를 허락해주지 않는다. 개개인이 확보할 수 있는 힘을 바탕으로 타인에 대해서 자신의 존재를 나타낸다면 힘없는 자, 가지지 못한 자, 신체적으로 능력을 잃은 자는 상대적으로 피해를 받을 수밖에 없다. 175 영원한 평화를 모색하기 위해 인간과 세계, 나와 타인, 진리와 정의, 자유와 책임의 관계를 바르게 설정해야 한다. 176

[ 2 ] 타인의 얼굴: 나의 자기 중심적인 이기적 삶을 타인에 대해 책임지며 타인과 함께 타인을 위해서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삶으로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이 가능성을 레비나스는 나의 존재 유지, 나의 내면성에서 찾지 않고 나의 바깥, 나의 존재와는 전혀 다른 차원, 다시 말해 나와 타인 사이에 일어나는 ‘윤리적 사건‘을 통해 찾아낸다.176 타인은 한마디로 유일하며 독특하다. 177 ˝맥락 없는 의미화요˝ ˝전체성의 깨뜨림˝이다. 타인은 단적으로 나에게 ˝낯선 이˝이다. 177 사물을 벗겨냄으로, 지평 안에서, 어떤 맥락 안에서, 일정한 형식을 갖춘 가운데 드러난다. 하지만 그 자체로, 스스로 자신을 보여주는 의미, 어떤 무엇과의 지시 관계를 통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 스스로 지시하는 가운데 드러나는 의미, 자기 자신 외에 어떤 다른 것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 의미, 자기 자신 외에 어떤 다른 것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 의미, 자기 자신에 의존하면서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는 의미, 나의 주도권과 나의 권력과는 완전히 독립해 있는 의미, 어떠한 형식에도, 어떠한 맥락에도, 어떠한 ˝의미부여˝에도 앞선 ‘지평‘없는 의미를 레비나스는 타인의 얼굴에서 찾는다. 178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것으로 우리에게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존재, 우리의 세계 안에서는 어떠한 지시체도 찾을 수 없는 ‘외재적 존재의 현시‘를 레비나스는 한마디로 ‘얼굴‘이라고 부른다. 179 언제나 ‘처음 온 사람‘이다. 179 얼굴의 시선과 마주칠 때 나는 회피할 수 없는 얼굴을 경험한다. 시선은 나를 ‘놀라게‘ 하며 나에게 ‘상처‘를 준다. 180 나는 이 ‘계시‘에 직면해서 그것을 수용하는 자로, 순종하는 자로 설 뿐 스스로 기획하거나 통제할 수 없다...나의 기대와 예측을 벗어난 가르침을 주는 스승과 주인으로 타인은 나에게 말 건네 옴을 통해 다가온다....그것은 ˝너는 살인하지 말지어다˝라는 명령이다. 181 ˝나그네와 과부와 고아˝이다. ..그 자체의 존재는 세계 안에서 하나의 비참이다.˝...비천함에 처한 타인이 나에게 간청으로 호소해올 대, 그 호소로 인해 나의 자유가 문제시될 때, 이때 비로소 윤리적 관계가 등장한다. 181 ˝윤리는 자유가 자기를 정당화하는 대신 스스로 자신이 자의적이며 폭력적임을 느낄 때 시작한다.˝...레비나스는 타인이 나를 정죄하고 사로잡음을 ˝끝까지‘ ‘따라와‘ 괴롭힌다는 뜻으로 ‘핍박‘이라고 부른다....응답을 요구하는 타인의 부름에 내가 ‘응답할 때,‘ 나를 ‘응답할 수 있는‘ 존재로 세울 때 나는 비로소 ‘응답하는 자‘로서 ‘책임적 존재‘ 또는 윤리적 주체로 탄생한다. 182 ˝여기 내가 있습니다˝는 레비나스에 따르면 모든 객관적인 서술에 앞서, 내용과 정보를 지닌 어떤 소통이라도 그 이전에 전제하는 ‘첫 언어‘이다. 183 저는 뒤에 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 이것이 언어의 시작이라고 보는 것이다. 184

[ ] ‘타인에 의한, 타인에 대한 책임‘과 대속의 의미: 윤리적 불면...‘타인에 의한, 타인에 대한 책임‘이라 이름 짓는다.....타인은 나에게 문자 그대로 ˝혼을 불어넣어주며˝ 나에게 ˝영을 집어넣어˝준다. 타인은 나의 호흡이며, 나의 혼이며 나의 영이다...타자가 내 안에 ‘혼을 불어넣음‘은 타자가 내 몸으로 육화되어 타인의 고통을 위해 나를 내어줄 수 있도록 노출시킨다. 185 대속은 타자에 의해 책임적 존재로 지정받은 내가 타자를 ‘위한‘ 책임적 존재로 세워지는 모습이다...대속은 문자 그대로 ‘자리 바꿔 세움 받음‘이다. 186

[ ] 대속적 책임의 실현과 비움의 주체: 응답, 환대 또는 책임은 ‘줌‘이고 ‘자신을 희생함‘이다. ˝주는 것, 즉 타자를 위한 존재란 자신의 입에서 빵을 꺼내어 자기는 굶주리면서 타인의 허기를 채워주는 것이다.˝ 189 나의 집과 나의 소유, 나의 지식을 타인을 섬기는 수단으로 사용하라는 것이 타인의 얼굴이 나에게 호소하는 윤리적 요구이다. 궁핍 가운데 있는 이웃을 그저 공감이나 연민으로, 나의 소유를 내어놓지 않고 빈손으로 대하는 것은 공허하다. 191

[ ] 제삼자와 책임: 정의와 국가 제도 : 정치의 드라마....지속적 혁명..틀의 파괴가 필요하다. ..체제와 영역 바깥에서 체제의 경직성을 경고하고 인간 개개인의 인격의 독특성을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이 곧 정치와 윤리의 결합을 가능하게 해준다고 레비나스는 보고 있다. 195 개인의 양심만이 이성 자체의 올바른 기능에서 유래한 폭력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자아만이 위계질서와 행정 체제의 순작동으로 생긴 타인의 ‘숨은 눈물‘을 볼 수 있다는 사실에 근거한다.(공무원) 196

[1 ] 응답으로서의 윤리학: ˝윤리적이란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왜 윤리적이어야 하는가˝ ˝우리는 어떻게 윤리적일 수 있는가˝ 이 세 가지 물음은 윤리는 언제나 행위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윤리에서 ‘존재‘를 강조한다고 해도 행위와 무관한 존재는 윤리에 관한 철학적 논의에서는 큰 의미가 없다. 그런데 행위는 언제나 행위를 실행하는 행위자의 행위이다. 197 응답자로서의 인간 198 니버는 ˝내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라고 묻지 않고 ˝현재는 무엇이 진행되고 있는가?˝라고 묻는다. 이것은 곧 내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으며 나에게 반응을 요구하고 사회적 연대를 요구하는 상황에서 내가 어떤 존재로 설 것인가하는 것이 니버 윤리학의 관심임을 말해준다. 199 이상 레비나스의 철학 타인의 얼굴 5장에서

볕뉘

0. 주변을 서성이고 있다. 그의 저작으로 들어가지 않고 사숙하는 이의 글이나 해설들을 살펴본다. 가벼운 뉘앙스의 차이가 해석의 차이로 이어진다. 그 사실을 유념하고 있다. 베르그손의 시간, 직관의 의미가 받아들여도 설명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처럼, 개념을 한 몫에 깨닫게 해주는 언어가 없다. 아니 우리의 상식들이 그 단어의 다른 의미에 갇혀있어 벗어나기가 힘든 것인지도 모른다. 조심스럽다. 그래서 더 서성인다. 책들 사이 편린들을 들추어보고 있다. 여기저기.

1. 다음에 읽어줄 이들이 기다리고 있다. 이미 책앓는 이가 되어버린 자의 슬픔을 책친구와 나누어본다. 굳이 슬픔이라고 하지말고 기쁨은 없는가하고 말머리를 돌려보자고 했다. 좋아하는 것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죽을 때쯤 겪는 왜 사는가의 질문지를 일찍 받아 괴롭기도 하다. 그 답답증의 출구를 모색해보기로 했다. 나는 누구인가 너는 누구인가 요즘 그런 질문을 안고 사는 사람들은 극히 희소하다. 거의 없다. 그러니 안으로의 나를 채우는 것에도 무심하며, 밖으로 향해 있는 나의 상황과 넓은 정황에도 관심이 없다. 오로지 손에 잡히는 것밖에라고 하면 지나친 것일까? 그래 미처 해주지 못한 이야기가 있다. 책 앓이를 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여러 농도가 차곡차곡 진해져 가는 것이라고, 어떠한 용도로 쓰일지는 모르지만, 목적이나 수단으로 생각하지 않는 만남처럼 제대로 된 길을 가는 것이라고 해두자고 ...일단은...

2. 밑줄이 많이 처 둔 부분은 그 만큼 낯이 설다는 것 같다. 옮겨 적으며 어제 육근종암에 걸려 다리를 절단한 청년의 삶을 끝까지 본 어제 상황이 생각났다. 아파 너무 아파 아픔을 끝내고 싶은 것, 아픔과 싸울 여력이 없어져 스러지는 것이 죽음이라면, 그 맛을 본 청년의 고통이 어른거렸다. 거기에서 시작하는 그의 삶. 얼마나 많은 슬픔이 다가설까..그래서 그 질긴 아픔과 비교해낼 것이겠지. 그저 마음씀이라는 것밖에 할 수 없음.

3. 얼마나 깊이 얼마나 다르게 얼마나 멀리 레비나스를 읽을지 모르겠다. 서성이다가 그를 읽는 것이겠지. 읽다가 슬프다가 힘을내다가 하는 것이겠지. 괴로움의 구렁텅이로 빠지는 것이겠지...두 손에 쥔 것을 놓겠지...그리고 아마 다른 것을 잡게 되겠지. 책을 읽는 것은, 책을 앓는 것은 그런 것이라고 위안 받을 친구가 있으면 됐지. 그냥 가보는 것이라고....위험한 독서란 이런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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